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시엔 미르모드를 내쫓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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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시엔 미르모드를 내쫓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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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시엔 미르모드를 내쫓아야 해
2023.07.28.
하인리히 대사와 시엔의 대화를 보고 듣던 황태자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저 조그맣고 맹랑한 꼬마를 쫓아내려면, 제 딸을 다정히 어르던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어쩐 일인지 갑작스레 자리를 비운 지금이 적기였다.
“어린 레이디 미르모드.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신체적 특징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란다.”
그때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던 황녀 역시 새침하게 말했다.
“원래 예법이란 건 모르는 아이잖아요.”
“셰리나 아네사 황녀.”
황태자가 엄하게 경고하자 황녀의 낯이 굳어졌다.
“송구해요, 오라버니. 하지만!”
“어린 레이디 미르모드, 네 자리로 돌아가거라.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게 이 정도의 관용을 베푸는 것을 감사히 여기고.”
황태자는 싸늘하게 말했지만, 시엔은 하나도 기죽지 않은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그 모습이 언뜻 몹시 귀여워 보이는 탓에 하인리히 대사의 표정이 풀어졌다.
“죄송해요, 전하. 그렇지만 너무 신기해서요! 아까 황궁 앞에서 보았거든요! 대사님과 귀가 똑같은 사람들이요!”
하인리히 대사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예? 가끔 제국과 기술적 교류가 있기는 하죠. 그런 것을 보셨나 봅니다.”
“그렇지만!”
황태자가 시엔의 말을 뚝 자르며 말했다.
“대사, 어린아이의 말에 하나하나 대꾸해 주다 보면 버릇이 나빠질 겁니다.”
“하하…….”
중간에 낀 하인리히 대사가 어색한 듯 웃음을 흘렸을 때였다.
시엔이 익살스럽게 다음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귀가 뾰족한 사람들 말인데요, 황궁 앞에서 커다란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었어요!”
만약 하인리히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시엔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착각 정도로 치부했겠지. 그러나 하인리히 역시 짐 마차를 타고 오면서 본 게 있었다.
‘설마 아까 본 그 사람들이……? 아니겠지. 공국인들이 왜 제국 황성에서 시위를 한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마음에 찜찜함이 남아 버리고 말았다. 시엔은 하인리히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 듯 그를 응시하다가 이내 익살스럽게 웃었다.
“그렇죠, 뭐!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시엔을 가만히 응시하던 하인리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것일까요, 어린 레이디? 하긴, 공국인들이 제국의 황성에 와서 시위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그때 시엔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저도 모르겠지만, 누가 자기의 아이디어를 빼앗아 갔다고 적혀 있었어요!”
엘프의 피가 섞인 공국인들에게 도둑질이나 표절은 결단코 용서받을 수 있는 범죄가 아니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도둑질이라니. 천박한 자들에게 당한 모양이군요.”
하인리히 대사가 인상을 찡그리자, 순간적으로 황태자의 낯이 일그러졌다. 마치 찔리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황태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마티어스가 아직도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시엔을 향해 짧게 일갈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제국민이 어떻게 공국 상단의 아이디어를 훔치겠나.”
시엔은 지금까지 그 말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저는 제국민이 공국 상단의 아이디어를 빼앗아 갔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요?”
그녀의 말에 황태자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하인리히 대사 역시 이상함을 감지한 듯 표정을 굳혔다.
시엔만이 즐거운 듯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황태자가 고작해야 말장난 따위에 넘어갈 일은 없었다. 몇 초도 안 되어 평온을 되찾은 그가 시엔의 분홍색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얼렀다.
“내가 맥락으로 상황을 지레짐작했나 보군, 어린 미르모드의 레이디.”
시엔이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했다.
“아아, 역시나 그런 거겠지요?”
시엔의 말에 황태자가 힘주어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그럼 이제 그대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겠나?”
황태자가 싸늘하게 문가로 손을 뻗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니 나가라는 의미였다.
이 모든 상황을 가만히 관조하던 하인리히 대사가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그러나 하인리히 대사는 어쩐지 입맛이 쓴 듯한 표정이었다.
***
축하연이 끝난 뒤, 황제와 하인리히 대사, 황태자, 황녀, 요테르 백작 간의 소소한 정찬 자리가 마련되었다.
황제는 황태자를 제 후계자로 삼기는 했으나, 영 미덥지 못하게 여기고 있었다.
황태자는 지금까지 정복 전쟁에 연이어 실패하고 측근들을 숙청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실책을 보여 왔다. 그런 그를 볼 때마다 황제는 내심 황태자가 제국을 지배하고 황제의 홀을 쥐기에는 미미하다고 여겨 왔다.
그러던 와중에 황태자가 직접 외교 분야에서 성과를 내겠다고 주청을 올렸다.
황제는 과연 제 아들이 미켈 광산의 마력석이라는 외교 분야의 수확을 올릴 수 있을지 귀추를 주목하는 중이었다.
“하인리히 대사, 반갑군.”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간단한 인사치레 끝에 황제가 가볍게 반문했다.
“여기 있는 요테르 백작이 친자 검사 키트를 개발 중이랍니다, 폐하.”
“아아, 친자 검사만이 아니지요, 오라버니?”
그들 사이의 분위기는 상당히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단 한 사람, 생각에 잠긴 듯한 하인리히 대사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런 하인리히 대사를 가만히 응시하던 황제가 조용히 물었다.
