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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악녀라고 불렸던 여자 (54/77)


54화. 악녀라고 불렸던 여자
2023.06.06.


한편, 메르시 지역. 마티어스는 마계와 이 세계의 게이트를 열었다.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물이 보였다.

악셀 미르모드라면 미친 듯이 마물에게 질주할 것이다. 악셀을 따르는, 살육을 즐기는 광기 어린 부대 역시도.

하지만 그들은 그 마물이 끝이라는 건 모를 거다.

마물이 모두 죽는 순간, 마계의 게이트가 열릴 테니까.

그리고 악셀 미르모드는 그 안으로 끌려 들어가겠지.

마계에서 살아남는다 한들, 향후 십 년 정도는 돌아오지 못하고 진창에 처박혀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이능력을 상실한 상태로 돌아와 봤자 쉬이 짓밟을 수 있었다.

마티어스는 비죽이 웃으며 턱을 괴었다.

잔인한 손속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포대기에 싸인 자그마한 꼬마, 시엔이 떠올랐다.

지금처럼 꼬물꼬물 곧잘 말하는 게 아니라, 오 년 전.

쉽게 울지도 못해 숨죽이던 그 작은 아기를.

그리고 제 품에 안긴 시엔을 조롱하던 악셀 미르모드를.


‘꼴같잖은 어린 거 그냥 버리는 게 어때?’

‘입 닥쳐.’

‘그건 저주의 핏줄이야. 가까이하면 죽는다고.’

악셀 미르모드를 짓밟고 싶었지만, 재판에서 갓 돌아온 그는 시엔을 건사하는 데에만 골몰해야 했다.

그건 재판에서 마녀로 몰려 처형당했던 그 여자의 부탁 때문이었다.

제국에 악마를 소환했다는 오명을 쓰고 악녀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여자.

시엔의 엄마, 유엘라.

이제는 그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모르지만, 마티어스만큼은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마티어스는 분홍색 머리칼에 녹색 눈동자가 시엔과 똑같았던 유엘라의 마지막 한 마디를 떠올렸다.

이 아이의 이름은 시엔이라고.

자신이 죽더라도 부디 선하고 다정한 아이로 건강하게 키워 달라고 했던, 그 말을.

그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마티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시엔에게 큰 애정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자신을 똘망똘망하게 바라보는, 시엔의 순진무구한 녹색 눈동자를 마주 본 순간, 그는 정해진 운명에 이끌리듯이 후계 작위를 버렸다.

자신을 소환해 모욕하고 유엘라를 마녀로 몬 재판장을 죽인 뒤. 그는 시엔의 행복한 삶을 위해 후계자라는 온전한 제 자리를 버리고 떠났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그는 유엘라가 했던 말을 내내 곱씹고 있었다.

유엘라와 마티어스를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민 사람들이 있다고, 억울하다고 했던…… 기나긴 이야기들.

그 이야기를 떠올린 순간, 마티어스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는 복수하기 위해 오 년을 숨죽여 왔고, 이제는 진짜로 칼을 꺼내 들 때였다.

마티어스는 이를 악문 채로 나직하게 물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

악셀 미르모드를 마계의 구덩이로 처박을 날이 머지않았다. 그의 서늘한 표정을 본 측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한데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뭐지?”

더 중요한 거라면 딱 하나뿐일 텐데.


“시엔 님께서 상단을 설립하셨답니다.”

그래, 시엔 말이다.


“뭐?”

그 다섯 살짜리, 시골 꼬마가?

내 사랑스러운 딸이?


“혹시 누가 시엔을 이용하려 드는 건가.”

뜻밖에 들린 시엔의 소식에 의아해진 것도 잠시.


“예. 게다가, 좀 좋지 않은 일도 발생한 것 같습니다만…….”

마티어스의 귓가에 측근이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제 딸이 고사리손으로 만들어 낸 상단이 함정에 빠진 것이 틀림없었다.

***



“상단을 후견해 주실, 후견인이 필요합니다. 부친이신 마티어스 님은 안 되고, 직계 가족은 어렵다고들 하더군요.”

