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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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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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나
2023.05.23.
그 이후에도 나는 연신 팻말을 들었다. 대장을 위한 행운 부적이나 시녀 언니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들도 하나둘 구입했다. 예를 들면…….
“마법 아대.”
“1번!”
시녀 언니들이 격한 운동을 할 때 관절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마법 아대라거나. 솔직히 이런 건 다른 곳에서도 살 수 있지만, 언니들에게도 선물을 하나씩 주고 싶었으니까, 이 기회에 주는 거다!
데드리 언니는 싱글벙글이었지만 벤치 언니는 살짝 걱정하는 낯빛이었다. 급기야 그녀가 내 손과 팻말을 꼬옥 붙잡고 걱정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대, 대체 돈이 어디서 나셔서 이렇게나 많이……. 용돈을 많이 받으셨나요?”
그제야 이 사태를 눈치챈 듯 데드리 언니도 당황해서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그, 그러니까. 마티어스 님의 금고에서 빼 오실 생각이시죠?”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다. 바보 아빠의 돈에는 애초에 손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럴 리가. 우리 아빠는 거지일 게 분명하거든.’
상속을 받았다 한들, 감자 농부였던 아빠의 재산은 가문의 다른 유력한 후계 후보들에게는 댈 것도 못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땅 파서 금괴 나오면, 돈은 그때 지불하면 되거든!’
하지만 이 자리에서 언니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법.
“다 방법이 이써.”
내 우쭐한 표정을 보며 벤치 언니는 여전히 걱정스러워 보였지만, 데드리 언니는 달랐다.
“역시 우리 아기님.”
그다음에도 나는 ‘1번’의 이점을 마음껏 즐겼다.
내 뒤에서 아저씨들이 수군거리고,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웅성댔지만, 어차피 미래에는 내가 승자가 될 것이었다.
***
시엔이 열심히 뽀짝거리며 비자금을 만들고 친구들을 위해 마도구 쇼핑을 하고 있을 때.
악셀을 찾아 메르시 지역으로 향한 마티어스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그날 밤, 악셀 미르모드가 머무는 메르시 지역에 다다랐다. 물론 복잡한 수식의 텔레포트 마법을 통해서. 다른 이들이 이동하는 것과 달리 그의 이동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내가 죽은 이후로 그가 지닌 능력이 무엇인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적어도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면 탈력감으로 하루 이상 쉬어야만 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마티어스에게 텔레포트 마법 따위는 쉬웠다.
그렇게 해서 그는 측근 몇과 함께 메르시 지역의 성에 도착했다.
‘의외로 마물 새끼든 사람이든 있군.’
악셀 미르모드답지 않게 사람들을 이렇게 살려 두다니.
‘역시 그 주술사의 영향인가.’
마티어스는 피식 웃으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악셀이 저 앞의 성을 수성하면서 주변을 학살하고 있다, 그건가.”
“네. 저 안에서 웬 주술사 하나를 끼고 그 여자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다고 합니다. 그 여자를 어떻게 빼낼지, 그게 걱정인데요.”
제아무리 마티어스 미르모드라 한들, 구도의 악마 사건에서 폭주한 이후로 힘을 많이 잃은 뒤였다.
봉인된 힘은 서서히 풀려 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는 있었다.
게다가 악셀 미르모드는 마티어스를 상대할 때 전력을 다할 것이다.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니.’
그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저 탄탄한 성곽 안으로 홀로 들어가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할까.
“집시 여자 하나만 빼 오는 게 좋겠는데.”
“위험하겠지만, 해 보겠습니다.”
“네가 어렵다면 내가 하지.”
악셀 미르모드가 끼고 있는 집시 여성 주술사가 아마 약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약점을 빼낼 생각이었다.
분명 잠입하기가 어려울 것이라 예상했다. 피를 보는 것도 어느 정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성벽 가까이로 다가갔을 때, 나이가 40살은 넘었을 것 같은 여자가 이미 촘촘한 경비를 뚫고 나와 있었다.
