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진짜 딸이 나타났다
(63/77)
63화. 진짜 딸이 나타났다
(63/77)
63화. 진짜 딸이 나타났다
2023.07.07.
아네사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래. 나도 걜 품고 갈 생각은 없어. 아무튼 그러니까, 내가 걔를 홀린 다음 나중에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었잖아!”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어린 애일 뿐이야. 사탕을 주면…….”
“걘 그냥 어린 애는 아니야. 물론, 어리기는 하지만 꽤나 명석하거든. 어쩌면…… 너보다도 더 똑똑할 수도 있어. 상단을 운영 중인 요테르 백작의 라이벌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그건 어른들이 도와준 거겠지!”
“그렇다 해도 말이야, 아네사.”
아네사 황녀의 자존심 상한 표정을 본 황태자가 그녀를 어르듯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의 목표가 미르모드 가문의 가주를 꼭두각시로 세우고, 황궁의 손에 넣는 것이라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어린애든 무엇이든 최대한 빨리 제거해야 해.”
그 말에는 아네사도 십분 동의하는 바였다.
“시엔 미르모드와 마티어스 미르모드는 눈엣가시니까, 그래. 그렇지. 그다음에는…….”
“……우리가 원하는 미래가 펼쳐지겠지.”
그들은 서로의 시선을 마주 보고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황태자, 그리고 아네사의 목표를 위해서는 시엔 미르모드를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그렇지만 오라버니. 그 가문에서 시엔 미르모드를 꽤나 아끼는 것 같았어.”
“지금은 그렇겠지.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해.”
“웬 동문서답이야?”
황태자가 박수를 치듯 짝짝, 소리를 냈다.
그때 바깥에 있던 시종들이 미리 대기를 하고 있었던 듯, 새하얀 문이 열렸다.
그리고…… 조그만 소녀 하나가 안으로 주춤거리며 들어섰다.
어디 시궁창 속에 빠져 있다가 나온 듯 몸뚱어리에서 냄새가 좀 나는 애였다.
더 이상 사교적인 가면을 쓸 생각이 없는 아네사 황녀는 코를 쥐며 물었다.
“대체 저 썩은 냄새 나는 건 뭐야?”
“내가 전에 말했던, 마티어스 미르모드의 진짜 딸이야.”
그러고 보니 자세히 보면 놀라울 정도로 마티어스 미르모드와 닮은 낯이었다.
아무렇게나 삐죽빼죽 잘린 흑발에 벽안. 그러나 몽롱하면서도 서늘한 눈빛과 날카로운 턱선.
시엔 미르모드의 이질적인 분홍 머리에 녹안과는 전혀 다른 외양이었다. 자세히 보면 마티어스와도 머리카락 색이 온전히 똑같았다.
잘 씻긴 다음 옆에 가져다 놓으면, 마티어스 미르모드 역시 제 딸이 아님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닮은 꼴이었다.
“그래…… 진짜 딸이군.”
아네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태자는 몸을 일으켜 그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친자 검사도 마쳤지.”
“오, 그래?”
“그래. 아네사, 이 아이 덕분에 우리의 계획은 성공할 거야.”
“이 아이는, 신전에서 보내 준 건가요?”
황태자의 입꼬리가 숨길 수 없이 상승했다.
“그래, 멜로디아가 보내 주었지.”
“믿을 수 있는…….”
아네사가 미약한 의심을 표하자 황태자의 낯빛이 삽시간에 살벌해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녀는 현명하고 우아해. 틀릴 리 없어. 의심할 시간에 제대로 연기를 수행해. 그래야 네가 원치 않는 일을 피할 수 있잖아?”
따발총처럼 쏘아 대는 황태자의 말을 들으면서, 아네사는 가만히 고개를 수그렸다.
“저도 멜로디아를 믿어요.”
“그래, 멜로디아를 믿어. 우리에게는 멜로디아가 만들어 준 마티어스의 진짜 딸이 있으니까, 그렇지?”
황태자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그는 제 옆에 멀뚱하게 서 있는 다섯 살배기 소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가 이제 파란의 중심이 될 거야.”
