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저 사람들이 왜 여기에 있어 (52/77)


52화. 저 사람들이 왜 여기에 있어
2023.05.30.


아빠가 휴가를 갔다.

남은 시간 동안, 나는 악독한 악셀 미르모드 녀석을 처단하는 데에 골몰하기로 했다.

제일 먼저 매일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힘을 길렀다.

근육에는 통달한 인재인 시녀 언니들이 나를 도와주었다.


‘힘을 길러야지!’

나는 시녀 언니들을 보며 열심히 동작을 따라 했다. 물론 팔이 짧아서 시녀 언니들이 하는 것만큼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알통이 쪼끔 나온 거 가태!”

“사, 사흘 정도 했는데……요?”

내 말랑한 팔을 매만지던 벤치 언니가 난감하다는 듯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살 뿐인……. 커헉!”

“헛소리. 아이고, 우리 아기님. 근육 엄청나십니다!”

“그래?”

나는 데드리 언니와 벤치 언니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할머니의 독약 아카데미를 수강했다.


“아이고, 우리 꿀빵이.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웅……?”

“어서 이 할미 무릎에 앉아 보거라.”

“……녜.”

나는 할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 독약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에는 독초가 많구나.’

악셀 미르모드에게 사용할 독초가 많다.

나는 음흉한 미소를 숨기며 할머니의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사람의 정신을 혼란하게 만든다는 세르베이 꽃 이야기를 듣자마자 무릎을 탁 쳤다.


‘악당이 되려면 독초도 잘 다뤄야지, 그럼.’

할머니의 목이 쉴 정도로 열정적인 수업 몇 시간 뒤. 슬슬 잠이 오는 바람에 나는 할머니의 무릎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꿀빵아, 이대로 갈 것은 아니지?”

할머니의 표정이 매우 아쉬워 보였다.

나는 주춤거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안니야. 안 가!”

“아이고오. 다행이구나! 그래!”

할머니는 못 보던 새에 조금, 아니, 아주 많이, 팔불출이 되어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안타깝다는 듯이 내 통통하고 탱글거리는 알새우 같은 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말라서야.”

살도 찌고, 심지어 근육도 펌핑된 거 같은데 어떻게 저런 말이 나오는지 의문이었다.

나는 가자미눈을 가늘게 뜨고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할머니가 안쓰럽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밥 먹자.”

“……?”

밥 먹자는 말을 저렇게 무서운 눈을 하고 하다니, 역시 본받을 만한 분이었다.

***

몇 시간 뒤.

내 저택으로 돌아온 다음, 나는 배불뚝이가 된 배를 통통 두드렸다. 할머니는 온갖 산해진미를 차려 놓은 다음, 다 못 먹으면 안 된다고 엄포까지 놓았다.

애피타이저만 12개에 본 코스요리는 고기, 생선 할 거 없이 수십 개씩 나왔다. 배부르다고 하면 소화가 잘되는 매실차를 주고 또 먹였다.

더 이상 못 먹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내 볼을 쓰다듬으며 음산하게 말했다.


‘내일 또 오라고 했지…….’

흡사 과자 집의 마녀 같은 목소리였다.


‘내일은 할머니한테 가지 말고 쉬어야겠어.’

왠지 속이 더부룩하고, 팔도 미쉐린 타이어처럼 통통해진 것 같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나 때지 댈 거 가타…….”

데드리 언니가 내 팔을 문질러 주면서 작게 속삭였다.


“……많이 드시긴 하셨어요.”

“웅…….”

나는 머리에 살짝 딱콩을 때려 정신을 차렸다. 이마에 붉은 기운이 남아 벤치 언니가 안쓰럽다는 듯이 신음을 삼켰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보다, 우리 수목원 땅, 잘 파구 이찌?”

“그럼은요!”

“저희 프레스 가문의 명예로운 근육 돼지들이 열심히 가서 땅 파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벤치 언니는 자기의 알통을 과시했다. 믿음직스러운 근육을 보며 나는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아빠가 없는 휴가 기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쭉 평온하게…… 지나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바로 그때, 문제가 터졌다.

***



“그 소식 들으셨어요?”

“웅?”

나는 열심히 고사리손을 쥐고 마도구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마도구를 통해 악셀의 귀환 일정을 미루는 방법이 필요했다.

악셀이 귀환하기까지, 앞으로 대략 2주도 남지 않은 수준이었다.

조그만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바로 그때였다.


