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뽀송뽀송하고 깨끗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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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뽀송뽀송하고 깨끗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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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뽀송뽀송하고 깨끗해!
2023.03.03.
나는 잘 키워 줘야 할 자그마한 강아지, 아니 소년을 한 명 얻었고, 덤으로 성기사의 마음까지 얻었다.
악셀 미르모드의 위협을 방어하고, 여차하면 공격까지 할 수 있을 효과적인 성채가 마련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 가는 느낌이었다.
정말 기뻐해야 할 일인데, 어쩐지 마음이 무거운 이유는 뭘까.
나는 마차에서 내 옆에 앉은 소년을 곁눈질하며 조용히 말했다.
“잘 부탁해! 아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소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기, 는 아니지만……. 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감사해요.”
나를 전적으로 믿는 것 같은 시선을 마주하니까 왠지 마음이 따끔거렸다.
나도 전생에서는 가족을 싫어했을 때가 있었으니까.
“웅, 아기야! 내가 도와주께.”
앞으로 네가 행복하게 꽃길에서 살 수 있도록.
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애시드를 바라보았다. 애시드의 초롱초롱한 눈에서 눈물이 일렁였다.
그렇게 우리 둘 사이로 따뜻한 분위기가 형성된, 바로 그 순간이었다.
킁!
맞은편에 있던 시녀들이 감동을 받은 듯 코를 먹었다.
‘분위기를 잡으려야 잡을 수가 없다니까.’
이 근육만 강하고 마음은 약한 시녀 언니들 같으니!
나는 그들을 흉보듯 작게 웃으며 내 옆에 있는 소년의 어깨를 응원하듯 두드려 주었다.
마차는 끊임없이 달려, 미르모드 가문의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함께 살고 있는 서쪽 저택에 도착했다.
“씻기기부터 하죠.”
“……좋아, 가는 거다!”
“웅! 다들 씻구 마싯는 거 먹자!”
시녀들의 기운찬 기합 소리를 들으면서 나와 애시드는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환히 웃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 상처로 얼어 버린 마음을 따뜻하게 해빙시켜 주려면, 따뜻하게 녹은 초콜릿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
시엔이 테드의 남동생을 서쪽 저택으로 데려왔을 때. 마티어스는 시엔의 시녀들이 죽기 직전까지 팬 세작들을 완벽하게 처리하고 온 터였다.
감히 제 딸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어지간히 심사가 꼬였다.
‘그 악마가 우릴 이렇게 만들었다-고 했지, 건방지게도.’
무엇보다 제 딸에 대해 ‘그 악마’라고 지칭하질 않았나.
마음이 여린 탓에 잡초조차 함부로 밟지 못하는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델피아가 보냈다고 했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마티어스는 미르모드 가문 내에서 압도적으로 강했지만, 본디 권력의 판도는 힘만으로 완전히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델피아 미르모드, 악셀 미르모드, 그리고 원로원.
그 너머에 있는 황제 일가와 제국의 권력과 결탁한 교황까지.
모두를 소리소문없이 처리해야 하는데, 자칫 스텝이 꼬이면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
‘교황을 처리해야, 유엘라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으니까.’
그녀는 구도의 악마 재판 사건으로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다.
유엘라는 자신이 악마를 소환했다고 시인하며, 자기를 죽여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유엘라에게 분명 다른 뜻이 있었을 거라고 믿었다.
‘……신전의 덫, 말이지.’
굳게 결심한 마티어스는 델피아부터 처리하기로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리라.
델피아 미르모드.
그야말로 미친 마법사로,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후계 구도에서 우위를 점한 이들 중 하나였다.
자기에게 반하는 자는 대놓고 찍어 누르는 성정에, 직설적인 화법을 주로 사용한다나.
가문 내에서는 제정신이 아닌 망나니지만, 마법이나 이능력만큼은 어디에 내놓아도 대단하니 후계자 자리를 차지해도 손색이 없다는 식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런 델피아의 이능력에는 틈이 있었다. 그녀는 제 몸을 변형시키는 마법을 주로 사용했고, 그 마법에는 커다란 부작용이 있었으므로.
‘델피아 미르모드를 처리하고 나면, 다음 단계가 있지.’
악셀은 어둠의 힘을 사용했으므로, 세간에는 그가 네크로맨서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네크로맨서를 이길 방법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아직까지 악셀 미르모드를 완벽히 파괴할 방법을 찾진 못했지만.’
마티어스는 눈을 아래로 내리감았다.
그는 지난 오 년간, 자신의 근처에 존재하는 모든 기연을 집어삼켰다.
사실상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강해진 것이다.