황태자는 마티어스 미르모드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간에 퍼진, 마티어스가 시엔을 사랑한다는 낭설 따위는 코웃음 치며 비웃었다.
‘그’ 마티어스 미르모드였다.
그런 자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다. 시엔 미르모드가 제법 영특하기에 이용하려는 것뿐일 터였다. 그러니…….
“계획은 완벽해.”
***
……그렇게 해서, 황태자의 계획대로 아네사 황녀는 이 자리에 나타났다.
그녀는 멜로디아의 계산속을 떠올리며 미르모드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사실, 몰래 담장을 넘어 이 아이만 들여보낼 생각도 했다.
마티어스 미르모드의 태도가 생각보다 강경했으니까.
하지만 의외로 마티어스는 자신을 들여보내 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마티어스가 지금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든 아니든, 이제 자신은 마티어스의 ‘진짜 딸’을 데려다준 은인이 될 예정이었으니까.
마침내, 미르모드 저택의 거대한 중앙 광장 안.
아네사 황녀의 손을 이끌고 자그마한 소녀가 그사이에 나타났다.
분명 황궁에서 잘 먹고 잘 자랐을 텐데도 누가 봐도 연민을 느낄 만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흑발에 벽안을 한 조그만 소녀의 모습은 어쩐지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이 각각 한 번씩 눈길을 줄 정도였다.
아네사 황녀는 요테르 백작과 시종, 그리고 소녀와 함께 중앙 광장에서 가장 오가는 인파가 많은 분수대 앞에 멈춰 섰다.
“이, 이게 무슨 일이래?”
“황녀 전하 아니야?”
“황녀 전하께서도 미르모드 가문의 <수확제>에 참여하러 오신 건가?”
구태여 오늘을 고른 이유가 있다.
오늘은 폐쇄적인 미르모드 공작 저택 내부에 수많은 귀족들이 드나드는 행사가 있는 날이었으니까.
그 탓에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저택에 상주하며 업무를 집행하는 날이기도 했었고.
또…… 그 망할 델피아 미르모드가 자기 영지 돌보러 떠난 날이기도 했다.
델피아를 떠올린 아네사 황녀는 이를 으득 갈며 제 옆에 있는 시종을 향해 턱짓했다.
계획한 대로, 빨리 바람을 잡아 보라는 뜻이었다.
그녀의 명에 따라, 아네사 황녀와 함께 들어선 요테르 백작 및 시종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여기, 마티어스 님의 진짜 딸이 있습니다!”
“시엔 미르모드는 진짜 딸이 아닙니다!”
“딱 보십시오. 닮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친자 검사까지 마무리를 했다고요!”
마침내 모여든 가문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
그리고 다른 가문에서 온 시종과 시녀, 몇몇 귀족들 역시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닮긴 닮았네?”
“진짜 황녀 전하시잖아. 저분이 거짓을 말할 리는 없지.”
“이게 무슨 일이래? 그럼 지금 있는 그 시엔인가 하는 애는, 가짜 딸인 거야?”
계획대로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었다.
황녀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광장 쪽으로,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나타났다.
‘……검을 찼어.’
어째서인지 검을 찬 데다 살기까지 느껴졌지만, 자기와 닮은 아이를 보면, 마티어스 역시 묘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저 뒤로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나타남과 동시에, 그 뒤편으로 시엔 미르모드 또한 등장했다.
그 순간 아네사 황녀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
아네사 황녀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시녀들을 통해 빠르게 전달되었다.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아네사 황녀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시녀 언니들은 나를 등짝에 업은 다음 성큼성큼 황녀가 있다는 중앙 광장 쪽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 나타난 광경은…….
이미 나보다 한발 앞서 광장에 도착한 아빠.
그리고…….
“아버지…….”
……아빠의 진짜 딸이라고 주장하는 아이.
“당신의 딸을 데려왔어요.”
아네사 황녀, 그리고 요테르 백작이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아네사 황녀는 제 옆에 있는 요테르 백작을 향해 턱짓을 했다. 요테르 백작의 눈짓을 받은 신관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신관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미르모드 가문의 후계자께 알립니다. 검사 결과, 미르모드 가문의 핏줄이 맞습니다.”
