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어린이 아카데미 입학 시험 (74/77)


74화. 어린이 아카데미 입학 시험
2023.08.15.


솔직한 속마음을 드러내자 그가 말문이 막힌 듯 마른세수를 했다.


“…….”

‘아예 안 된다고 말하지 않네. 분위기, 괜찮은 것 같은데?’

나는 익살스럽게 밀어붙이기로 마음먹고 물었다.


“광산 말인데요. 꼭, 황궁과 계약해야 하는 거 아니잖아요?”

하인리히 대사가 낙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황태자의 측근이 우리 공국의 기술을 훔쳤다고 하는데, 황궁과 계약을 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요.”

황궁과의 계약은 사실상 결렬되었다. 하지만 그의 낯에서 갈등하는 태도가 드러났다.

그도 그럴 게, 공국 입장에서는 제국의 황궁이 가장 좋은 거래처일 테니까. 게다가 공왕 역시도 제국의 황태자와 계약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갈등하고 있겠지. 나는 이때를 노리는 거야! 우리한테 꼭 필요하거든, 그 마력석!’

우리 가문이 조금 더 부강해지고, 아빠의 측근 중에 마법사를 늘리려면 미켈 광산이 반드시 필요했다. 나는 그의 팔을 꼭 잡으면서 다정하게 어르듯 물었다.


“그러면 그 마력석, 미르모드 가문의 시엔 상단과 계약하는 건 어때요?”

순간 하인리히 대사의 눈에 혼란이 담겼다. 얼이 반쯤 빠진 듯한 낯으로, 그가 반문했다.


“……예? 시엔 상단이라면.”

“미르모드 가문이 황가는 아니지만, 제국에서 그만한 힘은 있거든요. 시엔 상단도 요테르 상단만큼 내실 있는 곳이에요!”

‘표정을 보아하니, 조금 더 말하면 넘어올 것 같기도 하고!’

재판장에 끌려가기 전에 하려던 말이었지만, 이 말을 마저 해야겠다.


“음, 으음! 조금 더 어필해도 돼요?”

“네, 네…….”

나는 익살스럽게 웃으며 주머니 속의 계약서를 쏙 꺼내 들었다.


“제가 쉐라프 상단의 언니 오빠들을 구하기도 했거든요! 시위하는 거 보고 마음이 아파서요. 재판장에 들어와서 기술 빼앗긴 거 증명할 수 있도록 도왔지요.”

그다음 그에게 계약서를 슬그머니 내밀며 작게 윙크했다.

계약서를 바라보던 그가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실례지만, 연치가…….”

 

 
나는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 열 개가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양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열 살!”

하인리히 대사가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릴 때였다.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시엔, 이제 가자.”

잠깐만.

혹시 아빠가 내 말을 다 들은 건 아니겠지?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그때, 하인리히 대사가 말했다.


“……미켈 광산 건은, 곧 정리해서 연락 드리겠습니다. 공왕 전하와도 대화를 나눠야 하니까요.”

그때 아빠가 나의 손을 잡으며 하인리히 대사를 향해 말했다.


“미르모드와 협업하지.”

“네?”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신 사안이야.”

나는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


‘뭐야, 아빠가 황제랑 딜을 하고 왔어?’

물론 황태자가 미르모드에 엄청난 무례를 저지른 건 맞지만, 아빠가 무려 미켈 광산을 받아 올 줄은 몰랐다.

우리 아빠의 협상 능력이 나날이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

시엔이 마티어스의 협상 능력에 감탄했을 때, 마티어스 역시 제 똑똑한 딸의 미래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황궁에서 미르모드 저택으로 돌아온 뒤, 마티어스는 측근들을 불러 모아 천명했다.

황태자와 설전을 벌이고 온 시점인 터라, 모두가 긴장하며 마티어스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그가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딸이 미래를 읽는 능력을 가진 듯해. 천재들을 조기 교육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유학을 보내야 하나?”

