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구원자 시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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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구원자 시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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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구원자 시엔
2023.07.18.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이미 요테르 백작 측에서 선수를 쳤나?’
쉐리프 상단이 위치한 건물의 문 앞에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하지만 상단의 간판은 아래로 뚝 떨어져 있었다.
내가 요란법석을 떨며 마차에서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주목하는 사람이 하나 없었다.
‘설마 폐업?’
상단 문에는 새하얀 색으로 X자 표시가 되어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조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단 앞에 있던 사내 하나가 입술을 짓씹으며 욕설을 지껄였다.
“제기랄……!”
그 정도면 귀족이지.
바닥을 구르고 땅을 치면서 욕까지 하는 남자도 있었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곁에 서서 망연히 하늘만 바라보는 여자를 응시했다.
“다 끝났어…….”
그녀의 곁에 있는 키가 큰 언니 역시 울지는 않았지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떨어진 간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력 주입만 남았었는데…….”
“마지막이었지.”
“갑자기 우리의 연구 결과를 다 가져갈 줄 알았으면 암호화라도 해 놓는 건데.”
건물 입구에 옹기종기 모인 이들의 선량한 얼굴이 눈물로 일그러졌다.
“법적으로 그렇다잖나. 우리는 이제 끝났어.”
“돈을 얼마를 투자했는데, 젠장. 이제 곧 막바지였는데!”
대화를 꾸준히 엿들어 보니 확실히 요테르 백작 측에서 손을 쓴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을 빤히 바라보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안 끝났어.’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몸을 덜덜 떨었다.
시녀 언니들은 몸을 발발 떠는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사람들, 위험한 것 같은데요. 다음에 다시 올까요?”
“아니.”
입가에 미소를 띠지 않은 채 진지하게 척척 걸어 그들 앞에 섰다. 조금 멀리서 봤을 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바닥을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키트의 포장지라거나, 텅텅 비어 버린 네모난 박스라거나.
여러모로 황폐한 폐허 같은 모습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렇게나 노력했는데 요테르 백작에게 성과를 허망하게 빼앗기다니, 안타까워.’
왠지 모르게 마음이 짠해진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안녕.”
내 또박또박한 발음에 그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멋지게 말해야 했다.
“내가 그대들에게 투자하지.”
스카프를 쓱 벗은 다음 선글라스도 휙 벗어 던진 나는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누가 봐도 멋지고 대단한 모습의…….
“……누, 누구시죠?”
……10살이었다.
나를 보는 상단 사람들의 시선이 묘해졌다. 그들은 곧 뾰족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귀족 같은데, 혹시 요테르 백작 딸인가? 우릴 또 개무시하러 온 거야?”
도끼눈을 뜨는 걸 보니, 요테르 백작 쪽에 상당히 쌓인 게 많은 모양인데.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나 시엔 미르모드, 당신들보다 더 신전 반대파인 사람이거든요!
하지만 그들은 요테르 백작 이야기에 몹시 예민한 듯했다.
내가 고개를 저은 다음 입을 열어 대답하기도 전에, 붕어 눈을 한 채로 흙바닥에 엎어져 있던 여자가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요테르 백작이라고?”
그녀가 도끼눈을 뜨고 나를 보다 멈칫했다.
“어라.”
바로 반박하려 했는데 내가 신전 사람이 아닌 걸 눈치챈 모양이다. 나는 느긋하게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그러자 곧이어 내가 기대했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요테르 백작한테는 이만한 딸이 없을 텐데. 전부 다 장성한 자녀라고 들었어.”
“으응, 똑똑하네.”
어리둥절한 그들을 보며 나는 힘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내가 말을 할 때가 되었군!
“나 요테르 백작 완전 싫어해!”
그들이 여전히 경계의 낯빛을 지우지 않은 채로 반문했다.
“그럼 어린 레이디께서는 어느 가문이신지…….”
아무래도 제대로 신분을 증명하지 않으면 날 믿어 주지 않을 눈치였다. 나는 근엄하게 고민했다. 여기서 내 신분을 드러낼지, 아니면 제대로 말을 해 볼지.
하지만 그들이 먼저 선수를 쳤다.
“혹시 우리 상단이 예전에 붙였던 <친자 검사 키트 홍보물>이라도 보고 온 레이디이신가?”
흐음, 대화의 맥락을 유추해 보니 나를 홍보물에 눈이 멀어서 투자하러 온 졸부로 아는 눈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대꾸했다.
“웅!”
그러자 그들의 시선이 아래로 축 처졌다.
“죄송하지만…… 가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돈 많은 게 싫은가?’
하지만 그들은 금세 내 의문에 대답을 해 주었다. 한숨을 푹 내쉬면서.
“황궁이라 해도 어쩔 수 없어요. 무려 제국의 황궁 측에서 우리를 정적으로 규정했으니까, 꼬마 아가씨.”
“그래?”
“네. 키트를 만들었을 뿐인데 우릴 이적 단체로 규정했더군요. 우리와 가까이하면 당신 상단도 피해를 입을 겁니다. 기회를 줄 때 나가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파들파들 떨리는 입꼬리가 아래로 다시 내려갔다.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던 내가 떠날 것 같자, 거의 울 기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이럴 수가, 이 사람들…… 똑똑한데 정직하기까지 하다.
멍청하고 거짓말 잘하는 황녀와는 천양지차가 아닌가.
고로…….
“합격입니다.”
그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며 나는 손을 까딱했다.
“나를 안으로 안내해 줘!”
***
“시, 실례지만 못 믿겠어요!”
눈을 질끈 감고 하는 말에 나는 입매를 삐죽거렸다.
