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이 모든 게 과연 우연일까?
(46/77)
46화. 이 모든 게 과연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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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이 모든 게 과연 우연일까?
2023.05.09.
레온하르트가 머무는 저택을 빠져나온 그들은 루켈라 공작 부인의 사저로 향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 사이에 할 이야기가 무엇이 있겠는가.
이번에도 주제는 시엔 미르모드였다. 시엔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그들의 표정은 몹시 밝았다.
시엔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걸 먹는지부터 시작해서, 가히 덕질의 영역까지 간 탓인지 오래 걸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몇십여 분을 걸어 공작 부인이 머무는 저택의 외곽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산책하고 있던 루켈라 공작 부인을 맞닥뜨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애시드가 몸을 쪼그라트렸을 즈음이었다. 공작 부인이 싸늘한 낯으로 레온하르트를 향해 말했다.
“무슨 이야기들을 그리 즐겁게 하고 있었느냐?”
“아……. 아닙니다.”
루켈라 공작 부인은 뻣뻣한 레온하르트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 저 아이가 시엔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입매가 한껏 올라갔다가 다른 이야기를 할 때는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뻔히 알거늘.
그녀는 모른 척하며 말을 이었다.
“꿀빵이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조만간 셋이 만날 자리를 마련하지. 독 수업도 해야 하니까.”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신이 난 감정을 숨기려 했지만, 이미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럼 악셀 미르모드가 오기 전에 수업을 다섯 번은 할 수 있겠군.”
본디 악셀이 돌아오기 때문에 안 살림을 맡아 보는 루켈라 공작 부인은 매우 바빠져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엔을 위해 방금 막 빈 스케줄을 만들어 냈다. 스스로 스케줄 조정이 가능한 자신을 뿌듯하게 여기면서.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득달같이 끼어들었다.
“어어라, 저도 그럼 같이 어때요?”
그 누군가는 바로 델피아 미르모드였다. 공작 부인이 델피아를 보며 눈살을 대놓고 찡그렸다.
“무슨 헛소리야. 대체 델피아, 넌 왜 이 저택에 와 있는 거지?”
그러고 보니 대체 루켈라 공작 부인의 저택에 왜 델피아가 있는 건지. 둘이 원래 데면데면한 사이 아니었던가?
순간 애시드와 레온하르트의 머릿속에도 물음표가 떴다.
그때 델피아가 연극적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며 대꾸했다.
“아아니……. 요즘 우리 아기 주인님이 절 잊었는지 저택에 초대도 안 해 주고, 악랄한 마티어스 놈은 편지를 보내도 개무시를 하잖아요.”
루켈라 공작 부인은 여전히 별생각 없는 인상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턱짓을 하며 델피아에게 말했다.
“네가 우리 꿀빵이를 보든 못 보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넌 초대 받지 못한 손님이야.”
“아아, 우리 귀염둥이 보고 싶어라. 저도 가르치고 싶어요. 네?”
델피아는 마치 상사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녀를 힐끔 본 레온하르트는 생각했다.
안타깝다. 나는 밤톨 천재, 많이 볼 수 있는데. 지금 내가 바빠서 그렇지, 밤톨네 저택에 가면 바로 밤톨이 만나 주는데.
지금까지 저 델피아에 대해서는 위험한 인물이라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막상 꿀빵을 아기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애타게 찾는 걸 보니, 불쌍하게 느껴졌다.
더해서 델피아에 대한 묘한 우월감이 일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애시드 저 녀석은 밤톨이랑 같은 집에 살잖아?’
……애시드를 보고 나니 묘한 우월감도 깨져 버리고 말았다.
‘나도 밤톨이랑 같은 집에 살고 싶은데. 그럼 그 천재성이 전염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정작 같은 집에 사는 애시드는 눈을 깜빡거리며 루켈라 공작 부인과 델피아 사이의 시엔 쟁탈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시엔도 모르는 사이에 밤톨, 아기 주인, 꿀빵을 향한 셋의 애정 공세는 계속되었다.
***
나와 대장, 그리고 아빠. 이렇게 셋이 남았다.
갈색 머리 소년은 데드리 언니가 교화시킨다며 운동장으로 데리고 갔으니…… 당분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아빠의 옷소매를 꼬옥 움켜잡은 채로 속삭였다.
“압빠.”
“응?”
“있자나아, 누가 내 얘기를 하나 바!”
귀가 조금 가려웠다.
