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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건방을 떠는 것도 오늘이 끝일 거다 (70/77)


70화. 건방을 떠는 것도 오늘이 끝일 거다
2023.08.01.


아네사는 시엔과 독대했던 때를 떠올리며 표정을 섬뜩하게 바꾸었다.

그래, 시엔 미르모드.

그 아이는 제 나이치고 꽤 똑똑해 보이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래, 그 미르모드 가문이야. 하찮은 꼭두각시쯤이야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곳이지.’

어쩐지 선대 공작 부인이나 델피아 대공녀가 그 어린아이를 이상할 정도로 과하게 보호한다 싶었다. 시엔이 미르모드 가문 사람들을 제대로 구워삶았을 리는 없지 않나.

여전히 뒷맛이 찝찝하기는 하지만…….


‘그 애정 어린 눈빛이 조금 묘하긴 하지만.’

만약 황궁을 적대하기로 했다면 애정쯤이야 충분히 연기로 꾸며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네사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우리를 적대한다면, 일이 대체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 거죠?”

“너도 알다시피 미르모드와 우리가 적대하게 되는 거지. 아쉽군.”

“…….”

“이용당하는지도 모르게끔 만들어 이용하다가, 이 손으로 끝장을 내 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황태자의 낯에 비열함이 어렸다.


“하지만 그 얄미운 계집애는 꼭 제 손으로 혼쭐을 내고 싶어요.”

황태자의 입매에 아네사 황녀도 당황할 정도로 비릿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걱정 마라. 아네사. 그 미끼를 제일 먼저 죽일 계획이니까.”

“……어떻게 하실 계획이신데요?”

아네사가 반신반의한 낯으로 황태자를 향해 묻자, 그가 입술을 말아 올렸다.


“지금 그 ‘미끼’가 될 시엔 미르모드는 마티어스와 함께 있을 거다.”

“……그렇겠죠. 그래서요?”

“그 미끼와 미르모드 가문, 둘을 어떻게 처리할 계획이냐면 말이지…….”

황태자가 아네사를 향해 은근하게 속삭였다. 그의 계획을 듣던 아네사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더니, 이내 부드럽게 바뀌었다.


“한 마디로, 함정을 파자는 뜻이시군요.”

“그래. 그 어린 미끼를 제대로 이용할 생각이다. 그 계집이 내쳐지고 나면, 미르모드 가문의 위신도 땅으로 떨어질 거야.”

겉보기에 어떻건 간에, 미르모드 가문은 시엔을 아끼는 듯이 행동했다.

열 살짜리 가짜에게 속아 넘어가 아낌없는 애정을 보낸다는 프레임을 짜 선동하기가 쉬워진다는 소리였다.


“우리가 만들어 낸 가짜를 미르모드에 들여놓을 수도 있겠고요.”

“바로 그거다.”

“함정은…… 오늘부터 파실 생각인가요?”

“아마도 오늘부터겠지.”

황태자와 황녀의 시선이 중간에서 마주쳤다.

***

그때, 마티어스 미르모드는 시엔과 함께 있었다.


“시엔,”

“……압빠.”

나는 아빠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벌써 열 살이기는 하지만 아빠의 무릎 위에 앉는 걸 제일 좋아하거든!


‘오늘은 왠지, 아빠 분위기가 조금 무서운데?’

나는 괜히 분홍색 머리카락을 땋는 척하면서 등 뒤의 아빠가 어떤 말을 하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조금 기다리자, 아빠가 운을 뗐다.


“……시엔.”

“웅?”

“우리 딸이 무슨 생각 중일까? 아빠는 왜 모르겠지? 어릴 때는 생각이 고스란히 읽혔는데.”

나는 뜨끔한 채로 머리를 꾹 움켜잡았다.


‘아빠도 내가 평범한 열 살짜리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겠지.’

그동안 미르모드의 교육을 통해 천재성을 발현했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겨 오고 있었지만, 이제 슬슬 한계가 보였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환생자라는 사실을 들켜서는 곤란했다.


‘내가 ‘진짜 어린이’가 아니라서, 아빠와 나 사이에 거리감이 생길 수도 있는 거잖아.’

그 생각을 하니 몸이 바닥으로 축 가라앉았다.

다섯 살에서 열 살로 넘어오게 된 지금, 지난 오 년간 아빠와 나 사이에도 꽤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예를 들면…….


“우리 딸은 너무 똑똑해. 시쳇말로 뭐라고 하더라.”

아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감추고 있던 성기사, 테드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꼭 인생 2회차 같으시죠.”

마티어스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낮게 웃으며 혼잣말했다.


“그런가. 인생 2회차라.”

마치 진짜 고민하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몸을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인생 2회차인데!’

그때 아빠가 부드럽게 웃는 소리가 났다.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우리 딸이 똑똑하기는 하지.”

전혀 허무맹랑하지 않은데…….


