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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저는 모시고 싶은 분이 따로 있습니다 (33/77)


33화. 저는 모시고 싶은 분이 따로 있습니다
2023.03.24.


아빠와 나, 레온하르트와 애시드는 미르모드 공작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저택 문 앞에 묘한 그림자가 졌다 했더니!

근육 시녀 언니들이 나를 마중 나와서 환대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안 그래도 위압감 넘치는 덩치였는데, 인상을 찡그리고 있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느냐?”

혹시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저택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언니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도 최고의 프로테인이었습니다, 시엔 님!”

데드리와 벤치, 두 시녀 언니들은 오늘도 나에 대한 충심을 다짐했다.


“제 마음속은 충심으로 눈물이 나지만, 근손실 올 테니 참는 겁니다.”

나는 식은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시녀 언니들이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웅?”

“시엔 님께 편지가 두 장이 왔는데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움, 누구한테?”

데드리 언니가 조금 뜸을 들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내게 온 것으로 추정되는 고급지 편지 두 장이 덜덜거리며 흔들렸다.


“하나는 신전의 성기사예요. 이름이 테드라고 적혀 있습니다.”

“……아아, 테드.”

나는 애시드 쪽을 힐끔거렸다. 애시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심경이 꽤나 복잡해 보였다.


‘내가 먼저 읽어 보고, 애시드한테도 알려 줘서 생각할 시간을 줘야지.’

“웅, 그래! 다음은 들어가서 얘기하쟈!”

아빠가 나를 달랑달랑 들었다. 나는 아빠의 품에 안겨 까르르 웃었다. 그런 내 모습을, 애시드가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나는 아빠, 그리고 근육 시녀 언니들과 함께 내 방 안으로 위풍당당하게 입성했다. 시녀 언니들이 열심히 꾸며 놓은 나의 방은 오늘도 휘황찬란했다.


“벽에 금이 하나 더 늘어써?”

“제 월급으로 사서 조금 더 꾸며 보았습니다.”

데드리 언니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근육밖에 모르는 바보 언니답다. 안타까운 마음을 숨긴 나는 내 방의 소파에 아빠와 당당하게 마주 앉았다.

어른용 소파라서 그런지 다리가 중간에서 달랑달랑했다.

나는 동그란 발에 힘을 꾸욱 준 다음 입술을 삐죽거렸다. 사소한 일이지만, 조그맣기 짝이 없는 몸은 소파에 앉을 때조차 불편함을 유발했다.

단시간 내에 성장할 수 있는 아티팩트가 있는지 할머니한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시녀 언니들을 향해 손을 냉큼 내밀었다.


“이제, 편지 조!”

“네.”

“드리겠습니다!”

데드리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경건하게 편지를 건넸다. 나는 근엄하게 편지를 받으려 했지만, 아빠가 먼저였다.


“그 편지,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건 나도 안다.

아빠가 나를 어르듯 말했다.


“시엔. 아빠가 편지 먼저 보고 싶어.”

분명 편지가 데드리의 손에 있었는데, 어느새 아빠에게로 향해 있었다.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지만, 침착해야 할 때였다.

나는 아빠의 손에 들린 편지를 힐끗 바라본 다음, 논리정연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움, 마자. 위험할 지두 몰라. 거기 발신인, 델피아라구 써 이꺼든. 무서운 언니 맞지?”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델피아가 왜 편지를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빠의 얼굴이 살짝 펴졌다.

내가 아빠의 말을 들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

위험하니까, 더더욱 내가 봐야 했다. 아빠를 지켜 줄 수 있는, 미래를 아는 똑똑하고 사악한 어린이니까.

나는 아빠의 손에 들린 편지를 향해 손을 뻗으며 힘차게 말했다.


“구러니까 아빠 대신 내가 바야 대.”

하지만 아빠는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엔.”

“웅?”

“위험한 건 아빠가 읽어 보고 알아서 처리할게. 그렇게 하자. 응?”

