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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사랑스러운 분홍색 솜사탕 같은 꼬맹이 (34/77)


34화. 사랑스러운 분홍색 솜사탕 같은 꼬맹이
2023.03.28.


테드가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리 성기사라지만, 신의 사랑을 받는, 교황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어린아이에게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브리엘레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르모드 가문의 시엔이랬나?”

“……네, 그분이십니다.”

정직한 테드의 대답에 가브리엘레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디 흙바닥에서 구르다 온 아이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러더니, 우아하게 마저 속삭였다.


“그런 애와 나는, 가짜 진주와 진짜만큼이나 다르거든.”

가브리엘레는 이쯤 되면 테드가 오만한 태도를 꺾고 자신에게 굽힐 줄 알았다.

그러나 가브리엘레의 말에 테드가 눈매를 좁히며 일갈했다.


“시엔 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뭐?”

가브리엘레의 어이없다는 시선이 테드에게 못 박혔다. 그러나 태드는 태산처럼 엄준한 표정이었다. 마치 시엔을 자기가 지킬 레이디로 선택했다는 듯한, 저 태도는 뭔데?


“방금 뭐라고 했어?”

“시엔 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단호하면서도 온화한 성기사.

그 모습에 가브리엘레의 낯이 새빨개졌다.

지금까지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감히 성기사가…….

가브리엘레는 입술을 짓씹었다.

불쾌감과 분노, 모멸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럼 경은, 내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건가요?”

그녀는 자못 당당했다.

설마 이 말에까지 반박하랴 싶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십 년을 조금 넘게 살면서, 가브리엘레는 오만하게 자라 왔다. 충분히 거만해도 되는 위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의 신성력은 세노아 신전을 넘어, 모든 신전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그녀는 여기 있는 모든 신관들을 통틀어 가장 교황에게 총애받고 있었다.

하지만…….


“예. 시엔 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다시 한번 반박 당하고 말았다.

가브리엘레는 벙쪘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이렇게 단호하게 말한 적이 없었는데……!


“……다시는 내 앞에서 그 애 두둔하지 말아요!”

화를 냈지만, 분노는 테드에게 향하지 않았다.

가브리엘레의 뾰족한 분노는 시엔 쪽으로 향했다.


‘이건 다 시엔, 그 이상한 여자애 때문이야. 원래 테드는 내 기사가 되기로 거의 내정되어 있었는데……!’

시엔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세노아 신전은 평화로웠다. 오직 가브리엘레를 위해 돌아가는 장소였으니까.

가브리엘레는 신전을 돌며 신께 기도를 올렸다. 그뿐이랴. 신성력을 발휘해 방문자들을 자애롭게 치료해 주기도 하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하지만…….

시엔이 나타나면서 세노아 신전의 질서는 깨져 버리고 말았다.

고작 시엔 미르모드를 약올렸을 뿐인데, 아이들은 신관이 될 기회를 잃었다. 가브리엘레 역시 제 손과 발이 되어 주던 아이들을 잃은 것이다.


‘그 애가 모든 걸 망치고 있어.’

가브리엘레의 표정이 어린아이답지 않게 표독스럽게 변했다.

자신이 정한 기사를 빼앗아 가려는, 그 얄미운 여자애를 이 손으로 처단하고 싶어졌다.

그녀의 손끝에서 희끄무레한 기운이 점점이 퍼져 나갔다.


‘……테드는 내 것인데. 세노아 신전도, 그리고 사람들의 애정도 나의 것인데.’

가브리엘레의 신성력은 종종 미약한 예지 능력으로 발현되었다.

테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빼앗길 것 같다는 불안감이, 그녀의 마음속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테드는 마른세수를 했다.

이상하게도 가브리엘레가 자신에게 소유욕을 드러낼수록, 애시드와 시엔이 보고 싶어졌다.

***

한편, 나는 내 방에 들어온 애시드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문을 두드리고 들어올 때의 패기는 다 어디로 간 걸까.

애시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 시녀 언니들이랑 아빠까지 있다 보니 아무래도 조금 주눅은 드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저 정도면 꽤나 씩씩해지긴 한 거다.

이럴 때는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지!

나는 아빠가 말릴 새도 없이, 무릎에서 빠르게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아직도 문간에 서 있는 애시드 쪽으로 총총 걸어갔다.


