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아빠는 나쁜 말도 못 하고 너무 순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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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아빠는 나쁜 말도 못 하고 너무 순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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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아빠는 나쁜 말도 못 하고 너무 순수해!
2023.01.17.
다음 날. 교육원장과 훈육 담당자 릴미의 의문사 소식이 들려왔다.
게다가 아빠의 후계자 및 백작 복위 소식 덕분에 북쪽 첨탑은 떠들썩했다.
그래서 나는 교육을 받지 않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좀 이상하네. 죽기 직전까지 미로 속에서 헤맬 뿐, 이렇게 빨리 죽지는 않을 텐데.’
뭔가 환영술에 문제가 있었나 싶었지만, 조잡한 악당들의 죽음이 그리 안타깝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들에게 신경 쓸 시간 따위는 없었으니까.
지금은 일촉즉발의 위기 시점!
아빠가 후계자가 됐다는 소식을 들은 악셀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아니, 이렇게 바로 최종 보스랑 대면하게 되는 거야? 난 아무런 무기도 없는데? 진짜로 우리 같은 엑스트라한테는 끔살엔딩 밖엔 없는 거야?’
북쪽 첨탑에 근육 시녀들과 남은 나는 퀭한 눈으로 소파에 몸을 묻었다. 시녀들은 아빠가 미르모드의 후계자로 발탁된 것이 기쁜지 연신 조잘대기 시작했다.
“시엔 님, 축하드립니다! 공작 부인께서 새 저택을 선물하실 예정인가 봅니다! 조만간 시엔 님을 위한 예쁜 방도 가질 수 있으실 거예요!”
“그, 그럼 우리도…… 소공녀님을 모실 수 있는 거군요!”
시녀들은 방언 터지듯 열심히 말을 이었다.
말을 하는 와중에도 눈빛이 형형한 탓에 나는 살짝 쫄아 붙었다.
그들은 분명 내 편인데, 왜 무서운 걸까…….
‘그래도 이 시녀 언니들 나랑 평생 같이 갈 생각이구나.’
마음이 포근한 이불을 덮은 것처럼 부들부들 풀렸다.
당근을 줘서 나를 더 좋아하도록 만들어야 하겠지?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교육원장의 끄나풀을 패 버린 역사가 있는 강력한 시녀들이었다. 이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 두면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거다.
나는 해님처럼 찬란하게 웃으면서 톡톡, 시녀 언니들의 강철같이 단단한 팔을 두드렸다.
“있잖아, 내가 나중에 크면 저택에 근육 단련실두 만들어 주께!”
회심의 공약에 시녀들은 눈을 크게 부릅떴다.
“세, 세상에!”
“오늘이 제 생일인가 봅니다…….”
“이봐, 울지 마. 울면 근손실 온다고!”
행복해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언니들은 모르겠지. 우리 운명이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후계자 후보 삼인방 다 위험하지만, 악셀은 권력욕이 강해. 전쟁을 빠르게 마치고 돌아올 게 뻔해.’
소설에서, 대악당 악셀러레이트 미르모드는 악역 공작가의 후계자로 등장한다.
그는 혈족의 난을 통해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모든 미르모드 가(家) 일족을 다 숙청했다.
우리 아빠가 후계자가 됐으니까…….
악셀의 숙청 첫 번째 리스트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을 테다.
‘언젠가는 악셀과도 세력 다툼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빠를 줄이야.’
악셀.
피를 엄청 좋아하는 살인광이자, 성적으로 아주……. 더러운 취향까지 가진, 쓰레기.
‘그 자식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원작 주인공들의 수련 방법을 떠올리고, 원작에 나왔던 고급 아티팩트들의 위치를 떠올리던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 시엔 미르모드. 나이 다섯 살, 현재 악역 공작가 무한 접수 중.
다행히 교육원장에게 건 도박은 성공했다.
그렇다면 이젠 또 새로운 도박을 해 보면 될 것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좌절만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시녀 언니들이 열심히 뜨개질해서 만들어 준 분홍색 털실 손 장갑을 벗은 후, 느와르 영화 속 주인공처럼 터프하게 속삭였다.
“묻고…… 더블로 간다.”
진지한 나를 보면서 시녀 언니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예?”
나는 꽝꽝 얼어 버린 얼음처럼 싸늘하고 위협적인 눈빛으로 고개를 바짝 기울였다.
“묻어 버리게써, 그넘.”
우선 내 반대편이 되어 우리 착한 아빠와 나를 괴롭힐 그놈을 묻을 삽을 마련해야겠지. 그놈이 묻힐 봉긋한 봉분도 만들어 주고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할 일은, 역시!
나는 아주 위협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함모니한테 갈래.”
“좋죠!”
“역시 아기님이셔서 그런지 할머니를 좋아하시나 봐요!”
……할머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계획의 일부였다.
말하자면 할머니 꼬시기 대작전을 실행할 예정이었다, 이거다.
‘나, 시엔 미르모드는 다 계획이 있거든.’
“공작 부인께 그리 세력이 없는데도 저리 좋아하시니.”
“역시 아기님은 순수하셔.”
그들의 생각과 달리, 나는 순수한 게 아니라 계산적인 어린이였다.
한 번 실권을 잡아 본 사람과 못 잡아 본 사람은 다르다.
가문의 권력자들이 루켈라 공작부인을 무시할지언정, 그녀가 지닌 가능성이나 내가 배울 점은 상당히 많다는 거다.
뭐, 가문의 많은 아이들이나 후계자들이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으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바부 시녀들. 근데 진짜 내가 순수해 보이나?’
나는 시녀들을 보며 진지하게 고찰했다.
나, 생각보다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가? 사슴 앞의 가젤처럼 아주아주 무서워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탱글탱글한 볼살을 부풀리며 독 있는 복어처럼 보이게끔 해 봐야지!’
