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새엄마는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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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새엄마는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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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새엄마는 필요 없어
2023.06.23.
내 마음을 모를 아빠는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속삭였다.
“안 생길 거야. 아네사 황녀가 가끔 가문에 들르기는 할 텐데.”
“웅?”
“……혼담이라고들 할 테지만, 믿지 마. 그냥 금방 끝날 거니까, 새엄마라고 생각하지 마. 아무 관련 없는 여자가 될 거니까.”
이게 우리 아빠의 교육 방식이었다.
어른으로서, 나한테 정보를 공유해 주는 것.
아빠는 내가 아이라고 해서 무시하지 않았다.
내가 알아도 될 만한 정보들은 전부 다 나에게 오픈하고는 했다.
아빠에게서 전달받은 정보를 통해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아네사 황녀와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웅. 하지만 아빠.”
“응?”
“나 때문에, 아빠 인생 포기하지는 마.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는 뜻이 아니라……. 아빠는 이미 나 때문에 포기한 게 많으니까.”
새엄마는 아니라고 해도, 아빠도 취미도 조금 즐기고 친구도 만났으면 좋겠다.
내가 그 말을 하자마자 아빠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우리 딸이 벌써 그런 말도 하고…… 다 컸네.”
아빠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도 같았다.
큰일이다. 이러다 우리 마음 여린 아빠, 또 눈물 터지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말도 못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쩜 이렇게 다 커 버렸을까.”
아빠가 나를 빈틈없이 꼭 끌어안았다.
“우, 으으……!”
“우리 딸은 아빠의 유일한 자랑이야.”
내가 말도 못 할 정도로 꼬옥 끌어안는 바람에 열심히 바동바동거렸다.
“므, 므야, 숨 마켜-!”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빠의 까끌한 얼굴이 자꾸 내 뺨을 부벼 와서, 나는 결국 푸스스 웃어버리고 말았다.
***
평화로운 며칠이 지났다.
시엔은 여전히 상단에 들어오는 마법사들의 이력서를 확인했고, 몇 번의 면접을 거쳤다. 어린이 상단이라는 약점 때문인지 유명세에 비해 수준 높은 마법사의 지원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력서를 보는 일은 재미있었다.
그렇게 시엔이 상단 업무에 재미를 붙여 갈 즈음.
황궁에서 정식으로 마티어스 미르모드에게 혼담을 요청해 왔다.
혼약의 상대자는 제국제일미로 불리는, 황후의 딸 세리나 아네사 황녀였다.
그렇게 해서……. 황궁과 미르모드 가문의 결합은 전 제국을 강타할 정도로 커다란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미르모드 가문은 평온했다.
황녀의 마차가 미르모드 가문에 도착했을 때, 가문의 사람들은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황궁과 미르모드 가문이 척을 지고 있다고 한들 교류 정도는 있었으니까. 게다가 미르모드 가문에는 항상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일어나고는 했으니, 황궁과의 교류가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 분위기를 가만히 바라보던 황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루켈라 공작 부인을 만나 혼담에 관해 담판을 지을 차례였다.
그리고 공작 부인의 저택으로 들어서면서, 황녀는 이 저택이 상당히 묘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예를 들어 시녀들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부산스러웠다. 그러니까 마치 아이가 있는 저택처럼 말이다. 게다가 꿀빵이니 뭐니 하면서 시엔 미르모드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세간에는 루켈라 공작 부인이 시엔 미르모드에게 약소한 관심이 있다고들 했지.’
보통 세간에 미르모드 저택에 관한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는다. 철저히 통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엔 미르모드 상단이 창립되면서 미르모드 내부 사정 역시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 나갔다.
미르모드 가문의 허울뿐인 안주인, 루켈라 공작 부인이 시엔 미르모드에게 약소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어쩌면 공작 부인이 아이에게 관심 있단 말, 사실일 수도 있겠어. 분위기를 보아하니…….’
황녀는 영민했다. 당연히, 루켈라 공작 부인의 성미에 대해서는 그녀 역시 조사해 둔 바가 있었다.
그녀는 루켈라 공작 부인이 마련해 둔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이제 슬슬 자신의 목표를 위해 연기를 할 시간이었다.
“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지금은 칩거한다지만 한때는 그 기백이 호랑이 같았다더니 기세가 제법이었다. 황녀는 가만히 고개를 아래로 수그렸다가 다시 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루켈라 공작 부인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만나 보게 되는군요, 황녀.”
“네, 그럼은요.”
황녀는 제 입가에 볼우물이 팰 정도로 아름답게 웃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공작 부인이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혼담을 넣었더군.”
이렇게 나와야 미르모드지.
그들은 사교계의 화술에는 큰 재능이 없었다. 그건 사교계에서 깨나 굴렀다는 루켈라 공작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구태여 화술을 연마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그들에게 기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황녀는 꼬인 속을 숨기며 여전히 단아한 낯으로 말했다.
“저 역시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좋은 관계가 되고 싶어요. 미르모드와.”
눈앞의 상대를 가늠하듯, 공작 부인이 제 입매를 굳혔다.
황녀는 좋은 관계, 라고 하는 게 뭔지 모르는 나이가 아니다. 그러니 마티어스와 반드시 결혼을 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일 터.
순간 루켈라 공작 부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티어스와 진짜로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네.”
“그에게 아이가 있는데도? 황녀인 그대가 밑지고 들어갈 필요는, 없을 텐데.”
“어머나.”
황녀가 입가에 손을 대고 낮게 웃었다.
여전히 천사 같은 음성이었다.
“그 아이도 제가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은걸요?”
