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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그 고구마, 얼마냐 물었다 (28/77)


28화. 그 고구마, 얼마냐 물었다
2023.03.07.


시녀 언니들과 고양이를 먼발치에 보내고, 나는 정원에 마련된 벤치 앞에 앉았다.

그러면서 애시드와 대화를 몇 번 나눴다.


‘이름이 시엔, 이시구나…….’

‘웅! 그렇게 불러 조.’

‘……저는 거리의 아이라 이름이 없어요.’

애시드라는 이름이 있지 않느냐, 라고 물으려던 나는 멈칫했다. 생각보다 제 형에 대한 반감이 깊어 보이는 상태였으니까.


‘아아…….’

‘저어, 어디 가지 말아 주, 주세요.’

대화 중에 나온 말을 토대로 나는 깨달았다.

자신을 버린 형에 대한 애시드의 분노가 예상보다 깊다는 것과, 그가 약간의 분리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걸.


‘오래도록 혼자 살아서 그런지, 애시드는 많이 힘들어 보여.’

“움……. 형이 많이 싫은 고야?”

“……네, 절 버렸으니까요.”

나는 멈칫했다.

테드는 애시드를 버린 게 아닌데, 애시드는 테드가 자신을 버렸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어쩌면 애시드의 방어 기제인 걸까.

내가 공연히 건드려도 되는 문제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땅을 발로 툭툭 치면서 작게 대답했다.


“그러쿠나…….”

그러나 애시드는 빈민가에 살던 아이답게 눈치가 빨랐다.

소년은 제 손을 작게 꼼지락거리며 입을 열었다.


“……변명할 기회를 줬으면, 하시는군요.”

“아냐, 어린이는 싫은 건 안 해두 대. 힘든 일은 나중에 생각해.”

“……테드, 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려고 절 데려오신 줄 알았어요.”

나는 고개를 힘껏 내저었다.


“그거 아니야! 난 그냥!”

애시드의 유순한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짓씹다가 조용히 읊조렸다.


“그냥 네가 행복하길 바라. 나처럼. 테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면……. 억지로 테드를 받아들이려고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해.”

소년의 푸른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보석 사파이어를 닮은 영롱한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행복…….”

그가 조용히 읊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찬찬히 응시했다. 애시드는 깨끗하게 잘 씻기고 먹이고 나니 제법 잘생긴 태가 났다.


“응!”

“……제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게…….”

나는 서서히 눈시울이 붉어져 가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재차 강조했다.


“눈물은 금지야! 일단 따뜻한 거 먹구 좋은 거부터 생각하쟈!”

그가 작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꼭 어른처럼 말하시네요.”

말머리를 돌리는 걸 보아하니, 그는 생각할 시간이 조금은 더 필요해 보였다.

나는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양 갈래로 묶은 머리가 챠르르 흔들렸다.


“조아. 우리 이제 나쁜 생각 하지 말구, 힘 쎄지기 놀이하자!”

‘센치해질 때는 역시 ‘힘 쎄지기 놀이’만 한 게 없지!’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애시드가 제 입술을 꾹 깨물며 물었다.


“네?”

나는 주머니에서 커다란 물폭탄을 하나 꺼냈다.


“짠! 발이 느린 사람이 물폭탄 팡팡! 맞는 거다!”

고블린은 없긴 하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이 정도는 되어야 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악당답게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네. 그 놀이를 하고, 더 생각해 볼게요.”

애시드가 잔잔하게 웃었다.


“담력을 기를 수 있는, 무서운 놀이인데 괜찮지?”

“네. 시엔 님이랑 같이 하면…… 뭐든 좋아요.”

굳게 결심한 듯 보이는 애시드를 바라보면서, 나는 주머니에서 물폭탄을 꺼냈다.

***

마티어스는 창 아래를 내려다보며 애시드와 시엔이 뛰어노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다행히 고블린에는 관심을 끈 모양이었다.

하긴, 순수하고 순박한 시엔이 고블린을 좋아할 리 없다.

그저 다시 보고 싶은 호기심 정도일 것이다.


 


“우아아아!”

신이 잔뜩 난 소년의 목소리에 마티어스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니 상관없다.

저런 소리쯤이야 예상했다. 제 딸은 상대가 누구든 무장해제를 시키는 귀여운 능력이 있으니.

