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나랑 같이 가자!
(2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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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나랑 같이 가자!
2023.02.28.
혹시 이 아이가 내가 찾던 아이일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찰나였다.
원작 속에 묘사된 테드 동생의 얼굴이 정확히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명확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테드와 동생의 상봉 장면은 감격스러웠지. 테드의 동생은 자기 형을 내내 기다렸어. 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단 뜻이야.’
가난했던 작은 소년, 테드는 가족을 모두 잃고 동생과 둘이 남겨진다. 그는 먹을 걸 구하기 위해 잠시 동생을 거리에 맡겨 둔다.
그의 실수였다.
테드의 동생은 길을 잃고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래도 푸른 눈은 흔하지 않은데…….’
내가 생각하고 있던 사이 아이는 걸음을 멈췄다. 나는 내 앞에 나뒹구는 돌의 잔해에 잠깐 멈칫했다.
“다 왔어요, 여기예요.”
나는 시선을 들어 눈앞의 유아원을 바라보았다. 이 거리에서도 단연코 흉물스럽고 비좁은 폐허였다.
“……무서운 곳이군요.”
시녀 언니들의 말마따나 유아원은 보기만 해도 다리가 떨릴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반쯤 무너진 커다란 석조 건물은 겨우 비 정도를 피할 수 있는 잔해에 가까웠다.
나는 어렵게 입을 열어서 물었다.
“혹시 이 유아원에……. 아직 아이들이 살아?”
“……폐업했어요.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구요.”
“아아…….”
“찾는 사람이 아이인가 봐요.”
“웅. 아기야!”
이렇게 된 이상 모든 게 원점이다.
나를 보던 소년이 바스켓을 손으로 꾹 쥐며 낮게 속삭였다.
“……그렇구나.”
왠지 쓸쓸해 보이는 소년을 보니 마음이 안쓰러워졌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잘 알지만, 이럴 때는 섣부른 위로 대신 당분을 채워 주는 게 최고다.
“이거 먹을래?”
나는 주머니에 있던 사탕을 몇 개 꺼내 내밀었다. 소년이 눈을 크게 뜨고 경계심을 해제하듯 청량하게 웃었다.
“가, 감사합니다.”
까만 얼굴 중 유달리 하얀 이로 열심히 사탕을 깨물어 먹는 아이는 오늘 처음으로 행복해 보였다. 조용해진 분위기에 무언가를 말하기는 해야겠다는 듯, 아이가 시녀 언니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아까 깡패들한테 막, 뭐라고 할 때, 되게 멋졌어요.”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어깨가 한 움큼 올라간 시녀 언니들을 한 번, 소년을 한 번 바라보았다.
왠지 마음이 찌르르 아팠다.
가족에게서 버려졌다는, 이 폐허 속에서 혼자 사는 아이.
누구나 이런 아이를 보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싶다고 생각할 터였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도와주어야겠다.
어차피 도와줘도 내가 손해 보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언니.”
“네, 시엔 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이 아기도 데려가면 안 되느냐?”
어쩌면, 유아원에 살았다는 성기사의 동생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네?”
소년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바둑이 같은 그를 보면서 작게 웃었다.
“혼자서는 외롭지 아나?”
“……네?”
외로움이라는 말에, 소년의 눈동자가 풍랑을 맞은 배처럼 흔들렸다.
나는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아마도 이 소년이 오랜 세월 외로움과 싸워 왔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공연히 장난스럽게 눈을 접어 웃으면서, 나는 툭하니 다음 말을 내뱉었다.
“음, 막, 그러니까, 심심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괘, 괜찮았어요.”
“나랑 같이 가자!”
유아원에 살던 이 아이는, 성기사에게 그의 동생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아이가 원한다면, 미르모드 가문에 어린 시종으로 취직시켜 줄 수도 있고.’
나는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유아원에 홀로 남아 살아왔던 이름 없는 작은 아이.
“네. 저, 저라도 도움이 되, 된다면요.”
그가 손을 등 뒤로 하면서 눈꺼풀을 깜빡였다. 조금 기쁜 듯 입꼬리가 모호하게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도움이 안 되어두 갠차나!”
“……네? 하지만…….”
“언래 어린이는 행복해야 하는 거야!”
“행복…….”
아이는 미소 짓는 것이 어색하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앞으로 다가섰다.
그가 움직이자 텅, 하고 바스켓이 다리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내가 맛있는 거 많이 주께!”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소년의 건치 미소를 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즐겁게 펠로드 거리 앞으로 나섰다. 시녀 언니들이 깡패를 처리해 뒀기 때문에 쾌적하게 거리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성기사와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어.’
사냥 대회가 끝나기 전, 그와 나는 ‘내일 오후 세 시, 펠로드 거리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오후 두 시 오십 분.
거리의 먼발치를 바라보던 시녀가 눈을 가늘게 뜨곤 입을 열었다.
“저 말을 탄 사람이 성기사일까요?”
“성기사…….”
소년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알아?”
“네. 대단한, 사람들이잖아요. 저도……. 성기사가 되고 싶었는데.”
빈민가 어린이들의 꿈은 대부분 빈민가를 탈출하는 걸 텐데.
특이하다 싶은 소년의 꿈이었지만 굳이 반문하지 않으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꼭 됐음 좋겠다.”
내 말을 끝으로, 테드의 말이 거리 바로 앞에 멈췄다.
그는 투구를 벗어던지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상하게 표정이 다급해 보였다.
당장 그의 동생을 찾아 주지 못한 게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목을 높이 들어 그를 올려다보면서 씩씩하게 물었다.
“미안, 아직 못 차자써. 얼른 찾으러 가자!”