“급한 일이 있습니다, 시엔 님.”

테드가 머리를 휘날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테드를 오래 본 적은 없지만, 저 성기사가 저렇게까지 급하게 들어오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레온하르트 님의 전언입니다. 악셀 미르모드 님의 귀환 일정이 늦어졌다고, 하십니다.”

나는 커다란 눈을 더욱 커다랗게 떴다.

아직 내 실력을 완전히 기르지도 못한 데다 아빠를 완전히 악당으로 만들지도 못한 상황에서, 뜻밖의 엄청난 행운이 일어났다.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턱짓했다.


“왜 늦는대?”

“그게, 악셀 님께서 담당하시는 메르시 지역에 큰 소요가 일어났대요. 도저히 이곳을 방문할 수 없을 정도라고요.”

메르시 지역이라면 아빠가 봉사 간 곳이었다.

설마하니 우리 아빠가 소요에 휘말려서 죽은 거 아닌가, 하는 극단적인 걱정까지도 들었다.

순간적으로 덜컥 겁이 난 나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테드를 바라보았다.


“우리, 아, 아빠는……? 어떻게 돼써?”

“마티어스 미르모드 님은…….”

테드가 침묵했다.


‘왜 침묵하는 건데.’

한결 불안해진 내 곁에서 데드리 언니가 연신 호들갑을 떨었다.


“메르시 지역에서, 마티어스 님이 무슨 짓을 저질렀냐고요? 그, 그건.”

“너무 끔찍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데드리.”

“사, 살아 있게찌……?”

하나뿐인 아빠가 죽었다는 상상만 해도 벌써 눈시울이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데드리 언니는 정말 생전 처음 듣는 생소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이 나를 보며 말했다.


“예?”

“우, 우리 아빠.”

“……그, 당연히 살아 계실 걸요?”

“그런 걸 걱정하시다니……. 차라리 저의 근육을 걱정해 주십시오.”

시녀 언니들이 옆에서 열심히 말해 준다 한들, 나는 매우 걱정스러웠다.


“……우리 압빠 무사히 잘 있는지 봐야게써…….”

근심 걱정으로 손을 달달 떨고 있던 그때, 테드가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마티어스 님께서는 무사히 살아 계시고, 곧 돌아오신답니다.”

“끄래? 그, 그럼 다시 돌아오면 맴매해야지!”

살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근엄하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수목원 흙 파내기 사업은 진척이 있는 거시냐.”

오늘 일로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소요가 일어날 지역에 휴가를 갈 정도로 아빠는 너무 자유로운 영혼이고, 착하다.

그러니까 내가 얼른 금괴 모아서 우리 아빠를 지켜 줄 기사나 용병을 고용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연약한 아빠는 깨꼬닥, 하고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얼른 돈부터 벌어야 했다.

나는 시녀 언니를 독촉하듯이 반짝반짝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아기님이 진척이라는 말도 다 아시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닝데!”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곁에 있던 벤치 언니가 입을 열었다.


“아, 거의 다 팠답니다. 내일쯤이면 땅끝에 다다를 것 같다고 하더군요. 삽질하는 녀석들이, 삽 끝에 뭐가 걸리는 것 같다고 하던데요.”

“내일 아침, 수목원에 가 보자꾸나.”

악셀은 조금 더 늦게 온다고 하고, 아빠도 아직 살아 있고, 내일이면 나는 재벌이다.

시간을 번 덕분에 충분히 악셀 녀석과 붙어 볼 만하다는 뜻이었다.

***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나는 치카치카 열심히 양치를 하고 혼자 힘으로 꼬물꼬물 양말도 신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멋지게 양 갈래머리도 하고 위엄 넘치도록 금이 차르르 박혀 있는 옷도 입었다.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거울을 보니 그 안에는…….


“내가 왕이 될 상이느냐?”

“아이고, 그렇습니다요.”

아주 멋진 나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흡족하게 내 양 갈래머리를 휙 하고 날리며 웃었다.


“그럼 모두들, 가쟈.”

나의 충직한 부하를 자처하는 시녀 언니들이 내 양옆에 섰다.


“예이!”

성기사, 테드 역시도 내 옆에 붙었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나는 흡족하게 내 측근들을 보며 턱을 힘껏 치켜세웠다.

