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얼굴만큼이나 순진해 빠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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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얼굴만큼이나 순진해 빠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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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얼굴만큼이나 순진해 빠졌어
2023.04.25.
대장이라는 표현으로 일컬어진 소년을 제외하고, 다른 아이들이 눈을 끔뻑거렸다. 그중에서 제일 왜소한 소년이 말을 꺼냈다.
“그,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모?”
내 반문에, 대장이라는 소년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는 데드리가 관절을 꺾어도 쫄기는커녕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대장의 곁에 있던 남자아이가 웅얼거렸다.
“야, 아무튼, 너, 너넨 뭐야! 우리 대장은 잘못 없어! 다 이놈이-.”
데드리가 음산하게 속삭였다.
“고건 나랑 상관이 없어라. 다 필요 없고 울 아그님께 사과혀.”
“아니…….”
왜소한 소년이 입을 삐쭉였다. 데드리 언니의 표정은 더욱 음산해졌다.
“아그야, 너도 맞아야 말을 듣겄냐.”
대장이라는 소년이 우리를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레드. 물러나 있어.”
그는 폭력을 행사하려던 사람답지 않게 차분히 말했다.
“너무 열 받은 상태라, 사과하지. 하지만 내 의견은 변하지 않아. 네 일이 아니면 나가.”
나는 대장을 향해 당차게 답했다.
“안니야, 내 일이야.”
“뭐라고?”
드물게 당황한 표정의 대장을 보며 나는 배시시 웃었다.
“나 오늘 요기 놀아 주러 와써! 아니, 너희랑 놀러 와써!”
그의 낯이 당황으로 물들 때, 나는 잽싸게 문을 활짝 열었다.
잔뜩 서 있는 소년들의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척척, 중앙의 소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인누 와! 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소년은 먼지 묻은 제 손을 털지도 않고 내 손을 꾸욱 움켜잡았다. 린치당하는 중이라 몰랐는데, 생각보다 악력이 세서 손에 빨간 자국이 남았다.
나는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어렵게 웃었다.
“…….”
갈색 머리 소년은 별다른 감사 인사도 없이 가만히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갠차나?”
“……뭐, 네.”
나는 묘하게 주변 눈치를 살피듯, 나를 훑듯 응시하는 소년을 일으켜 준 다음 몸을 바로 세웠다.
201호 안은 어느새 편 가르기가 된 것처럼 반으로 나뉘었다.
왼쪽 공간에는 나와 공격당한 갈색 파마머리의 소년, 그리고 데드리 언니. 그리고 우측에는 대장을 위시한, 괴롭히던 소년 대여섯 명들.
나는 몸을 뻣뻣하게 세운 다음, 데드리 언니를 향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온니, 구런데…….”
데드리 언니는 내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 된 듯 저 아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야. 무슨 일이셔유.”
나는 그녀의 불끈한 근육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말투 왜 그러느냐……?”
순간 자신의 말투를 자각한 데드리 언니가 눈을 크게 떴다.
“헙.”
그녀는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볼을 빨갛게 붉히며 발을 동동 굴렀다.
너무 화가 나서 프트 영지 사투리가 나온 것 같다며.
***
그로부터 십여 분 뒤. 집시 보육원 201호는 애매한 분위기 속에 잠겨 있었다.
집단 린치를 당하던 갈색머리 소년은 처음에 데면데면하더니, 내 정체가 대단하다고 느낀 듯 연신 나에게 굽신거렸다. 거의 아부를 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넌 귀족이지?”
“웅?”
“이상하게 꾸몄지만 알 수 있어. 거리의 아이들은 아는 법이지. 그을음이 약간 묻은 얼굴이지만 분명 좋은 냄새도 나고…….”
그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아, 미안.”
“으음, 응…….”
나는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데드리 언니의 소맷귀를 쥐었다.
‘좀 이상하네…….’
분명 폭력에 시달리는 소년을 구해 주기는 했는데, 애시드를 구했을 때처럼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어쩐지 탐탁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폭력은 나쁜 거야. 그러니까 구해 준 게 맞는 거고.’
그냥 평범한 5살의 두뇌와 어른의 두뇌가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을 지나며 체화된 육감은 언제나 쉽게 살아나는 법.
‘하지만 뭔가 촉이 수상해. 폭력을 행사하는 쪽 입장도 일단 들어는 봐야 하나?’
