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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까불지 마 (60/77)


60화. 까불지 마
2023.06.27.


나는 아네사 황녀를 똑바로 마주 보면서 말했다.


“어떤 검증이요?”

“네가 미르모드가 아닐 수도 있으니…… 시엔. 그래, 네가 진짜 이 미르모드에 어울리는 아이인지 아닌지, 친자 검사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니?”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상처를 주려는 게 빤히 보이는 모습이었다.


“움…….”

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열 살 어린이한테 나쁜 말 하는 거, 창피하지 않나요?”

다 큰 어른이 되어서, 라는 말은 생략했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면서 생각했다.


‘세리나 아네사 황녀, 이런 사람은 우리 아빠한테 안 어울려!’

언젠가는 새엄마가 생길 수도 있다.

아빠가 하는 말 봐서는, 절대 없겠지만. 그래도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렇지만 이 여자는 아니었다.


“황녀님, 나쁜 사람이구나.”

나와 그녀의 시선이 중간에서 첨예하게 맞부딪쳤다.

‘황녀님, 나쁜 사람이구나.’라는 내 말에 그녀는 비죽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지, 시엔.”

그리고 마치 나를 가르치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나쁜 사람일 리가 있니?”

“움…….”

“하지만.”

황녀는 눈매를 반으로 접어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싸늘했다. 내 조그만 몸이 벌벌 떨릴 만큼의 살기가 느껴졌다.


“가짜인 주제에, 진짜 딸인 척하면서 살아가는. 너 같은 어린애를 상대할 때는…….”

그녀의 가냘픈 듯 연약해 보이는 외모 속에는 독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떨리는 입매를 마주 보고 단단하게 몸을 세웠다.


‘떨지 마, 쫄지도 마. 시엔 미르모드. 넌 가짜 딸이 아니라 진짜 아빠 딸이니까. 저건 저 사람의 잘못된 생각일 뿐이야. 몰아가기 같은 거라고.’

그러나 불행한 환생 전 과거라는 역린 때문에, 나는 긴장감을 늦추지 못한 채로 입술을 꾸욱 깨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번 생에서는, 대놓고 살기와 적의를 띠는 성인 여자는 사실상 처음 만나 보는 것이어서 당황으로 몸이 조금 떨렸다.


‘……전생의 엄마 같은 사람이야.’

오 년 전 환영 미로에서 겪었던 고통이 잠깐 머리를 지배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과거의 트라우마에 얽매일 생각이 없었다.

그때 비해 몇 단계는 더 성장했고, 전생의 트라우마 따위는 아빠의 따뜻한 위로로 극복했으니까 말이다.

내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자 황녀의 시선이 나를 흥미롭다는 삐딱하게 굽어 보았다.


“나도 나쁜 사람이 되어야겠지.”

내 앞에서 보이는 황녀의 그 모습은 결단코, 사람들에게 천사라고 불리던 그런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러니까 시엔, 우리는 반드시 다시 보게 될 거란다.”

그리고 아마도 그 사실을 지금은, 나밖에는 모르는 눈치였다.

그게 조금 거슬려서 나는 어푸푸,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황녀님 맘대로 하세요.”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나도 순순히 당하지는 않을 거니까. 우리 아빠하고 할머니가 있거든요.”

“그래? 그렇다면 나도 수가 있어. 세간에 네가 진짜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할 거니까. 네가 가짜 딸이어도, 그 사람들이 널 사랑해 줄까? ‘그’ 악명 높은 미르모드가?”

“…….”

그녀와 나의 시선이 중간에서 부딪쳤다.


 
그녀는 내 분홍빛 머리칼을 쓸어내리면서 낮게 속삭였다.


“내가 너를 아주 만만하게 보는 건 맞는데, 아가야. 방심을 좀 하더라도 너 하나쯤 여기서 쫓아내는 건 일도 아니야.”

하지만 황녀가 간과한 게 있다.


“아닐걸.”

나도 꽤 똑똑한 어린 애라고.

아니, 당신보다 더 오래 살았을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까불지 마.”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비록 나는 그녀 몸의 반의반만하지만, 저 여자만큼 살기를 내뿜지도 못하겠지만.


