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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저놈은 괴물이야 (43/77)


43화. 저놈은 괴물이야
2023.04.28.


나, 시엔 미르모드의 일일 빵집 만들기 계획은 계속되었다.

그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화합을 망치는 대장, 이 녀석이었다.

나는 그를 대장이라고 호명한 다음, 손을 꼬옥 끌어 쥐고 헤헷, 웃었다. 그러자 대장이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대장이라니.”

조금쯤은 순진해 보이는 표정.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대장 맞자나!”

“……왜 불렀는데.”

“가치 빵 만들어 보자.”

내가 배시시 웃자 대장이 나를 못 미덥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대장의 악력이라면 충분히 풀 수 있는 내 손을 그대로 움켜잡고 있는 걸 보면, 아무리 봐도 빵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게다가 대장만 이렇게 뻣뻣한 태도였지, 그 옆에 있는 집시 아이들은 주방을 보느라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나는 배시시 웃으며 대장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웅? 얼르은.”

그때였다.

뜻밖의 복병이 내 계획을 막아 세운 건.


“싫어!”

귀가 먹먹하도록 커다랗게 소리친 갈색 머리 소년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내 옷소매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상당히 폭력적인 행동이라, 나는 우당탕 바닥으로 넘어질 뻔하다가 겨우 제자리를 되찾았다. 그 모습에 테드가 검을 빼 들려 했지만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일단 이 소년의 말부터 들어보자.

내가 겨우 바로 섰는데, 소년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듯했다.

그가 싸늘한 명령조로 말을 꺼냈다.


“전 쟤 싫어요. 치워요.”

폭력을 당한 아이이니만큼 나는 그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했다.


“……아아, 웅.”

하지만 그럼에도 대장과 저 아이들을 아예 배제하는 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구럼, 대장이랑 칭구들은 부엌 왼편을 쓰고, 우리 둘은 오른편을 쓰자.”

나는 이 갈색 머리 소년과 친해지고, 대장과 집시들은 애시드, 테드, 그리고 시녀 언니들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대장과 갈색 머리 소년, 이 둘이 왜 싸웠는지는 먼저 이 갈색 머리 소년에게 물어봐야겠다.

나는 대장을 향해 눈을 까딱했다.

대장은 아주 잠깐 허탈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까딱했다.


‘분명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뭔가 있어.’

아까 살짝 풀릴락 말락 했던 봄눈 같았던 표정은 사라지고, 다시 엄동설한 같은 표정이 보였다.


‘저 마음의 문을 닫은 듯한 표정은 대체 뭐지?’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폭력 피해자인 갈색 머리 소년을 바라보았다.

일단 갈색 머리 소년부터 제대로 구워삶아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

아이들의 복잡한 인간관계와는 달리 빵 냄새가 고소하게 풍기는 시간이 돌아왔다.

동그란 주방을 두 구역으로 나누어, 즐거운 빵 만들기 시간이 계속되었다.

나는 내 쪽으로 오고 싶어서 몸을 움찔거리는 시녀 언니들, 애시드, 테드를 뒤로하고 갈색 머리 소년과 단둘이 빵을 만들었다.

위생 장갑을 탁탁 끼고!

몽글몽글 밀가루를 꾹꾹 밀 빵 같은 손으로 눌러 준 다음, 도마 위에 대고 길게 공처럼 굴려 주는 건, 생각보다 짜릿한 만족감을 선사했다.

나는 주물주물 반죽을 치대면서 히힛, 하고 웃었다.

곁에서 요리사가 ‘역시 우리 아기님, 조그만 손으로 밀가루도 잘 만지시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흡족한 마음으로 부풀어 오르는 빵 반죽을 노려보던, 바로 그때였다.

내 곁에 있던 갈색 머리 소년이 내 밀가루 반죽을 빼앗아 갔다. 그러더니 자기가 직접 만든 밀가루 반죽인 양 자연스레 제 앞에 가져다 놓았다.


‘뭐지……?’

나는 눈을 조그맣게 뜨고 그 소년을 응시했다.


 
그는 빵을 만드는 대신,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내가 만든 반죽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제가 만든 것처럼 주물럭거리다가, 안 되는지 도마 위에 반죽을 패대기쳤다.


“모야?”

나는 까치발을 하고 식탁 멀리 있는 밀가루를 꾸욱 움켜쥔 다음, 반죽을 다시 만들었다. 그는 반죽을 연신 치대면서 손에 밀가루를 묻혔다. 기분이 조금 이상해진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한 번 더 호명했다.


“웅, 저기이.”

“……네.”

소년이 잠시 몸을 움찔했다. 그래도 역시 빵을 만들다 보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 아까는 무슨 일이어써?”

“…….”

퍼억-!

내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로, 소년이 빵을 주먹으로 쾅! 쳤다.