“왜 내 말을 못 믿지?”
“갑자기 나타난 어린 레이디께서 대단한 미르모드 가문의 아기님이라는 걸 어찌 믿겠습니까! 그분이 이렇게 갑자기 우리를 구원하러 나타날 리 없잖아요?”
어지럽혀진 상단 안에 초대받은 지 몇 시간 째. 이 말만 벌써 열 번째다. 나는 시녀 언니들에게 짧게 눈짓한 뒤 어깨를 쭉 뻗었다.
그러자 시녀 언니들이 우락부락한 근육을 보여 주며 그들에게 척, 신분증을 내밀었다.
“아기님의 신분패다.”
“……위, 위조는 아, 아닌.”
“아니지. 제국 황제의 인장을 조작할 간 큰 자가 있을까?”
쉐리프 상단 사람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게 보였다.
나는 느긋하게 팔짱을 낀 채로 상황을 관망했다.
그들은 눈을 데구루루 굴리다 침을 꼴깍 삼킨 뒤 말했다.
“그, 그럼 정말 시엔 님? 그런데 왜 귀한 곳에 누추한 분, 아니, 아니.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그래! 내가 시엔 미르모드라구.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별거 없어. 언니, 오빠들. 사업 하나 했었지?”
“그렇……습니다만.”
“그럼 이제 나랑 같이 친자 검사 키트를 만들어 보는 건 어때?”
내 씩씩한 말에 그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픽 웃었다.
“하하…… 그게.”
“왜?”
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끝장났습니다. 키트를 만드는 데에 가장 필요한 재료는 마로아 구근입니다. 한데 요테르 백작 측에서 그 사실을 알고, 마로아 구근의 씨를 말리고 있습니다. 키트는 전부 다 짓밟혀서 사라진 지 오래고요.”
그러고 보니 상단 앞에 부서진 키트의 잔해가 보였었지.
‘요테르 백작, 이 잔혹한 자식!’
하지만 나 시엔 미르모드의 사전에 포기란 없다!
나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요테르 백작 측에서 제대로 된 친자 검사 키트를 만드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단 말이야? 가짜 키트를 만드는 방법만 아는 게 아니라?”
이렇게 되면 일이 크게 곤란해지는데.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핵심 기술은 저희 제작자만 알고 있어요. 문제는, 저희 상단 키트 핵심 제작자가 망명했거든요. 다만 마로아 구근이 키트 제작에 가장 필요한 재료라는 것 하나는 알고 있어서, 저희가 진짜 친자 검사 키트를 만들지 못하게 막고 있는 듯합니다…….”
산 넘어 산.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들을 알고 있으니까.
이들의 성품이나 지능, 노력 여하도. 전부 다.
“핵심 제작자가 망명했다구?”
“아, 네.”
“우리 가문이 보호해 준다고 천명하면 돌아올까?”
“……그건.”
“……신변 보호만이 아니라 키트 제작 전부를 돕는다고 하면?”
그들이 망설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명예욕이 있는 친구인지라, 가능합니다. 다만, 돌아오게 하는 것도, 다시 키트를 대규모로 제작하는 것도……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저희도 정말 그 친구가 어디 갔는지 모르거든요.”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테르 백작과 사악한 황녀 및 황태자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친자 검사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그런데 망명한 키트 제작자를 찾는 데에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건 엄청난 적신호였다.
‘시간이 금이야. 최대한 빨리 제작에 들어가야 하는데.’
나는 어지럽혀진 건물 속에서 겨우 생존해 있던 사과 주스를 쪽쪽 빨아 먹으며 당분을 충전하기로 했다.
제작자를 데려오는 것, 마로아 구근을 다시 찾는 것, 그리고 친자 검사 키트 제작에 들어가는 것까지.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멜로디아의 생애>를 계속 더듬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설에 생각이 미쳤다.
‘그 방법을 사용하면 될 것 같은데?’
행동파인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그, 그런데.”
“웅?”
순간 집중력이 깨졌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들이 비즈니스적으로 중요한 말을 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을 향한 나의 시선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러자 상단 사람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넙죽 엎드렸다.
“저희가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습니다.”
“말하지 못한 거?”
사내 하나가 촉새처럼 빠르게 말했다.
“네! 너, 너무 귀여우신데, 한 번만…….”
“웅?”
“볼을 딱 한 번만 만져 보면은…….”
“부, 불경해! 하지만 맞는 말이야!”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내가 귀엽다는 말이나 하고 있는 이 기술자들을 믿어도 될까?
하지만 그들의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보면서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쩌면 이 귀여움으로 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기술자는 중요한 존재니까, 내 볼 정도는 잠깐 내어줄 수도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들을 향해 속삭였다.
“흐음, 그럼…….”
그들의 눈이 반짝였다. 동시에 내 마음도 흐물흐물 약해져 버리고 말았다.
사실 집도, 상단도 잃은 저 언니 오빠들이 불쌍하기도 하니까…….
“내 볼 한 번 만지는 거, 허락할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턱을 치켜들었다. 곁에서 시녀들이 ‘최고의 포상이다’라고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그들의 덜덜 떨리는 손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차, 찹쌀떡…….”
그들은 볼을 살짝 문지르면서 힘겹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매정하게 그들의 손을 꼬옥 잡았다.
“이제 끝!”
“끄, 끝…….”
미련이 가득 남은 그들의 표정을 보며 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일이 잘되면 또 해 주지.”
“느에……? 또, 또요?”
그들이 눈을 반짝이며 양손을 앞으로 모았다.
대체 어떻게 친자 검사 키트라는 대단한 발명을 해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이 사람들은 아주 바보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 하나 났으니까 다들 집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