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아무래도 꿀빵이는 전례 없는 천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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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아무래도 꿀빵이는 전례 없는 천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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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아무래도 꿀빵이는 전례 없는 천재인 것 같다
2023.01.20.
그들의 예상대로였다.
루켈라 공작 부인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시엔의 똘망똘망한 눈빛을 떠올리며 흐뭇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꽤나 사랑스러웠더랬지.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루이보스 차를 한입에 머금었을 바로 그때, 유독 눈치가 없어 화제를 꺼냈던 나이 어린 부인이 난데없이 끼어들었다.
“우리 가문 아이들은 가족 간의 정이 없어, 꽤나 데면데면하지 않습니까?”
미르모드 가문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능력을 계발해야 했다.
누가 자신을 어떻게 죽일지 모르기에.
그러니 자연스럽게 어린아이다운 귀여움이나 애교는 없는 편이었다.
“크흠, 그렇지.”
“그런데 꿀빵 님……. 아니, 시엔 님은 마티어스 님이나 부인께 애교도 많으시겠지요?”
루켈라 공작 부인은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냥 숨을 쉬는 것이 애교 아닌가.”
“그, 그런가요?”
부인들이 긴장감으로 몸을 굳히고 있을, 바로 그때였다.
문이 스르륵 열리고 루켈라 공작부인의 수석 시녀장이 등장했다.
“저, 부인.”
“무슨 일이냐.”
루켈라 공작부인이 까칠한 얼굴로 시녀를 바라보았다.
그 뒤로 무언가가 어른거리는 것도 같은데, 공작 부인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방해하지 말라, 그리 일렀거늘.”
부인들의 티 타임 시간은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었다.
단 한 가지 예외인, ‘조그만 어린아이들의 방문’만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까지 간 크게 공작 부인의 밀실 문을 두드리는 어린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 그게…….”
수석 시녀장이 입은 차분한 드레스 너머로 빼꼼, 조그마한 밤톨 머리가 등장했다.
“시엔 님께서 독대를 청하셔서요.”
“……뭐?”
공작 부인이 반문하자마자 티타임 장소 안으로, 배시시 웃는 시엔의 얼굴이 드러났다.
터질 것 같은 볼살을 양손으로 꾹 누르며 시엔이 크게 소리쳤다.
“함모니! 저 와써여!”
“……꿀빵?”
“녜에!”
애교 가득한 시엔의 모습에 루켈라 공작부인의 입매가 하늘로 승천했다.
시엔은 빠르게 테이블 근처로 뛰어와서 꾸벅 배꼽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들이 들고 있는 티 컵만큼 조그만 꼬마다.
작은 아이의 우렁찬 인사에 공작 부인을 제외한 세 부인들의 표정도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
부인들의 티타임은 부산스럽게 정리되었다.
그러나 공작 부인은 휴식 시간을 방해받아 불쾌한 건가 싶을 정도로 데면데면하고 차가웠다.
그렇다면 어째서 내 독대 신청을 받아 준 걸까.
‘그래도 드디어 할머니와 독대할 수 있어!’
아직까지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최고 정보통, 루켈라 공작부인.
‘난 아직 따로 정보 길드를 만날 수 없으니까……. 지금은 공작 부인이 줄 수 있는 정보가 제일 필요해!’
그렇게 다짐하고 정보를 캐내기로 마음먹었는데, 좀 이상했다.
“당장 내 무릎 위에 앉도록.”
“녜?”
공작 부인이 고개를 까딱이며 엄중한 표정으로 명령했다.
‘무릎 위는 왜……?’
감히 공작 부인의 의견을 거스를 수 없어 무릎 위에 냉큼 앉긴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 힘들었다.
‘왜 무릎 위에 앉으라고 하는 거지?’
둘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의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곤란하다.’
그러나 루켈라 공작 부인은 초지일관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간단한 신변잡기 질문을 한 뒤 마침내 중요한 정보 하나를 제공해 줬다.
“조만간 가문에 큰 행사가 있을 거다. 대략 석 달쯤 뒤일까.”
행사라니. 좀 더 캐 봐야겠다.
“그으……. 시녀들이 그러는데, 행사 때에는 엄청 무서운 아저씨들 마니 온다구…….”
“아, 그래. 우리 가문의 후계자는 직계든 방계든, 입양아든 누구나 될 수 있으니, 후계자 자리에 도전하려 드는 뜨내기들이 오겠지. 그래도 대부분 잔챙이뿐이야.”
“잔챙이요?”
“그래. 우리 가문에서도 세 명 정도 빼면 잔챙이니 말이야.”
공작 부인은 가문의 권력 구도에 대해 여상한 말투로 말하는 중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럼……. 그 셋은 무서운 아저씨들이에요?”
“세 명이야 뭐. 뻔하지. 악셀, 델피아, 그리고, 마…… 아니다. 크흠, 아, 그중에서 꽤나 위험한 놈, 악셀이 전쟁을 끝내고 복귀하겠다고 하더군. 짜증 나는 일이야.”