오늘은 흙을 삽으로 열심히 판 다음 금을 줍는 날이니까 금박이 가득한 옷을 입었다. 의장까지 화려하게 챙기고 나니, 왠지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릴 것만 같은 행복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으쓱 올리면서 시녀 언니들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



“이, 이게 모지?”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수목원 입구에서 고개를 쭉 빼고 내부를 둘러 보았다.

수목원은 과거와 달리 완벽한 허허벌판이었다. 장미목은 모두 베어져 있었다.

물론 원래도 목재를 베어 내려 하긴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될 줄은 몰랐다.

근육 시녀 언니가 사태를 제대로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 그, 그러게요? 왜 이렇게 빠르게 진척됐지?”

“전부 다 대써.”

용역을 직접 고용한 언니도 모르는 눈치라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왜인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나는 눈을 거듭 깜빡였다.

내 당황스러운 표정을 본 시녀 언니들이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무슨……. 이봐, 벤치. 어떻게 된 거냐?”

“가문에서 명예로운 근육 돼지 녀석들 많이 데려온 거 같긴 한데…….”

“그러긴 했는데 이건……. 마, 마법 같은데?”

만에 하나…….


‘설마 여기에 금괴가 있다는 걸 알고 누군가 훔쳐 가려고 온 건가?’

확실히 그럴 만도 했다.

어둠의 경매장에서 내가 보인 행태가 다소 수상쩍긴 했겠지.


“그 용역 놈들은 어디로 간 거야?”

“그러게. 먹는 걸 좋아하는 놈들에 수다 떠는 것도 좋아해서,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

게다가 시녀 언니의 가문에서 보낸 근육 인력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만나게 되면 내 금을 파내 줘서 고맙다고 해 주고, 금을 조금 선물로 나눠 주려고 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온몸에 가시가 돋친 고슴도치처럼 털을 삐쭉삐쭉 세우며 말했다.


“일단 안으로 깊이 드러가 보자꾸나.”

“예!”

시녀 언니들은 내 양옆에 섰고, 테드는 내 등 뒤에 섰다.

나는 대장답게 제일 앞장을 서서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한껏 긴장하고 도착한 현장에서는…….


“헉.”

……나는 당황해서 눈을 비볐다. 왜 저 사람이 여기서 나오지?


“오늘도~ 삽질을~ 하지요~.”

델피아가 찬란한 은발을 휘날리며 제 몸만큼이나 커다란 삽을 쥐고 땅에 삽질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레온하르트가 툴툴거리면서도 금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고 있었고.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만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나, 싶어서 호위 역으로 데려온 시녀 언니들과 성기사, 테드를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게 소문이 안 나게 입단속을 철저히 했는데……. 저분들이 와서 돕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마 가문에서 고용한 녀석들은 다 입막음을 당하거나 쫓겨난 게 아닐까 하고…….”

“대, 대체 어떠케 새어 나간 거지?”

내가 속닥거리자 데드리 언니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고 보니 델피아 님이 시엔 님의 일거수일투족에 매우 관심이 많으셔서, 시엔 님께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당장 보고하라고 하긴 했……는데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역시 인기인의 죄 많은 삶이란.’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안으로 총총 발걸음을 옮겨 들어갔다.


“온니!”

열심히 삽질하던 델피아 언니가 내 목소리에 이쪽을 보았다.

그녀는 곧장 삽을 바깥으로 던지듯이 내려놓으면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드디어 얼굴 보는구나! 그 할망구, 하여튼 맘에 안 들어. 너를 독차지하고 말이야!”

델피아가 요즘 나를 안 찾기에 바쁜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게다가 레온하르트까지 옆에 끼고 있다니, 둘의 조합은 또 상당히 색달랐다.


“밤톨, 너 대체……. 여기 금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심지어 레온하르트는 나를 보고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웅! 내 금!”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전력 질주했다.

델피아가 나를 끌어안으려는 듯이 팔을 활짝 펼쳤다.

하지만 나는 델피아를 한 번에 넘어가서 금이 산더미처럼 가득한 공간에 다다랐다.


“힛!”

부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들떠 발을 콩콩 두드렸을 때였다.


“대체 우리 아기는 운이 어쩜 이렇게 좋을까.”

델피아가 조그맣게 혼잣말을 하는 게 들렸다. 그와 동시에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운이 아니라 천재라서 가능한 일이지.”

나는 말랑말랑한 양 볼에 두 손을 꼭 얹은 채로 생각했다.

내가 금괴를 발견했다는 사실, 바로 대서특필 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