“웅, 뭔데? 듣고 시퍼!”

“네, 네?”

지금까지는 약간 어눌하기까지 한 애시드의 말을 제대로 들어 준 사람이 없었던 걸까. 애시드의 속눈썹이 가냘프게 깜빡거렸다.

나는 참을성 있게 그의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애시드가 조심스럽게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웅, 아기야.”

“형을…… 만나고 싶어요.”

“……으응?”

나는 조심스럽게 애시드를 응시했다.

강해지고 싶다는 건 무슨 마음인지 이해했지만, 형을 만나고 싶다는 감정은 조금 갑작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혀, 형을 용서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여전히 미약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렇다면 왜일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애시드의 팔을 꼬옥 잡았다. 살짝 떨리는 게 완연히 긴장한 눈치였다.

나는 그의 팔을 톡톡 두드려 주면서 말했다.


“아기야, 나 듣구 이써. 말해두 대.”

“……네.”

애시드가 조심조심 다음 말을 이었다.


“만나서……. 저도 신성력이 얼마나 이, 있는지…….”

목소리는 분명 기어들어 가는 중이었지만 분명히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알아보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나는 애시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정도라면 애시드치고는 정말 가슴 밑바닥의 용기까지 박박 긁은 게 확실해 보였다.

그 용기에는 당연히 보답해야지.


“……응. 아기, 고생해써.”

애시드가 어리둥절한 말투로 부연했다.


“저는 하……한 게 없는데…….”

“아니지. 강해지고 싶다고 하구, 방법두 차자짜나.”

나는 애시드를 톡톡, 강아지를 칭찬하듯이 예뻐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동그란 눈동자가 꼭 멍멍이 같기도 하고…….


“저, 정말…….”

이렇게 망설이면서 머뭇거리는 모습도 왠지 모르게 조그만 시골 멍멍이가 생각났다. 나는 입술을 살짝 벌리면서 얕은 한숨을 토해 냈다.


‘귀, 귀여워.’

나보다 실제 나이는 많지만, 역시 아기 같아.

나는 애시드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면서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용기 낸 거, 잘해써!”

“…….”

 

 
애시드는 뜻밖의 칭찬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충분해.”

“아…….”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애시드가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얼굴은 엄청 빨갛고 손가락은 자꾸만 꼼지락거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저 부분까지가 애시드가 낸 최고 용기였던 것 같다.

칭찬을 너무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 건지, 얼굴이 불타는 홍당무가 된 애시드가 고개를 90도로 꾸벅 숙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럼 시, 시간 되시는 때에 세, 세노아 신전으로…… 가, 가, 같이 가요.’라고 말하며 바깥으로 떠나갔다.

그렇게 용감한 애시드가 떠난 뒤. 나는 문간에 홀로 남겨졌다.

지금까지 나와 애시드의 대화를 모두 들은 건지, 시녀 언니들과 아빠는 내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부끄러워!’

시녀 언니들의 눈동자는 엄청 흐리멍덩했고, 입술은 살짝 벌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무언가…….


‘시녀 언니들, 뭔가 엄청 과몰입한 거 같아!’

그녀들의 태도가 새삼 부담스러워진 나는 아빠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압빠아, 애시드 잘했지? 멋지지?”

아빠는 내 허리를 감아 들어 올리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빠의 청명한 눈동자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응, 잘했어.”

“히히.”

“우리 딸도 잘했어.”

아빠가 다정하게 나를 얼러 주었다.

나는 아빠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러자 아빠는 말문이 막힌 것처럼 조용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우리 딸이 벌써 이렇게 컸네.”

또 시작이다.

우리 아빠는 내가 조금만 어른스럽게 말하면 저렇게 눈시울을 붉힌다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웅, 으른이야!”

아빠랑은 대충 대화가 마무리됐고…….


‘그보다 근육 시녀 언니들 이상하네. 아까부터 턱 빠진 거 같던데…….’

아무리 봐도, 이 시녀 언니들은 아빠를 힐끔거리다가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우리 아빠가 감수성이 풍부한 게 놀랄 일은 아닐 텐데, 왜 저러지?

혹시 프로테인 부작용인가……?


‘좋은 일만 생각하자! 테드랑 애시드가 만나고, 애시드는 신성력 검사도 받을 테니까!’

