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역시 특별한 아이
(16/77)
16화. 역시 특별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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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역시 특별한 아이
2023.01.24.
이튿날 아침, 할머니는 새벽 다섯 시에 전갈을 보냈다.
나는 비척비척 잠옷을 갈아입고 할머니가 있을 공작부인의 사저로 향했다.
그리고 어리둥절해하는 레온하르트와 나는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갑자기 교육에 불려 나와 당황했겠지만, 레온하르트는 내 멋진 졸병이자 친구였다.
옆에 두고 함께 실력을 향상해 나가는 게 좋다는 뜻이었다.
나는 흑심을 숨긴 채 키득키득 웃어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까딱했지만 반문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나란히 선 우리 둘을 바라보던 공작부인이 엄중하게 말했다.
“나는 기준 미달인 아이는 가르치지 않는다.”
할머니의 냉정한 테스트가 시작된 것이다.
가르침을 주기에 앞서, 할머니는 나와 레온하르트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 간단하게 점검해 보기로 했다.
교육원장의 테스트 때와 달리, 할머니 앞에서는 내 능력을 깎아내릴 필요가 없었다.
환생자인 내게 할머니의 테스트는 너무 쉬웠다.
상식 테스트, 백점.
판단력 테스트, 백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마력 테스트가 있었다.
“눈을 감고 몸 안에 있는 마나를 느껴 봐라. 그럼 내가 너희들의 몸 안에 축적된 마나의 양을 확인해 보지.”
나와 레온하르트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할머니는 레온하르트의 앞으로 향했다. 나는 실눈을 뜨고 그들을 관찰했다.
“네 부모와는 그릇 자체가 다르구나.”
‘네 부모? 그릇? 레온하르트를 입양한 부모님 이야기인가?’
사실 소설 속에 레온하르트의 부모님 이야기까지는 나오지 않는다.
저 말이 무슨 의미일지 궁금했는데, 이상하게도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역시 예전에도 알아봤지만, 잘 가르치면 꽤 훌륭한 재목이 되겠군.”
할머니의 말에 나는 뿌듯하게 웃었다.
저런 대단한 인재를 내가 구슬렸다는 사실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레온하르트가 유능하긴 하지!’
그때였다. 할머니가 탐탁잖은 표정으로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며 물었다.
“한데 너는, 악셀의 저택에서 머물고 있질 않으냐?”
“……아.”
“그 아이에게 배워도 될 것을, 왜 시엔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지.”
그녀의 말마따나, 레온하르트는 양부와 양모 때문에 악셀의 저택에서 머물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우리 편으로 넘어올 수 있는 아이이기도 했다. 원래 악당들의 세계에서는 뒤통수치고, 뒤통수 맞는 일이 흔하기도 하고…….
‘한 하늘 아래 두 악당은 없다고, 나중에 악셀과 반목하게 되었던 기억이 있거든.’
악셀을 경계하는 것 같은 할머니 입장에서는 레온하르트를 가르치는 일이 떨떠름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알아 가다 보면 악셀이 좋은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괜찮다.
하지만 레온하르트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지는 다른 문제였다. 만약 반항적인 태도라도 보인다면……!
“악셀이고 뭐고, 전 밤톨과 친해질 겁니다만.”
“……히익.”
지나치게 반항적인 태도였다.
나는 눈을 껌뻑이며 고래 사이에 낀 새우처럼 둘의 눈치를 살폈다. 할머니는 한참을 무표정한 얼굴로 레온하르트의 표정을 훑더니,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뭐, 그렇다면야.”
이상하게도, 레온하르트의 대답이 할머니의 마음에 쏙 든 것 같았다.
상황이 종식된 것을 뿌듯해하며 그들을 실눈으로 관찰하고 있을 그때.
“보자.”
루켈라 공작 부인이 손을 뻗어 소년의 턱을 치켜들려 했다.
“앞으로-.”
바로 그때,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칼날 위를 걷듯이 날카로워졌다.
“만지지 마십시오.”
“…….”
“가면.”
왜일까.
분명 윗사람에게 하기엔 무례한 말인데.
왜 제 영역을 침범당한 새끼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는 것 같아 보이는 걸까.
그는 꼭 원치 않는 보호막을 만들어 낸 것처럼 쓸쓸해 보였다.
나는 내 옆에 선 레온하르트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문 채로 별말이 없었다.
