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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법 (64/77)


64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법
2023.07.11.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빠가 어떻게 해결한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분위기가 안 좋아.’

이곳은 거대한 미르모드 저택의 정중앙에 위치한 광장.

수없이 많은 기사와 시종, 그리고 다른 저택에서 심부름을 온 시녀들까지 오가는 장소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늘 저들을 공개적으로 내친다 한들, 저 황녀의 말을 믿고 나에 대한 불신이 가득 차오르는 식솔들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빠가 연약한 마음을 굳게 먹고 저 ‘진짜 딸’을 내친다고 하더라도 저 사람들은 수군거릴 것이다.

내 혈통과 핏줄에 대해서 계속 떠들어 대겠지.

그러니까 어떻게든 친자 검사는 해야 했다.

물론 그 전에 할 일은 있었다.


“아니야, 아빠. 내가 해.”

……확실히 화근을 뽑아야겠지.

저 딸이 진짜인지 아닌지, 감별하는 건 내가 한다.


 
연약한 아빠의 근육 빵빵 손 말고 강력한 나의 말랑말랑 마시멜로 손으로!

나는 눈에 힘을 팍 주었다.

아주 무시무시하게.

그리고 통통한 배에도 힘을 꾸욱 준 다음 사자후를 내질렀다.


“아기, 이리 와!”

너무 박력이 넘쳤는지 모든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열심히 통통한 배를 밀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아빠가 다정하게 웃으면서 내 목덜미를 쓰윽 올려 품에 끌어안았다.


“시엔.”

바동바동.

팔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보았지만 아빠의 단단한 근육질에 갇혀 있었다.

나는 눈썹을 아래로 추욱 내리고 아빠를 향해 반문했다.


“웅?”

“위험해.”

나는 반짝반짝 눈을 하고 아빠를 바라보았다.

‘위험하니까 연약한 아빠가 아니라 강한 딸이 해야지! 내가 지켜 줄게!’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아빠의 눈매가 새초롬해졌다. 저럴 때의 아빠는 아주 고집쟁이다. 내가 따로 말릴 수가 없다.

게다가…….


“시엔은 아빠 믿지?”

“웅!”

“그럼 아빠가 황녀님이랑 요테르 백작님이랑 대화하게 놔둬야겠지?”

“어어……? 안 되는데!”

나는 아빠 품에서 짤막한 다리를 동동 굴렀다.

그러자 아빠가 스산하게 미소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깐이면 돼. 십 분.”

“……십 분?”

아빠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한 적은 별로 없었다.

예절 아카데미에 가자, 하고 데려갈 때면 모를까.

게다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빠한테도 면이 있지. 나한테 밀리는 걸 드러내면 공작의 권위가 살지 않아. 여긴 악역 가문이니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기도 하고…….’

심지어 다른 가문의 인장이 있는 마차까지 주루룩 늘어서 있었다.

마음이 여리다는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아빠는 이제 무려 이 가문 전체를 다스리는 사람이었다. 나처럼 쪼그만 꼬맹이에게 반박당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 아빠의 권위가 훼손되고 말 게 분명했다.


‘아빠를…… 믿어 볼까?’

……조금 걱정되었다.

나는 떨리는 눈동자를 아빠에게 고정했다.

지금은 공연히 차가운 척하고 있지만, 나는 아빠의 여린 마음을 아주 잘 알았다.


‘시엔, 저 길거리 노숙인 분 너무 안쓰럽지 않아?’

‘압빠. 저 아조씨 금 목거리 하고 이쏘.’

‘어어……?’

‘저거 비싼 고야! 아빠도 알면서 또 마음 약해졌지!’

……시골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착한 아빠가 지금까지 해 온 선한 행동들이 떠오르자마자 불안해졌다.


‘아빠가 저 표독스럽고 독사 같은 사람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번에는 아빠의 입매가 단단하게 다물려 있었다. 이번만큼은 자기에게 맡겨 보라는 듯이.

마음이 뿌리 없이 수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꽃처럼 불안해졌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빠였다.

나는 아빠를 딱 한 번만, 믿어 보기로 했다.

만약에 아빠가 상황을 돌파하지 못하면 내가 조금 더 힘내면 되니까.

그게 바로 가족이라는 거니까 말이다.