집시가 몽유병이 있는 자라 이곳저곳을 드나든다는 첩보는 이미 받았다.
마티어스는 능숙하게 제 곁의 측근을 향해 손짓했다.
“기사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해.”
“몇 분 정도가 필요하십니까?”
측근의 진중한 질문에, 그는 고민도 없이 대꾸했다.
“십 분이면 충분해.”
저 집시의 근처에는 기사가 숱하게 많았다. 아마 악셀 미르모드가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해 붙여 두었겠지. 하지만 저들을 유인하는 것 정도는 마티어스가 아니라 그의 곁에 있는 측근 선에서 끝날 문제다.
이 자리에 있는 악셀 미르모드가 가장 위험하니까.
측근에게 기사들 처리를 맡긴 뒤, 마티어스는 느긋하게 걸었다.
측근은 쉬이 기사를 따돌렸다. 그 모습을 본 마티어스는 성곽을 가련하게 배회하는 집시 여자의 가까이로 다가섰다.
“이제 잠에서 깰 시간이야.”
그의 건조한 인사에 집시 여자는 놀란 기색도 없이 응수했다.
“오늘은 별이 어둡더니……. 악인께서 오셨군요.”
악인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집시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약하게 몸을 떨고는 있었지만 그뿐. 몽유병이라더니, 딱히 꿈을 꾸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며 마티어스는 사무적으로 물었다.
“기다리고 있었나?”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마치 올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여상한 태도였다. 마티어스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내가 올 것을 알았나 보군.”
“하늘에 뜬 별의 그림자를 보고 방문객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럼 내가 누구인지도 아나?”
“……그건 알지 못합니다.”
마티어스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이제는 도박수를 던져 볼 차례였다.
계속 껄끄럽게 거슬리던, 시엔이 데려온 그, ‘대장’이라는 아이.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해 조사한 결과.
“네 아들, 캐롤.”
……그 아이는 저 집시 여자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강렬한 예감이 그를 덮쳤었다.
지금까지 그의 예감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평온하기만 했던 집시의 낯이 일그러졌으므로.
마티어스는 픽 웃으며 집시를 바라보았다.
그의 짐작이 맞은 듯했다.
시엔이 ‘대장’이라 부르며 데려온 꼬마는, 저 여자의 아들이었다.
시엔은 그 아이를 대장이라 불렀지만 엄연한 이름이 있었다.
캐롤, 이라는 집시답게 발랄한 이름 말이다.
“……그 아이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녀의 시선이 흔들렸다. 지금까지 제 아들과의 연결 고리를 무정하게 끊어 낸 사람답지 않게. 집시 여자를 삐딱하게 내려다보며 마티어스가 말했다.
“네 아들은 내가 보호하고 있다.”
정확히는 제 딸, 시엔이지만.
그 말에 집시 주술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에게 원하는 바가 있으시군요.”
“악셀 미르모드를 배신하고 내 편에 서.”
마티어스의 간명한 말에 집시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제가 아이도 버리고 이곳에 온 까닭에 대해 아십니까?”
동문서답이었다.
마티어스는 그녀를 응시했다.
“예지몽을 꾸었습니다. 메르시 지역의 사람들은, 제가 없으면 죽습니다. 악셀의 곁에 선 채로, 그들을 구해야 합니다. 설령…….”
“……네 아들이 죽는다 해도 말이지.”
“…….”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마티어스는 시니컬한 악인답게 피식 웃으며 조소했다.
“그 말을 들으니 알겠군. 너는 악셀의 곁에서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려 함이겠지. 네 주술과 예언에 거짓을 반쯤 섞어 가면서.”
“……네.”
마티어스가 집시를 보며 빙긋 웃었다.
“나는 악셀 미르모드를 마계로 보낼 생각이다.”
“……마계, 라고요?”
지극히 악마적인 발상이었다.
저런 생각을 할 사람은…….
“악셀이 이 땅에서 영영 사라지면, 네 꿈도 이뤄지는 것 아닌가? 우리는 한 패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맞는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을 마계로 보낸다는 게…….