누가 내 욕을 하는 걸까 싶어서 주먹을 꽈악 움켜쥐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나를 보며 아빠가 후후, 웃었다.
“시엔, 그 표정 지으니까 무섭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안니야. 착해!”
아빠와 한참 대화를 나누다 보니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자리에는 나와 아빠 말고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것 말이다.
바로 내가 아빠에게 소개해 주기 위해 데려온 대장이었다.
“대장두 착해! 애시드 옆방에 재워도 대?”
“응, 시엔이 원한다면 방을 마련해 줄게.”
나는 대장을 아빠에게 조금 더 잘 소개해 주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그, 압빠. 대장네 보육원에 후원도 해 조야 해? 많이는 안 해 조도 대구.”
물론 그 후원금은 내가 일해서 아빠에게 갚을 것이다. 아빠도 후계자로서 자금이 필요할 테니까. 특히 우리는 지금 아주 영세한 영지를 얻은 후계자이기 때문에, 돈 한 푼이 아쉬운 실정일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그 사실도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후원을 한다는 게 기쁜지…… 그저 나를 향해 환히 웃어 보일 뿐이었다.
“으응, 그럼.”
역시 아빠는 선량한 사람이다 보니 후원이란 말에 넘어간 게 틀림없다. 나는 아빠의 품에 쏙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대장 엄마두 찾아 주면 조아. 나두 가치 찾아 줄 거지만……. 대장 엄마는 메르시 지역에 있는 집시야. 주술사일 수도 이써. 아닐 수도 이꾸.”
“찾아 볼게. 안 그래도 쟤 뒷조사를…… 아니, 잘 찾아보려 했어.”
“웅?”
안 그래도 찾아보려고 했다는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빠가 어색하게 웃었다.
“시엔 친구니까, 친구 어머님도 어떤 분인지 만나 뵈어야지.”
나는 아빠를 향한 신뢰가 가득한 눈빛으로 반짝반짝 웃어 보였다.
***
시엔을 코 재운 다음 마티어스는 제 집무실로 들어섰다.
시엔이 짐작하지 못했다뿐이지, 그 역시도 차근차근 악셀 미르모드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만 마티어스의 준비가 시엔의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악셀 미르모드의 약점이 주술사를 가까이하는 것이라 했나.”
“예, 징크스에도 상당히 예민하다고 합니다.”
마티어스의 정보력이 제법 빼어나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정보길드장을 내려다보며 파이프를 물었다. 그의 싸늘한 낯에 무표정이 어리자, 지레 겁먹은 부하가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방탕한 놈에 정신력이 약한 자입니다. 정신 쪽을 공격하면 좋을 텐데요.”
그의 말마따나 악셀 미르모드의 유일한 약점은 정신력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강력한 힘을 지녔고, 사나운 것과 별개로 악셀은 술이나 마법 약에 의지하지 않고는 제대로 버텨 내지를 못 했다.
그런 탓일까.
그는 영험한 것에도 제법 집착하고는 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전쟁에서는 곁에 주술사 하나를 두고 있답니다. 아직 자세한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집시 여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이는 대략 삼사십 정도고요. 많이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그 여자의 점괘에 의지한다는군요. 이번 전쟁이 끝나면 죽이겠다 벼르기는 하더라만은.”
집시 여자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아까 시엔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장의 엄마. 메르시 지역에 있는 여성 집시 주술사를 찾아 달라던, 그 말이.
‘……이 모든 게 과연 우연일까?’
하지만 그는 잇새로 침음을 삼켰다.
만약 우연이 아니더라도, 우연이 되게 만들 것이다.
더럽기 짝이 없는 미르모드 가문의 수 싸움에 조그만 시엔이 들어선다면 금세 허물어질 게 분명하니까.
부디 사랑스러운 시엔이 좋은 것만 보고, 행복한 일만 하기를.
“당장 가서 메르시 지역에 있는 집시 주술사부터 찾지.”
일단은 그 여자부터 찾아내야 했다.
시엔이 말한 여자와 동일 인물인지를 알아낼 생각이었다. 그다음에 만약 동일 인물이라면.
“납치해야지, 여기로.”
그는 제 조그만 딸인 시엔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마티어스가 정보를 입수하고 새벽을 틈타 메르시 지역으로 이동한 그때.
시엔은 이 더러운 가문에서도 가장 더러운 돈놀이판인, 카지노를 찾아간 상태였다.
‘원작 속에서 여기가 제일 돈이 많이 움직이는 곳이었지.’