그러니 미래를 조금쯤은 낙관하며, 서쪽 저택으로 돌아온 차였는데…….
“아빠!”
시엔이 저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티어스는 절로 풀어지는 입가를 숨기지 않으며 환히 미소 지었다.
“시엔, 보고 싶었어.”
힘든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나서 딸의 환영을 받는 건 여러모로 가슴 따뜻해지는 일이었다.
“아빠, 나 칭구 생겨써! 지금 여기 와 있어!”
그는 딸을 바라보며 환히 웃다 입매를 단단히 굳혔다.
세작을 처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낯선 자가 저택에 침입했다니.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사악한지 아직 모르는 순진한 시엔인데, 또다시 세작이 침입해 아이를 해치려던 건 아닐까.
그는 찌푸린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저거, 아니, 저 친구야?”
시엔의 뒤엔 시엔보다 커다란 몸집을 숨기고 있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는 본래 어린아이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제 딸을 저렇게 열렬히 보고 있는 아이라면 더더욱.
저 눈빛은 동경과 감격, 숭배까지 혼재된 미묘한 무엇인가였다. 자신을 구원해 준 사람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 말이다.
“웅! 지나가다가 데려와써. 뽀송뽀송하구 깨끗해!”
시엔은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복슬복슬한 아이의 까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내 아기 부하로 쓸 거야!”
시엔의 밝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마티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엔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대놓고 경계하는 티는 낼 수 없었다.
“그래. 귀찮…….”
……실수했다.
마티어스는 순박한 척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귀여운 친구구나. 방을 따로 내줄 테니 그 안에 머물게 해.”
그러나 분명히 의심의 여지를 둘 필요는 있었다.
게다가 시엔을 제 애착 인형처럼 대하는 건 그 기묘한 가면을 쓴, 눈빛이 묘한 꼬마로도 충분했다.
“웅! 허락 바다써, 이제 가치 놀자!”
시엔이 붕붕, 소년의 손을 들어 흔들었다.
소년이 잇새로 작게 중얼거렸다.
“네, 쓸모있는 사람이 될게요.”
쓸모있는, 이라는 말에 시엔의 표정이 잠깐 풀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마티어스는 시엔이 가끔 보이는 저런 쓸쓸한 표정을 볼 때마다 못내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경쾌하게 물었다.
“들어가자. 다른 일은 없었어?”
그저 화제를 돌리기 위한 것이었는데.
마티어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서면서 시엔이 활기차게 말했다.
“맞다, 나 어른 기사도 구해써!”
“으응, 아빠? 아빠가 시엔 기사님이잖아.”
마티어스는 환히 웃으며 반문했다.
시엔은 평소에 자주 “아빠는 백마 탄 기사 같아!”라고 말하곤 했으니까.
그러나 시엔은 이번에는 진지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니, 진짜 기사!”
……진짜 기사?
‘그럼 아빠는 가짜 기사라는 거야?’
조금 상처받은 마티어스는 힘이 들어가는 주먹을 풀며 침착하게 반문했다.
“누군……데? 아빠 상처받았어.”
사실, 시엔에게 ‘아빠 상처받았어.’라는 말은 제법 효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달랐다.
시엔은 머리를 나풀나풀 날리며 새치름하게 웃었을 뿐, 별다른 말을 더하진 않았던 것이다.
어쩐지 초조해진 마티어스가 제 입술을 연신 깨물다 물었다.
“응? 시엔.”
“우웅, 나중에 알려 주께!”
마티어스는 조용히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시골 마을에서는 아빠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요즘은 그런 말이 없었다. 꿀떡 같이 보드랍고 윤기 나는 얼굴에 인상을 팍, 쓰고 ‘아이고, 바뿌다!’라고 하며 돌아다닐 뿐.
어느새 시엔에게 비밀이 많아졌다.
마티어스의 주먹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동그란 시엔의 앞짱구를 보면서 마티어스는 고민했다.
도대체 요즘 시엔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한번 알아봐야겠다고.
‘기사의 정체를 확인해 봐야겠군.’
시엔이 구했다는 기사가 누군지부터 제대로 확인해 봐야겠다.
순수하고 연약한 제 딸에게 나쁜 짓을 가르친다면 가만히 있지만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생각이 너무 깊어졌던 탓일까. 어느덧 시엔은 동그란 발로 한 달음에 앞서 나갔다.
마티어스가 시엔의 걸음을 따라잡기도 전에, 먼발치에서 시엔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이따가 사냥 놀이 하자!”
“네?”
딸의 곁에 따라붙은 순수한 소년의 목소리에 시엔이 익살스럽게 소리쳤다.