마티어스는 제 앞에 부복한 심복을 내려다보며 권태롭게 속삭였다.


“네가 조사한 것을 말해라.”

……시엔이 말한 ’진짜’ 기사 역시 마찬가지일 터다.

그는 시엔과의 만찬 전에 자객을 보내 시엔의 행적에 대해 보고 받았다.

시엔은 신전의 평범한 성기사, 테드를 만났다고 했다.

그자가 감히 시엔을 홀렸을까 염려해, 평범한 세작 하날 보내 적당히 기를 눌러 줄 생각이었는데.


“성기사는 단숨에 제가 보낸 세작을 제압했습니다.”

“적어도 너보다는 실력자인가 보군.”

“예. 면목…… 없습니다.”

의외로 시엔이 선택한 ‘진짜 기사’는 실력이 꽤 빼어난 모양이었다.

심기가 언짢아진 마티어스가 눈썹을 까딱하자 세작을 보낸 자가 조용히 부복했다.


“그자가, 이 서신을 전해 달라 했습니다.”

마티어스는 차가운 시선으로 측근을 본 후 서신을 잡아챘다.

[기척 없는 자객을 보냈다면, 시엔 미르모드 님의 부친이신 마티어스 님이시겠지요. 불쾌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대단히 불쾌하다.

마티어스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저는 보잘것없는 성기사지만, 시엔 미르모드 님께 해를 끼치는 일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도리어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이 말만큼은 진심으로, 신께 진실의 맹세를 할 수도 있습니다.]

도움은커녕 지금 큰 해악을 끼치고 있다. 마티어스의 심기에 말이다.

그러나…….


‘진실의 맹세를 언급한단 말이지.’

성기사에게 진실의 맹세란 목숨을 걸고 제가 말한 것이 진실임을 보증하는 행위였다. 고작 한 번 만났을 뿐인 시엔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기사의 맹세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이 고민한 듯한 필체였다.

마티어스는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겼다. 성기사가, 악당 가문이라 이름난 미르모드의 딸에게 기사의 맹세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그러나 서신의 내용은 거기서 끝이었다.

마티어스는 서신을 한 손으로 구긴 후 측근을 향해 물었다.


“신전의 성기사 테드라고?”

“네, 맞습니다. 시녀들에 따르면, 시엔 님께서 주워 온 아이가 이 성기사의 동생이라더군요. 아마 그 점에 고마움을 느낀 것 같습니다.”

마티어스는 눈을 느른하게 감았다 떴다.

악셀 미르모드를 상대하기 위해, 마티어스에게는 신성력이 빼어난 이가 필요했다.

그런데, 시엔이 공교롭게도 신성력이 있는 기사를 주워 왔다.

우연의 일치일까?


“서류 상으론 평범한 성기사에 불과한데, 어떻게 자객을 한 번에 간파했지?”

“제 경험으론……. 대단한 실력자였습니다. 신성력 쪽으로 특화된 것 같았고요.”

제국의 악역을 자칭한 가문, 미르모드.

악마 혹은 어둠의 힘을 기반으로 한 가문의 능력은, 당연하게도 신성력에는 제법 취약했다.


‘안 그래도 신성력이 가득한 성기사 중 신전의 변절자가 될 이를 찾고 있었는데.’

악역 가문에 제대로 충성할 성기사를 찾을 수 없다 생각해서 포섭은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실력 있는 성기사를 영입하게 된다면, 악셀 미르모드나 델피아 미르모드와 대적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가 되어 줄 것이다.


‘이렇게 성기사가 굴러들어 온단 말이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꼭, 아무것도 모르는 시엔이 자신의 앞날에 아름다운 꽃길을 깔아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럴 리 없을 텐데.

그리고 그래선 안 됐다.

마티어스는 제 마음을 건드리는 미묘한 감정을 밀어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델피아 미르모드가 내일 귀환한다더군.”

그는 우선 델피아를 처리하기로 했다.

새하얀 머리칼에 바다처럼 맑고 푸른 눈동자를 가진 반쯤 미친 여자.

시엔에게 세작을 보냈던 후계 구도의 주인공.

그는 내일 저녁 식사에 대해 알리듯 가볍게 말했다.


“도착하면 바로 칠 생각이야.”

델피아를 쳐서 그녀의 세력을 온전히 흡수하기로 한 것이다.