내가 떼를 쓰면 아빠는 엄하게 말을 했다. 그게 아실리라는 교육 박사의 교육 철학이라나.


‘하지만 뛰는 아빠 위에 나는 시엔 있지!’

우리 아빠의 교육 철학은 내가 아주 잘 안다. 아빠는 나한테 대놓고 숨기거나, 속이는 짓 따위는 절대 못 한다.


“압빠.”

“응?”

“그럼…… 나한테 거짓말한 고야?”

 

 
순간 아빠의 말문이 막혔다.


“……그건 왜?”

“압빠 옛날에 시엔한테 했던 말, 기억 안 나?”

“……응?”

아빠는 5세 유아인 나의 사고방식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듯, 얼떨떨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몹시 논리적으로 내 의견을 피력하기로 했다.


“꼬마라도 절대 의견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했짜나.”

“으, 으응…….”

“압빠는 시엔이의 의견을 들어 쥴 의무가 이따구.”

나는 히힛 웃다가 순간 멈칫했다.


‘헉, 잠깐. 이렇게 계속 거짓말하게 두면 아빠가 나쁜 사람 되는 거 아닌가?’

이거 약간 고민된다.

아빠가 거짓말하게 둘지, 말지.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듯이, 거짓말처럼 가벼운 악행을 꾸준히 저지른다면 진짜 악당이 될지도 모른다. 새삼 좋은 기회에 나는 눈을 반짝이며 아빠를 응원하듯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아빠는…….”

아빠의 시선이 살짝 떨렸다. 나는 아빠의 편지를 힐끗 보면서 두근대는 마음을 담아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제발 악당처럼 변하길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아빠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편지를 내 손에 꾹 쥐여 주었다.

나는 편지를 움켜쥐고 물미역처럼 시무룩하게 늘어졌다.

역시 아빠는 태초부터 타고난 선량한 마음을 포기하지 못하는 듯했다.


“……델피아는 위험한 사람이야. 환영술도 쓸 줄 알고, 공격적이야. 그 사람이 편지에 뭔가를 적어 놨다면…… 시엔이 위험할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겠어?”

그건 나도 아주 잘 안다. 하지만 아빠의 진지한 표정에 나는 눈매를 가늘게 떴다.


“아빠 몸이 떨릴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라, 시엔이 만나면 안 될 거 같아서 편지 읽지 말라고 한 거였어.”

나도 나를 많이 걱정하는 아빠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벌써부터 눈에서 걱정이 뚝뚝 떨어지니까.


“미안해, 아빠가 시엔 의견 무시한 건 아니야.”

어떤 어른들은 자식한테는 절대 사과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우리 아빠는 다르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왜 그랬는지도 말해 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웅…… 아빠, 시엔이도 미안.”

우리는 사과를 하고 나면 서로를 안아 주고는 했다.

나는 편지를 내려놓고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린 다음 아빠의 무릎 위로 낑낑거리며 기어 올라갔다. 아빠는 내가 잘 앉을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나를 꼬옥 안아 주었다.


“우리 화해한 거지, 응?”

“웅! 이제 편지!”

살짝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아빠는 내게 다시 편지를 내밀었다. 나는 델피아가 보낸 편지부터 꺼내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를 너의 티 파티에 초대해 줘.

일시는 글쎄, 모르겠는데. 네가 원하는 때면 난 좋아.

시간 비워 놓을게.

p.s 안 잡아먹을게, 아기야. 만나고 싶어서 그래. 사랑을 담아, 델피아 미르모드.]

안 잡아먹는다니!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에 쥔 편지가 파드득, 하고 구겨졌다.

하지만 난 절대 순순히 당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제대로 갚아 줄 수도 있다.


‘델피아 미르모드는 신성력에 매우 취약하거든. 정말 기쁘게도, 나에게는 성기사인 테드가 있으니까……!’

내 등 뒤에서 편지를 본 건지 아빠가 말을 걸었다.


“티 파티라.”

아빠의 목소리가 살짝 음산한 것도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웅. 초대해 달래!”

