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만나기도 전에 꼬셔 버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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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만나기도 전에 꼬셔 버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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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만나기도 전에 꼬셔 버린 건가?
2023.03.21.
애시드는 구걸은 누구보다 잘했다.
하지만 그 외의 능력은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시엔이 마티어스에 의해 사지(死地)라는 곳으로 갈 때, 애시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실 애시드는 레온하르트가 말했던 사지(死地)가 뭔지도 잘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길거리의 구걸꾼, 바보니까.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위치다.
하지만…….
‘나도 시엔 님을 지켜 주고 싶어.’
자신에게는 아직 아무것도 없다.
어른도 아니고, 성기사인 형처럼 신성력도 없었다.
근력이라도 키워야 할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시엔을 보필하는 근육 시녀들만 한 근력을 지닐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불끈불끈했던 그들의 근육을 떠올리니 절로 기가 죽어 버렸다.
자신에게 장점이 있다면…….
단 하나, 성기사인 형 테드뿐.
‘……그러고 보니, 신성력은 유전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형이 성기사이니 어쩌면 자신에게도 신성력이라는 잠재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신성력은 일찍 발현되는 힘.
지금까지 발현되지 않았다면 제 몸에 신성력이 없다고 보는 게 맞을 테지만.
애시드의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어 생채기를 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자신을 버린 형, 테드를 만나 봐야 할까?
그때였다.
고개를 바닥에 푹 처박은 채로 가만히 있던 애시드의 어깨에 산뜻한 손길이 와 닿았다.
“아기, 왜 그래?”
시엔이었다.
애시드는 퍼뜩 고개를 들어 시엔을 응시했다. 순진하면서도 다정한 눈빛이 그를 향해 있었다.
“저……. 그, 그러니까.”
시엔이 보살펴 주는 아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자신은 조그맣고, 빈민가 출신이지만…….
지켜 주고 싶었다.
시엔이 살 수 있도록.
그렇다면 자신을 구해 준 시엔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자신을 버리고 성기사가 된 형, 테드처럼.
필요하다면 그의 도움이라도 빌려서.
“가, 강해지고 싶어서요!”
……처음으로, 형을 마주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엔의 어리둥절한 표정과 함께, 그의 귓가로 명상을 진행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세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답니다.”
“삼라만상을 생각해 보세요.”
“굳이 강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약한 것도 약한 것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지요.”
애시드는 속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다.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저기 마티어스 님보다도 더 강해져서, 시엔을 위협하는 것들에게서 시엔을 지켜 줄 거였다.
그리고 애시드의 말을 들은 시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기야!”
겁이 많은 소년은 순간 겁을 먹고 말았다.
햇살처럼 따뜻한 시엔 님은 어쩌면 강해진다는 말을 두려워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강해지고 싶다니, 정말 천재적인 발상이야!”
평소에도 웃는 상인 시엔은, 지금에 와서는 거의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 마티어스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의도를 가늠할 수 없는 낯이었다.
그래서 애시드는 그저 시엔만을 못 박힌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시엔의 통통한 볼살과, 커다랗고 반짝거리는 바둑알 같은 눈동자와, 조그만 앞니.
그리고 선량한 마음씨를 보여 주는 것 같은 따사로운 미소까지 모두 눈에 담았다.
강해지기로 마음먹은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시엔이 좋아하니까…….
‘최고의 선택이야.’
애시드의 마음이 행복감으로 가득 차올랐다.
***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애시드의 그늘이 한결 옅어진 게 보였다.
새삼, 잘 먹이고 깨끗하게 씻기고 예뻐해 주는 게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주면, 슬슬 테드랑 만나게 해 줘도 될 것 같아. 그러면 애시드도 테드도 행복해지고, 테드는 내 기사가 되는 거지!’
나는 함지박만큼 커다랗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모름지기 인생은 산 넘어 산이라 했던가.
꾸벅꾸벅 졸던 애시드가 갑자기 벼락처럼 각성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놈의 햇살 아카데미 코스가 끝이 안 난다.
아빠의 백화를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는 개뿔. 아무것도 못하고 영혼을 정화 당한 채로 점심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신성력이 가득한 곳에서 채식을 한다고 하는데…….
“아빠.”
“응, 시엔. 채식 좋아하지?”
입 안에 침이 고였다. 하지만 좋아한다고 말하면 악으로 물들었던 정신이 완벽하게 정화될 것 같았다. 나는 큼큼, 헛기침을 한 다음, 다음 말을 이었다.