무혈 전쟁이라면 전력을 아낄 수 있으니까 더 좋을 터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가문의 세력 싸움은 피를 흘리게 되는 것이 정상이었다.


‘내일은 시엔을 밖으로 내보내지 말아야겠군.’

델피아가 시엔에게 수를 쓸 수도 있으니, 둘을 마주치게 하면 곤란했다.

마티어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까딱했다.

제 측근을 바깥으로 내보내기 위한 눈짓이었다. 측근은 그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려는 듯 몸을 더욱 구부리며 부복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아빠아아!”

물풍선 놀이를 다 한 것인지, 홀딱 젖은 시엔이 들어왔다.


“시엔 심심해! 고블린 사 조……! 어라?”

시엔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바닥에 무릎 꿇은 심복을 한 번, 마티어스를 한 번 바라보았다.


“……움?”

시엔의 눈에 물음표가 떴다.

그리고 마티어스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

무릎을 꿇은 채로 제 앞에 부복하고 있는 심복.

그 심복의 얼굴은 생채기가 잔뜩 나 있는 상태.

객관적으로 지금 마티어스, 자신의 모습은 누가 봐도 흑막 같아 보였다.

마티어스는 조용히 침음을 삼켰다. 시엔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게 보였다.


“모지? 이 아저씨 왜 이러고 있어?”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란 시엔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의문을 가지는 눈치였다.


“혹시…….”

정적 앞에서 단 한 번도 긴장한 바 없던 마티어스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자신이 사실 순박한 농부가 아니라는 걸 시엔에게 들킨 것일까.

힐끔 심복을 본 시엔이 쪼르르 달려와 마티어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아저씨가 가, 감자 사 달라구 무릎 꿇어써?”

다행히 아직까지는 순박한 감자 농부인 척하는 콘셉트가 먹히는 것 같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감자만 계속 우려먹으면 좀 그러니까…….


“응, 그러네. 이번에는 감자 아니고 고구마.”

시엔의 표정이 부루퉁해졌다. 마치 ‘아빠는 완전 호구 가타!’라고 말할 때의 그 표정이었다.


“휴.”

시엔이 조그만 유치를 아득아득 갈며 무릎 꿇은 심복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심복은 당황한 표정으로 시엔을 응시했다.


“이보게나, 고구마 가격 얼마이느냐!”

“예……예?”

시엔이 근엄하게 배를 내밀고 물었다. 통통한 아기 배가 살짝 보였다가 사라졌다.


“귀, 귀여워…….”

심복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을 때였다. 시엔이 어깨를 딱 벌리며 거만하게 한 번 더 물었다.


“어허. 무섭다고 해야지!”

더욱 빤질빤질하게 드러난 통통하고 사랑스러운 아기 배를 응시하던 심복이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무, 무섭습니다.”

“구래. 잘하였느니라. 앞으로도 명심하거라. 나눈 아빠와 달리 아주 무서우니까.”

마티어스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고 시엔이 어디까지 하는지를 지켜보았다.

측근의 ‘무섭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시엔의 보송보송한 볼에 발그레한 홍조가 물들어 있었다. 저건 시엔이 신나고 행복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무섭다는 말을 좋아한다, 라…….’

서서히 이 악당 가문이 시엔에게 미치는 악영향이 실감이 났다.

욕설, 고블린, 취향 변화.

삼연타였다.

마티어스는 이를 으득, 갈았다.

시엔은 제 아빠 주변의 공기가 족히 5도는 내려갔다는 사실은 모르고 심복을 빤히 관찰하고 있었다.


“조아. 나는 그 고구마, 얼마냐 물었다.”

심복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 모습이 더욱 흉악해 보였는지 시엔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무섭게 생겨써!’라고 혼잣말을 하는 것도 같았다.

물론 심복은 시엔의 말조차 귀담아듣지 못한 채로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는 고구마 가격 따위는 몰랐지만, 마티어스의 딸인 시엔에게 잘 보이고는 싶었으니까.

시엔의 형형한 시선을 마주한 심복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극존칭을 쓰며 대답했다.


“그, 100개당…… 1실버? 정도 되옵니다.”

“뭐어?”

시엔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반면, 심복은 시엔에게 잘 보이기 위해 미소를 지었다. 누가 봐도 위협적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최선이었다.

마티어스는 시엔과 심복 간의 대치를 가만히 응시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이 가문의 후계 경쟁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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