나는 델피아와 전면전을 펼칠 생각으로 떨리는 마음을 담아 아빠를 바라보았다.


“시엔 티 파티 하고 싶어!”

정확히 말하자면 티 파티가 아니라 델피아와 전면전을 치르고 싶다는 뜻이었지만, 아빠는 다르게 파악한 눈치였다.


“시엔, 티 파티…… 하고 싶어? 생각해 보니 우리 딸, 티 파티를 많이 못 했구나.”

아빠가 티 파티를 제대로 못 해 본 나를 짠하게 생각하는 듯 보였지만, 모로 가도 수도로만 가면 된다는 말도 있으니까 굳이 착각을 정정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짐짓 시침을 떼기로 했다.


“웅! 이제 시엔도 귀족이니까!”

“그럼……. 그래, 시엔. 델피아를 한번……. 만나 봐.”

아빠가 내 귓가에 대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어디에서든 시엔이 안전할 수 있도록, 아빠가 도우면 되니까.”

등 뒤에 있어서 잘은 모르지만, 아빠는 분명 웃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주변의 온도가 반쯤 떨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매우 열정이 불타는 상태였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테드가 보낸 편지도 마저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편지 속에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세노아 신전의 아기 신녀이신 가브리엘레 님께서 거듭 호위를 요청하셨습니다.

아직 성기사의 신분인만큼 가브리엘레 님을 호위하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만, 당분간은 시엔 님의 기사가 되기 어려울 것 같아 이렇게 서신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정리가 되고 난 다음 다시 찾아뵐 수 있을지요?

그때에는 시엔 님의 기사로 임관하고 싶습니다.]

끝줄만 보면 분명 희소식이었다. 언젠가는 내 기사가 되어 준다는 거니까.

하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델피아도 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당장 한 달 뒤 악셀이 귀환하니까.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신성력을 가진 성기사가 꼭 필요한데……!’

나는 조그만 손을 꾸욱 움켜쥐었다.


‘가브리엘레가 테드를 노리고 있다면,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길 확률이 높은데…….’

신전에 들어가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는 만큼, 테드가 성기사 직위를 버리는 데에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대략 숙려 기간이 7일 정도는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가브리엘레가 계속 테드를 불러낸다면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특히 가브리엘레가 테드를 제 기사로 가지려 한다면 뜻밖의 실랑이가 이어질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까.

편지를 움켜쥐고 곰곰이 생각하던 그때 누군가 내 방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용감하게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바로 테드의 동생, 애시드였다.


“아기야?”

나보다 몸집은 크지만, 내가 아기라고 부르는 소년.

문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애시드가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다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애시드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

같은 시각, 성기사 테드가 머무는 세노아 신전 내부.

이 신전의 최고 권력자이자 모든 성기사들의 주인인 양 행세하는 이가 있었다.

신전 내에서 가장 신성력이 많기로 유명해 교황까지도 눈독 들였다던 아이, 가브리엘레였다.

가브리엘레는 고작 열 살을 조금 넘게 산 아이였지만 오만한 데가 있었다. 그녀는 턱을 치켜들며 낮게 속삭였다.


“테드, 그대가 이번 외유에서도 나를 지켜 줄 거지?”

예비 신녀들의 외유에 호위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테드 같은 급의 성기사가 따라갈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았다.

테드는 다른 중요한 일정들로 바빴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가브리엘레는 투정을 부리듯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테드는 가브리엘레의 말을 전부 다 들어주었으니까.


“……이번 외유에서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선약이 있어…….”

단단한 가브리엘레의 말에 테드가 대답을 하다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시엔을 떠올렸다. 아이들끼리 비교하는 것이 죄악임을 안다. 그러나 시엔은…… 당당했지만 부드러운 주인이었다. 아무 이익 없이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직접 모시고 싶은 분이었다.

하지만 가브리엘레는…….


“네가 내 호위 기사가 될 건데, 선약이라니.”

“…….”

“나를 모실 거잖아.”

“가브리엘레 님. 저는……. 모시고 싶은 분이 따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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