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상단 등록하러 갔어요 (55/77)


55화. 상단 등록하러 갔어요
2023.06.09.


할머니는 나의 직계 혈족인 만큼, 직접 후견인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나는 잽싸게 달려가 할머니의 팔에 달랑달랑, 아이처럼 매달렸다.


“함미!”

“우리 꿀빵이가…….”

“하, 나 참.”

그 순간 델피아가 부채를 살랑살랑 부치며 나타났다. 매우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나한테는 안긴 적도 있거든요.”

“어디서 개가 짖는구나.”

할머니와 델피아 간의 신경전을 보며 나는 눈만 도륵도륵 굴렸다.

오늘의 작전을 위해서는, 둘이 싸우면 안 되었다. 하지만 둘이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한 이상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그, 그러니까아!”

“응?”

“무슨 일이냐, 꿀빵아?”

델피아의 표정은 흐물흐물해졌고 할머니는 몹시 인자해졌다.

나는 헛기침을 큼큼 한 다음 눈을 데굴 굴리며 입을 열었다.


“두, 둘 다 뽀뽀해 줄 테니까 싸우지 마아…….”

사나운 개처럼 서로를 응시하던 둘이 온순해졌다.

그들은 정말로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갑자기 순식간에 말이 없어진 것일까? 뽀뽀해 준다는 건 싫은가? 싶어서 내가 순간 당황했을 때였다.


“세상에, 뽀뽀라니!”

델피아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갑자기 춤을 췄다.


“우리 아기가 나한테 뽀뽀를! 주인님이 델피아에게 뽀뽀를 주셨어요!”

다 큰 어른이 아기들이나 추는 엉덩이춤을 마음껏 추는 것도, 너무 좋아해 주는 것도 살짝 민망해서 할머니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그래도 할머니가 조금 더 어른이니까, 다르겠지 싶어서!

그런데…….


“자, 마도구 가져오거라. 마도구. 사진도 찍고, 초상화도 그려야지.”

……할머니는 시녀들을 닦달해 이 상황을 기념하는 사진과 그림을 만들겠다고 공표하는 중이었다.

나는 중간에서 큰 한숨을 내쉬었다.

어른들이 어른스럽지 못하니, 꼬마로 살기도 정말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른들의 철없음에 휘둘려서는 곤란한 법.

나는 발가락 끝에 꾸욱 힘을 준 다음 할머니와 델피아에게 다가갔다.


“자아, 볼!”

“으응?”

 

 
쪽, 쪽!

나는 둘의 볼에 빠르게 뽀뽀해 준 다음 토끼 모양 가방을 멨다.


“뽀뽀해 줘쓰니까, 이제 다녀 오께.”

오늘, 나는 황궁에 간다.

행정관이 오늘 오후까지 후견인과 함께 오라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마도구 상단을 폐업 처분하겠다고 했다.


“조심해서 다녀 오거라.”

“걱정이야.”

“꿀빵이 네가 말한 대로 준비는 다 해 놨으니 걱정은 말거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녜! 다녀오께요!”

오늘 나는 후견인과 함께 황궁으로 가지는 않는다.

나 혼자서 갈 예정이었다.

***

몇 시간 뒤, 나는 황궁 안으로 총총 들어섰다.

황궁 앞까지는 미르모드 가문의 마차를 탔고, 황궁 내부로 갈 때는 기사님이 태워 주는 말을 타고 이동했다.


“귀여운 레이디, 가려는 곳이 어디이신가요?”

“사업 관청이에요!”

“자, 타시지요.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기사 아저씨는 나를 무릎 위에 올린 다음 느릿느릿 말을 몰았다.

황궁 내라서 그런지 빠르게 달리지 못하는 말, 그리고 말의 갈기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궁은 정감이 안 간다.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자주 오게 될 테니까 적응해야지.

오늘 내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까? 같은, 이런저런 생각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사 아저씨들이 나를 말에서 내려 주었다.


“도착했습니다, 레이디.”

조그만 몸으로 말에서 힘겹게 내린 다음, 나는 앞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일주일을 기다려, 마침내 이곳 [제국 사업 관청] 앞에 도착했다.

나는 비장하게 간판을 올려다보면서 조그만 발걸음을 뗐다.

뾱, 뾱.

아빠가 사 준 뾱뾱이 신발의 소음이 바닥을 울렸다.