팔불출 면모가 가득한 마티어스를 보면서 측근들은 적응이 영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역시 권력을 탐하는 자는 있는 법.

얼굴에 흉악한 스크래치가 난 측근 하나가 잽싸게 말을 꺼냈다.


“유학보다는, 아카데미는 어떻습니까?”

“……아카데미?”

“예. 보통 귀족 어린이들은 아카데미에서 친목을 도모한다 들었습니다!”

마티어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살기 어린 시선을 받은 측근이 어깨를 구부정하게 구부리며 눈치를 보고 있을 즈음, 마티어스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에는 좋은 어린이들이 많은가?”

“……예?”

흉악한 마티어스의 입에서 나온 ‘좋은 어린이들’이라는 말에 벙 찐 것도 잠시.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측근이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대꾸했다.


“예! 좋은 어린이들이 많을 겁니다! 분명 평범한 친구들을 많이 사귀시고, 좋은 어린이들과 교우 관계를 맺게 될 겁니다! 미르모드에 계시는 것보다는 낫죠!”

“그래.”

마티어스 미르모드는 황태자의 졸렬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대국적인 망신을 주었으나, 권력욕과 열패감이 강한 자이니만큼 미르모드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문의 원로원 등을 제 편으로 포섭해 미르모드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하고, 또다시 시엔을 노릴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저택 안팎으로 모두 가지치기를 해 줄 차례였다.


“내가 이번 재판으로 깨닫게 된 게 있어.”

“무, 무엇인지요?”

“하나는 우리 딸이 얼마나 똑똑한지.”

측근이 김 샜다는 표정을 애써 관리하며 침착하게 감탄했다. 상사의 딸 사랑에 그의 연기력은 나날이 일취월장해 가고 있었다.


“……아, 역시 대단하십니다! 하하! 다, 다른 하나는요?”

“감히 우리 딸을 괴롭히는 놈들을 싹부터 밟아 버려야 한다는 거야.”

마티어스의 시선이 스산해졌다.

그의 손에는 원로원과 황태자의 유착 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서류가 적혀 있었다.

그 서류는 원로원에서 시엔의 행적을 황태자에게 팔아먹으며 뒷돈을 받은 정황을 일목요연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쓰레기를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되지. 겸사겸사, 우리 딸을 잠깐 아카데미에 보내 두는 것도 좋겠어.”

이번 일을 통해, 마티어스는 확실히 결심했다.

시엔을 잠시 아카데미로 보내 평범한 세계를 보여 준 다음, 그사이에 가문 내의 권력을 완전히 잡아채기로.

***

시간이 흐른 후, 미르모드 저택 안.


“이리 와, 시엔.”

나는 엉겁결에 아빠의 무릎 위에 앉혀지고 말았다. 눈을 데구루루 굴려 아빠의 무릎 위에 앉는데, 아빠가 조용히 읊조렸다.


“너는 황제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가 궁금하겠지.”

“…….”

이렇게 마음을 읽혀 버렸다. 조그만 양손을 꾸욱 움켜잡으며 긴장했을 즈음, 아빠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모든 걸 숨길 수는 없으니 사건의 전말에 대해 이야기해 줄게, 시엔.”

“……아빠?”

아빠의 태도가 조금 묘했다. 나는 분홍색 머리칼을 꾸욱 움켜잡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어린이는 뒤로 물러나 있으라는 식으로, 나를 보호해 주는 느낌이기는 했지만…….


‘꼭 나를 파트너처럼 생각해 주는 느낌이야. 내가 파트너 얘기를 먼저 꺼내서 그런가?’

내 느낌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아빠가 내 어깨를 꼭 끌어안으며 조곤조곤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잘 들어, 시엔. 이번 재판을 끝내고 황제에게 황태자의 악행에 대해 말해 두었어. 황태자는 황제의 신임을 크게 잃었지.”