악셀은 ‘꽤나’가 아니라, ‘제일’ 위험한 놈이었다.
나는 얼어붙어서 고양이처럼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어어…….”
“마물 전쟁인데 한 달 만에 끝내겠다니, 오만하다 못해 제대로 돌아 버린 거지.”
미르모드 가문의 사람들은 호전성을 죽이기 위해 마물들을 사냥하러 가고는 했다. 그것을 점잖은 표현으로 ‘마물 전쟁’이라고 칭해 왔다.
‘마물들은 반짝이는 것도 좋아하고, 온갖 마도구를 수집하기도 해서, 마물 전쟁터에 보물이 자주 등장하기도 하거든.’
그래서 악셀을 포함한 미르모드들 역시 마물들이 지니고 있는 물건을 가지러 마물 전쟁에 참가하고는 했다. 하지만 마물들을 한 번 들쑤셔 놓고 나면 쉽게 퇴각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최소 일 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그런데 악셀 미르모드는 지금 한 달 만에 전쟁을 끝내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한 달 동안 내가 이 가문을 평정할 수 있을까?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소식에 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 그러쿠나.”
“악셀 그놈은 쓰레기다.”
딱딱하게 굳어진 나를 어떻게 생각한 건지 할머니가 짧게 첨언했다.
“아, 미안하다. 넌 어린아이라 내 표현이 무섭겠구나.”
‘그래도 악셀이 본격적으로 가문 내를 평정하는 건 전쟁에서 복귀한 후니까. 아직, 아직은 승산이 있어!’
내가 초조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던지, 할머니가 눈썹을 찡그렸다.
“넌 걱정 마라. 마티어스가 전부 알아서 할 게다. 죽는다면 그것도 네 아빠 탓이겠지.”
나는 죽음을 쉽게 입에 담는 할머니를 파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난 죽기 싫단 말이야!’
우리 아빠의 한없이 무해하고도 부들부들한 눈빛을 떠올리니 심장이 아팠다.
우리 아빠가 알아서 하면 끝은 몰살 엔딩일 게 확실하다. 순진한 우리 아빠는 못 믿어. 나만 믿을 수 있지!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악셀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은 그를 힘으로 찍어 누르거나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것뿐이었다.
‘악셀은…… 흑마법을 쓰는 놈이니까. 백마법이나, 신성력을 이용해야 하나?’
나는 진지하게 주먹을 꼭 쥐었다.
내 복잡한 마음도 모르고 할머니는 태평하게 내 귓가에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너는 당분간 심심하겠군. 교육원장의 자리가 공석이라.”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당분간 교육이 없다니 시간이 비겠구나.
“저, 갠차나요!”
“……왜지? 넌 어린아이답지 않구나.”
“함미한테 계속 놀러 올 거니까요!”
“그래?”
할머니의 품 안에서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기에 그녀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너 따위가 나를?’이라고 말하는 듯한 차디찬 음성이었다.
그래서 나는 도박하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공작 부인을 내 편으로 만들고, 그녀에게 힘을 이어받으려면 이 방법밖엔 없다.
나는 본론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았다.
“네! 그, 시녀들한테 함미 얘기를 했는데…….”
‘미안해, 시녀 언니들.’
사실 거짓말이다.
“……내, 얘기를 했다고?”
“녜.”
“뭐, 뭐, 뭐라고 했지?”
“얘들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함미가 있는데에…….”
불끈.
어느 순간부터 탁상을 쥔 할머니의 손에 핏줄이 불끈불끈거렸다.
근육 가득한 시녀 언니들한테나 볼 수 있는 그런 핏줄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공포를 참고, 몸을 은근히 배배 꼬며 수줍게 말을 이어 갔다.
“……있는데?”
“함미가 너무 멋져서, 함미처럼 힘이 쎄지구 싶다구…….”
공작 부인만큼 힘이 세지고 싶은 건 진심이었다.
악셀이 한 달 뒤에 돌아오는데, 내가 힘이 약하면 우리 아빠는 꼼짝없이 잡아먹히고 말 것이었다. 그 전에 힘을 많이 길러 둬야 했다.
내 생각을 모르는 할머니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녜.”
할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뜬금없이 말을 더듬었다.
“머, 멋있……다고?”
내 작은 머리통 속을 해부하려는 듯 바라보고 있을 게 뻔했다.
잔뜩 경직된 할머니의 허벅지 근육 위에 앉아서 나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녜! 함미처럼 엄청 멋진 사람이 되려면…….”
“되, 되려면.”
“어떻게 해야 대요? 막, 엄청 쎄지는 아티팩트도 있다던데에……. 흑마법이랑 반대되는, 백마법이라는 것도 있구…….”
루켈라 공작 부인이 주먹을 꾹 쥐었다.
나는 떨리는 얼굴을 들어 슬쩍, 위를 올려다보고 눈을 찡긋했다.
그런데, 할머니의 얼굴이 엄청나게 일그러져 있었다…….
