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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내 기사가 되어 주면 안 돼요? (18/77)


18화. 내 기사가 되어 주면 안 돼요?
2023.01.31.



“정말 송구합니다.”

조그만 다탁에 다리를 달랑거리며 앉은 내 앞에 찻잔이 내밀어졌다.

성기사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긴 한숨을 내쉬더니 상황을 빠르게 수습하고 나를 제 사저로 데리고 왔다.


“갠차나요.”

나를 놀린 아이들은 오랜 근신 처분을 피할 수 없었다. 어차피 신성력이 높은 것도 아니니, 내가 문제를 삼는다면 신관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할머니가 내 손목에 채워 준 시계 모양의 영상구가 증거가 될 테니까.

미르모드의 위세가 신전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지만, 그럼에도 우리 가문은 귀족이었다. 굳이 어린 신관 몇을 보호하겠답시고 공작가와 척을 지는 멍청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큰 잘못, 묻지 않으께요.”

하지만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물론 상냥한 척 말하지만, 사실은 저 아이들이 어떻게 처분당할지 알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문제 삼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쟤넨 끝났어.’

어린 신관들에겐 티끌만 한 흠결이 있는 것도 문제가 되니까. 앞으로 신관이 되기는 매우, 매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악동처럼 속으로 후후, 웃은 뒤 눈앞의 성기사를 바라보았다.

제법 대인배 같은 말이었지만 이 안에는 노림수가 있다.


‘내가 이렇게 착하게 말하면, 이 성기사 오빠는 나를 착하게 볼 거니까!’

그는 나를 착한 어린이로 인식한 듯 한숨을 포스스 내쉬며 감사 인사를 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한데, 미르모드 가문의 어린 영양께서 여긴 어쩐 일로…….”

그제야 그쪽에 생각이 미친 모양일까.

그는 조심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너 보러 왔지, 라고 말할 순 없으니까.’

나는 세련되게 입을 열었다.

소설 속에서 멜로디아가 그의 환심을 샀던 방식, 그대로.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원작의 대사들을 떠올려 봤다.


“전단지를 보고 왔다요?”

“예?”

“이 신전에서 어떤 분이 가족을 찾는다구 해써요. 테드 님, 이었나. 그래서 찾아 주려고.”

“그, 전단지를 보고 오셨다고요?”

“녜!”

그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 전단지를 붙인 게 저, 접니다.”

테드의 눈동자가 떨렸다.

물론 나는 그가 만들었다던 전단지를 본 적도 없다.

그저 기억을 더듬어 말할 뿐이었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거기 나오는 몽타주랑 똑가튼 금발, 아몬드 모양 푸른 눈, 남자 아기를 본 적 이써요.”

“네? 어, 어디에서…….”

“펠로드 거리에 이써요.”

강직한 성기사가 긴장한 듯 손에 든 찻잔을 더욱 세게 쥐었다.

찻잔이 깨질 것 같았다.

멜로디아의 성기사, 테드.

그는 신에게 제 능력을 전부 바치기로 한 후에도 잃어버린 남동생을 꾸준히 찾고 있었다.

그리고 원작 속에서 멜로디아는 그가 잃어버린 소중한 남동생을 찾아 주었다.

테드는 남동생의 행방을 알려 준 멜로디아에게 소중히 간직하던 머리핀을 건네며 감사 인사를 건넸고, 남동생을 찾은 후 그녀의 기사가 되기로 맹세했었다.

나는 이번에 그녀의 역할을 대신하기로 한 것이다.


“그게 진실이라면, 사례, 사례를 꼭 하겠습니다, 미약하지만…….”

“정말요?”

“네,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그럼…… 움…….”

살짝 고민하던 나는 바로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내 기사가 되어 주면 안 대요?”

“예?”

그가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례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미르모드 가문에 더 좋은 기사들이 많을 텐데요. 저는 성기사 중에서도 그리 빼어난 재목이 아닙니다. 지켜야 할 분도 있고요.”

‘이런, 미친!’

조그만 어린이답지 않게 욕하고 싶어졌다.


‘지켜야 할 분이 벌써 생겼다고?’

나는 진정하기 위해 연신 심호흡을 했다.

저 말은 분명 연막일 수도 있었다. 원작에서는 아직까지 지켜야 할 분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미르모드 가문 사람이니까, 성기사 입장에서는 더욱 나를 따르고 싶지 않을 터였다.