“먹기 전에 기다려, 압빠! 잠깐만 아기들만의 시간이 필요해!”
“……어?”
아빠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상처를 받은 것이다.
“아빠는?”
마음이 아프지만…… 여기서 넘어가서는 안 된다.
나는 밀착 감시를 피해 아이들만의 시간을 가지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압빠는 같이 있으면 안 대.”
아빠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벌써부터 아빠한테 비밀이…….’라고 말했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아빠의 여린 마음에 생채기 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요기서 기다려! 십 분이면 대!”
나는 레온하르트와 애시드의 손을 꼬옥 잡고 빠져나왔다.
아빠에게 세상이 얼마나 엄혹한지를 알려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한숨이 절로 나오기까지 했다.
“이 아카데미 코스 어때?”
“졸아서 못 들었는데.”
솔직한 레온하르트의 말 뒤로 애시드는 내 시선을 피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귓불이 붉어진 걸 보니 레온하르트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나는 양 주먹 불끈 쥐고 연설하듯이 말했다.
“칭구들.”
“응?”
“알다시피 우리 압빠를 갱생시켜야 할 거 같아.”
악당 가문에 들어와 목숨까지 위협받을 수 있는 중대한 상황인데, 아빠가 나를 아카데미에 보내면서까지 착하게 만들려 한다면 어쩔 수 없다.
마음은 아프지만, 아빠가 악당같이 굴게끔 더 강하게 갱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치켜들면서 위협적으로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밤톨 너…….”
“웅?”
레온하르트가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정말, 살아남으려고 노력 중이구나.”
“……웅! 아주 옴총 노력하고 있지!”
“나도 도울게.”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레온하르트. 이 악당 가문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나를 빤히 보던 애시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갱생시키는 거, 저, 저도 도울게요.”
“웅?”
“신성력을 길러서 사용하면 될지도 몰라요.”
“신성력에 그런 힘이 있어?”
“……알아보려고 해요.”
‘테드랑 말해 봐야지.’
어쨌든 애시드도, 레온하르트도 우리 아빠의 악당화를 도와준다니 정말이지 뜻밖의 성과였다.
이제부터는 직접적으로 행동을 요구하기 보단, 악당들을 보여 주면서 멋있다고 열심히 칭찬하고, 악하고 나쁜 게 좋다고 계속 간접적으로 세뇌시킬 생각이었다.
매일매일 나쁜 짓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세뇌시키다 보면, 아빠도 순간적으로 악당 같은 행동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해맑게 박수를 짝짝 쳐 주었다.
“좋아, 아주아주 머시써!”
레온하르트가 질세라 다음 말을 이었다.
“나는…….”
“웅?”
“마티어스 님 갱생을 넘어, 모두를 능가하는 악당이 될 거다.”
나는 조심스럽게 레온하르트를 향해 말했다.
“그…… 내 편인 악당이 되는 거 맞지……? 우, 우린 칭구자나!”
나는 그를 향해 사실을 명백하게 주지시켰다.
그러자 레온하르트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하지, 밤톨. 그리고 넌 천재잖아.”
“……응?”
그가 당연한 것을 말한다는 듯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너를 능가할 순 없지. 게다가 난 친구는 안 괴롭히는 정의로운 악당이 될 거다.”
원작 속의 레온하르트는 네 편 내 편 가릴 것 없이 학살하는 악당 중의 악당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딱 한 번은 믿어 볼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레온하르트가 내게 보여 줬던 건 순도 백 퍼센트의 진심 같으니까 말이다.
나는 주먹을 옴팡지게 움켜쥐고 그들을 향해 척, 내밀었다.
“그럼 자, 주먹 대!”
“네……?”
“왜지?”
“우리 압빠 갱생 프로젝트를 같이 하겠다는 약속!”
우리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가운데에 맞대었다.
벌써부터 든든했다.
아직 나는 존재감 미약한 꼬맹이일 뿐이지만, 벌써 내 측근들이 생긴 기분이 들었다.
“힛.”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주먹을 떼어 냈다.
우리는 서로를 결의에 찬 시선으로 마주 보며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레온하르트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말했다.
“밤톨.”
“웅?”
“벌써부터 주변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묘한 위화감이 드는 게…….
“……저 흉악하게 생긴 새는 뭐지?”
……그 위화감의 정체는, 풀숲 근처에 숨어 있던 조그만 새였다. 눈이 하나 달려 있고 부리는 샛노란 새 말이다.