문을 넘어 복도로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이 내 쪽에 닿아 왔다. 얼굴이 따끔할 정도로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웬 꼬마가……?”

“저 귀여운 분홍 머리 누, 누구야!”

아무튼 나는 힘차게 걸었다.

몇몇 행정관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 시야는 오직, [창업·폐업 인허가과]에 못 박혀 있을 뿐이니까.

그리고 [제국 사업청] 소속 [창업·폐업 인허가과]는 2층 맨 끝 방이었다.

뾱뾱뾱뾱뾱.

나는 그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 과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녀하세요.”

“들어오십시오.”

문이 스르륵, 하고 열렸다.

큰 과 안에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창업 신청팀]이라고 적혀 있는 팻말 쪽으로 이동했다.

뾱, 뾱, 뾱.

천천히 걸어 담당 행정관 쪽으로 향하자, 권태로운 표정을 한 채 서류를 훑던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뭐지?”

“신청하러 와써요.”

나는 해맑게 웃으며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그리고 내 곁에 그 어떤 사람도 없는 것을 보고 권태로운 표정을 위협적으로 바꾸었다.


“꼬마야.”

“녜?”

“이름.”

나는 힘차게 내 이름을 대답했다.

이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시엔 미르모드임니다!”

상황은 의도대로 흘러갔다.

커다랗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아닌 척 이쪽을 주목한 것이다.

이 모든 건 나를 함정에 빠트리려 한 사람이 언론 플레이를 착실하게 해 준 덕분이었다.

부정적인 관심이기는 했지만, 사람들도 내 상단이 정말로 폐업될지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오…….”

순간 흥미진진하다는 시선이 이쪽에 꽂혔다.

그리고 행정관의 표정이 불쑥 일그러졌다.

나는 그의 불편하다는 듯한 표정과, 굳이 가릴 생각도 하지 않는 책상 위의 발신인 ‘신전’이 적힌 봉투를 보고 깨달았다.


“후견인 안 데려왔나?”

‘오, 이 아저씨……. 내 사업 폐업 시키라고, 신전에서 뇌물 먹었구나?’

내 예감은 아마도 확실히 들어맞은 모양이었다.

눈앞의 행정관, 조르주는 내 이름을 듣자마자 한결 더 냉막해졌다.

마치 내가 나타나면 문전박대하라는 신호라도 들은 사람처럼 말이다.


“난 바쁜 사람이다. 쓸데없는 말 할 거면 가라.”

“……녜? 그치마안.”

조르주가 제 이름으로 보낸 독촉장을 볼 때마다 보아하니 이 행정관도 돈을 좀 먹은 모양이다. 아니면 멜로디아의 화술에 감화되었거나, 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마주하니 더했다.

뭐가 되었든 나한테 호의적인 인상은 아닐 거라고 예상했던 게 무색하게도 정말이지 나를 적대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면서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쓸데엄는 말, 안니야!”

나 시엔 미르모드.

뇌물 먹고 색안경 쓰는 사람한테 존댓말 해 줄 정도로 착한 사람 아니다.

조르주는 내가 반말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쓸데없이 후견인 신청이라도 하려 하느냐?”

“쓸데있게 후견인 신청, 하꺼야!”

나는 그를 향해 당당하게 후견인 목록이 적혀 있는 용지를 내밀었다.


“후견인하고 같이 온 게 아니면 무효인 거 아나?”

“같이 완는데……?”

내 반문에 그는 문가를 힐끔거렸다.

하지만 문가에는 여전히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살짝 불안해 보였던 그는 겨우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몰아세웠다.


“거짓말하는 꼬맹이는 못 쓴다. 싹수가 누런 게지.”

“거짓말 아닝데…….”

“그럼 뭔데. 어휴, 꼬맹이 상단까지 처리해야 한다니. 귀찮네.”

“후견인 편지두 이써!”

후견인이 직접 적어 준 편지까지 내밀었지만, 그는 받아 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 통통한 팔을 힐끔거리더니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그래…… 뭐, 후견인을 찾기는 찾은 모양이지? 역시 너도 미르모드이긴 한가 보구나. 하지만 이미 끝났단다.”

“……왜?”

“방금 막 황궁에서 법이 하나 통과됐거든.”

그는 나를 향해 빳빳한 양피지를 보여 주었다.