나는 놀라서 귀를 꾸욱 막았다. 내 눈앞에서 직접적으로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낸 사람은 처음이었다. 콩알만치 조그만 심장이 바닥으로 콕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애시드와 테드, 시녀들이 급하게 이쪽으로 다가오려 했을 때. 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주의를 주었다.

나는 쿵쿵거리며 울리는 마음을 아래로 꾸욱 누른 다음 가만히 소년을 바라보았다.


“저놈은 괴물이야.”

“우웅……?”

괴물이라는 말에는 짙은 혐오감이 어려 있었다. 나는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다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도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괴물이라고까지 칭하는 건지…….


“사람들은 저놈을 좋아하지. 저놈의 더러운 꿍꿍이를 몰라서 그래.”

섬뜩함이나 열등감이 또렷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웅? 그게 무슨 소리야……?”

다행히 아직 어린아이라 머리가 덜 여문 건지, 아니면 나를 완전히 제 편으로 만들고 싶은 건지. 그는 자꾸만 이쪽을 응시하는 대장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저놈은 더러운 놈이야. 난 저놈을 괴롭힌 적이 없는데, 내가 그냥 장난치는 걸 가지고, 나를 몰아가고……!”

“으응?”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장난을 했는데?”

그는 나를 빤히 보았다. 그리고 빙글거리며 웃었다.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이상하게 저 웃음을 보니 속이 느물거렸다.

정말 이상하게도.


“……나중에 다시 오면, 무슨 장난인지 알려 주지.”

나는 밀가루 반죽을 연신 치대면서 고민에 빠졌다. 아까 대장을 보내면서, 시녀 언니에게 조심스럽게 조언했던 게 떠올랐다.

대장과 즐겁게 놀다가, 은근히 한번 떠보라고 했었다. 떠돌이 주술사 집시에 관한 정보를 얻어 오라고도 말했었던 기억이 났다.

시녀 언니들이 성공했을지가 궁금했다.

나는 갈색 머리 소년을 향해 어색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

즐거운 빵 만들기 시간이 끝났다.

맞은 편의 소년들은, 밀가루를 얼굴에 잔뜩 묻힌 채로 신이 나서 깔깔대고 있었다.

대장의 곁에 있던 소년이 나를 향해 쪼르르 달려왔다.


“내일도 또 올 거야?”

“……웅!”

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양 갈래머리가 내 고갯짓을 따라 연신 휘날렸다.

내 앞의 소년이 찬탄 섞인 한숨을 내쉬었고, 집시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다들 나를 선망에 찬 눈길로 보고 있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의외로 이 집시 소년들은 생각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는 어린애들인 모양이었다.

딱 두 명.

대장과 갈색 머리 소년을 제외하고는.

……이 둘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모양이다.

대장의 등 뒤에서 못 박힌 채로 서 있는 데드리 언니를 보니, 대장이 뭔가 언니에게는 살짝 말을 해 준 모양인데, 아마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는 듯했다.


‘……정말 궁금하게 만들었어.’

나는 옅게 웃으며 손을 붕붕 흔들었다.


“이제 빵 나눠 주러 가쟈!”

빵을 한껏 품에 안아 든 다음 트레이에 쏘옥 넣었다.

이제 아이들의 기 싸움보다도, 멋진 주술사를 찾으러 가야 한다!

내가 주먹을 꽈악 움켜쥔 순간. 대장이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야.”

여전히 투박하고, 조금 틱틱거리는 말투였지만, 의아한 채 돌아보는 나를 향해 그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우리 애들한테 좋은 추억 만들어 줘서 고맙다. 시엔 미르모드.”

나는 대장에게 내 이름을 소개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


“우웅…….”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청명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거리 사람들한테 빵이나 선물하러 가자. 다들 좋아하겠네.”

나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대장도 슬슬 유해지는 분위기!

조금 더 마음의 문을 열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를 물어보아야겠다.

보육원의 집시 아이들이 지닌 배경 이야기를 하나둘 들으면서, 서서히 친해진 다음, 주술사를 찾아낼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의 첫 번째 단계.

바로 스몰 토크 하기!

나는 입가에 미소를 유지한 채로, 그의 손에 있는 곰보빵을 보며 말했다.


“웅! 곰보빵을 만드럿네……? 기엽다!”

그런데 그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이거…… 카스텔라인데……?”

……나도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굳어졌다.

저렇게 구멍 숭숭 난 곰보빵이 어딜 봐서 카스텔라라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사이의 마음의 거리는 조금 더 멀어진 것만 같다.

하지만, 왠지 저 대장.


“……곰보빵이라니.”

놀리는 맛이 있을 것 같아 보인다.

나는 그를 보고 빙긋 웃다가 고개를 픽 돌렸다. 이제는 진짜 빵을 나눠 줘야 할 때였으니까.

***

조금쯤은 더럽고 낙후되어 있는 골목길.