현재의 마티어스 미르모드에게 황녀는 최고의 선택지였다.
그러나 공작 부인 역시도 황녀를 의심하고 있었다.
세리나 아네사 황녀, 이 아름다운 여자가 수없이 많은 선택지 가운데 굳이 마티어스를 고른 이유가 무엇일까.
루켈라 공작 부인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마티어스는.”
“한 번 만나는 봤어요. 다정하시지는 않지만, 부군으로 나쁘다 생각하지는 않아요. 좋은 분이실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자잘하게 미소 짓는 아네사 황녀는, 세간에서 언급한 대로 선량한 천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저 아리따운 모습을 보니 혀끝이 썼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단 말이지.’
게다가 걱정스러운 건 또 있었다.
계모가 반드시 학대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 배로 낳은 자식과 아닌 자식 간의 차이를 두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지 않나.
눈앞의 황녀가 어떤 타입인지는 아직 모른다.
황궁에서만 자라 왔을 황녀가 어미 없이 자란 조그만 꿀빵이에게도 잘해 줄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라면 분명 아네사 황녀는 모두에게 잘해 줄 거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루켈라 공작 부인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타입.
특히나 꿀빵이에 한해서는 조금이라도 모험하고 싶지 않았다.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혼담을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진 않을 거요.”
“아마 아이 때문이겠죠.”
루켈라 공작 부인은 구태여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황녀가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시엔을 만나 봐도 될까요?”
사랑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어렸다. 그러나 공작부인은 힘 있게 고개를 저었다.
“꿀…… 아니, 새어미를 들이는 데에는 시엔의 의사를 물어보는 게 순리겠지.”
아네사 황녀는 잠깐 입술을 감쳐 물었다.
황궁에서 온 자신이 ‘만나고 싶다’라고 말한다면, 당연히 만나게 해 줄 줄 알았다.
그러나 상황은 그녀의 의도와는 사뭇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마티어스의 혼담에도 그 아이의 의사가 들어간다니, 생각보다 강적일 수도 있겠어.’
아무래도 시엔 미르모드가 이 집안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구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그럼 물어보고 알려 주세요.”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명성처럼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제 손으로 꺾어 줄 수 있었다.
***
나는 레온하르트, 그리고 애시드와 함께 대장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녀 언니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녀가 나를 찾아왔다나. 그러니까 그녀를 만나지 않으려면 빨리 숨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황녀를 만날 생각이었다.
아네사 황녀, 그녀의 의중이 궁금했으니까.
“안녕, 시엔 미르모드.”
마침내 황녀가 응접실 안으로 우아하게 들어섰다.
나는 황녀를 향해 고개를 까딱 숙였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녀의 입가에 그린듯한 미소가 팼다.
황녀는 제 권한을 들어 시녀를 모두 물린 다음, 나와 단둘이 남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잠자코 아네사 황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녀를 저지하지도 않고, 굳이 지지하지도 않은 채로.
이 천사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할까, 그게 조금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세간의 평가처럼 착한 사람일까? 아니면 미르모드에게는 나쁜 사람일까? 어쩐지 후자일 것 같은데 말이지.’
황녀는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내 맞은편에 앉은 그녀는 우리 단둘만 남은 것을 알게 되자마자 천사의 가면을 벗었다.
“너, 가브리엘레를 괴롭힐 때에 녹음 마도구를 썼다면서.”
‘난 가브리엘레를 괴롭힌 적 없는데.’
하지만 이미 멜로디아와 가브리엘레의 친구로서, 모든 소식을 듣고 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제 품에 있는 ‘녹음 무효화 마도구’를 꺼내 들어 보이며 배시시 웃었다.
“이제 네가, 더 이상 수작을 부리진 못할 거야.”
“수작 가튼 거 안 부려요.”
정말 ‘녹음용 마도구’ 같은 걸 품고 있지는 않았다.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그녀는 다리를 꼬며 나를 거만하게 응시했다.
“너, 가짜 딸이라고 들었어.”
“아니에요. 나 우리 아빠 딸인데요?”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럴 리가. 넌 빈민가의 딸이라던데.”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말문이 막힌 채로 황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가짜 딸이 아니라 진짜로 아빠 딸이었다. 하지만 저쪽에서는 내가 가짜라고 믿고 있는 눈치였다.
게다가 나를 아주 싫어하는 낯이었다.
미움을 받아 본 사람은 적어도 눈앞의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정도는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있었다.
세리나 아네사 황녀, 아빠의 부인이 되겠다고 찾아온 이 사람은 나를 싫어한다.
“상당히 신뢰도 높은 정보거든. 그러니까, 내가 미르모드 가문에 들어오게 된다면…….”
그녀는 우아한 손끝으로 찻잔을 쥐었다.
“너부터 검증을 해 봐야 할 것 같아, 시엔 미르모드. 네가 진짜인지, 아닌지.”
나는 황녀의 투명한 본심을 마주했다.
나로서는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황녀는 멜로디아의 열화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멜로디아처럼 완벽하고 우미하게, 악역 상대방에게까지 제 본심을 숨기며 선량한 행세를 하지는 못했다.
그녀의 착한 척하는 가면은 내 앞에선 깨져 나갔다.
‘애초에 어린아이라고 가면조차 안 쓰는 게 우스워. 어린아이니까 으름장을 놓으면 바로 고개를 조아릴 거라고 생각했나 보지.’
하지만 나는 평범한 열 살짜리 꼬맹이가 아니었다.
아네사 황녀가 가면을 벗어 던진다면, 이쪽에서도 정당하게 대비하면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