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델피아의 등장 (30/77)


30화. 델피아의 등장
2023.03.14.


그는 레온하르트와 애시드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낮게 깐 듯한 다정한 목소리로 시녀들을 불렀다.


“시엔의 친……구들에게도 저녁 디저트를 후하게 대접하도록.”

“웅? 그럼 나는 누구랑 먹어?”

“시엔, 맛있는 거는 아빠랑 먹기로 했잖아.”

“웅? 압빠랑……?”

“그래, 시엔. 아빠랑 먹기로 했었잖아.”

나는 아빠의 울상인 데다 순박한 표정 공격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웅! 아기, 레온하르트! 칭구들! 이따 바!”

‘그래도 레온하르트랑 애시드가 화해했으니까! 둘이 만날 기회를 만들어 주면서, 둘 다 내 측근으로 삼아야지.’

나는 즐겁게 웃으며 아빠의 근육으로 빵빵한 팔을 꾸욱 잡았다.


‘아빠 닭가슴살이랑 고구마 많이 먹었나?’

근육 시녀 언니들도 부러워할 튼튼한 팔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빠의 사랑스러운 눈매를 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몸은 기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강하지만, 너무 착하게 생겼다.

내가 지금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되어서 아빠를 지켜 주어야겠다.

***

레온하르트와 애시드는 덩그러니 남겨졌다.

레온하르트의 입장에서도 더 이상 애시드를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그랬지? 이건 마치 질투 같잖아.’

시녀들이 저 애시드란 놈을 밤톨이 달고 다니는 키링 같은 녀석이라고 소개했을 때부터였나.

밤톨 옆에는 자신만 있을 줄 알아서인지 섣부르게 큰소리를 내 버렸다.


‘……괜한 생각이었지. 내가 누구랑 그렇게 친하게 지낸다고.’

그런 일 따위는 없다.

그 밤톨, 시엔도 그냥 똑똑해 보여서 살짝만 친해질 생각이었던 거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마음을 한껏 부정하면서 애시드를 응시했다.

어쨌든 시엔의 친……구로서 아량을 베풀 요량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애시드가 시엔의 곁에 붙어 있는 걸 보고 기분이 이상했지만……. 물론 지금도 그건 약간 그렇긴 하지만…….

지금은 공공의 적이 있으니까.

그는 주의를 주듯 애시드를 불러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분이 마티어스 미르모드 님이야.”

“네?”

애시드가 어리둥절한 낯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에서 가장 세고…… 어린아이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분이지.”

“하지만 저분은 시엔 님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봤-.”

“아니.”

레온하르트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사랑스럽다’는 시선을 받은 적이 없었다. 소년은 그만큼 감정에도 둔감했다. 그래서 레온하르트는 조용히 속삭였다.


“저분은 시엔을 위협하고 있어. 내가 시엔에게 직접 들었다.”

시엔이 들으면 어이없어하겠지만, 레온하르트는 그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 말에 애시드의 안색이 희멀게졌다.


“조그만 아기 공주님을 위협할 일이 뭐, 뭐 있대요?”

“그래. 무섭지.”

레온하르트가 애시드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엔은…… 지금 우리를 위해 사지(死地)로 걸어 들어가는 거야.”

“……예?”

“우리가 마티어스 님의 먹잇감이 될까 봐, 대신 떠난 거라고!”

“그, 그런…….”

애시드의 눈이 혼란으로 잠겨 든 그때. 레온하르트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그러니까 네가 이 저택에 있을 거라면, 시엔을 지켜. 내가 못 볼 때 말이야.”

애시드가 저택 안으로 들어선 마티어스와 시엔을 바라보았다.

그럼……. 시엔이 자신을 구해 준 것처럼, 자신도 시엔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걸까?

애시드는 조심스럽게 주먹을 움켜쥔 다음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네!”

굽었던 어깨가 조금 펴지고, 낯이 단단하게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둘의 결의에 찬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그리고-.


“저기, 여기 두 분만 계신 것 아니고 저희도 있습니다만.”

“그러게요. 꿔다 놓은 보릿자루도 아니고.”

