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아빠는 약간 감동이라 눈물이 나네
(45/77)
45화. 아빠는 약간 감동이라 눈물이 나네
(45/77)
45화. 아빠는 약간 감동이라 눈물이 나네
2023.05.05.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주술사 아들을 가진 여자 집시가 전쟁터로 갈 일은 없었다. 집시들은 무력이 강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높으신 분을 도와서 열심히 일을 하겠다고…… 했어. 그래서 다시 돌아오겠다고. 물론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대장의 눈동자에는 총기가 잔뜩 어려 있었다.
나는 이제 슬슬 그의 이름을 묻고, 손을 잡고 집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대장과 대화하는 내 곁을 지키던 성기사 테드와 애시드, 근육 시녀들이 동시에 시선을 다른 쪽으로 고정한 건.
“저기 음침한 놈들이 있다!”
“포박해!”
그 순간 데드리 언니가 평소 내 교육 때문에 절대로 입 바깥에 내지 않던 욕설을 토해 냈다.
“저 새끼 잡아—!”
나와 대장은 눈을 크게 떴다.
테드가 먼저 앞으로 다가가고, 애시드와 대장이 나를 보호하듯이 내 앞을 촘촘히 막아섰다.
“뭐, 뭐야?!”
***
근육 시녀들과 테드는 패트, 매트의 힘을 대충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워낙 그림자 속에 잘 숨어들어 있었던 탓에 꼬리를 잡지는 못한 터였다.
하지만 패트와 매트는 시엔의 선행을 보는 순간 순간적으로 방심해 버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아이는 자신을 공격한 대장에게 맞공격하지 않고 너른 마음으로 끌어안았다. 게다가 무려 보육원까지 후원해 주겠다고 공언하지 않았는가. 저 조그만 꼬마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다니.
마음이 순간 먹먹해진 탓에, 그들은 그림자 속으로 숨어드는 것을 순간 잊고 말았다.
“정화된다…….”
“우리가 이 일을 맡게 된 건…… 행운이네.”
그리고 그들이 방심한 그때. 시엔에게 충성 맹세를 한 성기사, 테드가 그들 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패트와 매트는 튀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만 테드의 갑작스러운 신성력에 압도당했다.
둘이 전력을 다하면 당연히 도망치거나 테드를 압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야?”
시엔이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
도망에는 반드시 결투가 수반된다. 감히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데다 선량한 시엔의 눈앞에 피를 튀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감히 도망 같은 걸 칠 수가 없이 포박당해 끌려 나왔다.
무력하게 끌려 나오는 길.
패트와 매트는 눈을 내리깐 채로 시엔 앞으로 끌려 나왔다.
“시엔 님. 이자가 계속 저희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테드가 담담하게 보고하고, 근육 시녀들이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아까부터 계속 음침하게 지켜보고 있더군요!”
패트와 매트는 최대한 순수해 보이기 위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저희 착한 사람이에요, 하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본 시엔의 눈빛이 흉악하게 빛났다.
“이름 모야!”
시엔이 콩알 같은 주먹을 꾸욱 움켜쥐고 패트와 매트를 노려보았다.
“끌구 가쟈, 언니들!”
패트와 매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엔의 귀여움과 카리스마에 압도된 매트가 우물쭈물 말했다.
“어, 어딜 가시는…….”
“어디긴 어디야! 우리 집이지! 대쟝, 너두 따라와!”
……그렇게 해서, 패트와 매트, 그리고 대장은 보육원을 떠나 미르모드 저택에 들어섰다.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기다리는 곳으로.
……조용히 감시하라 하셨는데 이리 바보같이 들키다니.
패트와 매트는 오늘이 자신들의 제삿날이 될 것임을 직감하고 말았다.
***
“압빠, 얘는 대장이야!”
셋을 한꺼번에 끌고 간 시엔은 마티어스 앞에 당당하게 섰다.
마티어스는 패트와 매트를 보고 싸늘하게 웃다가, 시엔을 다정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야말로 지킬 앤 하이드가 따로 없었지만, 시엔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티어스는 시엔에게 따스하게 물었다.
“대장?”