“고블린 때려잡기!”
시엔의 목소리를 듣고 마티어스는 생각했다.
아냐.
우리 딸은 아무 문제가 없어.
이건 다 이 가문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왠지 목덜미부터 싸해지는 기분에, 그는 시엔의 최근 근황을 전부 파헤쳐 보기로 결심했다.
***
아빠는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난 모른다. 아마 ‘저 조그맣고 착한 아이, 애시드를 잘 먹이고 입혀야지.’ 같은 사랑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 아빠는 엄청 착하고 상냥하니까!’
가볍게 아빠의 심리를 추측한 나는 곧장 애시드를 바라보았다.
애시드는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그럼, 저녁 먹고 고블린 잡는 거예요?”
“웅! 잡아 버리는 고야!”
나는 아주 사악하게 웃어 보였다.
‘저녁 먹고 고블린 잡아서 아빠한테 자랑해야지! 나의 힘을 과시하겠어!’
일거양득,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저녁, ‘고블린 때려잡기’ 놀이를 하면서 테드의 동생, 애시드와 친해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이 힘들었던 건지 한 일 년 정도는 폭삭 늙은 듯한, 어쩐지 얼굴이 잔뜩 굳어 버린 아빠와 알콩달콩 식사를 끝내고 애시드의 손을 꼭 잡고 나서 저택의 야외 정원으로 나왔는데 말이다.
‘왜 고블린 없지?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아빠의 최측근으로 추정되는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고블린을 이 근처에 풀어 뒀던 기억이 있는데 말이다.
나는 내 등 뒤에 서 있는 시녀 언니들을 향해 예리하게 물었다.
“온니들, 귀여운 고블린이 다 어디로 갔느냐?”
“아, 그게…….”
“고블린을 준비하기는 했는데…….”
시녀 언니들의 반질반질한 이마에 땀이 주룩 흐르는 게 보였다.
“마티어스 님께서 전량 폐기를 지시하셨습니다. 그런 무서……운 것은 우리 저택에 둘 수 없다면서요.”
시녀 언니들의 목소리가 살짝 삐끗했다.
그녀들의 말을 들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빠가 또 잡혀 온 고블린 불쌍하다고 했겠구나.’
확실히 아빠 같이 선량한 사람은 고블린조차도 안타깝게 여길 것이 자명했다.
‘역시 우리 아빠는 천사야.’
그런데 그다음으로 시녀 언니들이 내 발치를 가리키며 눈을 찡긋했다.
“대신 이 귀여운 고양이를 내리셨어요.”
“고양이……?”
나는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언니들의 말이 맞았다.
살짝 찬 서리가 내린 풀밭 위, 털이 온통 새하얗고 귀여운, 복슬복슬한 고양이가 내 앞에 얌전히 다가와 있었다!
꼬리가 낮게 살랑살랑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고양이는 귀엽긴 하지만, 힘을 기르는 데에는 필요가 없는데!’
당연히 고양이는 아주 귀여워서 심장을 아프게 했지만 말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여러 번 내저었다.
“나 같은 사람은 고먀미랑 안 어울려.”
“네?”
“나는 고블린이 좋단 말이야. 고블린, 사자, 호랑이!”
“아…….”
나는 낙담한 시녀 언니들을 보다가, 고개를 우측으로 홱 돌려 애시드를 바라보았다. ‘사자를 보러 가자!’라고 말하려 했다.
“아기야, 우리 사자-.”
그러나 곧 헙, 입을 막았다.
애시드는 살짝 입을 벌리고 젤리가 콕콕 박힌 발바닥을 그루밍하는 고양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건, 그는 고양이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 고양이는 원래 털이 하얀가요?”
“웅?”
‘하얀 고양이도 있고, 까만 고양이도 있지.’ 라고 가볍게 대답하려던 나는 소년이 제 화상을 입은 손을 등 뒤로 감추는 걸 보고 잠시 멈칫했다.
‘펠로드 거리에는 지저분한 고양이밖에 없으니까, 몰랐구나.’
뭔가 공기조차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박수를 한 번 짝! 쳤다.
“우리 재미있는 얘기 하자!”
애시드는 지금까지 더럽고 안 좋은 것들만 보아 온 것 같았다.
환생하기 전 내가 가족들에게 외면당하면서 상처투성이가 된 것처럼, 애시드도 지금 마음이 뾰족해진 상태일 것이다.
‘나 같아서 외면하기가 힘들어.’
그러니까 나도 그에게 좋은 것들을 많이 알려 주고 싶었다. 지금의 나처럼 행복해지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