“아빠.”

“응?”

“만약에 누가 뭐라고 하면, 바로 나 불러. 나 저기 가 있을게. 그리구…….”

물론 걱정되니까 한 가지 보험은 들어 놓기로 했다.


“저 애기는, 내가 데리고 갈게!”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아기들은 아기들끼리.

만약 아빠가 실패하더라도, 내가 아기에게서 허점을 발견해 내면 그만이니까.


“아.”

아빠답지 않은 태도였다.

아빠가 스산한 표정으로 내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저게, 갖고 싶다면 가져가도 좋아.”

나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웅!”

어른은 어른끼리, 아이는 아이끼리.

나쁜 구도는 아니다.

원하는 걸 반만 가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빠를 딱 한 번만 믿어 보기로 하니까…… 이상하게 어깨가 조금 덜 무거워진 것 같기도 했다.

***

시엔은 중앙 광장의 옆에 마련된 응접용 소규모 저택으로 들어섰다.

옆에는 ‘마티어스 미르모드의 진짜 딸’이라고 주장한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시엔 미르모드는, 마티어스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고로 더 이상 이 거대한 가문의 중앙 야외 광장에서 마티어스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걸어 황녀와 요테르 백작의 바로 앞에 섰다.

사냥꾼이 야생의 들짐승을 사냥하듯이 우아한 몸짓이었다.


“내가 좀 성격이 나빠.”

“……그건.”

마티어스가 황녀의 앞으로 더 바짝 다가섰다.

황녀는 조용히 숨을 참았다.

마티어스 미르모드의 찌르는 듯한 시선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

금방이라도 찢어 죽일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상위 포식자의 시선이었다.

아까 시엔 앞에서 보였던 유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흡사 포악한 짐승이 먹잇감을 보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저 표정에는 그 어떤 감정도 없었다.

그저 단죄하려는 욕망뿐이었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눈치챈 황녀가 손을 미약하게 떨었다.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렸다는 것을, 감각으로 깨달은 것이다.

마티어스 미르모드는…… 부인을 들일 생각이 없다. 게다가 황녀라면 더더욱.

그리고 마티어스의 역린은 바로 시엔이다.

하지만 자신은 시엔 미르모드를 건드리고 말았다. 그 사실을 모른 채로.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마티어스에게는 그다지 자비가 없었다.


“이 자리에서 네 발로 꺼지든가.”

“…….”

“아니면 죽어서 내 헌팅 트로피가 되든가. 결정해.”

그 말에 미르모드 가문의 가솔들이 전율했다.

마티어스는 진심이었고, 황녀를 죽일 힘도 있었다.

다른 가문이라면 마티어스의 발언을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악역 가문인 미르모드는 힘을 숭앙하는 존재였다. 다시 말해,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뿜어내는 짙은 살기가 그들에게는 일종의 숭배할 만한 무언가로 보였다는 뜻이었다.

마티어스는 타인의 시선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느긋했다.

그는 허리춤의 검을 꺼내서 황녀의 목에 겨누었다.


“카, 칼은…….”

“거두라?”

“……그리, 말씀, 드렸습니다.”

관중도 많았고, 외부인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자들의 입놀림에는 관심 따위 없었다.


“목이 잘리고 싶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천명해야지.”

그의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가 광장에 선뜩하게 울려 퍼졌다.

마티어스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말을 잇지 못하는 상황.


“시엔 미르모드가 내 딸이야. 그렇지?”

저 말은 곧, 시엔 미르모드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 한들 제 딸은 오직 시엔뿐이라는 뜻이 된다.

애초부터 요테르 백작의 친자 검사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저 남자, 시엔 그 계집애에 대한 애착이 지나치게 강해.’

여전히 제 자존심을 굽히지 못한 황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을 때였다.

마티어스의 시선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황녀를 보좌하러 함께 온 요테르 백작이 있었다. 가엾게도 그는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고 있었다.


“대답.”

황녀를 겨눈 칼끝을 보던 요테르 백작은 흡사 오줌이라도 지릴 기세였다.

날 벼린 칼이 황녀의 목덜미에 가 닿았다. 살짝 그인 목덜미에서 옅게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마티어스의 검에서 옅은 오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황녀는 당황하지 않은 채로 도리어 입꼬리를 올렸다.