아무튼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나는 아빠의 커다란 손을 내 조그만 손으로 꼬옥 잡아 주면서 생각했다.

우리 가족과 친구들이 점차로 행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다시 같은 시각, 세노아 신전 안.

미르모드 가문의 방문을 알리자마자 신전 분위기는 뒤집혔다.

그도 그럴 게 신전과 미르모드 공작가는 완벽한 대치 상태를 이루는 곳이었다.

제국 중앙에 위치한 화려한 신전도 아닌 외곽의 세노아 신전이라니. 그것도 일방적인 방문 약속이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을 포용한다’는 신전의 특성상, 공식적으로 제재하지는 못했다.


“시엔, 그 여자애가 왜 또 신전에 방문한다는 거죠?”

“듣기로는, 테드에게 동생이 한 명 있다고 하더군요. 그 동생이 지금 미르모드 가문에 시종으로 있답니다. 그 아이 때문인가 보던데요.”

왜 하필……! 가브리엘레의 낯이 일그러진 것도 모른 채, 신관은 열심히 제 말을 주워섬겼다.


“테드의 동생에게도 신성력이 있을 수 있다면서, 신전에 신성력 검사를 요청하였습니다. 신성력 검사가 주된 이유이고, 검사 전후로 테드와도 만나려는 것 같습니다.”

동생 따위는 분명 표면적 이유이고, 그 소악마 시엔 미르모드는 분명 테드를 훔쳐 가려고 오는 것일 터.

제 악당 아비를 앞세워서 테드를 괴롭힌 다음 신전에서 빼내 가려는 수작이겠지.

물론 성기사들은 굳이 신전에 봉작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송충이가 솔잎을 먹고 살듯이, 신성력이 있는 자들은 신전에 봉작해야 하는 게 일차적인 원칙 아니던가.

역시 시엔 미르모드는 테드를 홀리려고 나타난 악마인 게 분명했다. 테드는 그 악마의 유혹에 홀리고 있는 게 분명하고!


‘어떻게 해야 이 난관을 타개할 수 있지?’

가브리엘레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성녀답게 우아한 몸동작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속에 담은 생각만큼은 사악했다.

난, 절대 너 따위에게 테드를 보여 주지 않을 거야. 테드는 날 지켜 줄 기사이니까.

너 같은 악마의 딸 따위에게는 절대로 지지 않아.

나는 신성력이 가득한 신녀이니까.

가브리엘레의 우아했던 낯이 한껏 일그러졌다.


“테드를 데리고 갈 거예요.”

“네? 가브리엘레 님, 하지만…….”

“내 마음이야.”

교황의 사랑을 듬뿍 받는 소녀, 가브리엘레는 사실상 세노아 신전의 지배자였다. 그녀의 말에는 그 어떤 사람도 토를 달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브리엘레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은 젊은 신관이 쩔쩔매며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미르모드 가문에서 테드에게도 전갈을 넣었더군요.”

“……테드에게도요?”

“네. 테드의 동생이 올 테니, 그날은 신전에 머물러 달라고요.”

가브리엘레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흐음, 그래요?”

가브리엘레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테드가 직접 그 전갈을 받았나요?”

“테드는 지금 금식 수련 중이라 소식을 아직 못 들었을 겁니다.”

“그래요?”

“좋은 일이죠, 동생을 찾았다는 건.”

그까짓 동생이 뭐가 중요하다고.

솔직히 말해서, 동생이 온다는 소식을 들어 봤자 자신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지.

테드는 정이 많은 기사였다. 테드의 멍청한 평민 동생을 조금쯤은 아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내내 소중하게 지켜 온 가브리엘레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은, 절대 아니겠지만.


“그럼 숨겨요. 테드는 동생이 온다는 건 모르게 해야죠.”

“……예?”

얼뜨기 신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시엔 미르모드가 테드의 멍청한 거지 동생을 가지고 테드를 협박해, 제 호위 기사로 탐낼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일만큼은 막아야 했다.

하지만 그 말을 저 신관에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

가브리엘레는 몸을 일으켰다.


“괜히 분위기 어수선해지는 거 싫어. 그날, 테드 데리고 하루 종일 신전 바깥에 나가 있을 거예요.”

그 말은 곧 시엔 미르모드와 적대하겠다는 정식 선언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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