“……그렇구나아.”

하나도 관심 없는 척 애써 눈을 동태처럼 만든 다음, 나는 아빠의 팔을 꼭 부여잡으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황제는 황태자를 원래도 크게 신임하고 있지 않아서……. 변방에서 황제의 사생아인 셀바스티안 대공이 올 예정이야.”

나는 눈을 번뜩이며 떴다.


‘아, 셀바스티안 대공님이면 황태자의 정적이자 숙명의 라이벌이잖아!’

대공은 황제가 다른 여인을 안아 낳은 사생아로, 황태자의 적대 진영에 있는 사람이었다.

작중에서는 악역으로 나오지만, 소설 속 남주인공인 황태자가 저리 졸렬하고 비열한 인간이라면 그의 성향 역시 또 다를지 모르지.

미르모드 가문도 엄청난 악마 가문으로 묘사되었지만, 사실 할머니를 포함해서 따뜻한 사람들이 가득한 것처럼 말이다.

아빠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셀바스티안 대공은 아빠 친구이기도 해.”

“우와아. 아빠 친구! 나중에 소개해 줘!”

나는 눈을 깜빡이며 아빠의 어깨에 몸을 폭 기대었다. 그러나 아빠는 나를 소개해 준다는 말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엔, 아빠 말 아직 안 끝났는데?”

“웅? 또 재미있는 일 있어?”

슬슬 졸린 듯 피곤하기까지 했다.


“재미있는 일이라……. 사실, 아빠는 정말 궁금하거든.”

묘한 어조였다.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아빠를 향해 물었다.


“……우웅?”

“우리 아기가 대체 가문의 창고에 처박혀 있던 백조 조각을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몸을 움찔했다. 그래, 사실 좀 급해서 내가 아는 원작 속 정보를 많이 풀어 버렸다.


‘……어쩔 수 없었지만, 아빠가 의심하는 것도 당연해.’

가만히 고개를 떨구며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지만, 아빠의 말은 계속되었다.


“뭘 원하는 건지,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는 건지. 그리고…….”

아빠가 내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네가 나한테 숨기고 있는 비밀이 뭔지.”

순간, 나는 몸을 또 움찔거렸다.

내가 환생했다는 비밀, 사실은 아주 악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들킬까 봐. 그로 인해 아빠가 나를 꺼리게 될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래, 이럴 때는…….


“아, 아빠두 시엔이한테 숨기는 거 있잖아!”

괜히 땡깡 피우고 투정 부리기가 답이다!

그런데 순간, 아빠의 몸이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어라, 이상하네? 아빠도 나한테 숨기는 게 있는 모양인데?’

나는 의심스러운 시선을 아빠에게 가져다 댔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아빠의 측근으로 추정되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아저씨가 우리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나를 꼭 껴안고 있던 아빠의 팔이 굳어졌다.


“……무슨, 소식 말이지?”

참 이상하단 말이지.

지금 아빠의 목소리는, 그러니까, 유일하게 좋아하는 이와의 티 타임을 빼앗겨서 굉장히 불쾌해하는 악당 같았다. 나는 한껏 의구심에 차서 아빠를 바라보았다.


“……웅?”

나는 의문스러운 시선을 그쪽에 고정했다. 그러자 측근 아저씨 역시도 떨리는 시선을 이쪽에 고정했다.


“황제가 대공을 다시 불러들였다는 이야기는 드, 들으셨지요?”

“그래.”

고작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이 자리에 들어왔냐는 듯한 권태로운 목소리. 나는 악당화된 아빠의 모습에 뿌듯함을 느끼며 킬킬 웃다가 멈칫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에게 악당 모드가 너무 과하게 체화된 것 같기도 했다.


“……큼.”

아빠가 짧게 헛기침을 한 뒤 다소 어리바리한 목소리 톤으로 말했다.


“으음, 그래서 무슨 일, 이지?”