나는 그의 의심을 풀어 주기 위해 무해하게 웃으며 좋은 핑곗거리를 댔다.

통통한 두 뺨이 창문을 틈타 들어오는 햇살을 받아 부드럽게 익어 있었다.


 


“구치만 시엔, 아까 나를 구해 준 멋진 기사님한테 감동해써요.”

“네? 그게 무슨…….”

“압빠랑 시골 마을에서 맨날맨날 둘이만 있어써요.”

“…….”

“그래서 미르모드 무서워써요. 지켜 줄 기사님이…… 있으면 조케써요.”

테드도 나와 아빠에 대해 퍼진 소문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어쩌면 제 남동생과 자신의 관계에 나와 아빠의 관계를 겹쳐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나는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시엔이는 나를 지켜 줄 가족이 마니 마니 필요해요!”

눈 반짝반짝.

양 볼에 말랑한 두 손을 얹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맥이 풀린 듯 웃어 보였다.


“아…….”

철없는 귀족 영애라, 생각하는 표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마음에 빚을 잔뜩 진 표정이었다.

신을 위해 사는 강직한 기사의 맹세를 깨기에는 부족하겠지만.

그래서 나는 그의 마음에 빚을 더 달아 두기로 했다.


“동생, 같이 찾아 주께요.”

“……예?”

“도와주께요.”

나는 환히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도와줄 거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렇다 해도 저는, 당장 호위가 되어 드릴 수는…….”

“호위 말구, 그냥 도와주께요. 기사님두 나 그냥 도와줬으니까! 저는 시니 알거든요. 아앗, 시니 말고! 신, 의.”

“하하…….”

그냥 한 말이었지만, 테드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가 낮게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의라…….’ 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테드가 신념을 중시하는 FM 타입이었지?’

별다른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그의 의표를 찌른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그의 마음의 틈새를 파고들고, 빚을 지게 한 걸로 됐다. 앞으로 이 강직한 성기사는 나를 기억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내게 손을 내밀 터다.


‘어차피, 이 사람을 오늘 당장 데려갈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는 조그마한 내 손을 내려다보며 잇새로 무언가를 작게 중얼거렸다.


“어린 레이디 미르모드.”

그는 조심스럽게 제 품을 뒤져 내게 작은 머리핀을 건넸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이건, 값비싼 성물은 아니지만, 받아 주십시오.”

나는 머리핀을 가만히 보다가 멈칫했다. 스스럼없이 머리핀을 주는 모습에 나는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원작 속에서는 멜로디아가 이 머리핀을 선물 받으면서 그와의 친교를 다지게 되니까 말이다.


“녜.”

나는 그가 건넨 핀을 받아 들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멜로디아와 완벽히 같은 루트를 밟고 있어.’

그녀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고 나는 아니다.

멜로디아의 역할을 가로채기엔 역부족일 수 있지만, 그의 눈빛을 보면 희망이 생겼다.


‘내 사람이 되어 줄지 아닐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나는 그의 복잡미묘한 표정을 응시했다. 동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이, 아빠를 지키려는 내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의 절절한 진심을 엿보고 나니, 진심으로 동생을 찾는 걸 도와주고 싶어졌다.


“그러엄, 세 밤 자구 보러 가요, 동생!”

내일은 아빠의 계승식이 있는 날이고, 모레는 사냥 대회 날이니까, 글피는 시간이 난다.

나는 시간을 최대한도로 잘 활용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족을 지키려는 사람의 얼굴은 저런 표정이구나.’

어쩐지 저 기사님의 표정이 내 얼굴을 보는 것 같아서. 나는 그를 진심을 다해 성의껏 도와주고 싶어졌다.

나와 같은 마음인 걸 아니까.

***

어쩐지 떨리는 마음을 안고 나는 공작가로 곧장 돌아왔다.

성기사가 건네준 나비 모양 머리핀을 품은 채로.

근육 시녀 언니들은 신전 바로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기도실 안에서 시종들을 협박한 참이었다.


“하하하! 시엔 님!”

“……어어?”

나는 주춤거리며 몸을 물렸다. 그러자 그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희가 이 신전 출입증을 받아 냈습니다!”

“…….”

“앞으로 이 신전에 오실 때면 저희가 에스코트를 바로 해 드리죠!”

“시녀답게 말입니다!”

나는 그들의 등 뒤에 서 있는 신관의 새하얗게 질린 안색을 응시했다. 확실히 협박한 것처럼 보여서 왜인지 모르게 안쓰러워지기까지 했다.


