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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살려 주세요, 아기 주인님 (36/77)


36화. 살려 주세요, 아기 주인님
2023.04.04.


차에 독이 들어가 있는 것은 델피아가 찻잔에 입술을 대자마자 눈치챘다.


‘정화시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할머니의 독이라 안 되나?’

델피아의 이능은 신체 변형이니, 충분히 독을 정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틀린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다리를 달랑거리며 흔들었다.


“구치만 내가 살려 줄 수 이써.”

델피아가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응시했다. 그녀의 입술은 시시각각 보랏빛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나는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며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오, 그래?”

중독되어 가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델피아는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그녀는 나를 향해 호기심 넘치는 눈을 반짝였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웅!”

“어떻게 날 살려 줄 수 있는데?”

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읊조렸다.


“나한테는 온니를 살릴 수 있는 무기가 있고든.”

“……무기?”

“웅!”

순간 델피아의 눈동자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그럼 내가 너한테 뭐 해 줘야 하는데?”

나는 순간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그냥 치료해 주려고 했는데……! 아플까 봐……!’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법이다. 여긴 악당 가문이니까. 나는 눈매를 뾰족하게 바꾸며 말했다.


“다, 당연히 나한테 해 줘야 할 거 이써.”

델피아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으응, 뭔데?”

“그건…….”

아빠를 위협하지 못할 정도로, 힘을 조금만 빼앗아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델피아 온니가 가진 힘의 일부를 조.”

델피아 같은 이능력자들은 힘의 일부를 마나 구슬로 만들 수 있었다.

이 미르모드 가문의 최종 보스인 악셀 미르모드가 그런 흉악한 놈이었다.

그는 자신을 공격하는 이능력자를 협박해 그가 지닌 힘의 일부를 이어받았다. 마나 구슬을 제 몸에 흡수하는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힘의 일부라면, 마나 구슬을 달라는 거야?”

“웅! 쪼끔만 주면 대!”

내가 해맑게 대답하자 델피아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점점 더 아리송해졌다.

분명 기분 나빠해야 정상일 것 같은데, 왜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럼 내가 네 부하가 되는 거네?”

부하라는 말을 내뱉는 데부터도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웅? 그러케까지는 아닌데.”

힘의 일부를 떼어 준다고는 해도 부하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저 내가 그녀의 힘 중 일부를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한결 어리둥절해진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델피아는 박수를 짝, 쳤다.


 


“난 좋아. 부하 할래.”

“……?”

“너한테 내 생명을 맡기고 싶어. 엄청 재밌을 것 같아.”

델피아의 입매가 나른히 휘어졌다.


‘아니, 왜 이래. 이 사람!’

생명까지는 맡고 싶지 않은 나는 조금 난감해졌다.

하지만 델피아는 벌써 신이 났다. 그녀는 제 심장 어귀에 손을 짚더니 자그마한 마나 구슬을 만들어 냈다.


“가져. 이게 내 목줄이야.”

마나 구슬은 사람의 특성을 따라간다던데. 나는 그녀의 손에 담긴 마나 구슬을 바라보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내 주먹보다 조금 작은 마나 구슬은, 마치 그녀의 머리 색을 닮은 찬란한 은색으로 빛났다.


“아, 우리 아기 목걸이로 만들어 줄까?”

나는 새초롬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기 안니야.”

내게 손을 내밀면서, 델피아가 나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주인님.”

델피아의 손에서 마나 구슬이 예쁜 은색 목걸이로 바뀌었다.

그녀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목걸이를 내 목에 쏙, 걸어 주었다. 델피아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살려 주세요.”

전혀 삶을 원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지만……. 그녀의 마나 구슬은 이미 내 손 안에 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델피아는 제법 순순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델피아의 설정값 중에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상대에 한에서는 상당히 물렁물렁 복숭아 같다는 것이 있었던 기억이 났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델피아에게 상당히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내게,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변태 언니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녀를 빠르게 외면하고 문 쪽을 바라보며 커다랗게 말했다.


“이제 들어 와두 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고 새하얀 의복을 입은 꼬마 소년, 애시드가 들어섰다.

나는 화사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저께까지만 해도 평범한 일반인이었지만, 어제부터는 능력자가 된, 애시드가 등장했다!


“저 꼬마가 날 살릴 수 있는 무기라고?”

델피아는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확고했다.


“웅! 살릴 수 이써!”

어제, 신성력 검사 때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말이지…….

나는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애시드를 보며 활짝 웃었다.

***

바로 어제, 세노아 신전의 신성력 검사실 내부.

신성력 검사실은 신관과 당사자, 단둘만 들어가야 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문 바깥에 시엔과 마티어스를 남겨 두고, 애시드는 홀로 검사실 내부로 들어섰다.

시엔이 사라지자마자 애시드는 조금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이겨내야 했다.

자신이 시엔에게 의지하는 게 아니라, 시엔이 자신을 믿어 주었으면 하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검사실 내부 분위기는 싸늘하고 냉랭했다.

신성력 검사를 하는 신관은 평소보다도 귀찮은 낯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정말로 따분하고 귀찮았으며, 사실은 조금 짜증도 났다.


‘하여튼 개나 소나 죄다 신성력 검사를 한다고 날뛰어서는. 쯧.’

최근 들어 미르모드 가문의 악행과 대비해 신전의 선행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신성력에 대한 갈망을 품게 되었다. 그 갈망은 ‘혹시 내게도 신성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으로 이어졌다.

그 탓에 죽어나는 건 신성력 검사 담당인 신관 본인이었다.

어제도, 그제도 야근한 탓에 안 그래도 좋지 못했던 그의 인성은 현재 밑바닥을 치고 있었다. 게다가 성기사의 동생이라지만 악당 미르모드 가문에 의탁하고 있다니. 더 고운 말이 나가지 않는 것이다.