“웅! 보육원 봉사 가따가 칭구 데려와써! 힛!”
“보육원 봉사를 갔다고…….”
마티어스는 대장을 싸늘하게 응시했다. 혹시 선량한 시엔을 등쳐먹으려는 껄렁한 새끼는 아니겠지, 같은 눈빛으로.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아직 시엔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으니 일단은 감시하며 내버려 두기로 결심한 그는, 감동했다는 표정으로 시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딸 좋은 일 했네?”
“웅!”
“아빠는 너무 감동이라…… 약간 눈물이 나네.”
마티어스의 목소리에 살짝 울음기가 섞였다. 물론 반쯤은 연기였다.
시엔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아빠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압빠 밥오. 마음이 너무 여려.”
“으응……. 그치.”
마티어스의 소문을 잘 모르는 대장은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패트와 매트는 입을 쩍 벌리고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이 사람이 우리가 알던 그 마티어스 님이 맞나?
우리가 죽을 때가 다 되어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 그런데 시엔.”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당도했다.
“우리 딸이 이 나쁜 사람들 잡아 온 거야?”
패트와 매트는 억울하다는 듯이 마티어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마티어스는 그들을 손절한 뒤였다.
시엔은 해맑게 웃으며 패트와 매트를 가리켰다.
“그런데 이 아저씨들 바보야!”
“응? 왜?”
“도망가려구 할 줄 아랏는데, 바루 잡혀써! 때릴 꼬야!”
“아빠한테…… 맡겨 주면 안 돼? 아빠가 심문해 볼게. 시엔이는 아직 어리고.”
시엔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마티어스를 바라보았다.
‘이 착한 아빠, 또 호구되어서 심문 제대로 못 하는 건 아니겠지.’ 같은 표정이었다.
“웅! 압빠가 심문한 다음, 시엔이가 또 심문할래!”
마티어스는 흉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패트와 매트를 바라보았다.
“그래. 성기사 하나한테 꼬리를 잡힌 멍청한 첩자일 수도…… 있으니.”
패트와 매트는 간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죽음이 다가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다행히도 신이 있기는 한 모양인지, 마티어스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시엔을 온화하게 바라보았다.
“딸, 오늘은 그래서 보육원에서 뭐 했어?”
“히힛, 압빠 생각.”
그 말에 마티어스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싸늘했던 얼굴에 싱글벙글한 미소가 번지니까 상당히 귀여웠다.
물론 이건 시엔 시점이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흉악한 사신처럼 보였다.
시엔은 아빠의 볼을 검지로 콕 눌러 주면서 헤실헤실 웃었다.
“바부. 기여워.”
패트와 매트는 내가 지금 죽을 때가 되어서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딸이라지만 감히 마티어스 님의 권위에 손상을 가하는 행동을 했는데…….
마티어스 님이 시엔을 조금 귀여워하는 것 같아 보이기는 했지만, 감히 얼굴에 손을 대다니.
아까부터 계속 심각한 상황이다. 이대로라면 정말 죽는 거 아닌가?
심지어 마티어스 님은 입이 찢어지게 웃고 있었다. 마치 악독한 사신처럼.
이미 시엔에게 한껏 정이 들어 버린 패트와 매트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제발 시엔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그-.”
……하지만, 마티어스는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아빠 원래 귀엽잖아. 착하고.”
충격을 받은 그들이 몸을 움츠러트렸다.
천지가 개벽했다.
마티어스 님이 저런 말을……?
그리고 혼란스러운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시엔을 구하기 위해 각성한 애시드였다.
마티어스 미르모드에게서 시엔을 구하려고 힐러 능력까지 각성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애시드가 악당들보다도 더 혼돈에 찬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이야기를 해 준 레온하르트를 찾아가야 했다.
***
악셀 미르모드가 곧 저택에 도착할 예정이기 때문일까. 레온하르트가 머무는 저택의 분위기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애시드가 왔다고 하자 귀찮은 기색 없이 묵묵히 나타났다.
“밤톨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애시드가 조심스럽게 지금까지 자신이 관찰한 상황에 대해 언급했다.