“뭔가 이상…….”
나는 의심스러운 눈을 데굴 굴렸다. 그러자 레온하르트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평범한 새는 아닌 게,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나는 몸을 주춤거리며 뒤로 물렸다.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 새라니. 아주 흉악하게 생긴 걸 보니 길들이고 싶어졌다.
나는 주먹을 꾸욱 움켜쥐고 새를 응시했다.
나 같은 악당에게 아주 잘 어울릴 법한 새였다.
뱁새 같은 조그만 주먹만 한 새보다는, 저렇게 무시무시한, 독수리보다 더 위협적으로 생긴 새가 더 좋지!
“저거 잡아 보까?”
“위험할 수도 있…….”
레온하르트의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래도 만약 저 새가 우리를 공격하려 했다면 벌써 했을 테니까.
나는 밀떡 같은 다리를 붕붕거리며 새 쪽으로 움직이려 했다. 그런데 아무리 다리를 움직이며 용을 써도 걸을 수가 없었다.
“……어라?”
한참 무의미하게 발짓을 하다가, 나는 깨달아 버렸다.
……누군가의 두툼한 손이 내 몸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시엔.”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빠였다.
“압빠!”
내가 압빠, 라고 불렀는데 아빠의 표정이 펴지질 않았다. 햇살 아빠답지 않게 건조하고 무심한 저 표정은, 그러니까…….
‘저건, 나쁜 놈들한테 돈 뺏겼을 때 아빠 표정이다!’
저 흉악한 새가 무서워서 저러는 걸까. 나는 아빠를 토닥여 주려고 했다.
그런데 아빠의 혼잣말이 먼저였다.
“사라졌군.”
역시 아빠도 새를 봤던 모양이었다.
새가 있던 중앙에는 옅은 그을음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조막만 하게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아빠가 조용히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시엔, 이제 집에 가야겠다.”
“웅?”
아빠가 햇살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연습은 끝났어.”
“웅?”
“이렇게 도발해 준다면 제대로 겨뤄 봐야 할 것 같네.”
뜻 모를 말이었다.
멀리서 레온하르트가 ‘벌써 우리의 계획을 눈치챈 건가…….’, ‘역시 악당 중의 악당.’ 따위의 혼잣말을 한 것 같기도 했지만, 환청이 들린 것으로 미루어 짐작했다.
***
마티어스는 눈치챘지만, 시엔이 눈치채지 못한 것.
그 새가 바로 델피아의 환영술이 만들어 낸 전령구라는 사실이었다.
전령구는 델피아의 마력으로 인해 발생한 개체였다.
그녀의 본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서, 여기저기 운신할 수 없는 그녀의 눈이 되어 주는 귀한 존재였다.
마티어스가 빠르게 접근을 차단한 탓에 확실히 보지는 못했지만-.
“저 셋 중에 한 명한테서 신성력이 보이는 것 같은데.”
델피아는 미간을 좁혔다.
미르모드 가문은 대체로 신전과 적대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르모드 가문 중에서 가장 신성력과 상극인 이능력을 지닌 자가 있었으니, 바로 델피아 미르모드였다.
그녀가 지닌 환영 소환술의 능력은 신성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델피아는 신성력을 지닌 자를 약하게나마 감별해 낼 수 있었다.
불쾌한 낯빛으로, 델피아가 미미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이상하게 쟤 주위로 이능력자들이 몰리는 것 같단 말이지.”
델피아의 혼잣말에 곁에 있던 측근이 조심스럽게 제 의견을 피력했다.
“맞습니다. 시엔 미르모드, 저 아이. 얕봐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델피아의 삶은 흥미 본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문의 후계자가 되고 공작 작위를 쟁취하려는 것 역시도 그러한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공작이 되는 것보다도 더 재미있는 게 생긴 것 같다.
“친하게 지낼래.”
바로 뜬금없이 생긴 꼬맹이, 시엔 미르모드 관찰.
그녀는 씩 웃었다.
“한 달 뒤, 악셀이 와서 모든 걸 끝장내기 전에.”
“아…….”
“어차피 시들어 버릴 어린애라면, 그 전에 재밌게 놀고 싶어.”
심장이 뛴다.
혹시 쟤가 첫만남도 전에 날 꼬셔 버린 건가?
이러면 좀 곤란한데.
델피아는 입가의 미소를 유지하면서 흰색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