“앉아라. 기대는 하지 말고.”

“……네.”

애시드가 제 맞은편 의자에 앉자마자 신관이 깔아뭉개듯 말을 이었다.


“모를 것 같아 말해 주는데.”

애시드가 신관을 또렷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서 무언가 묘한 기색이 느껴졌다. 신관은 두어 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꼬마야, 신성력에는 총 네 가지 범주가 있다. 하나는 공격형 신성력, 하나는 방어형 신성력. 다른 하나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예언형 신성력이고, 마지막으로는 치유의 신성력.”

신관은 모르겠지만, 거리의 난민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공격형이나 방어형 신성력을 지닌 사람은 성기사가 되고,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신성력을 지닌 사람은 신관이나 신녀가 된다. 치유의 신성력을 지닌 사람은 세상에는 거의 없지만, 힐러가 된다.

힐러는 죽기 직전의 모든 것을 치유하는 힘을 지닌다고 했다.


“치유의 신성력을 지닌, 힐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되고…… 뭐, 네가 기사인 형처럼 되고 싶은가 본데.”

신관이 애시드를 비웃듯이 피식 웃었다.


“그 나이 먹고 신성력이 발현되는 케이스는 극히 드물다는 것만 알아 둬라.”

애시드는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지금 검사 안 하고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다.”

“바, 받을…… 거예요.”

애시드도 알고 있지만 혹시나 해서 온 것이었다.

주눅이 들기는 했지만 절대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은근히 또렷한 목소리에 신관은 잠시 멈칫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애시드를 향해 자그마한 큐브를 내밀었다.


“쯧. 그럼 큐브 검사부터 시작하지. 이 큐브 위에 손을 대라.”

신관은 애시드에게 신성력을 검사하는 과정을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이 별거 없어 보이는 소년이 첫 번째 단계인 큐브 검사에서 탈락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신성력 검사는 총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신성력을 지니고 있는지 검사하는 것이었다.

이 검사는 큐브 검사로 이루어지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테이블 위에 있는 큐브에 손을 가져다 대면 끝이었다.

신성력 검사를 하겠답시고 찾아온 어중이떠중이들의 99% 이상이 이 수준에서 탈락했다.

다른 하나는 어떤 종류의 신성력을, 얼마나 지니고 있는지 검사하는 것이었다. 이 단계까지 들어 오는 일반인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 굳이 설명할 필요 없다는 생각이었다.

신관은 턱을 괸 채로 눈을 느슨히 내리 감았다 뜨며 애시드를 바라보았다.

진창에서 굴렀다던 거지답지 않게 손을 내밀어 큐브에 대는 폼은 제법 귀공자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 신성력이 있을 리가 없…….


“……음?”

신관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큐브를 내려다보았다.

신성력을 지닌 인간이 큐브를 만지면 그 손에서 새하얀 빛이 일렁인다.

그리고 지금 그의 눈앞에서는 새하얀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미간을 잠시 찌푸렸던 신관이 한쪽 입꼬리를 비웃듯 올렸다.


“……꼴에 미약한 수준이나마 힘이 있는 모양이군.”

애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관은 애시드를 힐끔 바라보았다. 애시드는, 조금쯤 안도하는 눈치였다.

테드의 남동생이라 했으니 사실 아예 예상 못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큐브 검사를 통과한다 한들, 그뿐이다.

큐브 검사를 통과한 1% 역시도, 다음 검사에서는 별 쓸모없는 수준의, 빈약한 신성력을 지녔다는 판정을 받는 경우가 수두룩했으니까.

그는 냉랭하게 애시드를 향해 말을 내던졌다.


“다음 검사가 있으니 안심하지 마라, 꼬맹이.”

“안심……하지 않았습니다.”

의외로 상처받지 않은 듯한 태도는 내심 놀라웠으나, 그뿐.

신관이 애시드에게 로사리오를 건넸다.

겉보기에는 쇠사슬을 둥글게 말아 그 안에 구슬을 겹겹이 채워 넣은 평범한 묵주처럼 보이지만…….

하지만 저것은 분명 신이 직접 내린 로사리오였다.

로사리오는 신성력이 강한 인간을 직접 선택하는 귀중한 물건이었다.

인간이 로사리오를 손에 쥐면, 그곳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얼마나 강한 신성력을 가졌는지에 따라서 로사리오에서 흘러나오는 마나의 색이 달라졌다.

보통은 흰색이고, 조금 신성력이 강하다 싶으면 붉은색, 가장 강력한 신성력을 지닌 인간이 손에 쥐었을 경우 금빛을 띠었다.


“이 로사리오를 쥐어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라.”

“……네.”

신관은 테이블 위로 고개를 처박고 보고서를 썼다.

[1차 신성력 검사 : 통과.

2차 신성력 검사 결과, 신성력 미약.]

이 정도로 쓰면 되겠지.

이미 결과를 속으로 다 정해 둔 신관과 달리, 애시드는 차분하게 로사리오를 잡아 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전혀 관심도 없고, 오히려 냉대하는 기색이 만연한 신관 앞에서도 꿋꿋했다.

지금까지 저렇게 대하는 사람들은 많았으니까. 오직 시엔만이 자신을 인간으로 대우해 주었으니까.

저런 대접에는 상처조차 받지 않았다.

로사리오를 손에 꼭 움켜쥔 다음, 애시드가 조용히 물었다.


“이 로사리오를, 한 손으로 이렇게 잡으면 되나요?”

신관은 성의 없이 시선을 들어 올린 다음 아무렇게나 대답하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애시드가 손에 쥔 로사리오에서 선명한 푸른 빛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뭐, 뭐야.”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검사해 왔지만, 단언컨대 처음 보는 선명한 푸른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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