‘나도 힘 쎄거든?’

협박 못 해서 안 하는 거 아니고, 능력이 없어서 그녀를 가만히 놔두는 게 아니었다.

내 말에 황녀는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상당히 통쾌한 한 방이었다.


“너 정말 해 보자는 거구나.”

황녀는 뾰족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녀의 심기를 더욱 건드린 건 확실해 보였다.

***

그날은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녀가 돌아간 뒤, 나는 아네사 황녀가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내가 가짜 딸이라고 했던 그 말들을.


‘정말 나는 가짜 딸인 걸까?’

대체 무슨 근거로 내가 아빠의 딸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여린 아빠에게 ‘나 가짜 딸이야?’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을 하면 아빠는 울어 버릴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진짜건 가짜건 나를 내내 보살펴 온 아빠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아빠와 나 사이의 신뢰는 단단했다. 고작 아네사 황녀 따위가 균열을 내려 해봤자였다.

그래서 나는 제일 먼저, 이 가문에 나보다 오래 있었던 레온하르트에게 돌려서 묻기로 했다.


“있잖아, 레온하르트.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

“어? 그거는 내가…… 모르겠는데.”

레온하르트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천재, 너도 모르는 게 있어?”

“웅?”

“넌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안다고 생각했거든.”

그의 순수하면서도 명석한 눈동자를 보니 차마 ‘그렇진 않아.’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스스로를 합리화하기로 했다. 세상에 나를 천재라고 생각하는 사람 한 명 정도 있는 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아주 좋은 일이었다.


“……으응, 그렇지.”

나는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천재인 내가 딱 하나 모르는 게 있는데, 바로 내 출생의 비밀이거든.”

“허어…….”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 그가 뾰족한 수가 있다는 듯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같은 방법이 있어. 어때?”

그의 반짝반짝한 눈동자를 보니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된다.

아주 멋진 아이디어 뱅크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이야기지만…….


“괜찮은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레온하르트의 두 뺨이 발그레한 복숭아처럼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칭찬받았다……!”

‘뭐야, 나한테 칭찬받은 게 그렇게 신이 날 일인가?’

그렇다면 더 칭찬해 줄 수도 있었다. 칭찬은 돈이 들지 않으니까 말이다.

나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조그만 손으로 짝짝 박수를 치며 생각했다.


‘뭐, 레온이 기분 좋다니까 나도 조금 기쁘기는 해! 더 해 줘야지!’

몇 차례 칭찬 세례를 끝낸 뒤, 나는 레온하르트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이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벌써 바깥 하늘에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알려 준 방법대로 내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통실한 몸을 슬그머니 일으켰다.

……레온하르트가 알려 준 방법은, 그러니까.


“가, 가, 가, 가짜 딸이라니!”

델피아 미르모드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레온하르트나 나보다 더 오래 미르모드 가문에서 생활해 왔으니까 제대로 알려 줄 수 있을 거라는 판단하에서였다.

레온하르트로서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논거를 펼친 셈이었다.

그는 ‘델피아에게 물어봐야 하는 이유’에 몇 가지를 들었다. 루켈라 공작 부인이 가장 잘 알 테지만, 그녀는 거짓말과 술수에 능하다.

반면 델피아 미르모드는 자신이 꽤 오래 봐 왔는데, 사람이 매사에 솔직하고 강직하며 거짓말을 못 한다고 했다.

그러니 이런 질문을 묻는 데에는 제격일 거라면서 가슴을 활짝 펼쳤다.

물론 레온하르트의 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델피아의 저택으로 향했다. 델피아는 내가 왔다는 소식에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그리고 내 조그마한 몸을 꼭 끌어안은 다음 어화둥둥 둥기둥기해 주었다.

그녀의 애정 공세는 노을이 다 져 버릴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는 그녀의 품에서 나오는 걸 포기하고, 온몸이 간지럽도록 둥기둥기를 당했다.

한참 포옹을 한 다음에 델피아의 옆에 앉아서 근엄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나 혹시 가짜 딸이냐고 말이다.