“으응…….”

진지하게, 근육 시녀 언니들이 내 편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작은 소동 끝에 이튿날, 아빠가 소공작이자 백작의 홀을 넘겨받는 날이 왔다.

계승식은 약식으로 진행되었다.

영지전이 진행되고 황궁이 우리 가문을 견제하는 이때, 계승식을 크게 가질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우리를 위해 마련해 준 서쪽 저택으로 가며 속으로 미르모드 가문을 욕했다.


‘이 나쁜 가문 사람들, 우리 아빠가 어차피 갈아 치울 후계자니까 계승식도 조그맣게 하는 거야?’

우리 아빠가 살아남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10%도 안 되는 것 같았다.

내가 저택 주변을 산책할 때마다 수군대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들어 봐도 그랬다.


‘쟤도 곧 죽을 거라던데?’

‘그래도 과거에는……. 그러니까 어떻게 될진 모르는 거 아냐?’

그들이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최대한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래 봐야 힘 전부 잃고 추방당했었는데, 뭘.’

‘하긴. 조만간 악셀 님과 델피아 님이 복귀하실 예정이니까.’

‘진짜? 델피아 님이 더 빠르게 도착하시려나?’

‘두 분 다 한 달 내로 도착하실 거야. 전령이 파발을 보냈다고!’

하지만 들려오는 건 악셀과 델피아가 곧 돌아올 거라는 절망적인 소식뿐이었다.

잔뜩 경직된 나는 할머니가 건네준 공격형 아티팩트를 품 안에 꼭 품고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힘을 길러야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저택으로 향하는 내내 내가 입술을 깨물고 빠르게 걷는데도 내 뒤로 시선과 말이 따라붙었다.


“가문에 조만간 또 피바람이 불겠군. 어휴.”

“저 어린애도 곧 죽겠네. 불쌍해라.”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수군대던 사람들이 뚝, 말을 멈췄다.

뚝, 뚜둑.

내 옆에서 관절을 꺾는소리가 났기 때문일까?

시녀 언니들은 목소리를 낮추고 중얼거렸다.


“시엔 님.”

“웅.”

멈춰 서서 위를 올려다보자, 시녀 언니들의 어두운 표정이 나를 반겼다.

표정을 보아하니 근육에는 밝지만 귀는 다소 어두운 근육 시녀 언니들도 그들의 나쁜 속삭임을 들은 모양이었다.


“곧장 처리할깝쇼?”

“모두 준비 되었슴다.”

……뭐야, 이 말투?


‘도대체 어디서 이상한 말투 배워 왔어, 이 언니들!’

설마 교육원장의 세작을 처리했을 때도 저런 태도였나, 싶어서 착잡해지기까지 했다.


‘무섭잖아!’

그녀들의 흉흉한 기세에 질린 사람들이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뭐, 뭐야. 곧 죽을 자들 눈치는 왜 봐?”

“어휴, 추방자가 다시 복권하다니. 악셀 님이 돌아오시면 저것들은!”

“악셀 님? 거기까지 갈 것도 없어. 델피아 님이 오셔서 처리하면 끝이니까!”

물론 개중에는 악당답게 악담을 퍼붓는 자들도 있긴 했다. 위악을 행하듯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든 그들은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그 마음, 잘 알지.’

나는 그들을 빤히 보다 씨익 웃었다.


“후움, 우리 아빠 절대 안 죽어.”

“그럼요. 저희는 다 압니다.”

“하면, 저 입 가벼운 치들은 마티어스 님의 이름으로 처리할까요?”

“웅? 우리 압빠 이름?”

순간 잘못 들은 줄 알고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아빠 이름으로 처리한다니, 그럼 마음 여리고 순한 아빠는 큰 충격을 받을 것이 자명했다.

손을 덜덜 떨면서 내가 사람을 처리했다니, 라고 몇 박 며칠을 시무룩한 표정을 지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찌르르 아파 왔다. 하지만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시녀들이 합창하듯 크게 복창했다.


“네? 시엔 님! 결단을 내려 주십쇼!”

말도 안 되는 소리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어 주는 것이 내 특기 중 하나였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 대. 우리 아빠 맘 아파서 눈물 줄줄 나!”

“허, 허허……?”

“시엔 님…….”

근육 시녀 언니들이 이상하게 내 시선을 피하는 것 같았다.


‘왜 저런 표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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