아무리 악셀 미르모드가 수없이 많은 이를 죽인 악행의 축이라 해도.
경악한 집시의 낯이 굳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섬광 같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혹시 존함이…….”
마티어스가 머리칼을 넘기며 싸늘하게 속삭였다.
“마티어스 미르모드.”
집시는 저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악마와 계약했으나 그 악마가 자신을 구속하려 들자 악마조차 죽여 버린.
한때는 그 악랄한 미르모드 가문에서도 제명당했던 자.
재판에서도 재판장을 죽이고 나왔던 걸출한 악인.
‘그’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제 눈앞에서 말을 잇고 있었다.
“내 편이 돼.”
“…….”
“네가 원하는 대로, 더 이상 무도한 생명이 죽지 않게 돕지. 네 아들도 마찬가지고. 어때, 이제 거래할 마음이 좀 생겼나?”
집시의 눈이 커다래졌다.
저건……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할 법한 제안이 아니었다. 악셀처럼 자신의 목숨을 두고 협박할 줄 알았는데.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선택지를 주고 있었다.
마치 정말로 제안을 하는 것처럼.
마티어스를 마주 보면서, 집시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풍문으로만 전해 듣던 마티어스 미르모드 님과는 다른 것 같군요.”
“그런가.”
“무언가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무언가, 라.
그래, 일이 하나 있기는 있었다.
과거와는 달랐다.
이제는 그의 마음에 온기를 불러온 아주 자그마한 아기, 분홍 털실 공처럼 포근한 꼬마가 존재한다.
꼼지락거리며 그의 품에 안겨 오는 사랑스러운 아기.
사랑스러운 시엔의 생각을 하는 마티어스의 입매가 다소 느슨하게 풀어졌다.
언제나 냉랭한 표정을 짓는 터라 저도 모르는 사이 나온 표정.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집시가 당혹감을 내비칠 정도로 다정한 낯이었다.
그러나 마티어스의 표정은 금세 서릿발처럼 차갑게 바뀌었다.
“그 문제가 중요한 건가?”
“……중요했습니다만, 대답은 이미 들은 것 같습니다.”
마티어스의 표정만 보고도 집시는 눈치챘다. 그가 달라졌다는 것을.
마티어스는 방만한 집시를 바라보면서도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녀의 결정을 묻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그래서 그대의 결론은.”
집시가 눈을 깜빡였다.
집시 여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마티어스는 한쪽 입꼬리만 치켜올렸다.
“……그거 아십니까? 제 아들을 구해 주신 뒤부터였을까요. 절망뿐이던 미래에 희망이 가끔 보였습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면서 허밍하듯 말했다.
“당신의 편에 서겠습니다.”
“그러지.”
“스파이라…… 예언가들이 제 팔자를 못 본다더니, 제가 스파이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반쯤 회한이 어려 보이는 낯이었다.
집시를 바라보면서, 마티어스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사명이 있으니 잘 해내겠지.”
그녀의 사명은 사람들, 그리고 제 아이를 구하는 것.
마티어스는 ‘선한 자가 승리한다’는 프로파간다를 믿지 않았다.
저 여자가 악셀 미르모드를 얼마나 상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가 확실히 알고 있는 건, 더 절실한 자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 여자의 절실함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스스로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마티어스는 간단히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임무를 마치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빼내 주지.”
그의 약속은 지금까지 어긋나 본 역사가 없었다.
집시는 그 사실까지는 몰랐지만, 신뢰감 있는 어조에 낮게 웃었다.
“그것참 행복한 이야기네요.”
“기다리고 있어. 조만간 그대에게 할 일을 전달해 주지.”
돌아서려던 그는 잠깐 미간을 좁혔다.
어려운 길을 나서는 측근에게 마지막 배려 정도는 해 줄 법하니까.
“마지막으로, 네 아들에게 할 말은 없나?”
“……그냥.”
지금까지 꿈결을 걷는 듯했던 그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