여기 온 이유는 간단했다.
귀족가의 후계자임에도 가난할 게 분명한 우리 아빠를 위해서 내가 대신 가장이 되어 돈을 벌고, 정보 길드에 대장네 엄마를 찾아 달라고 의뢰하기 위해서였다.
‘여기 꽤 괜찮은 딜러가 하나 있을 텐데 말이야…….’
아주 조그만 몸을 보자기로 꽁꽁 싸맨 다음 눈만 내민 채로 총총 걸어가는 시엔의 등 뒤.
근육질에 키 180cm이 넘는 시녀들이 음산하게 따르고 있었다.
시녀 언니들은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이번 일은 조용히 움직여야 하는 만큼 꼭 필요한 소수정예의 인원들만 골라서 데려온 차였다. 그들에게는 미리 보좌를 부탁해 두었지만, 이 장소가 워낙 위험한 곳이니만큼 당황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 카지노는 단순한 돈놀이판이 아니거든.’
공식적인 통로로는 절대 아이들이 들어갈 수 없는 장소.
대장과 애시드의 교육에는 좋지 못하겠지만, 그들이 반드시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데려오게 되었다.
‘이 안에서 딜러를 찾아낸 다음, 함께 할 일이 있으니까.’
딜러를 찾아 무엇을 할 생각이냐, 라고 묻는다면 아주 구체적으로 대답할 수 있다.
이 카지노는 단순한 카지노가 아니었고, 딜러도 평범한 딜러가 아니었다.
카지노장은 물론 겉보기에는 단순히 포커를 치고 룰렛을 돌리는 카지노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건데, 사실 이곳은 어둠의 경매장으로 가는 통로였다.
<어둠의 경매장>.
세상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그곳에 있다고 할 정도로 수많은 위험 물품들이 오가는 장소다.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르는 공간.
그러나 주인이 누구이건 간에, 경매는 특별한 날마다 열려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고는 했다.
경매 대상은 사람이 되기도 했고 마도구가 되기도 했으며 땅이 되기도 했다.
물론 다른 경매장과 유사하게, 제대로 된 물건이 나오는 건 대략 10%의 확률. 쓸모없는 잡동사니들이 90%의 확률로 입찰되었다.
제대로 입찰이 되지 않은 물건은 다음 경매 때 늘 재입찰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잡동사니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10%의 대단한 물건을 구하러 이 경매장에 들어왔다.
멜로디아도 마찬가지였다.
소설 속 여주인공답게, 멜로디아는 이곳에서 좋은 물품들을 많이 구입했다. 그 물건으로 악당 가문 미르모드를 처단하기도 했었고.
특히 내가 사고 싶어 하는, 금이 한도 끝도 없이 묻혀 있는 작고 아름다운 장미목 땅을 사서 부자가 되기도 했지!
사람들은 그 위의 장미만 알았지, 땅속에 금이 묻혀 있는 건 아무도 몰랐다.
저런 하찮은 땅이 이 경매장에 올라오다니 한심하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저런 걸 사면 체면이 떨어진다, 정도의 반응을 보이며 냉담하게 다른 대단해 보이는 물품들만을 구매했다.
멜로디아도 운이 좋았을 뿐, 그 땅속에 금이 있다는 건 몰랐다.
그리고 바로 그 땅을 지금 내가 사러 가는 것이다.
그 안에 묻혀 있는 금광을 내 손에 넣으러.
게다가 한 번 <어둠의 경매장>에 들어가는 테스트를 통과한다면, 앞으로는 거듭 들어갈 수 있다. 그러니까 나중에 또 좋은 아이템이 나오는 날, 경매장에 들어가 물품을 사 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아마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지금쯤 땅이 입찰되었을 것이다. 대략 5번째 유찰쯤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만약 내 예상이 맞는다면 지금은 땅을 내가 멜로디아보다 먼저 살 수 있는 굿 타이밍이었다.
제일 먼저, <어둠의 경매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판매하는 카지노 딜러를 찾아가야 했다.
그 티켓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딜러의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했다.
나는 오늘 그 테스트를 위해 내 측근들, 시녀 언니들과 애시드, 대장 등을 심혈을 기울여 골라 함께 왔다.
‘테스트 전에는, 최대한 있어 보이고, 멋진, 능력자처럼 보이자!’
그래서 나는 카지노장 안으로 아주 당당하게, 어디 느와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멋있게 들어서려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던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