뽀송뽀송한 트레이가 하나 놓였다.

그 위에는 맛도 좋고 폭신폭신한 빵들이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올라가 있었다. 물론 손재주 나쁜 대장이 만들어 모양이 조금 이상한 빵도 있었지만, 갓 나온 탓에 따끈하고 맛은 있었다.


“빵 받으세요!”

“무료입니다, 무료!”

무료 빵.

골목에 아무렇게나 앉아 대화를 나누던 가난한 집시들이 눈을 빛낸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어어, 저거 진짠가?”

“저기 길목에 있는 보육원 애들이잖어?”

집시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켜 빵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 저 어린아이들을 제압하면 빵을 죄다 먹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일단 들고 튀-.”

“어이. 저기 봐.”

집시의 손끝이 우락부락한 시녀들 쪽으로 가 닿았다.


“……차, 참자.”

대단히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못되어 먹은 망상은 보육원 아이들 주변에 선 무장한 기사들과 근육 시녀들에 의해 빠르게 사라졌다.


“그려……. 하, 하나씩만 받자고.”

이게 바로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마인드였다.

집시들은 한 줄로 체계를 이루어 서서 빵을 하나씩 받아갔다.

그 와중에도 시엔은 집시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피며 원작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주술사는 여기 정말 없네.’

다들 꼬질꼬질하고, 머리 색은 까맣고…… 피부도 까맣고, 입술 위에는 점도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집시 친구들이랑 친해져서 물밑으로 정보를 알아봐야 하나.’

정보 길드를 통하는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상대는 자유 영혼인 집시다. 그런 상대가 정보 길드의 그물망에 들어올 리 없다.

나는 열심히 빵을 나눠 주며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한 가지 보람이 있다면, 사람들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거였다.


“좋은 일 하네, 아기.”

“네에.”

“머리 색이 분홍인 사람은 처음 보네.”

“우웅?”

“귀엽다는 뜻이야.”

인상이 푸근한 할머니들은 한 번씩 나를 귀엽게 바라보며 지나가 주었다. 나는 볼이 발그레해진 채로 열심히 빵을 나눠 주었다.

지금까지는 주술사로 보이는 사람의 실마리도 잡지 못했다.

악셀 미르모드를 잡을 방책을 찾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내 명줄이 타들어 가고 있는 게 보이는데, 그래도 기분이 이상하게 뿌듯했다. 나는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이마를 쓱 닦았다.

그렇게 준비한 빵이 착착 소진되어 갈 때쯤. 시녀 언니들이 빵을 조금 더 가지러 잠깐 보육원 안으로 들어간 사이.

뒤늦게 등장한 몇몇 집시들이 왈칵 성을 냈다.


“너 귀족이지? 우릴 동정하는 거냐?”

“이딴 빵, 맛대가리도 없어.”

집시들은 내 쪽으로 와서 턱짓을 하며 욕설을 지껄였다.

그 와중에 내가 든 커다란 쟁반을 건드려서 톡, 하고 빵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나는 충격받지 않고 의연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다른 아이들은 달랐다. 열심히 오밀조밀하게 만든 빵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걸 보자 보육원 아이들의 시선이 심각하게 흔들렸다.

상처받은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던 테드가 내 옆으로 다가와 칼을 빼어 들 듯이 집시를 위협했다.


“이만 물러나.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

“하! 대단한 귀족 나으리야. 기사까지 대동하셨네. 퉤!”

침을 땅에 퉤 뱉는 것을 보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딴 동정 필요 없다고, 알겠어?”

가만히 있던 나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안니야!”

“……그럼 뭔데.”

그들의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그냥, 내 마음이야.”

“……뭐? 그딴 게 어딨어.”

“주고 시퍼서 주는 고야. 그니까 받고 싶으면 바다. 동정 가튼 거, 안니니까.”

집시들이 씩씩거렸다.

그들은 내가 내민 빵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냥 고개를 돌렸다.


“……야, 가자.”

“기사 때문에 봐주는 줄 알어.”

빵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데도 안 받는다는 건, 정말 싫다는 뜻으로 읽혔다.

조금 시무룩해진 내 곁에 대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까 나를 싸늘하게 노려봤던 때와, 처음 만났을 때 내게 ‘꺼져’라고 말했던 소년답지 않게, 조금쯤은 유순해 보이는 낯으로.


“……시엔 미르모드.”

“응?”

“……너 좀 강단 있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레온하르트가 떠올랐다.

내 이름을 부르는 대장을 보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대장이 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직도 궁금해?”

“……으응?”

“내가 저 새끼를 팬 이유.”

여전히 격해 보이는 태도.

나는 보육원으로 들어가는 갈색 머리 소년을 바라보았다.


“응, 궁금해.”

한 번쯤은 물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가 피식 웃으며 제 머리칼을 넘겼다.

하지만 분명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내 반응이 어떨지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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