‘환생했다는 거,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기는 한가 봐.’

나는 열심히 땋던 머리를 툭 떨어트린 채로 웅얼거리다가 순간 멈칫했다.


‘아빠, 방금 악당 같은 목소리였는데. 요즘 들어 아빠한테 묘하게 악당의 기운이 느껴진단 말이지…….’

그렇게 해서, 나와 아빠는 서로를 의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물론 아직까지는 아주 사소한 불씨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나는 가만히 아빠의 무릎에서 뛰어내렸다.


“아빠.”

“응, 시엔.”

“……나는 똑똑해. 똑똑해서 잘 아는 거야.”

아빠가 특유의 인자하고 온화하고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엔.”

“응?”

아빠의 손이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시엔 하고 싶은 거 다 해 봐.”

“응……?”

아빠가 따뜻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빠가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 줄게.”

 

 
그렇게 말하는 아빠의 눈은, 이상할 정도로 강렬해 보였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악당 아저씨처럼!


‘헉, 정말 아빠가 악당으로 성장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원래 아빠의 성향이 악당이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한 다음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일부러 무서운 생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애써 묘한 감정을 떨쳐 내고, 나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아빠의 진심 어린 마음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았어!”

나는 폴짝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곧 아빠의 커다란 그림자 위에 서는 꼴이 되기는 했지만…….


“나, 다녀올게.”

아빠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어딜 가려고?”

불안해 보이는 아빠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옆구리에 손을 댄 채로 씩씩하게 외쳤다.


“비밀! 그래도 걱정 마. 나는 계획이 다 있거든.”

아빠는 조금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턱을 치켜든 채로 꼿꼿하게 아빠를 보고 있었다. 마침내 아빠의 입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시엔이의 계획대로 해 보자. 이번에는.”

내가 어떤 사람이건 믿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가만히 아빠를 바라보다가 주머니에 있는 열쇠를 그의 손에 건네주었다.


“그러면, 부탁이 있어. 가문의 창고로 가 줘.”

“이게 무슨……. 이거 누구한테 받았어? 가문의 안주인만 가지고 있는 건데.”

“할머니가 줬어.”

열쇠를 확인하는 아빠의 안색이 하얘졌다. 나는 아빠를 바라보면서 싱긋 웃었다.


“아빠.”

“응?”

“이 열쇠를 들고 가문의 지하 창고에 들어가면 백조 조각이 있을 거야. 아빠도 백조 조각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

“알지. 그런데 백조 조각은 왜…….”

“만약 내가 위험해지면 그걸 가지고, 꼭 나를 구하러 황궁으로 와야 해. 알겠지?”

“시엔? 갑자기…….”

어리둥절해 보이는 아빠를 향해 나는 가만히 입술을 달싹이며 진중하게 말했다.


“오늘은 우리가 협업하는 파트너인 거야! 그러니까 나를 꼭 믿어 줘. 이유는 나중에!”

지금은 아빠에게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풀어내서 말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아빠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로 문 바깥으로 달음박질을 쳤다.


“그럼, 아빠. 황궁에서 기다릴게!”

크게 내지른 목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치다가 사라질 때까지,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떠나야 했다.

***

황궁 안.

하인리히 대사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머릿속에 공국 시위대의 모습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들은 자신의 팔을 붙잡은 채로 원통하게 소리쳤었다.


“억울해서 그랬습니다, 억울해서.”

“……억울하다고.”

“예! 저희의 성과를 다 빼앗겼으니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제대로 증명하지 못했다. 그러니 구제할 방법도 없었다. 자국민을 보호하는 건 분명한 도리였지만 말이다.


‘그 말만 믿고 제국에서 난동을 피울 수는…….’

미켈 광산이 분명 중요하기는 하지만, 상대는 제국이었다. 최대한 마찰 없이 행동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있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다는 말인가.’

모든 일을 평화로이 갈무리하는 방법이 없을까. 한참 별채 안을 서성거리던 그는 산책이라도 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한참 산책을 하던 차. 그의 시야 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시엔이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그녀는 하인리히 대사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뭘 고민하고 계세요?”

갑작스레 나타난 꼬마 아이.

아까 보고 잠깐 대화를 나누었던 시엔 미르모드였다.

소녀의 너풀거리는 머리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대사는 반 박자 늦게 대꾸했다.


“……레이디 미르모드?”

“네에. 시엔이라고 불러도 돼요!”

바람에 살랑살랑 흐트러지는 머리칼,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아까 무도회장에서 봤던 것과는 또 다른, 마치 꼬마 요정 같은 분위기에 하인리히 대사가 살짝 숨을 참았을 때였다.

시엔이 깜찍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있잖아요, 아저씨! 저, 아까 마차를 타고 가다가 봤어요!”

“네? 무슨…….”

시엔이 순진무구하게 속삭였다.


“황궁 바깥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이요! 시녀들이 공국 사람이라던데요?”

