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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이번 축하연은 내가 주인공! (68/77)


68화. 이번 축하연은 내가 주인공!
2023.07.25.



 
사실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정복 전쟁을 한다면 소규모인 공국쯤이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럴 수 없는 복잡한 정세가 얽혀 있었다.

공국은 엘프 혼혈이 세운 나라로, 그들의 마력은 그 누구보다 빼어났다.

그뿐이랴?

백여 년 전 제국의 대륙 정복 전쟁에 차출되어 제국의 연합으로 훌륭하게 싸운 뒤 중립국의 위치를 받아낸 곳이기도 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훌륭한 인재를 보유한 데다 천연자원 역시도 많이 보유하고 있어 쉽사리 무시할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게다가 아버지 폐하께서도 미켈 광산 계약에 기대가 크시지.’

황태자는 하인리히 대사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미켈 광산에서 나는 광석, 미켈은 한 마디로 마나를 증폭해줄 수 있는 마력석이었다.

마력석을 지닌 마법사는 제 능력의 백 배 이상을 발휘할 수 있다고들 했다.

황태자가 미켈 광산 계약을 위해 하인리히 대사를 초청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제국 궁정 마법사 자리에 지원하는 자들이 열 배로 늘었을 정도였다.

그러니 하인리히 대사가 제 맘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해도 당분간은 참아 주어야 했다.

황태자의 낯이 일그러지려던 그때, 타이밍 좋게 마차가 멈춰 섰다.


“황태자 전하, 벌써 황궁에 도착했군요.”

 

***

마차 바깥으로 나온 하인리히 대사는 불편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 보았던 시위대가 마음에 걸렸다.


‘그 시위대, 귀도 어쩐지 뾰족한 것 같았는데. 내 착각인가?’

공국인들끼리는 누구나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대륙인들과 다르게 엘프의 피가 섞여 귀가 유독 뾰족했으니까.


‘하지만 공국인들이 왜 제국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겠어. 말이 안 되지, 이건.’

하인리히 대사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했다.

애초에 공국은 폐쇄적인 곳이었고,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외부의 출입을 불허하는 장소였다.

게다가 그는 제국, 특히 황궁과 척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번에 미켈 광산에 있는 마력석을 최대한 비싼 값으로 팔고, 제국의 아카데미에 인재들을 유학시킬 계산을 떠올린 그가 입가에 가식적인 미소를 흘렸다.

이번 일은 제국에게도 중요한 계약이었지만, 공국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국의 기술력 발전이니까.

그런데 황태자와 함께 축하연이 벌어지는 황궁의 홀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는 수상쩍은 상황에 직면하고야 말았다.

그의 축하연을 해 주기로 했다던 무도회장 안의 분위기가 영 싸늘했던 것이다.

대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도회장 안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이게 말이 되나? 무도회장에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가문의 어린 레이디를 데려오다니!”

“말이 안 되지요.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대모님.”

“미르모드 가문은 축하연에 초대받지도 않았잖아!”

귀족들이 벽에 바짝 달라붙은 채로 가운데에 선 사람들에 대해 힐난하고 있는 묘한 광경이었다.

게다가 비난받는 당사자 둘은 몹시 잘생겼으나 싸늘한 인상의 미남과, 건드리면 뾱 소리가 날 것처럼 귀여운 아기 새를 닮은 조그만 꼬맹이였다.

공국 대사인 자신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무도회라고 들었는데, 어째서인지 분위기가 영 어수선한 게 불편하기까지 했다.

하인리히 대사는 곁을 힐끗 바라보다가 멈칫했다. 황태자가 이를 으득 가는 게 보였다.


“마티어스 미르모드…….”

황태자는 무도회장 내부로 들어갈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뿐이랴? 곁에 있는 자신을 살피지도 않는 태도였다. 하인리히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혹시 축하연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황태자 전하?”

황태자가 그제야 분위기를 알겠다는 듯 다시 낯빛을 바꾸어 내며 속삭였다.


“아닙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대사.”

 

***

황태자에게는 안타깝게도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갈수록 분위기는 더욱 숙연해졌다.

시엔과 마티어스는 마치 저들 세상이라는 듯 행복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중이었다.

문제는 이 자리에 반(反) 미르모드 가문이자 친 황태자파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일까?

황궁에서 열리는 축하연인 데다 미르모드 가문의 참석이 없을 예정이었던 탓에 상당히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온 황녀 역시 벽에 꼿꼿이 기대어 얼굴을 가린 채로 씨근덕대고 있었다.

하인리히 대사는 머쓱하게 벽에 기대어 황태자와 대화를 나누려다 문득 중얼거렸다.


“분위기가 좀…….”

외교 사절치고는 제 감정의 진폭을 감출 줄 모르는 하인리히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시 닫았다. 황태자는 겨우 입꼬리에 우미한 웃음을 단 채로 중얼거렸다.


“아아. 분위기가, 좋군.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오기는 했지만 말일세.”

제아무리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라 한들 위세 등등한 미르모드 가문이었다. 황태자의 낯이 불편함으로 물든 것을 본 하인리히 대사가 솜씨 좋게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축하연이니 즐겁게 즐기고 싶군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기가 막힙니다.”

오케스트라를 언급하자 황태자의 안색이 단숨에 밝아졌다.


“공국인들이 엘프의 핏줄이지 않나. 엘프만큼이나 아름다운 연주를 할 줄은 모르겠지만, 내 여동생인 황녀가 이번 축하연을 꾸리며 많이 노력을 하였지.”