“정확히는 마티어스 님의 아이죠.”
그 아이가 굳은 아빠를 향해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저, 저기.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
나는 아빠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인기척에 예민한 아빠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분명 따스했는데, 저들을 바라보는 표정은 싸늘했다.
나는 아빠가 나를 버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약한 아빠의 성정 상, 진짜 딸이 도착했다고 하면 당연히 걱정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 아빠는…….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군.”
마치 내 아빠가 아닌 것처럼 아주 냉정하게 속삭인 뒤 그 아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덜컥 겁을 먹은 표정으로 아이가 땅에 한 걸음을 디뎠다.
“아, 아빠……!”
하지만 아빠는 진짜 딸이라고 나타난 꼬마 애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네 아비지?”
“……그, 렇지만. 제가 아버지의 딸이라고 했-.”
“난 너를 내 딸이라고 인정한 기억이 없는데.”
“……네?”
황녀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이곳으로 들어온 아이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는 자기와 꼭 닮은 아이를 냉정하게 외면한 다음 나를 꼭 끌어안았다.
“시엔, 우리 딸, 가자.”
‘저런 더러운 소리 들을 필요 없어.’라고 속삭이면서.
하지만 나는 아빠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아이를 힐끗 바라보았다.
확실히 확인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빠는…….
……자기 딸이라고 주장하는 아이가 찾아 왔는데. 심지어 생김새나, 눈 색과 머리 색도 아빠와 똑같은데도.
“시엔.”
나만 바라보면서, 엄하게 말했다.
“보지 마. 아빠가 알아서 할게.”
아빠는 나를 쓱 들어 올리며 아네사 황녀를 향해 말했다.
“아네사 황녀, 할 말이 이건가?”
아네사 황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는 아빠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빠…….”
아빠가 뜻밖에 싸늘했던 태도를 버리고 나를 향해 웃어 주었다.
“시엔, 아빠가 맛있는 거 해 줄까?”
나를 꼭 끌어안은 품에서는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힐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황녀와 ‘진짜 딸’이라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내 시선을 눈치챈 건지 아빠가 조용히 읊조렸다.
“누가 뭐래도 시엔이가 아빠 딸이야.”
아빠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해 주었지만, 솔직히 저 아이, 아빠와 닮아도 너무 닮기는 했다.
나는 정말 가짜 딸인 걸까, 라고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잡다한 생각의 타래가 조금씩 얽히고설키기는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어 버린 걸까.
“이상한 거 믿지 마. 아빠가…….”
아빠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혼내 줄게.”
……믿기지는 않지만, 왠지 정말로 혼쭐이 날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막 정신을 차린 듯 아네사 황녀가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안 됩니다, 전하. 이미 미르모드 가문의 원로원에서는 친자인지 아닌지를 요테르 백작이 만든 전문 검사 키트를 통해 검증하겠다고 하셨거든요.”
황녀는 원로원의 패를 꺼내 들었다.
원로원은 현재 악셀 미르모드를 지지하는 패거리로, 이 가문 권력의 중심이었다. 우리 아빠와는 반대되는 세력이기도 했다.
어쩐지 저렇게나 당당하더라니, 원로원과 이미 뒷거래를 끝낸 모양이었다.
이제 갓 공작이 된 아빠가 단독으로 황족과 원로원 둘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아빠는 강력한 후계 후보였던 악셀 미르모드가 뜻밖에 마계 근처에서 오랜 세월을 분전한 덕에 어부지리로 공작이 된 상황이었다.
그런 아빠의 기반이 원로원과 황궁을 무시할 만큼 탄탄할 리가 없었다.
그 순간, 나를 꼭 끌어안은 아빠의 팔이 살짝 떨렸다.
혹시 마음 약한 아빠가 상처받기라도 한 걸까, 싶은 생각에 마음이 콩닥거렸다.
“시엔.”
“웅?”
“……들어가 있을래? 아빠가 최대한 빨리, 해결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