“……시엔 미르모드 님.”
“웅?”
나는 무심결에 그를 힐끗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의 눈시울이 잔뜩 충혈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 동생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성기사의 시선은 내 옆의 소년을 향해 못 박힌 듯 붙어 있었다.
“……누구시죠.”
소년은 시리도록 차가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내 옆에 멈춰 섰다.
“전 가족이 없는데요.”
이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칼 위에 선 것처럼 아슬아슬한 분위기에 나는 눈을 연신 굴리며 사태를 파악해 보고 있었다.
***
오랜만에 상봉한 형제였지만, 아무래도 펠로드 거리 앞에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펠로드 거리에서 빠져나와, 바로 옆 블록으로 향했다.
나는 급한 대로 시녀 언니들이 가지고 다니던 내 예비 턱받이 손수건 열 장을 아이의 얼굴과 몸을 닦는 데에 썼다.
별로 아깝진 않다.
왜냐면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지금 테드와 테드의 동생은 감격스러운 형제 상봉 대신,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다.
“미안해, 들어 줘. 널 버린 게 아니었어.”
“……아뇨, 버렸잖아요. 저 사람이 날 버린 거예요.”
소년의 얼굴에는 분노와 증오가 어려 있었다.
“계속…… 계속 찾았어.”
“거짓말. 날 더러운 거리에 버리고 간 거, 다 기억해요.”
고통을 담은 테드의 시선이 소년의 쪼그라든 왼손으로 향했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보던 소년이 증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성기사가 됐군요.”
“그땐 너무 가난해서……. 너를 찾지 못했어. 미안하다, 애시드.”
소년의 증오 섞인 눈빛이 눈앞의 테드를 바라보았다.
“애시드라고 부르지 마세요. 전 그런 이름 없으니까.”
형제 간에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소설 속에 엑스트라의 가정사까지 상세히 나와 있진 않았기에 새삼 난감해졌다.
‘둘을 만나게 해 주면 바로 짝짜꿍해서 잘될 줄 알았는데.’
나는 나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도는 둘의 대화를 바라보며 이마를 짚었다.
성스러운 여주인공, 멜로디아 성녀님이 아닌 나는 두 형제 간의 깊어진 감정의 골을 메워 줄 재간이 없었다.
“이거 어떠케 하지?”
자꾸 내 등 뒤에 숨으려 하는 조그만 소년을 보며 나는 긴 한숨을 쉬고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 속에서는 달콤한 초콜릿이 나왔다.
“자, 초콜릿.”
“가, 감사합니다.”
어린 강아지가 처음 보는 사람을 제 엄마처럼 인식하듯, 소년은 자꾸 내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자신을 명확히 경계하는 듯한 소년을 보던 테드가 얼굴을 울듯이 일그러트렸다.
그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보여서, 나는 넌지시 물었다.
“……테드, 동생 버려써?”
“절대 아닙니다. 내내, 찾고 있었어요. 일부러…… 너를 찾으려고, 계속……. 이곳에 있었어. 다른 곳도 가지 못하고 계속.”
그의 절실한 눈빛을 보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을 본 나는 알 수 있었다. 테드가 제 동생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렇지만 소년은 모르는 눈치였다.
분명 원작에서는 없던 장면이었다. 원작 속에서 테드의 동생은 성녀 덕분에 가족을 찾고 행복해했으니까. 성녀가 찾아 준 행복이라면서 내내 기뻐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오해가 있구나.’
지금 이 순간 소년은 몸을 떨고 있었다.
테드의 손에 맡긴다면, 이 소년은 겁먹고 내내 경계하게 될 것이다.
유아원에 있던 것보다 더 크게 상처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족 간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는 주의기는 하지만, 둘의 성격적인 차이를 고려하면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둘 다 잘 들어. 내가 대안을 하나 주께.”
내 말에, 둘의 혼란스러운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생각했다.
“아기야, 나랑 살래? 당분간만.”
“그게 무슨-.”
“테드, 애시, 아니, 동생한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게 조을 거 같지?”
말하면서도 나는 큰 확신을 하지는 못했다.
이 아이는 오늘 처음 본 나를 선택할까, 아니면 제가 잃어버렸던 하나뿐인 가족을 선택할까.
“저는…….”
애시드는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덩달아 긴장한 나도 입술을 공연히 한 번 훑었다.
그의 시선이 테드와 나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나는 소년의 손을 꼭 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아까 있던 일이 머릿속에 짧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소년은 테드와 나 가운데, 나를 선택했다.
그리고 테드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가족에게 상처받은 아이는, 자기 형보다도 처음 본 사람을 따라갈 정도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상태였다.
테드는 의외로 쉽게 동생을 되찾는 일을 포기했다.
그는 나를 반쯤은 미묘하고, 반쯤은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오히려 조급해진 내가 그를 향해 물었었지.
‘테드.’
‘네.’
‘정말 후회하지 아나?’
내 질문에 테드는 진지하게 말했었다.
‘……제 동생을 잘 돌봐 주십시오. 그래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동생, 많이 예뻐해 주께. 이건 테드를 내 편으로 만들고 싶어서는 아니야.’
하지만 오래 기다려 줄 수는 없었다.
나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한 달이라는 데드라인이 명확하게 있었으니까. 악셀이 올 시기를 늦추는 방법이 있지 않은 한은 말이다.
‘그래도 테드, 2주 안에 나한테 와.’
내 말에 그는 미묘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푹 숙였었다.
‘……고민해 보고, 명심하겠습니다. 한 가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웅.’
‘제가 오늘 일은 평생, 잊지 않겠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