……시녀들이 하품을 쩍, 하며 그들을 향해 속삭였다.


“이제 공자님도, 꼬마 너도 티 테이블로 갈 차롑니다.”

근육 시녀들이 단단한 전완근을 자랑하며 에스코트를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 넷은 저택의 응접실로 향했다.

***

같은 시각. 나는 둘을 두고서 아빠의 서재로 티 타임을 하러 갔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비탄에 빠진 아빠는 케이크를 깨작깨작해서 나를 걱정시켰다.


“아빠, 왜 구래?”

“아무것도 아니야……. 아빠 입맛이 없어서…….”

“으응? 왜 입맛이 없지.”

“그게…….”

아빠의 입맛을 북돋기 위해 좋은 이야기를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밝게 웃었다.


“맞다. 아빠, 나 친구 생겼어!”

그 말에 아빠는 아예 포크를 내려놓았다. 평소보다 더 핼쑥해 보이는 표정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빠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래도 아빠가 최고지?”

나는 배시시 웃으며 아빠를 향해 못 박았다.


“웅! 아빠가 쪼끔만 더 나빠지면 최고가 될 수 이써!”

“…….”

“더 나빠져서, 이 나쁜 가문 우리가 무찌르자!”

아빠가 또 새삼 충격받은 표정을 한 채로 말했다.


“시엔, 아빠가 가문 사람들 착해지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잖아.”

목소리까지 삐끗한 걸 보니, 진짜로 큰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아빠는 아직도 나쁜 놈 되는 일에 거부감이 크군.’

내가 조그만 머리가 터질 정도로 곰곰이 생각할 때였다. 아빠가 은은하게 속삭였다.


“아, 그래. 시엔. 할 말이 있어.”

케이크를 거의 다 먹어서 불편한 턱받이를 풀어야 했다. 나를 보던 아빠가 근엄하게 말했다.


“아빠랑 같이 <멜로앙 유아 아카데미 행복 과정> 가자.”

“……뭐?”

순간 내 안색이 새하얘졌다.

<멜로앙 유아 아카데미 행복 1일 과정>

이건 정확히 말하면 청학동, 템플 스테이 같은 거다. 나쁜 아기를 착하게 만들고, 착한 아기는 차분하게 만드는 예절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내가 마을에 머물 때 사고를 치면 아빠는 나와 함께 그 아카데미에 갔다.

그곳에 가면 좋은 향기 나는 착한 어른과 어린이들이 내 곁에 모여서…….


‘시엔 님, 너무 사랑스러우세요. 시엔 님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친구예요.’

‘자, 나쁜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합시다.’

찌든 때 잔뜩 낀 영혼이 백화되어 버리는 그 장소에는 절대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빠를 바라보며 커다랗게 외쳤다.


“시러! 나는 나쁜 놈 중의 나쁜 놈이 될 구야!”

내가 기겁하는 모습을 보자 아빠는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가야 하는 거야, 시엔.”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착해지는 거, 결사반대다.

나는 이글이글한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았다.

당분간 아빠 교화를 포기하고 스스로 강해지자고 다짐했던 마음에 불이 타올랐다.


‘직접적인 세뇌술이 안 먹힌다면, 간접적인 악당 트레이닝이라도 해 주겠어.’

겸사겸사, 내가 가장 강한 악당이 되어서 몰래몰래 아빠를 지켜 주는 일도 필요할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빠는 절대 대악당이 될 생각이 없어 보이니, 작전을 변경할 차례였다.

***

다음 날 아침, 미르모드 가문으로 델피아 미르모드가 귀환했다.

평소 싸이코틱하다는 세간의 평가와 다르게 마차를 탄 채로 다분히 조용하게 귀환한 차였다.

공작 저택 내에 따로 마련된 제 저택으로 향한 그녀는 혼비백산한 시녀들을 귀찮다는 듯이 물리고 방 안에 처박혔다.

두려움을 이기고 겨우 당도한 시녀 하나가 델피아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욕물을 받아 놓을까요?”

“목욕물은 개뿔. 병사 훈련과 시찰부터 물어보지. 그게 내 시녀의 도리잖아?”