“대사.”
“…….”
“하인리히 대사?”
“아, 예. 폐하!”
하인리히 대사를 가만히 바라보던 황제가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며 말했다.
“왜 그러는 것이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시오?”
하인리히 대사가 어색한 듯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인리히 대사의 표정을 살피던 황태자가 가볍게 말했다.
“자, 그럼 미켈 광산의 계약은 지금 당장 하는 걸로 하지요.”
하인리히 대사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황녀가 제 잔에 애교 있게 셰리주를 따랐다.
“미켈 광산은 제국과 공국의 연합을 상징하는 다리가 되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하인리히 대사가 잔에 찰랑거리는 와인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우선 공왕 전하께 보고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순간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황태자가 딱딱한 낯으로 하인리히 대사를 보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
문제라, 문제 따위는 없었다.
하인리히 대사는 황궁의 별궁으로 들어와 제 머리칼을 마구 헤집어 댔다.
‘공왕 전하께서도 웬만하면 제국에 미켈 광산의 마력석을 판매하라 하셨거늘.’
그렇게만 된다면, 제국과 공국 외교에는 활력이 생길 것이었다.
한데 왜 자신의 독단으로 황태자의 말에 제대로 대꾸하지 않은 채로 방 안에 돌아온 것이었던가?
‘……답답하군. 설마 그 꼬마 레이디의 말이 마음에 걸려서는 아닐 테고.’
하인리히 대사는 답답한 마음을 안은 채로 산책을 나서기로 했다.
말이 산책이기는 했으나, 어느새 그의 발걸음은 황궁을 빠져나가, 아까 시위대가 있던 장소에 도달해 있었다.
그런데…….
‘저게 뭐지?’
아까 보았던 2인 시위대는 아직까지도 내내 그 자리에 있었던 듯했다.
시위대들이 경비병들의 손에 이끌려 가고 있었다.
하인리히 대사는 손에 땀을 쥔 채로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시위대 둘은 시엔이 말했던 것처럼 귀가 뾰족했고 눈이 푸른색이었다. 전형적인 엘프 혼혈이었으며, 공국의 신민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하인리히 대사는 체통을 지킬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 나가며 외쳤다.
“이게 무슨 짓들이지?”
하인리히 대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충 스캔한 경비병들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별일 아닙니다. 집시법 위반으로 잡아가는 것이니까요.”
“그, 그렇다기에는 우리 공국민 같은데.”
그때 반항하던 시위대 중 한 명이 씨근덕대며 외쳤다.
“저, 공국민 맞습니다! 제국 사람들이 저희의 아이디어를 훔쳐 갔다고요! 그래서 여기서 시위를 하고 있던 겁니다!”
“그게 말이 되나?”
하인리히 대사의 낯이 일그러졌다.
“누군가 도둑질을 했다면, 공국에 직접 말을 하면 되지, 왜 굳이 제국까지 와서 시위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군그래!”
그의 말이 백번 맞았다. 공국인들이 기술과 예술을 사랑하는 만큼 공국은 기술자를 보호하는 데에도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생각이 착각이라는 듯, 시위대가 경비병의 손을 거칠게 털어 내며 중얼거렸다.
“하. 공국에 항의하라고요? 수도 없이 항의했습니다! 한데 어차피 윗선에서는 우리의 의견, 받아들여 주지도 않더군요.”
“……그게 무슨.”
“저희를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소립니다. 제국 놈들의 뇌물을 먹은 행정관들이야, 그저 모르쇠만 했지요!”
하인리히 대사도, 공왕도 잘 몰랐다.
공국의 신문고 역할을 담당하는 민원 담당 행정관들이 그리 부패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황제나 고위 귀족과 같은 자들과 하위 상단 간의 이해관계가 그리 유지될 리가 있겠는가.
하인리히 대사의 낯이 충격받은 듯 일그러졌다. 그가 급하게 주머니를 뒤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외교관에게 있는 면책 특권이었다.
경비병들이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자네들은 시위를 멈추고 이리 오게나. 내 할 말이 있으니.”
***
“시엔 미르모드 말이다.”
황태자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아네사 황녀는 황태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네, 오라버니. 시엔 미르모드요!”
“영 수상쩍긴 하더구나.”
“그렇죠?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어요.”
“역시 어리더라도 미르모드라는 건가……. 하지만 아네사, 넌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느냐?”
순간 아네사의 눈동자에 의문이 짓쳐 들었다.
“무슨 생각 말씀이세요?”
순간, 황태자의 입매가 비웃듯이 올라갔다.
“이 모든 것을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
“……예? 그게 무슨.”
황태자가 느긋하게 웃으며 탁상을 두드렸다.
“시골에서 올라온 어린아이에게 상황을 설계하고 판을 짜는 능력이 있을 확률이 몇이나 된다고 보지.”
상식적으로 0%였다.
서서히 황태자가 하는 말의 진의를 깨달은 아네사의 낯이 굳어졌다.
“……그럼, 그 말의 뜻은.”
“그래, 모든 걸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어린아이가 만든 상단도, 모든 것도. 전부 다.”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우리를 적대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아네사.”
아네사 황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황태자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웃었다.
“시엔 미르모드는 미끼에 불과하다. 아네사, 알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