75화. 어린이 공녀님을 둘러싼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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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어린이 공녀님을 둘러싼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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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어린이 공녀님을 둘러싼 음모
2023.08.18.
아네사 황녀는 손수건을 들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요!”
세상의 모든 비극이라는 비극을 죄다 끌어모은 얼굴로, 아네사 황녀가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런 그녀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황태자가 입을 열어 말했다.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나도 최선을 다했다.”
아네사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급하게 반박했다.
“이렇게 팔려 가듯 결혼하게 될 줄 알았으면……!”
친자 검사 재판은 아네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황제와 직접 독대한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아네사 황녀가 지금까지 해 왔던 일을 모두 밝힌 탓이었다.
‘마티어스 미르모드, 제가 감히.’
부황께서는 지금까지 황녀가 미르모드 가문을 드나들며 시엔을 괴롭혀 왔던 점이나, 친자 검사를 했던 점까지 모두 참작한 모양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이미 너와 외국의 왕자 간의 결혼을 추진한 이상, 돌이킬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봐야겠지.”
“……하.”
황제가 제 짝으로 붙인 외국의 왕자가 어찌 생겼는지는 알고 있었다.
뚱뚱하고 배가 나와 못생긴 사내였다. 유일한 적장자이기는 했으나, 외적으로 상당히 떨어지는 상황.
말 그대로 왕국 간의 친선을 위해 하는, 결단코 좋지 않은 결혼이었다.
그 사실을 상기한 아네사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거칠게 닦아 냈다.
황태자는 권태로운 표정으로 아네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차피 이어질 결혼이었어. 늦출 수는 있었겠지만 말이다.”
“오라버니!”
아네사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지만, 황태자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아네사, 널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네, 그러니까 오라버니께서도, 멜로디아 성녀께서도, 교황께서도 저를 도와줄 수는 없다, 이 말이군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팔려 가는 결혼을 하게 될 줄 몰랐던 아네사 황녀가 콧물을 팽 풀며 표독스러운 낯을 했을 때였다.
지금까지 내내 말이 없던 멜로디아가 그린 듯 우수에 찬 미소를 지었다. 이 와중에도 멜로디아의 외모는 몹시 아름다웠다. 아네사가 멍하게 입술을 달싹거리며 그녀를 응시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아네사와 달리, 멜로디아는 더 이상 아네사를 응시하지 않았다. 지금껏 아네사와 멜로디아는 꽤 많은 친교를 쌓아 왔는데도, 그녀는 아네사를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 응시할 뿐이었다.
말하자면 이제 아네사에게는 흥미가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아네사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로 찻잔을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황태자 전하,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결국 나섰더군요.”
황태자가 아네사를 바라보던 것과는 달리 꿀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을 했다.
“그래, 멜로디아.”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폐하와 대화를 했다던데요. 대체 어떤 대화가 오갔을지 궁금해져요.”
황태자는 ‘빛의 길’로 떠난다는 성녀, 멜로디아를 바라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대충 어떤 대화가 오갔을지 정도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황제는 자신과 황녀를 불러 고약할 정도로 야단을 쳤다.
그뿐인가.
황녀에게는 혼처를 잡아 주며 외국으로 나가라 호통을 쳤었지.
“미켈 광산을 미르모드에게 넘긴다더군.”
그가 이를 갈았다.
황태자는 이전부터 미르모드 가문의 눈치를 보는 부황이 싫었다.
이번에도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압박을 넣자 곧장 깨갱대는 것을 보라. 황권이 진창에 빠진 수준이었다.
그때 멜로디아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속삭였다.
“이리 분노하시는 걸 보면, 그뿐만이 아니지요?”
“……그래.”
차라리 그뿐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황은 또 다른 초강수를 내밀었다.
더 이상 황태자를 믿지 못하겠다며, 그에게도 새로운 자극제가 필요하다고 말했지.
‘나를 여전히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듯이 말했었지.’
분노로 입술을 짓씹은 탓일까.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 멜로디아가 보드라운 손을 내밀어 그의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닦아 내 주면서 말했다.
“무엇인가요, 전하?”
“하! 뭐냐고? 그 반푼이 같은 셀바스티안 대공을 황도로 불러오겠다더군. 말이 되나?”
황도를 지키고 있는 제 이복형제인 셀바스티안 대공까지 불러오겠다니. 이는 황태자인 자신의 입지를 좁게 만들겠다는 뜻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부황은 황권 강화에는 전혀 욕심이 없어.’