할머니도 그를 흘기더니 더 묻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꿀, 네 차례다.”
‘꿀단지, 꿀빵, 빵, 꿀……? 저번부터 궁금했는데, 혹시 그거 내 이야기인가?’
나 엄연히 시엔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그렇지만 할머니에게 토를 달 순 없다.
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녜! 눈 꼭 감으께요!”
나는 눈을 꼭 감고 할머니를 기다렸다.
그러나 몇 초, 몇 분이 지났는데도 할머니는 말이 없었다.
‘뭐지?’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유를 알 수가 없군.”
“……녜?”
“마력이 없는데.”
마력이 아예 없다고?
“마력이 미약하긴 할 거라 예상했지만 아예 아무것도 없이 깨끗할 줄은 몰랐군.”
나는 낙담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어릴 때부터 비실비실했던 탓에 짐작하긴 했지만, 아예 없다니.
‘아니, 내 몸 그 정도로 최약체였어? 마력도 못 만들어?’
“그런데…….”
잔뜩 좌절한 내게 의아함 가득한 음성이 들려왔다.
“뭔가가 네 몸 안에서 부딪치는 느낌이야. 이럴 수가 있나?”
“움…….”
콩콩, 할머니가 나를 만질 때마다 몸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무언가가 부딪치는 기분이 들기는 했다. 기세가 아주 미약하기는 했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몸 안에서 공이 튕기는 느낌은 있어요.”
“이상해.”
할머니의 말에 나는 뜨끔했다.
‘혹시 내가 가진 ‘환생자 패널티’와 관계가 있는 건가?’
그렇지만 나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신이 알려 준 ‘환생자 패널티’는 마력과는 관계가 없었다. 내가 이 세계의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할 때 제약이 생길 뿐이었다.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 보는군.”
곁에서 조용히 레온하르트가 첨언했다.
“요정의 목걸이를 빼 봐, 천재. 그거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할머니가 단칼에 잘라 냈다.
“아니. 저 요정 목걸이 때문은 아니다.”
“아…….”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나는 멈칫했다.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내 몸은 이상하다는 거지. 게다가 마력 보유량은 최하.’
산 넘어 산이라는 말밖엔 나오지 않는다. 나와 아빠를 죽일 그놈이 오기까지 딱 한 달 남았는데!
이래선 주인공들의 아티팩트를 빼앗아도 문제일 터다.
중급 이상의 아티팩트를 활용하려면 마력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물끄러미 공작 부인을 바라보곤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그렇지만 마음이 너무 슬퍼져서 고개를 잘 끄덕였는지도 잘 모르겠다.
순식간에 침울해진 내 표정에 공작 부인의 표정도 덩달아 가라앉았다.
“실망했나?”
“안니요…….”
이런, 누가 봐도 실망한 티가 나는 대답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보며 짧게 고민했다.
“음…….”
“함미만큼 강해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겠지요?”
“그래. 뭐, 마력을 다루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크흠, 네가 특별한 아이라는 소리다. 좌절하지 마라. 나도, 한때는 너처럼…….”
나도, 한때는 너처럼, 그다음에 나올 문장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나는 그다음 말을 기다리면서 할머니를 바라봤다. 그러나 기다렸던 대답은 들리지 않고, 대신 곁에 선 레온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특별한 아이……. 역시…….”
나는 옆에서 자꾸 아련한 눈빛으로 보는 레온하르트를 애써 무시하고 다시 반짝이는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까 했던 말을 이어서 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 아무튼 시엔. 넌 다른 방법으로 가르쳐야겠구나.”
“……특별한 방법으로 말입니까?”
레온하르트의 질문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기다려서 널 잘 다듬을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머리 하난 똑똑하니 행정관이 되어도 좋겠지.”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행정관은 약하다.
가만히 앉아서 머리만 굴리다 악셀에게 단칼에 죽게 될지도 모른다.
‘난 행정관이 되어서도 안 되고, 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릴 시간도 없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살짝 흠칫해서 물었다.
“너 눈을 왜 그리 뜨느냐, 아가.”
나는 꼭 쥔 주먹을 풀고 할머니의 옷깃을 꾹 잡아당겼다.
‘내가 강해지지 못한다면 주변을 강자로 가득 채우면 돼.’
이 세계에서 ‘특별한 사람’은 마법사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의 강자들을 대충 알고 있지.
“함미!”
“……뭐지?”