하인리히 대사의 낯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그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부분을 정통으로 찔린 탓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엔이 고개를 기우뚱 기울인 채로 웃었다.


“사실은, 대사님이 그 사람들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 것도 봤어요! 역시 대사님은 멋져요!”

“아닙니다. 그러니까, 전 하나도…….”

하인리히 대사가 불편한 듯한 낯으로 고개를 젓자 시엔이 활짝 웃었다.


“힛, 그 시위하는 사람들도, 대사님을 믿고 있을 거예요!”

“……제가 딱히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을요.”

이 조그만 아이의 녹색 눈동자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무슨 말이든 털어놓게 되었다.


‘어차피 어린아이인 것을.’

제국에 파견된 사절단으로서, 그 역시 미르모드 가문의 악명은 익히 알고 있었다.

황태자가 그 가문을 얼마나 견제하는지도 잘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 꼬마와 마주할 때면, 어느새 마음속의 장벽이 사르르 녹고 마는 것이었다.

시엔이 작게 속닥거렸다.


“그런데요.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아요?”

“네?”

“제국이랑 척지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 같은데에…….”

시엔이 싱긋 웃으며 자그마한 명함을 내밀었다. 조그만 손에 명함이 무척 크게 보였다.


“짜잔, 시엔 미르모드 상단!”

그의 낯이 의아하게 일그러지자, 시엔이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목소리에 느끼한 기름이 반질반질 낀 것 같은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인리히 대사, 여기 계셨군요.”

나와 하인리히 대사는 동시에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황태자의 측근이자 시엔 상단의 라이벌인 요테르 백작이 서 있었다. 그는 입꼬리를 비웃듯 올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지금은 대사에게 볼일이 없소. 내가 볼일이 있는 건 이쪽이오.”

그 말과 동시에 요테르 백작이 손을 들어 내 팔을 무례하게 잡아챘다. 하인리히 대사가 당황한 채로 입을 열었다.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죄인 포박이오.”

“귀족 레이디에게 죄인이라니요?”

“하! 귀족? 이자는 감히 미르모드의 이름을 허위로 사칭한 가짜입니다.”

“예? 아니, 그게 무슨, 저는 더 이야기를 듣고 싶은-.”

“하인리히 대사.”

하인리히를 바라보던 그가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이제 조용히 하십시오. 여기서부터는 황궁과 미르모드 가문 간의 이야기가 될 테니.”

“……그런.”

가만히 요테르 백작과 시엔을 응시하던 하인리히가 시엔의 굳게 다물린 입매를 보고 맥없이 손을 내렸다.


“우리 요테르 상단에서 직접 개발한 친자 검사 키트요.”

시엔이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요테르 백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친자 검사 키트가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요테르 백작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무슨 상관이냐니. 너도 알고 있지? 너의 정체에 대한 진실이 세간에 퍼졌다는 걸 말이다.”

“제가 가짜 딸이라는 거 말인가요?”

“그래. 이 친자 검사 키트를 통해 네가 가짜 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할 거다. 황궁에서 친히 미르모드 가문에 은혜를 내리신 게지.”

가만히 있던 시엔이 제 턱을 매만지며 다음 말을 내뱉었다.


“그래요? 그렇다 한들, 지금 당장 재판을 할 수는 없을 텐데요?”

고위 귀족을 상대하는 재판은 황족 한 명 이상이 참관해야 했다.

지금 황제는 이번 광산 문제를 모르는 척하며 실권을 황태자에게 쥐여 준 채로 빠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요테르 백작은 배를 내밀며 당당히 말했다.


“수를 쓰는구나, 꼬마야. 하지만 충분히 가능해. 황태자 전하께서 지금 당장, 직접 재판을 주관하실 참이니까. 당장 따라와.”

요테르 백작의 계획은 이러했다.

제 친자 검사 키트의 효용성에 대해 홍보하면서, 시엔을 가짜 딸이라고 몰아세울 것이었다.

미르모드 가문에 가짜 딸이 숨어들었다는 이야기는 소재가 자극적이니, 재판이 끝나고 나면 그가 만들어 낸 친자 검사 키트는 자연스레 홍보가 될 것이었다.


‘일명 노이즈 마케팅. 이쪽에서는 손해 볼 게 없어.’

요테르 백작이 시엔을 거칠게 옭아맸다. 하인리히 대사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나서려 했으나, 시엔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네, 알겠어요. 갈게요. 그런데요, 대사님도 제 재판에 데려가도 돼요?”

마치 이 모든 것을 계획한 사람처럼 여유로워 보이는 태도였다.

요테르 백작은 시엔의 조그만 몸을 거칠게 움켜쥐며 속삭였다.


“그래, 데려가지. 대사에게도 네가 몰락하는 꼴을 보여 주거라. 그리 건방을 떠는 것도 오늘이 끝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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