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독인가 보네. 나 이제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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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독인가 보네. 나 이제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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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독인가 보네. 나 이제 죽어?
2023.03.31.
다음 날 아침. 나는 당근 모양 가방을 어깨에 메고, 한 손에는 아빠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아빠는 세노아 신전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아빠랑 꼭 같이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신전이 위험하기는, 뭐가 위험해. 내가 있는데! 라고 생각했지만…….
아빠는 논리적으로 말했다.
‘신전과 미르모드 가문은 적대적 관계야, 시엔. 너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어. 아빠가 어떻게든 협, 아니, 설득해서 미리 출입증을 받아 올 테니, 같이 가.’
아빠의 진지함에 설득되어 버린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빠와 함께 왔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오늘은 보호자가 있는 쪽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사실상 내가 아빠의 보호자인 셈이지만, 그래도.
그런데 세노아 신전에 아빠, 애시드와 함께 도착하자마자 나는 크나큰 문제를 맞닥뜨렸다.
‘저 무섭게 생긴 아저씨들은 왜 왔어!’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바깥에서도 샌다더니.
무섭게 생긴 아저씨들이 귀여운 핀을 꽂고 신전 주변을 경호하듯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냥 무서운 아저씨들이 돌아다녀도 이상할 텐데,
죄다 플로랄 패턴의 의상을 입은 데다, 머리에 꽃을 달고 입가에는 순박한 척 어색한 미소까지 짓고 있으니…….
……말 그대로 엄청난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시녀 언니들에게 듣기로는, 분명히 신전은 미르모드 가문과는 적대적 관계여서 오래 머물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이래도 되는 걸까.
“저 아조씨들…….”
“응.”
신전의 벽을 촘촘히 둘러싼, 키가 족히 2m는 되어 보이는 아저씨들이 보였다. 흉악한 인상에 어설픈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아빠에게 소곤소곤 말했다.
“머리에 핀 모야? 휴우…….”
“……이상해?”
“안니야…….”
“이상하지.”
“안니, 안 이상해…….”
이상하게도 내 말을 들은 아빠의 표정이 굳자, 아저씨들의 어색한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그래도 저 아저씨들은, 다행히 신전 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했다.
‘아저씨들이 시비 걸려서 호구라는 거 들키기 전에, 최대한 빨리 검사받고, 테드 데리구 나가자.’
나는 아빠를 따라 쪼르르 세노아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일전에 신전에서 시녀 언니들이 쫓겨난 뒤로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느낌이었다.
신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우리를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대체로 엄숙하고 진지해 보였다.
그런데…….
‘테드가 왜 없지? 분명히 나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어, 테드 성기사님은요?”
내가 눈을 깜빡이며 묻자 신관이 안타깝다는 듯이 침음을 삼켰다.
“테드 님께서는 신녀들의 다과회에 가셨습니다. 하루 종일 출타하실 예정이라 만나 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분명 이상했다. 애시드가 온다고 한다면, 어떤 스케줄이든 다 버리고 나올 만한 사람이었다, 테드는.
나는 의문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다과회에는 왜요?”
“신녀님의 호위를 맡으셨습니다.”
내게는, 테드에게 애시드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문득 테드가 보냈던 편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가브리엘레가 계속 호위를 맡긴다는 그 내용 말이다.
“……음, 혹시 가브리엘레 신녀님이요?”
신관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저건 어떻게 알았느냐, 같은 식의 말일 것이다.
“네, 가브리엘레 님의 호위로 가셨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외부에 있을 예정인지라, 실례지만 다음 기회나 되어야 만날 수 있을 듯싶습니다.”
상황이 맞아떨어진다.
가브리엘레도 테드를 제 기사로 노리고 있고, 나를 적대시하고 있는 눈치다.
‘가브리엘레도 테드의 재능을 눈치챘나 봐.’
나는 귀밑머리를 귓가에 꽂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내 왼편에 서 있던 애시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시엔 님.”
“웅?”
나는 애시드를 바라보았다. 애시드가 조심스럽게 나를 향해 중얼거렸다.
“형을 마, 만나고 싶으셨던 것 아니셨어요?”
“웅, 그랬지.”
그렇지만 오늘 없으면 내일 오면 되고, 내일도 없으면 모레 오면 되고.
매일매일 여기 죽치고 있으면 되니까.
‘난 아주 집요하거든!’
하지만 내 마음을 모르는 애시드는 조금 풀이 죽은 기색이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나를 향해 물었다.