나는 그냥 평범한 봉사자지만, 여기 201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까 그 대장을 찾아가서 이유를 들어나 볼까, 싶어졌다.
“잠깐만 여기 이써!”
“어어……?”
“아기님!”
갈색머리 소년과 데드리 언니, 둘 다 나를 만류하지 못하도록, 잽싸게 몸을 일으킨 다음 청설모처럼 빠르게 대장을 향해 달렸다. 빠르게 제 앞에 도착한 나를 노려보면서, 그가 짓씹듯 중얼거렸다.
“어쨌든 폭력은 나쁘다 이딴 말 할 거면 꺼져.”
“웅? 아닌데.”
나도 폭력주의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하는 대신 나는 근엄하게 말했다.
“나랑 재민는 거 하자!”
“넌 나 싫어하잖아.”
“움…….”
나는 그를 향해 엄숙하게 물었다.
“아직 안 시러해! 아까 왜 칭구 괴롭혀써?”
대장은 딱히 말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비죽이 조소하며 나를 조롱하듯 말했다.
“내가 왜 그랬는지 말하면, 너 같은 외부 사람들이 제대로 듣기나 해?”
“웅!”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장은 여전히 비웃음만 흘릴 뿐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거짓말하네. 오늘 처음 본 너한테 내가 사정 하나둘 다 말할 것 같아?”
“움…….”
“얼굴만큼이나 순진해 빠졌어.”
나는 불신이 가득한 대장을 보며 속으로 고개를 기우뚱했다.
생각해 보면 아까 내 손을 잡은 아이의 악력이 생각보다 세기도 했고, 맞은 부분도 없어 보였으며, 따로 흉터 같은 것도 없어 보였다.
‘분위기가 수상쩍단 말이지.’
나는 삐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인 대장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을 깜빡였다.
햇빛에 비쳐서 그런가, 푸르스름한 머리가 자꾸 갈색으로 보였다가 말았다가 했다.
‘일단…… 이 아이들의 마음을 열어 보고, 내 원래 목표도 제대로 세워 보자.’
나는 총총 뒷걸음질을 친 다음 시녀 언니에게 까딱까딱 고갯짓했다. 그다음 내 입가에 귀를 댄 그녀에게 조심조심 속삭였다. 내 사악한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자 데드리 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게 보였다.
“어떻게 그,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웅!”
데드리 언니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근손실을 걱정해서인지 급하게 손등으로 훔쳐 냈지만. 나는 볼 수 있었다.
“너무…….”
“이 조그만 말랑 콩떡 같은 분이, 기특해서…….”
울기까지 할 일은 아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 의아해졌다. 그러나 데드리 언니는 감동에 북받친 표정으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
보육원의 주방에 미르모드 가문의 파티시에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거대한 밀 포대와 버터 등을 이고 진 채로 이 보육원 안에 위풍당당하게 나타나 내게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시엔 님을 뵙습니다!’
내가 볼을 발갛게 물들이면서 부끄러워하자 그들은 허허실실 웃었다.
그러나 역시 프로답게, 나를 귀여워하면서도 주방을 정리하고 빵과 버터를 채워 넣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 모든 장면을, 보육원 아이들이 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오늘의 계획을 떠올리며 헤실헤실 웃었다.
바로 <시엔이의 일일 빵집>!
아까 보육원장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미르모드…… 가문의 영애셨다고요?’
그녀는 급하게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여기 있는 집시들을 위해서 일일 빵집을 만드시겠다고요? 아이들과 함께 빵을 만들고, 그걸 집시들에게 무료 나눔해 주시겠다는…… 아이디어시죠?’
‘웅! 재룟값은 시엔이가 내구!’
‘파티시에가 필요할 텐데…….’
나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집에서 데려오께!’
‘……하아, 아이들이 이번 계기로 서로서로 친해지면 좋겠네요.’
‘구치? 애들 착해질 구야!’
내 말에 보육원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뭔가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그건 나에게 알려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모른 척 내 계획에 대해서만 구체적으로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계획은 아래와 같다.
교도소에서는 청년들을 교화할 때 빵을 만들게 한다.
빵을 만들고 먹으면서 성취감도 느끼고, 기분도 좋아지게 되며, 공격력도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얼핏 듣기로는 집시 보육원 아이들은 워낙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니는 터라 많은 정보를 안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번 계획을 통해 그들과 친해지면서 내 정보통으로 삼으면 장기적으로도 좋다.