미르모드 가문의 시녀라기엔 간담이 너무 작은 시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시찰은 어찌 되셨는지요……?”

“거슬리는 놈들 싹 쓸어 버린 다음 부관한테 맡겼어. 아, 내 저택엔 여전히 찬란한 박제품들이 남아 있구나?”

“예, 예에…….”

델피아가 제 침실의 벽에 걸린 온갖 박제품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녀가 가장 아껴 마지않는 새하얀 설표 마물의 박제품은 털끝 하나 상하지 않은 최상품이었다. 델피아는 제 마음에 드는 것을 온전한 상태로 죽여 박제하는 기괴한 취미가 있었다.


“박제품은 대충 확인했으니 됐고…….”

일단, 이 자리에 온 건 마티어스 때문이다. 그리고 마티어스의 약점이 될 것만 같은 꼬마 여자애, 시엔 때문이기도 하지.

제일 먼저 마티어스 미르모드를 공략하는 건 좀 상도덕이 없으니 어린애부터 공략해 볼까.


“내가 오기 전에 시엔 미르모드에 관한 정보를 모아 두라고 했었지.”

“아, 네, 넵!”

잔뜩 길이 든 시녀를 우아하게 응시하며 델피아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았다.


“가문 내에 시엔 미르모드와 접촉한 자가 누구 있지?”

시엔 미르모드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면 저 ‘황야의 미친개’, 델피아 미르모드에게 죽는다.

그 사실을 바짝 상기하면서, 시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보를 쏟아 냈다.


“가신의 아이들과…… 레온하르트 미르모드, 그리고 루켈라 공작 부인입니다.”

루켈라 공작 부인이라. 델피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루켈라 공작 부인과도 연관이 있다니.


“애들이야 됐고. 레온하르트 미르모드는 뭐…….”

레온하르트 미르모드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잠재력이 있다.

그 사실을 델피아는 잘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자기보다 연약한 아기일 뿐이었다.

그 잠재력이 이 가문에서 제대로 꽃필 거 같지도 않고 말이지.

그보다 중요한 건 루켈라 공작 부인이라는 대물이었다.

세가 꺾였다지만 스스로 꺾었다는 말이 있는 이이니, 만만한 상대는 결코 아니었다.


“루켈라 공작 부인과 그 땅꼬맹이는 대체 어떤 관계지?”

“따, 땅꼬맹이요?”

“그래. 시엔 미르모드 말이야.”

정보를 얻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던 탓일까. 공작 부인의 심기까지 캐낼 틈이 없었던 시녀의 이마에 자잘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뭐……. 그래 봐야 데면데면한 수준이겠지요. 루켈라 공작 부인은 아이를 싫어하고, 마티어스 소공자와도 정이 없으니까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델피아는 곧장 몸을 일으켰다.


“네, 네. 델피아 님, 무슨, 왜 갑자기 일어나시는……. 목욕물 받아 놨…….”

델피아의 뜬금없는 태도에 시녀가 식은땀을 흘렸다.


“목욕물에 왜 이렇게 집착하지?”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시녀를 향해 일갈했다.


“뭐가 문젠데? 나, 찾아가려고, 루켈라 공작 부인.”

루켈라 공작 부인에게 찾아가서 시엔 미르모드에 대해 운을 띄워 봐야겠다.


“난 궁금한 건 못 참거든.”

델피아가 다리를 스트레칭하듯 쭉 뻗고 픽 웃었다. 시녀가 ‘지금 흙먼지 가득하신데…….’라고 말하는 것 따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시엔 미르모드, 그 여자애는 그냥 미끼일 뿐이었다.


‘마티어스 미르모드의 약점이라면 내가 먼저 잡아채고 싶거든.’

마티어스 미르모드.

현재 공작 작위와 가까운, 가장 위험한 존재.

그러나 미르모드 가문의 가주이자, 미르모드 공작이 되고 싶은 건 델피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재미있는 유희였다.

그리고, 시엔 미르모드를 만나는 것 역시 유희의 일종이 될 예정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