황태자가 이를 으득 갈았을 때였다. 멜로디아가 특유의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아, 셀바스티안 대공 전하라면, 황태자 전하의 이복형제 말씀이시지요?”
“그래!”
그때까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손수건을 움켜쥐고 있던 황녀가 조롱조로 말했다.
“후계 구도를 양분하겠다는 뜻이겠죠. 결혼에 팔려 가는 저도 저지만, 오라버니께서도 제대로 한 방 먹으셨네요. 반푼이 대공 따위에게 차기 황제 자리를 위협당하는 처지라니. 안타까워라.”
“……아네사.”
“왜요? 생각해 보니 미르모드를 건드린 게 잘못이었어요. 왜 그런 과욕을 부렸을까. 마치…….”
황태자를 빤히 바라보던 아네사가 멜로디아를 째려보았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요. 그렇지, 멜로디아. 나는 대체 네 말을 왜 따랐을까? 이해가 안 가. 미르모드를 공격하라는 그 말을 들은 게……. 너무 갑작스럽고, 또, 이상하잖아.”
아네사의 말에 황태자가 역정을 내며 테이블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멜로디아는 우리를 홀리지 않았어!”
“글쎄요. 멜로디아가 우리를 부추기지 않았다면, 우리가 굳이 미르모드를 잡겠답시고 그런 악수를 뒀을까요? 잘 생각해 보세요, 오라버니. 제가 굳이 위험 부담을 지고, 시엔 미르모드를 학대해서 쫓아내려고 한 것도, 멜로디아와 오라버니 때문이잖아요.”
황태자와 황녀 간의 언성이 높아졌다. 멜로디아는 입가에 미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차만 들이켰다.
“후…….”
가만히 숨을 내쉬며 황태자와 아네사가 진정하기를 기다리던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기품 있는 태도에 멜로디아를 공격하려던 아네사조차 움찔했다.
곧, 황태자의 옆에서 표정을 살피던 멜로디아가 그의 어깨를 위로하듯 톡톡, 다정하게 두드렸다.
“그래요. 결국 시엔 미르모드는 처리하지 못했네요.”
그녀의 손길에 왜인지 모를 평온함을 느끼던 황태자는, ‘시엔 미르모드’라는 말에 돌연 안색을 붉혔다.
“그래, 멜로디아.”
“아쉽게 되었네요. 그래도 고생했어요, 전하.”
멜로디아가 눈을 접어 올리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아네사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가 굳이 시엔 미르모드를 처리하려 했던 이유. 그건 바로 첫눈에 반한 여인, 성녀 멜로디아 때문이었다.
그녀가 시엔 미르모드를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기에, 아네사와 요테르 상단을 이용해 미르모드를 잡으려 했었다. 마치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모든 것을 감수하려 했는데…….
‘다들 굳이 미르모드 가문에 친자 검사로 꼬투리를 잡는 일이 이상하다고 말했었지만, 모든 것이 실패한 와중에도 멜로디아의 말을 듣고 나니 보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군.’
멜로디아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생했다고 말한 것만으로도 부황에 대한 분노나 마티어스에 대한 열등감이 눈 녹듯 녹아 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제 어깨를 위로하듯 매만지는 멜로디아의 손을 잡으며 짧게 말했다.
“……멜로디아.”
“네.”
“난 역시 그대뿐인 것 같아.”
아네사 황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시선 따위는 무시했다.
그에게는 다른 왕국으로 팔려 가 제국을 더욱 부강하게 해 줄 멍청한 도구인 여동생보다, 사랑하는 여인이 더욱 소중했다.
멜로디아 성녀는 그의 첫사랑이었고, 앞으로 황태자비 자리를 넘겨주고 싶은 유일한 여인이었다. 그는 애정을 듬뿍 담아 멜로디아를 응시했다.
곧이어 맞잡은 손이 떨어져 나가며 멜로디아가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요?”
“그래, 그럼 일전에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약혼을…….”
멜로디아가 짧게 웃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저, 이제 빛의 길로 떠나야겠어요.”
“멜로디아? 진짜로 가겠다는 거였어? 빛의 길로 떠난다고 말하며, 칩거하려는 게 아니라?”
“네, 전하. 그럼요.”
‘빛의 길로 향한다’는 말은 곧 제국 최남단에 위치한 룩스 해안가로 걸어간다는 의미로 통했다.