“그럼 어쩌죠……. 내, 내일 다시 오면.”
“아기는?”
“……네?”
“아기는 형 안 만나두 대?”
“저, 저는……. 신성력 검사부터 받고. 형은…… 다음에 만나도 돼요.”
애시드의 의지가 꺾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애시드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그럼 갠차나. 네가 이쓰니까.”
그의 말이 맞다.
오늘은 테드와 애시드를 만나게 하려는 날이기도 하지만, 애시드의 신성력 검사를 위한 날이기도 했다.
‘어쩌면 애시드도 신성력이 있을 수 있지……!’
신성력은 유전이 된다고 하니까, 어쩌면 애시드의 신성력이 테드보다 풍부할지도 모른다.
생각을 마친 나는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역시 칭찬에 약한 듯한 애시드의 얼굴은 어제처럼 화르르 불타올랐다. 그러니까 저 모습은 마치……. 불타는 고구마 같았다.
***
애시드의 머릿속에는 뎅, 뎅거리는 종이 울리는 것처럼 시엔의 목소리가 떠다녔다.
“그럼 갠차나. 네가 이쓰니까.”
“그럼 갠차나. 네가 이쓰…….”
“그럼 갠차나. 네가…….”
시엔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애시드는 귓가에 들려 오는 삐이- 소리를 느꼈다.
이명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 말에 순간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은 건 확실했다.
마음에 살랑살랑 봄바람이 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난생처음으로 느껴보는 감각의 파도에 애시드의 입이 살짝 벌어지고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기야?”
시엔이 의아한 듯이 자신을 부를 때까지도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할 만큼, 애시드는 당황한 상태였다.
“아기야!”
시엔이 눈을 깜빡거리며 제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야, 겨우 대답할 말을 찾았을 정도였다.
“……네, 네!”
이상하다.
시엔의 녹색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젯밤 내내 신성력 검사를 받을 수 있을지 말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형에 대해 고민했던 것들도 전부 부질없게 느껴졌다.
“이제 신성력 검사받으러 가야지. 긴장대서 구래?”
신성력 검사 때문에 긴장했던 마음도, 전부 다 젓가락에 휘저어진 계란처럼 풀어져 버리고 말았다.
애시드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 가요……. 기, 긴장돼. 돼서요.”
“그래? 힘을 주께!”
애시드는 순간 힘을 준다는 말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때 시엔이 애시드에게 왼손을 척, 내밀었다.
“자아, 손!”
과연 시엔 님의 손을 잡아도 될까, 싶은 의문이 차올랐다.
자신은 구걸이나 하던 평민이고, 시엔은 고귀한 귀족이었다.
감히 그녀의 손을 잡으면 불경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손이 주춤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려 했을 때였다.
“아아, 손 아푸다아.”
시엔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고민할 틈도 내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소년은 제 앞에 내민 소중하고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시엔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손깍지를 끼워 주었다.
“힛, 이제 검사하러 가자!”
“네.”
시엔과 함께 걸을 때마다 코끝에 좋은 아기 냄새가 났다.
‘정말로, 지켜 주고 싶어…….’
제 생각에 몰두한 애시드는 상황을 관망하듯 잠자코 곁에 서 있던 마티어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곧 있을 신성력 검사가 기대가 되었다.
제발 시엔 님에게 도움이 되는 쪽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신전 내부의 화려한 문이 보였다.
애시드는 몸에 힘을 주고 단단하게 걸어 나갔다.
등을 곧게 펴고, 당당해져야 했다.
지켜야 할 시엔이 있으니까.
***
애시드가 신성력 검사를 받은 다음 날 아침. 델피아의 저택 앞에 자그마한 스케치북 편지가 하나 배달되었다.
[오늘 오후 두 시, 티 파티에 초대함니다.
-시엔-]
삐뚤빼뚤한 글씨는 누가 봐도 시엔이 직접 적은 것이 분명했다.
이런 티 파티 초대는 처음이라, 델피아는 인생 최초로 조금 당황했다.
게다가 상당히 순순하고 갑작스러운 편지였다. 한 달 뒤는 되어야 얼굴을 빼꼼히 비출 줄 알았는데.
‘시엔 미르모드, 마티어스가 별로 아끼는 아이는 아닌가.’
만약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딸이라면 자신과의 티 파티를 허락했을 리 없다. 델피아가 마티어스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마티어스 역시도 델피아를 알고 있었으니까.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방향으로 했겠지.