그랬더니 델피아의 안색이 그보다 더 새하얘질 수 없을 만큼 하얘졌다. 그녀는 말을 연신 더듬기 시작했다.


“가, 가, 가짜 딸? 누가, 누, 누가 그런 망발을 해!”

지금 이 상황만 봐도 내 선택이 옳았다는 걸 알겠다.


‘델피아 언니는 거짓말을 못 하네.’

“그런 말이 있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줘.”

“그, 그러니까…… 어떤 놈이 말했느냔 말야, 그런 불경한 말을!”

“누가 말했는지는 안 중요해. 나 가짜여두 상처 안 받으니까아.”

“우리 아기, 너무 컸어…….”

지난 오 년 새 눈물이 많아진 델피아가 나를 보며 훌쩍댔다.


‘오 년 사이에 델피아가 더 작아진 거겠지!’

미르모드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던 무시무시한 델피아는 이미 내 포로가 된 지 오래였다. 그것도 되게 하찮은 포로여서, 내가 챙겨 주지 않으면 금세 눈시울을 붉히곤 했다.

나는 눈썹을 치켜뜨며 볼을 부풀렸다.


“나 그래두, 아빠랑 사람들 다 사랑해.”

델피아는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한숨을 파스스 내쉬었다. 한참 내 눈치를 보는 건 또 덤이었다.


“그, 그러니까 말이지…….”

델피아가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내가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한 범주 내에 있었다.

***

나는 델피아에게 내 출생과 관련되어 쉬쉬 되고 있던 모든 루머를 들었다.


‘진짜로 내가 가짜 딸이라는 소문을 냈네. 아빠가 나를 어딘가에서 주워 왔다는 그런 이야기 말이야. 이 비겁한 자식!’

결심했다.

아네사 황녀를 만나서, 그녀가 내 출생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알아내기로. 그리고 그녀가 내 출생의 비밀을 이용해 나를 어떤 방식으로 내쫓을 생각일지, 제대로 알아보기로 말이다.


‘단순히 계모가 되어서 짜증 난다는 태도가 아니었어. 반드시 나를 없애고 말겠다는 집념이 느껴졌다고. 그러니까 분명 의도가 있을 거야.’

아네사 황녀는 나를 종종 찾아왔다.

미르모드 저택 사람들이 모두 알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물론 내게는 그녀를 피하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네사 황녀가 정확히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도 고민을 해 봐야 했기 때문이다.

아네사 황녀는 그렇게 치밀한 타입이 아니었다. 애초에 어린이인 내 앞에서 가면을 내려놓을 정도이니, 긴장이 풀리면 더 허술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이 여자와 대담하면서 그녀가 나에게 보여 주는 정보를 모으는 일이었다.

아네사 황녀가 언제쯤 나를 가짜 딸이라고 몰아갈지, 내가 진짜로 가짜 딸인지, 만약 내가 가짜 딸이라면, 진짜 딸은 어디에 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본인은 자기가 내게 정보를 흘린다는 것도 모르는 눈치지만 말이야.’

아네사 황녀는 델피아에게도 잘했고, 루켈라 공작 부인에게도 꼬박꼬박 문안 인사를 가며 점수를 땄다.

다른 미르모드 수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동안 그녀의 행보를 잠자코 지켜만 보았다. 아네사 황녀 같은 사람이 본성을 숨기고 엎드리는 모습을 보는 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이거 드셔 보세요. 제가 만들었어요.”

……라며 산딸기 파이를 건네기도 했다.

심지어 델피아 언니 역시도 그녀가 건네주었다는 파이를 먹으며 이렇게 논평할 정도였다.


“아네사 황녀? 그 여자 뭐 썩 나쁜 여자는 아닌 것 같던데?”

황녀는 그만큼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천사처럼 행동했다. 내가 그녀의 실체에 대해서 따로 언급하지 않으니, 델피아까지도 아네사가 내게 잘해 주는 줄 알고 있었다.


‘아네사는 모든 미르모드 저택의 사람들에게 친절해.’

하지만 나에게만큼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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