이제야 내가 알던 아빠 같기는 한데…….

나는 고개를 갸웃한 뒤 다시 아빠의 어깨에 조그만 몸을 기댔다.


“교황과 멜로디아 성녀가 빛의 길로 수행을 떠난다고 한답니다. 신전 측이 조용한 게 퍽 수상쩍은데,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걸까요?”

‘빛의 길’ 수행?

나는 눈을 부릅뜨고 몸을 경직시켰다.


‘이건 원작 <멜로디아의 생애>에서는 거의 완결 날 때나 되어서야 나오는 내용인데?’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빛의 길로 떠난다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원작 <멜로디아의 생애> 말미에서 교황과 성녀 멜로디아는 빛의 길로 수행하러 떠난다. 수행을 마친 멜로디아는 제국으로 다시 돌아와서 황태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게 둘의 해피 엔딩이었다.


‘빛의 길은 둘 사이의 애절한 로맨스를 부각시켜 주는 장치일 뿐, 그곳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르는데…….’

일단 신전이 미르모드의 적이고, 멜로디아의 미래 남편이 되는 황태자가 나와 아빠의 적이 되었으니 그들이 ‘빛의 길’에서 뭘 얻을지를 찾아내는 게 중요할 것 같았다.


‘그래, 황궁은 당분간 대공과 황태자의 알력 다툼으로 미르모드에게 직접적으로 싸움을 걸 일이 적어질 거야.’

이번에 가짜 딸 소동으로 한 방 먹었으니 황태자는 한결 더 조용해질 거다.

진지하게 머릿속으로 현 정세를 그려보고 있는데, 아빠가 말을 이었다.


“신전은 그렇다고 치고.”

“네.”

나는 귀를 쫑긋했다. 착하지만 얼굴이 나쁘게 생긴 악당 아저씨가 가져온 알짜 정보를 더 듣고 싶어서였다. 그때 아빠가 말했다.


“가문 내의 불온한 분위기…… 아니, 잠깐.”

아빠가 순간 나를 덜렁 들어 올렸다.


“시엔,”

“우, 웅?”

나는 최대한 선량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어린이인 척 입꼬리를 스윽, 찢었다. 하지만 아빠는 싱긋 웃으며 나를 덜렁 끌어안고 문을 열었다.


“시엔이는 얼른 가서 자자.”

‘안 되는데? 나도 가문 돌아가는 꼴에 대해 좀 알아야 하는데!’

나는 눈을 부릅뜨고 아빠의 소맷귀를 꼭 움켜잡으며 칭얼거렸다.


“……시엔이도 듣고 싶은데!”

“시엔이는 자야 해. 자고 나면, 아빠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줄게.”

그렇게 나는 내 방에서 따뜻한 벽난로와 함께 맛있는 우유나 먹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몰랐다.

다음날 내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

***



“이, 이건 아니잖아!”

나는 손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반쯤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시엔도 이제 아카데미 가야지.”

“황립 어린이 아카데미라니, 이건 말도 안 돼! 나는 아직 할 일이 많단 말이야!”

멜로디아와 교황이 왜 빛의 길로 이렇게 빠르게 떠났는지도 알아봐야 하고, 가문의 정세도 살펴야 하고, 호구 아빠에게 악당 같은 마음을 더 심어 주려고 했다. 그런데 어째서……!


“할 일이 많지. 등하교해야 해.”

“아빠, 시엔 상단 운영…….”

“가문의 회계 담당자가 당분간 맡아 준대.”

“휴우…….”

……큰일이다. 물러날 구석이 없었다.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아빠는…….


“시엔이도 또래 친구들 많이 사귀고 좋은 일 해야지.”

……라며, 나를 보내 버렸다!

***

같은 시각, 황궁 안.

‘빛의 길’로 떠난다던 멜로디아 성녀와 황태자, 아네사 황녀가 마주 앉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