……실패했나, 싶어 눈치를 힐끗힐끗 살피고 있을 바로 그때, 할머니가 떨리는 입술을 열어 말했다.
“나도 너 같은 시절이 있었지. 강해지고 싶다, 열망하던 때가 말이다. 넌 그때의 나를 생각나게 하는구나.”
분명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섬찟했다.
할머니는 제 말에 방점을 찍듯 입을 열었다.
“안 되겠다.”
부정적인 말이 나오다니 큰일이었다.
실패인가? 싶은 좋지 않은 생각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하긴 공작 부인을 구워삶는 게 이렇게 쉬울 리 없지, 같은 패배감 어린 생각도 정신을 잠식했다.
앞으론 어떻게 그녀를 대해야 할지 머리를 마구 굴리던 그때였다.
잔뜩 실망한 내 귓가로 기합이 한껏 들어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줄까, 꿀빵아?”
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처럼 되려면 어떻게,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요?
‘그런데 꿀빵이?’
진지한 상황에서 꿀빵이라고 하니까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일단 귀 기울여 들어 볼 생각으로, 나는 쫑긋 귀를 세웠다.
“내가 널 직접 가르쳐 주마.”
“……녜?”
“너무 기뻐하진 마라. 딱히 네 부탁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니.”
할머니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이건 다, 교육원장이 의문사해서 당분간 널 가르칠 사람이 없어서다. 또, 교육원장의 후임이 없어 교육관들이 죄다 뒤숭숭하기도 하니……. 내 널 가르치는 게 좋겠지. 안 그러냐?”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어쩔 수 없는 일을 떠맡은 탓에 공작 부인이 날 싫어하게 될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다.
미래가 걱정스러워진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어, 안 그래두 괜찮은-.”
“어허.”
“……?”
“널 교육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그녀는 강경했다. 그리고 목소리의 톤을 자세히 들어 보니, 엄청나게 싫어하는 눈치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공작 부인은 전성기가 있는 사람이야. 지금은 몰락했지만 사교계에서는 여전히 입지가 약간이라도 있고, 악셀을 조금이나마 저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을지 몰라.’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다.
루켈라 공작 부인은 다방면에 해박했지만, 특히나 높은 등위의 마법사였던만큼 마법약이나 독(毒)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알았다.
몇십여 년 전, 그녀가 어린아이들을 위해 만든 키 크는 마법 물약 키즈 텐텐은 제국 전역에 다 퍼져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였다.
그뿐인가?
그녀는 무척 많은 공격형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물론 반론도 있었다. 공작부인이 공격형 아티팩트를 그리 많이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 쉽게 가문의 실권을 내주었겠느냐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나같이 아무것도 없는 어린 애보다는 공작 부인이 훨씬 힘이 셌다.
생존 확률이 올라간 기분에 나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우와아, 감사함니다!”
동글동글한 내 눈동자를 위에서 빤히 내려다보던 할머니가 한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헛기침을 하며 중얼거렸다.
“큼, 큼. 그래, 빵아.”
빵이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꿀빵이랑 빵이가 누구야?’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공작부인은 시선을 거두고 차갑게 대꾸했다.
“이제 나가 보거라. 내일 또 오도록.”
“녜. 함미, 좋아해요!”
나는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할머니의 손등 위에 쪽, 뽀뽀한 뒤 뽀르르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이제 나도 강자가 될 수 있어!’
문 앞에 선 채 두 손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폈다.
벌써부터 힘이 세진 기분이 들었다.
‘힛, 신나.’
마음속으로 방방 뛰던 나는 그러고 보니 나가기 전에 할 말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살짝 돌렸다.
“아, 구론데요 함미…….”
고개를 돌렸을 때 루켈라 공작 부인은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마치 폭주기관차 같았다.
게다가 손등을 조심스럽게 매만지기도 했는데, 내가 고개를 돌리자 화들짝 놀란 기색이었다.
그녀는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뭐지?”
차가운 표정과 달리,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빨갰다. 그게 조금 의문이기는 했지만, 얻어 내야 할 게 있는 나는 모른 척 입을 열었다.
“제 칭구도 같이 가르쳐 주시면, 안 대여?”
나는 윗니와 아랫니가 시원하게 보이도록 입꼬리를 양옆으로 올렸다.
엄청나게 어색해 보였지만……. 할머니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가르쳐 주신다고 하니 오늘은 그것으로 만족할 참이었다.
나는 동그란 머리통이 보일 정도로 꾸벅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교육을 하는 날, 내 다시 네게 전갈을 보내마.”
너무 늦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환히 웃으며 눈매를 접었다.
“네! 최대한 빨리 함미 보고 싶어요!”
할머니가 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최대한 빨리라. 그럼 오늘, 아니, 오늘은 부담스럽겠지.”
‘당연하죠! 한 일주일 정도 뒤…….’
“내일 바로 시작하자꾸나.”
‘……네?’
“준비하마.”
할머니는 근엄하고 차갑게 말했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