“마티어스 미르모드의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놈은 흉악해서, 죽일 수도 있…….”
“마티어스한테 죽는 게, 뭐.”
시녀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재밌으면 그만이지.”
델피아가 히죽 웃었다.
자신의 미래를 전혀 모르는 웃음이었다.
***
그날 오후 두 시, 마티어스 저택 안. 혈혈단신으로 들어선 델피아는 범상치 않은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섰다.
응접실 안은 정식 티 파티장처럼 화사하게 꾸며져 있었다.
‘제법 잘 꾸며 뒀네.’
소녀 취향의 분홍색 티 파티장 안. 제 몸의 반절만 한 꼬맹이가 쪼르르 자신의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언니!”
델피아는 살면서 처음으로 살짝 당황했다.
그녀는 시엔을 마주 보면서, 자신이 저만한 나이대의 꼬마 애를 이렇게 직접적으로 가까이 만나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뭐야, 조그맣잖아.’
……너무 조그매서 콕 찌르면 금방 죽을 것 같아 보였다.
게다가 그 누구도, 시엔 미르모드가 이렇게 귀엽게 생겼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
환영 전령구로 설핏 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귀여움이었다.
우선, 오동통한 볼살.
입에 넣고 부르르, 하고 싶을 정도로 탱글탱글해 보였다.
“요기 앉으……. 웅? 왜 그러케 바?”
다음으로는, 말꼬리가 살짝 어눌하게 늘어지는데…… 꾸욱 눌린 찐빵이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무척 새침했다.
“아씨, 만져 보고 싶네…….”
“웅?”
“볼살 한번, 만져 보고 싶어. 만지게 해 주면 안 돼?”
시엔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시로.”
고개를 저을 때마다 부푼 볼살과 함께 예쁘게 묶은 양 갈래머리가 양쪽으로 휘날렸다. 델피아는 나쁜 의미로 법 없이도 잘 살아남을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시엔에게 미움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델피아는 그냥 멈췄다.
그리고 시엔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이 맹랑한 꼬맹이가 준비한 이 티 파티를 즐기기로 했다.
오늘 티 파티에서 정확히 뭘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설마 이 조그만 꼬맹이가 뭔가를 했겠어? 싶은 마음이 반, 뭔가 새로운 이벤트를 만들어 줬으면 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자아, 이 차에는 신 레몬을 넣어써요.”
쪼끄만 게 데뷔탕트를 끝낸 레이디가 티 파티를 호스트하는 것처럼 제법 제대로 안내를 한다.
“그래?”
시엔이 테이블을 가리키며 의젓하게 말했다.
“녜. 마셔요!”
델피아는 별생각 없이 레몬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를 보면서, 시엔이 입꼬리를 올려 배시시 웃었다. 다시 봐도 홀리는 눈웃음이었다.
별생각 없이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는데 시엔이 조그만 앞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움, 그 차, 온니 오면 주라고 함미가 준 건데…….”
할머니라면 루켈라 공작 부인인가, 하고 생각하는데 시엔이 고개를 갸웃하며 밝게 말했다.
“은수저 색이 변해써. 독인가 바!”
은수저 색이 변했다는 건, 차 안에 독이 들어 있다는 소리였다.
허무하게 당해 버린 델피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그래, 독인가 보네. 그럼 나 이제 죽어?”
첫 티 파티부터 독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놀라지도 않고 하다니. 떼쓰기가 특기인 네다섯 살 꼬맹이로는 절대 안 보였다.
정말 악당 미르모드 가문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보여서, 좀 귀엽기까지 했다.
이제 델피아는, 이 귀엽기만 한 꼬맹이가 기꺼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독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시엔은 차 안에 독이 든 걸 몰랐을까? 이제야 안 거라면, 어떻게 대처를 할까?
새삼 몸에 피가 돌면서 짜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그녀는 내내 지루한 인간 군상들만 보아 왔다. 그저 틀에 박힌 전형적이기 짝이 없는 인간들은, 델피아에게 인간 혐오를 불러왔다.
그러나 시엔은 달랐다.
이 자그마한 소녀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면서 저를 방심시킨 다음, 악마처럼 제 차에 독을 풀고, 여상하게 사형 선고까지 내렸다.
이 모든 일련의 행동들이 마치 잘 짜인 행위 예술을 보는 것처럼 완벽했다.
“아아…….”
델피아는 황홀한 표정으로 시엔을 바라보았다. 델피아의 눈동자가 시엔과 단단히 맞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