“후견인……?”

내 질문에 데드리 언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래 유명무실한 제도인데 황궁에 익명으로 신고가 빗발쳤다니까요. 5살짜리가 상단을 만드는 게 말이 되냐며, 아동 착취가 아니냐고요.”

황궁 대신은 미르모드 가문에 들어서는 게 무서운지 직접 오지 않고 서면으로 통지했다. 나는 허공에서 나풀거리는 통지서를 바라보며 푸우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 안에 후견인이 없으면 폐업을 당하게 돼요.”

“헉.”

“히익.”

탄식은 내 쪽에서 터져 나온 게 아니다.

나는 그냥 아주 딱딱한 감자떡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옆얼굴을 긁적거렸을 뿐이다.


“후움.”

“아동 부당 노동 착취, 라고 해서요. 실제로 아동 이름으로 상단을 경영하는 척, 탈세를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충부니 조은 법이야.”

나한테는 안 좋지만.

어쨌거나 그보다 중요한 건 누군가 날 겨냥해서 함정을 팠다는 것이다.

악셀 미르모드는 지금 소요 사태 진정으로 바쁘다니까 범인은 대강 좁혀진다.

나는 우직하게 서 있던 성기사, 테드 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테드.”

“네?”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짐짓 순진하게 물었다.


“이짜나, 가브리엘레가 나 시로하지?”

“아…….”

“신전 사람들두, 우리 가문 시러하지?”

테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그 말만으로도 충분히 그 의사가 전달되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테드가 모가 미아내? 갠차나.”

‘나는 연대 책임 따위는 아주 딱 질색인 사람이거든.’

잘 생각해 보자. 이 음모를 꾸민 사람은 아마도 신전 쪽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날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가브리엘레. 그리고 그녀의 뒤에 있는 뒷배일 멜로디아 성녀.

내일인가, 그녀가 성녀로 즉위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권력을 가지게 된 멜로디아가 앞으로 어떻게 나서게 될지가 의문이었다.


‘성녀로 즉위하는 시기 즈음해서, 미르모드를 건드리려나?’

나는 조그만 손으로 턱을 괴었다.

내가 침묵하자 걱정스러워하는 시녀 언니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기 시작했다.


“후견인으로는 어떤 분을……. 시일이 늦었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어렵겠지만 저희 가문에서 나서 볼깝쇼?”

“너희 가문이면 나쁘지 않지. 정보 길드와도 제법 연이 있으니까.”

그 말에 시녀 언니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의 말마따나 프트 가문에서 나서 주는 건 분명히 좋은 일이지만 거절할 생각이었다.


“안니. 갠차나.”

내 단호한 말에 시녀 언니들이 일동 동작을 멈췄다.

그녀들은 이제 내가 콩을 팥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에 다다라 있었다. 그들의 크리스탈처럼 반짝이는 눈빛이 나를 응시했다.


“방법이…… 있으신 건가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나는 조그만 앞니를 톡 내밀고 토끼처럼 배시시 웃었다.


“방법, 이써.”

내 말에 시녀들이 입을 떡 벌렸다.

뭐지, 마치 믿고 있었다는 듯한 저 표정은!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움찔.

나는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생각했다.


‘혹시 우리 생각이 공유되는 건 아니겠지?’

그런 부질 없는 생각을 잠깐 하는 사이 그들의 반짝거리는 시선이 내게 부딪쳐 왔다.

한결 더 부담스러워서 몸을 움찔 떨었을 즈음 테드가 조심스럽게 나를 향해 물었다.


“그, 어떤 방법인데요?”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냥 차즈면 대. 후견인.”

“생각해 둔 분이 있으세요? 혹시 아는 사교계 명사라거나.”

“힛, 그냥……. 강한 사라미 필요하겐네, 그치?”

좋은 생각이 났다.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는 악당들도 놀랄 만한, 좋은 생각이.


‘잘만 하면 우리 상단 홍보도 되겠는걸?’