그도 그럴 게, 오러는 신성한 황족에게는 듣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그러나 마티어스의 오러는 황녀에게 닿지 않았다.

그의 검은 오러가 향한 곳은…….

숨이 넘어갈 정도로 꺽꺽거리고 있던 요테르 백작 쪽이었다.

그의 오러는 황족에게는 듣지 않지만, 연약하기 짝이 없는 요테르 백작 따위는 충분히 복속시킬 수 있으므로.

곧 검은 오러가 백작의 몸을 둘러쌌다.


“너 같은 걸 당분간 살려 둘 생각인 이유는 단순해.”

“커흑!”

요테르 백작이 몸을 배배 꼬며 바닥으로 무너졌다.

그는 감흥 없이 감히 제 친자를 발견했다 떠들어 댔던 요테르 백작을 내려다보았다.

시엔한테 ‘나쁜 아빠’로 의심받고 싶지 않다는 것.

그리고 감히 시엔을 상처 입히려 든 저놈들을 쉽게 죽일 생각 따위, 없다는 것.

맹수는 먹이만을 위해 사냥하지 않으므로.

그 순간 요테르 백작의 머릿속에 빨간 불이 켜졌다.

저 남자는 정말로 자신을 죽일 수 있다. 이 자리에서만큼은 면피를 해야 했다.

당황한 요테르 백작이 급기야 철퍼덕 엎어져 읍소했다.


“마, 마, 맞는 말씀이십니다! 시엔 님이 명실상부 딸이십니다.”

칼끝은 거둬지지 않았다.

그 대신 마티어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친자 검사를 하겠답시고 이 자리에 왔으면 뭔가를 준비했겠지.”

“그, 그, 그건…….”

그의 싸늘한 시선이 황녀에게 붙박였다.


“황녀.”

“……살려, 주……시는 건가요.”

그녀는 생각 외로 침착했다.

살기만 한다면 이 자리를 넘어 새로운 꿍꿍이를 만들어 낼 게 뻔히 보였다.

그러나 마티어스는 그녀를 살려 둔다고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분간은 가지고 놀 생각이었다.

마티어스는 소중한 제 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 연약한 아이에게, ‘너는 가짜 딸이야’라고 말하는 듯한 불온한 분위기도.

시엔의 작은 생채기와 다른 사람들의 목숨.

마티어스에게 그 두 개를 저울질해야 한다면 반드시 전자였다.

그러므로…….

감히 시엔의 마음에 상처를 낸 저들을 쉽게 죽여 줄 수는 없었다.

당연히, 제대로 근원을 뿌리 뽑을 생각이기는 했다.


“글쎄. 친자 검사라는 걸 요테르 백작이 하겠다고 했지.”

“……그, 그건.”

친자 검사를 포함한 온갖 검사는 요테르 백작, 나아가 황태자의 돈줄이었다.

그런, 그들이 자행하는 검사의 신뢰도가 바닥이 된다면 어떨까.

그들이 지니고 있는 돈줄부터 마르리라.

그리고 그다음은 요테르 백작과 결탁한 황태자, 그리고 황녀의 차례지.

마티어스의 입가가 사악하게 올라갔다.

적들의 피부터 말려 죽일 생각에 순수한 희열이 끓어 올랐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건 시엔만 할 줄 아는 게 아니었다.

그 피가 어디 가겠는가.


“날뛰는 게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잘됐군.”

“……그, 그 말은.”

“참여하지, 친자 검사.”

분명 그들의 의도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 갑자기 친자 검사를 하겠다고 하는 걸까?

그 의미 모를 말에 요테르 백작과 황녀의 안색이 동시에 하얗게 질렸을 때.

그는 품 안의 회중시계를 꺼내 보며 느긋하게 웃었다.

마치 무언가 계략을 꾸미는 사람처럼.

검은 거두어졌지만, 황녀와 요테르 백작은 무릎을 털썩 꿇었다.

딱 십 분이 지났다.

제 딸이라고 주장한 아이, 그리고 그의 사냥개들과 함께 보냈으니, 시엔은 아마 편안하고 무탈하게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시엔은 ‘편안하고 무탈하기는’ 했다.

마티어스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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