이 보육원에서 무료로 빵을 나눠 준다는 소문이 퍼지면, 주술사도 이곳에 방문할 확률이 높았다.
원작 속 멜로디아의 말에 따르면 이 주술사는 뒷골목에 사는 굶주린 인물이라니까.
그렇게 해서 내 계획대로 애시드와 테드, 보육원장님, 시녀들이 주방에 한데 모였다.
파티시에들이 열심히 재료를 운반하는 사이, 나 한정 칭찬봇인 그들은 나를 헹가래라도 칠 기세였다.
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저렇게 말랑하신 분이 이런 귀한 생각을 하다니.”
“아직 나이도 이리 어리신데…….”
“아까 보육원 아이들이 싸우는 걸 보고 마음에 걸려 하셨던 모양이에요.”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실 건 없는데, 원장으로서 반성하게 되는군요. 어린아이라고만 느꼈는데…….”
그들의 대화 속에서 나는 ‘폭력 때문에 심히 걱정해서 아이들을 위해 일일 빵집을 만들고 그들의 재활과 교화를 돕는 성녀’쯤으로 각색 및 포장되었다.
특히 애시드는…….
“저도 거리에서 살았는데, 시엔 님께서 주워 주셨어요.”
주방 바깥, 멀리서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빼꼼히 기웃거리던, 대장을 위시한 소년들까지 다 들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나는 삐죽빼죽 털실 같은 머리를 마구 매만지며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지나친 과장법에 얼굴이 다 빨개진 것 같아서였다.
***
그 자리의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있지만 여기, 깊고도 과도한 감명을 받을 만한 사람들은 또 있었다.
바로 마티어스의 명에 따라 시엔의 감시역을 맡은, 패트와 매트였다.
패트와 매트는 시엔이 하는 행동을 다 보고, 들었다.
말까지도 전부 다 호시탐탐 염탐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 하루 종일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저 조그만 아이가, 악당 가문에서 사는, 최고의 악당 마티어스 미르모드의 딸이!
보육원 아이를 구한 데다 빵까지 무료로 나눠 주다니.
악당답게, 그들은 머리털 나고 이런 정화되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결코, 어린아이가 고사리손으로 하는 선행 따위에 넘어갈 만큼 허접한 악당이 아니었으니까.
겨우 정신을 차린 패트와 매트가 입 안쪽 살을 꾸욱 깨물었을 때였다.
쪼르르 달려간 시엔이 대장 소년의 손을 꼬옥 잡아챘다.
그 모습을, 패트와 매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혹시 시엔이 자신을 조롱하고 모욕한 저 대장이라는 집시 꼬마 녀석을 똑같이 모욕하고, 조롱할까 싶어서였다.
‘그’ 마티어스 님의 딸이라면 신랄하게 모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말로 사람을 죽이고, 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분이니까.
일전에 마물 게이트가 열렸을 때 마티어스가 마물을 베어 냈던 상황을 떠올린 패트와 매트의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그런데……. 시엔은 남달랐다.
“대장!”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대장을 향해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혹시, 저 대장이라는 아이와 화해를 하려 하는 걸까?
정말 저분은 아기 천사구나.
서로가 동시에 그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패트와 매트는 급하게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드는 생각과 실질적으로 하는 말은 다른 법.
“여, 역시 난 어린 애들은 싫어.”
자신이 말을 더듬었다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패트가 중얼거리자,
“……그……렇지. 역시 나도 마찬가지라네.”
자신이 말문을 어렵게 틔웠다는 것을 모르는 매트가 다음 말을 받았다.
여전히 악으로 물든 그들의 내면은 그 사실을 냉정하게 외면했다. 패트와 매트는 애써 위악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잇새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지금의 그들은 몰랐다. 의식적으로 계속 시엔을 싫어하려 하는 것이, 자신들의 최후의 보루라는 것을.
이 보루가 무너지고 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시엔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시엔을 응시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
“저 대장이라는 애 말이야.”
“어?”
“뭔가 익숙하지 않아?”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던 그들이니, 누구인지 알 법도 했다. 그런데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분명 익숙한 얼굴인데……. 저 얼굴에 누군가가 비치는 것 같은데.
누군가 머릿속을 마카로 까맣게 칠해 버린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