항상 생각하는 건데, 핀치에 몰려 있을 때가 제일 최고의 기회다.

역경을 견딘 다음 타는 상승 기류는 인력으로는 쉽게 막을 수 없는 법이다.

나는 시무룩해진 시녀 언니들의, 여전히 건장한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아이고, 어깨가 너무 딱딱해서 손이 아프다.

***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나는 여전히 미르모드 가문의 저택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시녀 언니들이랑 토끼잡이 놀이를 하고, 레온하르트와 할머니와 함께 독약학 수업도 듣고 -여전히 내 몸에는 마나가 없다는 절망적인 말만 가득했다- 애시드와 테드랑 같이 신성력에 대해 배웠다.

또, 델피아 언니의 부비부비를 당했지…….

그러던 와중에도 황궁에서는 끊임없이 독촉장이 날아오고 있었다.

당장 후견인을 등록하지 않으면 상단의 사업자를 등록하라는 골자의 편지였다.

그 편지가 몇 번 날아온 직후, 이틀 전부터는 신문에 공격적인 메세지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미르모드 가문도, 나도 독촉장을 가장한 폐업 협박에 잠자코 있었던 탓일까.

사람들은 내가 이제 미르모드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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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면] 시엔 미르모드 상단, 이대로 침몰하나?

미르모드 가문의 시엔 미르모드(5세) 양이 야심차게 출범시킨 마도구 상단이 시작도 전에 좌초 위기를 맞았다.

상단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성인 후견인을 찾지 못한 것.

시엔 미르모드 양은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탓에 사교계는 물론 가문의 직계 혈족과도 깊은 인연이 닿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후견인의 조건은 상당히 까다롭다.

상단주가 될 어린이와 동성이며, 직계 혈족이 아닌 데다, 2명 이상에, 권위가 있는 여성.

부친인 마티어스 미르모드 역시 사교계에서 두문불출하는 터라 후견인을 구하는 데에 상당한 위기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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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조차 눈이 튀어나올 만큼 상당히 상세한 소식이었다.

이 정도 수위에도 미르모드 가문에서 별말이 없자, 미르모드 가문의 눈치를 보던 가십지들도 슬그머니 ‘시엔 상단 때리기’에 동참했다.

덕분에 내 마도구 상단에 취업 지원한 마법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머무는 미르모드 저택의 분위기는 아주 고요하고 조용했다.

딱 하나, 아빠의 안절부절못하는 편지만 도착했을 뿐.

[시엔, 아빠가 후견인을 몇 명 보낼게. 아빠가 아는 사람 있어. 상단은 그런데 왜 설립한 거야? 혹시 누가 상단 설립하자고 했을까? 얼른 아빠한테 연락해. 아니면 아빠가 지금 당장 갈까?]

엄청나게 휘갈겨 써서 눈을 가늘게 뜨고 봤다.


“노안 올 거 가타.”

횡설수설하는 아빠의 편지를 해독하고, 아니, 읽고 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답장 보내실 거지요, 시엔 님?”

“후견인도 어서 구하셔야 할 텐데요…….”

“걱정 마. 시엔 님은 계획이 다 있으셔.”

옆에서 시녀 언니들이 입을 모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웅, 마자. 그리구 편지는 보내꾸야.”

나는 아빠에게 편지를 열심히 썼다. 소중한 마음을 담아서.

[압빠 안 보고 시퍼. 오지 마! 저리 가아!]

이렇게 쓰고 시녀 언니들한테 검사를 받았더니 그들의 안색이 새벽빛처럼 희붐해졌다. 나는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이렇게 쓰면…….”

“경을 칠 겁니다요.”

“메르시 지역이 먼지만 남을지도 모릅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으응, 아라써…….”

나는 예쁘게 꾸미고 팔랑팔랑 몸을 움직였다. 내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머리칼이 나풀나풀 휘날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아련하게 보고 있는 눈길이 있었다.


“꿀빵아.”

……바로 내 계획의 일환인 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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