——————————————————————————————————————————

[어린이 상단 ‘개·휴·폐업’ 개정안 통과]

- 어린이가 주인인 상단은 개업 신고 불가

- 노동 착취 문제로 인한 일이니 개업 신고하는 어린이들에게 재차 안내할 것

——————————————————————————————————————————


“이게 모냐?”

나는 양피지를 받아 들고 읽으며 볼을 부풀렸다.

그는 이제야 내 반말을 눈치챈 듯 미간을 좁히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감히 반말을 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나는 양피지를 흔들며 그를 압박하듯 말했다.


“이게 모냐구.”

그가 화가 난 듯 붉으락푸르락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낮게 속삭였다.


“가문에서 버려진 주제에 버릇없긴.”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별로 타격감은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를 향해 턱짓했다.


“설명해 조.”

“……으휴, 됐다. 어린이 상단은 개정안에 따라 애초에 설립이 불가능한 것으로 바뀌었어.”

“……우웅.”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어린이들의 상단은 노동 착취 및 탈세 용도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으니 개업을 제한하겠다는 뜻이었다.

참 좋은 법안이었다.

내가 후견인을 구할까 봐 이 법까지 개정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나가. 너한테 줄 도움 따위는 없단다.”

그는 슬슬 막 나가기 시작한 눈치였다.

그럴 만도 했다.

미르모드 가문은 무섭지만, 미르모드에서 버린 듯한 어린 5살짜리 꼬마는 무섭지 않겠지.

게다가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신전의 봉투를 보니 거하게 해 먹은 모양인데.

내가 보이기나 하겠어?


“……휴우.”

나는 시무룩한 척 볼을 조심조심 부풀렸다.

그러자 그가 내 몸을 밀쳐내려고 손을 들었다.


“이제 나가라.”

“……안 나가. 할 말, 더 이써.”

“무슨-.”

그때 사업부의 문이 활짝 젖혀졌다.

그리고 나는 뒤를 돌아보면서 활짝 웃었다.

그 순간 여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이 자리에 명징하게 울려 퍼졌다.


“나가긴 뭘 나가?”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빠르게 이쪽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모든 이가 사용하는 약물인 ‘악마의 풀’ 제조자,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약사이자 롤로 백작가의 대부인인 멜랑 롤로.

내 후견인을 자처한 그녀가 타이밍 좋게 당도한 것이다.


“내가 후견인이 되기로 했는데 말이다. 뭐가 마감됐다고?”

그녀는 내 등 뒤에 든든히 서서 가엾게도 쭈그러진 행정관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누, 누구시죠.”

“내가 누구인지 너 따위한테 하나하나 보고를 해야 하나?”

딱 봐도 우아한 귀부인의 포스가 풍기는 모습에 행정관은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는 전형적으로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타입인 모양이었다.


“그, 일단 후견인 등록은 불가합니다.”

“말단 행정관 따위랑은 말 섞을 생각 없다. 상사 불러.”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가 파티션 너머에 앉아 졸던 과장을 넌지시 불렀다.


“……과장님, 말씀해 주시죠. 그, 그렇죠 과장님?”

그는 과장 자리에 앉은 제 상사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과장이 몸을 일으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실례지만 이미 후견인 등록은 마감되었습니다. 위대하신 약사이자 백작가의 대모이신, 멜랑 님이시군요. 맞습니다. 황궁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입니다. 멜랑 님의 지시로 수정할 수 없는 문제라는 뜻이죠.”

둘 다 바로 찌그러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행정관이 쪼그라든 어깨를 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꼬맹아. 아쉽지만 폐업이란다.”

“아닐걸?”

나는 활짝 웃으며 다시 문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문이 활짝 열리고 무수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 왔다. 하나같이 또각거리는 구둣발 소리였다.

그들은 내 계획대로, 사람들이 이쪽을 주목하고 있던 차에 짠 하고 도착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숨기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멜랑만큼이나, 아니 그녀보다도 더 포스 넘치는 귀부인들이 내 근처로 빽빽하게 몰려들었다.


“누가 우리 아기를 괴롭혀.”

“뭐가 마감됐다고?”

“황후 폐하를 이쪽으로 초청할까?”

“별 육수거리도 안 되어 보이는 게 감히 고개를 뻣뻣이 들고 설쳐?”

내 편이 되어 줄 든든한 조력자!

열 명의 환불 원정대, 아니 귀부인들이 나타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