아주 오래전, 룩스 해안의 해안선 근처에 어두컴컴한 빛에 감싸인 마계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망상에 가까운 말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빛의 길을 걷는다’고 하면, 제국 최남단 해안가를 몇 년간 순례하듯 끊임없이 걷고 또 걸으며 제국민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과정으로 일컬어졌다.
그 탓에 정식 명칭인 빛의 길이 아니라 순례자의 길로 불리기도 했다.
역대 교황이나 성녀, 추기경 등이라면 누구나 다 가는 순례 장소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은퇴 직전 말년 즈음하여 방문하는 곳이었다.
나이 어린 성녀가 빛의 길에 방문한 적은 거의 없었다. 상당히 이례적인 행보에 황태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는 왜 벌써 ‘빛의 길’로 떠난다는 거지? 아직 어리잖아. 결혼을 하고 떠나도 되는 것이고.”
순간, 나긋나긋하고 사랑스럽던 멜로디아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황태자가 당황할 정도로 빠른 표정 변화였다.
그러나 그 서늘함은 전부 거짓이었다는 듯, 멜로디아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다정히 말했다.
“교황 전하와 전, 빛의 길에서 찾아야 할 게 있어요.”
“찾아야 할 것?”
“네. ‘그것’을 찾는다면 황태자 전하께서 그 누구의 견제도 없이 황위에 오르실 거라 확신해요.”
그녀의 말을 들은 황태자가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까지 멜로디아와 만난 이후로, 그녀의 말을 들으면 모든 일이 잘 풀렸다.
비록 시엔 미르모드의 친자 검사 사건에서 면을 구겼지만…….
‘그거야 내가 멜로디아를 위해 노력하다가 헛발질을 한 거고, 그녀는 아무 잘못이 없지.’
멜로디아는 고작 열 살짜리인 시엔 미르모드를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으니까.
“그래, 그럼 돌아오면 우리…….”
“네. 좋아요. 우리, 결혼해요. 제가 무사히 돌아오면 말이에요.”
그녀는 손을 들어 황태자의 뺨에 가져다 대며 다정히 말했다.
상당히 심플한 청혼이었다.
멜로디아는 웃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풋내 나는 사랑에 빠진 황태자에게는 그녀의 모든 것이 좋아 보일 따름이었다.
그 모습을 아네사가 차게 식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우습지도 않아.’
결국 모든 것을 잃은 와중에도, 저 연인들은 어쩜 저리 뻔뻔하게 군단 말인가.
기분이 묘하게 나빠졌다.
‘대체 멜로디아는 왜 시엔 미르모드를 견제하려 한 거지?’
시엔 미르모드가 영특하기는 하다지만 아직 어린아이였다.
청순하고 선량한 멜로디아가 제거하려 들기에는 아직 어린 새싹에 불과한데, 왜 굳이 황태자의 손에 피를 묻히려 한 걸까?
순간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돌연 속이 멀미가 난 것처럼 안 좋아졌다. 아네사의 불편한 안색을 눈치챈 멜로디아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네사, 머리가 많이 아픈가 보네요. 쉬어요.”
그녀의 말대로 더 이상 생각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네사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매만지며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
왜 신전 측에서 굳이 시엔 미르모드를 없애려 드는가.
그에 의구심을 품은 것은 단순히 아네사 황녀만이 아니었다. 이 모든 사건을 시엔과 함께 해결해 낸 마티어스 미르모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르모드 가문 소공작의 집무실 안.
마티어스는 탁상을 내려다보며 턱을 괸 채로 속삭였다.
“결국 황태자가 신전과 유착해서 이번 일을 벌였다, 이 뜻인가.”
“예, 맞습니다. 요테르 상단, 신전, 황태자. 이 셋의 합작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 왜 굳이 황태자와 신전이 나섰는지는 의문입니다.”
“우리 가문에 흠집을 내려 했겠지.”
“하지만…….”
“그래. 너무 과해. 고작 미르모드 가문에 흠집을 내겠다고 이런 일을 벌인 이유가 뭔지 궁금할 정도로, 과한 일이었어.”
마티어스는 황태자에게 뒷돈을 받은 원로원의 측근을 죄다 죽였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확인한 뒤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그가 직접 키운 살수들은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말이야, 이유를 굳이 고민해 볼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예?”
“신전과 황궁이 동시에 내 딸을 공격했다니…….”
마티어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손가락 끝이 탁상 위에 놓인 지도로 향했다.
지도의 중앙에는 황궁과 신전이 위치해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황궁과 중앙 신전의 한가운데에 놓였다.
“둘 다 없애면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