순간 레온하르트의 낯이 새하얘졌다.
“……뭐, 뭐라고? 말도 안 돼.”
“하지만 사실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당황한 애시드와 달리 레온하르트는 빠르게 평정을 찾았다.
그가 입술을 와락 깨물며 중얼거렸다.
“그 천재가…… 기어코 마티어스 님마저 구워삶았단 말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레온하르트가 입가에 손을 대고 중얼거렸다.
“정말 멋있어. 이대로라면 그 위협적인 악셀 님까지도 부숴 버릴지도…….”
자신이 시엔을 지킬 수 없다는 생각에 어깨가 축 늘어졌던 애시드가 눈을 반짝였다.
“악셀 님이요?”
레온하르트가 애시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애시드는 악셀이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 내가 말 안 했던가?”
유순한 애시드의 얼굴을 보니 말을 했다 한들 잊어버린 눈치다.
레온하르트는 간략하게 악셀 미르모드, 그가 누구인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미르모드 가문에는 광견이 두 마리 있는데, 하나가 마티어스고 하나가 악셀이었다.
마티어스가 모종의 사건으로 후계에서 밀려난 뒤, 악셀 미르모드는 차근차근 권세를 장악해 나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악셀 저택을 맡긴 채로 전쟁터에서 굴러다녔다. 더 이상 살인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실제로도 그랬다. 악셀 미르모드는 피에 미친 악귀처럼 사람을 살육해 나갔다. 착한 자, 나쁜 자 할 것 없이 그의 손에 도륙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자기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자만 계획해서 죽이는 마티어스와 다르게, 진짜로 눈이 돌아 버린 미친 개처럼 굴었다.
그러니 말 그대로 엄청나게 무서운 인물이었다.
레온하르트는 품에 있던 회중시계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애시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슬슬 나가지. 공작 부인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시간이 왔거든. 요즘 나한테 밤톨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세뇌 교육을 하시더라. 안 그래도 난 밤톨한테 충성을 다 하는데 말이지.”
요즘 레온하르트는 공작 부인의 저택에 있는 마법사에게 따로 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애시드는 부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대답했다.
“네, 같이 가요!”
애시드는 조금 더 듣고 싶었다. 시엔의 주변인들이 말하는, 시엔에 대한 이야기를.
그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파도처럼 일렁거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듣고 싶지는 않았다. 시엔에 대해서 자꾸만 알고 싶으니까.
‘들을수록 기분이 이상해져.’
정확히 왜 기분이 이상한지는 알 수 없었다.
시엔의 주변인들이 자신이 모르는 시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을 때면 마음이 묘하게 파도를 치는 것만 같았다. 가끔은 잔잔한 바다의 물결이 일렁이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가끔은 기분이 이상해지기도 했다.
그 감각이 질투라는 걸, 아직 어린 애시드는 자각하지 못했다.
애시드가 제 감정에 취해 걸음을 내디딜 때, 레온하르트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는 침음을 삼키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무튼 밤톨이라지만 마티어스 님을 구워삶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정말 신인가?”
사실 시엔이 구워삶은 건 아니고, 원래부터 마티어스는 시엔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레온하르트에게는 그런 생각 따위 들지 않았다.
그저 밤톨이 자신에게 그러했듯 마티어스까지도 구워삶았다는, 자신 기준에서 지극히 합리적 의심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한테는…….”
“너한테는 신이라고?”
애시드는 부끄러워하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당황해서 말이 너무 잘 나와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또 부끄러워졌다.
그런 애시드를 힐끔 본 레온하르트가 다시 자신만의 상념에 잠겼다.
애시드 녀석까지 구워삶다니.
세간에서는 사람을 다루는 걸 용병술이라고 하던데. 밤톨은 용병술을 배우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실생활에 적용을 잘하는 거지?
정말 신인 걸까?
이렇게 레온하르트의 마음속에는 시엔에 대한 새로운 오해가 겹겹이 쌓여 갔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천재인 건 알고 있었다만, 이리 용병술까지 잘 쓸 줄이야. 인간적으로 존경스럽군.”
오해에 새로운 오해가 덧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