“황녀 전하께서 예술에 조예가 깊으신가 봅니다?”

“그래, 그렇다네. 하인리히 대사. 내 여동생인 황녀와 대화를 나누어 보겠나?”

“오, 그것도 좋지요. 엘프의 핏줄을 이은 공국의 신민이라면 모두 예술가와 기술자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황태자는 벽에 기댄 채로 묵묵히 서 있던 황녀 쪽에 눈짓했다. 황녀는 가끔 발작적으로 손을 떨어 대기는 했으나, 하인리히가 보기에 그리 심각한 문제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와 오케스트라에 관련된 대화를 나누면서 서서히 즐거움을 되찾아 가는 눈치였다.


“여기 요테르 백작도 있다네.”

“처음 뵙겠습니다, 하인리히 대사.”

“반갑소, 요테르 백작.”

이번에 황태자가 소개한 요테르 백작은 콧수염이 멋들어진 50대의 중후한 신사였다.

눈빛에 느글거리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상단을 운영하는 일반인들이야 눈이 찌들 수도 있는 법이라고 가볍게 넘겼다.

그보다 황태자가 요테르 백작을 소개해 주는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라 여겼을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태자가 요테르 백작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요테르 백작은 내 측근이오.”

“오, 그렇습니까.”

“나와 절친한 친우이기도 하지. 이번에 미켈 광산이 계약되기만 하면, 이 친구가 마력석을 일부 가져갈 예정이야.”

마력석이라는 말에 요테르 백작의 눈이 욕망을 담아 희번덕거렸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 하인리히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요테르 백작께서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하시는 분입니까?”

그때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던 아네사 황녀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요테르 백작은 물건을 판매하기도 하죠. 요즘에 공을 들이는 건 검사 키트예요.”

황녀의 시선이 무도회장 가운데에서 제 아버지의 손을 잡은 조그만 레이디 쪽으로 향했다. 미르모드 가문이라고 했나?


“농작물의 상태를 검사하는 일도 하죠. 무엇보다 귀족들이나 평민들의 사생아 감별을 위해 친자 검사 체계를 구축하고 있답니다.”

“오, 우리 공국에서도 하나같이 관심이 있는 주제들이군요. 안 그래도 친자 검사 연구는 공국에서도 하고 있는데, 영 답보 상태인 것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제국에서 먼저 실행한다니, 기술력이 제법이십니다.”

황녀의 입가에 그린듯한 미소가 그려졌다.


“감히 가짜 주제에 진짜 행세를 하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요테르 백작이 끼어들어 말했다.


“하하, 마력석을 갖게 된다면 바로 친자 검사를 시행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공국에 로열티 일부도 지불할 수 있겠죠.”

새로운 기술이라면 얼마든지 흥미롭게 바라보는 공국 사람답게, 하인리히 대사가 눈을 반짝거리며 화답했다.


“정말이지 미래가 기대되는군요.”

하지만 그들과 함께 장밋빛 청사진을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하인리히 대사는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묘하게 알맹이가 빠진 대화 같단 말이지.’

게다가 황녀의 태도도 상당히 수상쩍었다. 처음에는 덜덜 떨더니만, 황태자가 제 곁에 있는 요테르 백작을 소개하며, 그에게 마력석을 나누어 줄 거라고 공언한 시점에서는 완전히 행복한 미소를 되찾은 듯 보였다.


‘묘하게 이상한데 말이지.’

그가 기이한 위화감을 느끼며 대화를 하던 찰나 오케스트라가 멈췄다.


 
그리고 멀리서 누군가 그를 향해 뽀짝뽀짝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무도회장에 있던 열 살짜리 어린아이였다. 미르모드의 딸이라고 했나?


“제국의 빛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저는 시엔 미르모드라 합니다.”

어린 레이디는 예법도 모른다는 듯 천방지축으로 굴었다.

어린아이를 예뻐하는 하인리히 대사를 제외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하지만 열 살짜리 레이디는 그런 것도 모른다는 듯 시침을 뚝 떼며 황태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황태자가 마지못해 입을 열어 답했다.


“그래, 미르모드 가의 어린 레이디를 보는군. 이리 갑작스레 무슨 일이지?”

안타깝지만, 황태자의 입장에서도 무도회장 안에서 공개적으로 열 살짜리 어린아이를 내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타국의 대사가 곁에 있다면 말이지.

그 사실을 시엔 미르모드가 알고 온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어린 시엔이 순진하게 웃으며 작게 손뼉을 쳤다.


“외국의 대사님이 오셨다고 해서 궁금해서 찾아뵈었어요!”

뜬금없기는 했지만, 어린아이다웠다. 하인리히 대사는 어린아이들에게 친절한 성품이었다. 황태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그는 다정한 어투로 속삭였다.


“아, 그러십니까?”

“네! 귀가 너무 멋져요!”

제국의 어린아이들에게 엘프의 피가 섞인 공국인의 귀는 신기하겠지. 처음 보는 것일 테니까.

하인리히 대사는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대하듯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공국인들은 엘프의 피를 이어받아 대체로 귀가 뾰족합니다.”

“아아, 정말 그런가요?”

“네, 그렇지요. 저 같은 귀는 처음 보시지요?”

시엔은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마치 이해할 수 없는 난제를 보았다는 듯이.


“우움, 이상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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