“저 데려다주실 곳이 있어요!”
나는 할머니의 옷깃을 쥔 손에 다시 강력한 힘을 주었다.
‘나한테 마력이 없다면, 환생자로서 알고 있는 지식을 쓰면 그만이거든!’
내 부탁은 교황청의 부속 신전인 ‘세노아 신전’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능력을 달라고 신께 기도하러 가겠다는 게 명분이 되어 주었다.
내 뜬금없는 부탁에 할머니는 메마른 눈가를 몇 번 문지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잇새로 가여운 것, 신전에 가는 게 부탁이라니. 라고 말하는 것도 들렸었다.
“함미?”
“……내 네 앞으로 내린 선물이 하나 있다. 받았느냐?”
“선물?”
고개를 기우뚱하자 할머니가 읊조렸다.
“아직이구나. 별건 아니다만 유용히 쓰일 게다.”
악역 할머니에게 ‘별거 아닌 것’이 과연 내게도 ‘별거 아닌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할머니가 내 부탁을 곧바로 들어주었다는 게 중요했다.
‘왠지 할머니가 날 동정하는 것 같긴 했지만 괜찮아. 어쨌든 신전에 들어왔다는 게 중요하지.’
나는 할머니 찬스 덕분에 곧장 신전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비록 할머니가 악역 공작가에서 배척받는 존재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때나마 아성이 있었던 존재라는 게 중요한 모양이었다.
‘할머니를 넘어서는 손녀가 되겠어. 청출어람!’
청출어람이 이때 맞는 한자성어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눈앞에 있는 교황청의 부속 신전을 바라보며 힘차게 심호흡을 했다.
“후, 하. 후, 하!”
열심히 심호흡을 하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바보 무리가 있는 것 같지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심장께를 파고드는 긴장감을 떨쳐 내야만 한다는 사명을 떠안고 눈을 반짝 빛냈다.
‘진정해, 시엔. 너무 긴장하지 마.’
말랑말랑한 손을 딱딱해질 때까지 꾸욱 움켜쥔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신전 안으로 힘차게 들어섰다.
나는 자그만 손을 힘차게 내저으며 척척, 병정처럼 걸었다.
그래, 분명 시녀 언니들의 보폭을 쫓아 열심히 한 걸음 한 걸음 걸었는데 말이다.
조금 이상하다. 뽀르르, 열심히 걸어가기는 했지만 한참을 걸어도 신전 문은 나오지 않았다.
“히유.”
“업어 드릴까요, 아기님?”
“웅!”
시녀들의 등짝에 휘릭 짐짝처럼 업히면서 나는 생각했다. 위험하니까 우리 근육 시녀 언니들 데려오길 잘했어!
이곳은 교외에 있는 작은 신전이지만 신전은 신전이고, 악당 가문과는 그리 친밀하지 않았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단 소리다.
혈혈단신으로 신전에 향하는 내게 할머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해 주었고, 레온하르트는 내 손을 꼭 잡고 삼 초 정도 놔주지 않았다.
악셀 미르모드가 돌아오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딱 한 달 남짓.
내가 할 수 있는 건 몇 가지 없었다.
조력자를 모으고, 악셀 미르모드의 ‘전쟁’을 방해해서 그가 돌아올 시기를 최대한 늦추고, 그사이 그와 대적할 만한 힘을 기르는 것뿐!
‘일단 들어가자!’
잠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짧고 통통한 다리를 연신 흔들며 시녀 언니들의 품에 쏙 안겨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해서 신전에 들어선 뒤.
내부를 한번 훑어본 나는 <멜로디아의 생애> 속 내용을 다시 한번 복기했다.
신의 성녀, 멜로디아.
그녀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물들여 간다.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선한 마음으로 위로해 주기도 한다.
그녀는 신성력도 빼어났지만, 신이 내린 성유물과 위엄 있는 성기사들을 토대로 미르모드 가문을 포함한 악역들과 대적해 나갔다.
그런 그녀가 제일 먼저 성녀로 이름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 신전, 붓꽃이 가득 핀 세노아 신전이었다.
내 사정이 급하긴 했지만, 멜로디아가 찾아낸 성유물과 모든 성기사를 전부 다 빼앗을 수는 없었다.
그저 딱 하나만 욕심낼 생각이었다.
‘멜로디아가 가지고 있는 가장 힘이 센 성기사를 데려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