나는 눈을 부릅뜨고 볼 안에 공기를 빵빵하게 넣었다. 마침내 내 무시무시한 표정과 맞닥뜨린 시녀들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역시 우리 아기님은, 애교도 부리시고, 너무 귀여우셔!”
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텄다, 텄어.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무서워 보이겠지!
그래도 내가 할머니를 만나서 애교를 부리러 가는 건 아니다. 악셀을 비롯한 미르모드 가문 후계 구도에 관해 정보를 먼저 수소문할 생각이니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어.’
미르모드 가문에는 악당들이 몹시 많았다.
그들은 살육을 좋아하고, 사람을 찢으며, 나 같은 어린애 따위는 손가락으로도 날려 버릴 수 있는 아주 위협적이고 무서운 놈들이었다.
특히 악셀 미르모드!
악셀은 유명한 악당이었기 때문에, 어떤 놈인지는 소설 속에서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가문 사람들에게 직접 얻은 정보는 또 다르겠지. 마침 할머니에게 진지하게 부탁할 것도 있고.
내가 콩알만 한 주먹을 꽉 움켜쥐고 미래를 진지하게 고찰하는 사이 시녀들이 서로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어쩜 저리 귀여우실까.”
“케이크 생각을 하고 계신가 봐. 눈이 반짝거리셔!”
“사탕 생각일 수도!”
……휴.
“케이크나 사탕 아니고든?!”
“어머, 어머나. 죄송해요, 아기님!”
이 시녀 언니들, 나만 빼고 다들 아주 평온하잖아? 아무도 상황의 심각성을 몰라!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향해 눈을 반달로 접으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모두 소중한 내 사람들이었으니까.
“케이크 줘!”
……케이크 먹고 싶은 것도 사실이긴 하니까, 뭐!
***
시엔이 공작부인을 찾아가려 마음먹었을 때 루켈라 공작 부인은 절친한 가신 가문의 부인 셋을 모아 두고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가문을 상징하는 음각이 새겨진 테이블, 아름다운 다기, 그리고 둥글게 모여 앉은 네 명의 귀부인들까지.
오늘 티 타임의 화제는 여러 가지였다.
악셀 미르모드가 전쟁터에서 보내온 전서구, 이건 대체로 적들을 죄다 쓸어 버렸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오만불손하게도 그 전서구가 보낸 편지에서 장유유서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세력을 잃은 부인에 대한 조롱이 약간 적혀 있었지.
델피아 대공녀의 환영 소환술도 화제였다. 델피아가 환영 소환술로 후계 구도에 화려하게 입성하겠다 밝혔다고. 이미 후계자가 정해져 있는 것도 모르는 채로.
가문의 좀도둑 출신인 대도 몰리의 성유물 무단 점거 사건까지…….
일반적인 사교계의 차담(茶談)에서는 화제로 꺼내기 극히 쉬쉬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아, 부인. 교육원장이 갑자기 죽었다지요?”
“자다가 갑자기 의문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면 새로운 자를 뽑아야지.”
그러나 그들의 말에도 공작 부인은 내내 시큰둥한 기색이었다.
서로 눈치를 보던 세 부인들은 이내 입을 모아 말했다.
“아, 마티어스 님께서 후계자가 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랬지.”
“……원로원의 의장께서도 승인하셨다고 들었지요.”
“그래.”
“황제께서 가만히 계실……까요?”
“하면, 뭘 어쩌겠는가. 가만히 있어야지.”
공작 부인은 무표정하게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제 아들이 복권되었다는데도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보이는 여상한 태도였다.
가문의 부인들은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오랜 세월동안 공작 부인의 최측근으로 살아왔고, 공작부인이 가문에서 실각하고도 여전히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진짜 측근’인 그들은, 입이 무거운 만큼 눈치가 빨랐다.
분명, 루켈라 공작 부인께서 원하는 화제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와중에 셋 중 가장 나이 어린 부인 하나가 끼어들었다.
“아, 마티어스 님께 딸이 하나 있다던데요. 영특하다 들었습니다.”
다른 부인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탄식했다.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이들도 있었다.
대부인과 마티어스 대공자와의 관계가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마티어스 대공자의 딸, 시엔 미르모드는 가문 내에서도 악하기로 유명한 ‘그 악녀’의 딸 아닌가.
아직 아이라지만 악녀의 딸이라니 찜찜한 것도 사실이었다.
심지어, 그 ‘악녀’는 마티어스가 가문을 떠나게 된 이유인 구도의 악마 사건에 연루된 여자다.
구도의 악마 사건.
시엔의 어머니이자 마티어스의 연인이었던 유엘라가 악마를 소환하려다 실패한 사건이었다.
그녀는 악마를 소환하지 못한 채로 신전에 끌려가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마티어스는 그녀의 죽음을 막지 못했지만, 그 이후……. 그는 유엘라를 신전에 밀고한 자를 전부 죽여 버렸다. 세간에는 이른바 피의 숙청이라고 불렸다.
미르모드 가문의 사람들이 악행을 쉴 틈 없이 저지르는 것은 맞았다. 그러나, 마티어스 미르모드는 유엘라의 죽음에 연루된 자들 모두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죽였다.
그런 불쾌한 화제를 공작 부인이 좋아할 리 없지 않은가?
“……마티어스의 딸 말인가?”
루켈라 공작 부인이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쨍그랑 소리가 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거친 손길이었다.
숨소리는 또 어떤가. 쌕쌕대는 소리가 조용한 티룸 안을 가득 메울 지경이었다.
모두 당혹한 표정으로, 여차하면 읍소할 기세로 공작부인을 바라보았다.
화제를 꺼낸 부인이 몸을 굽히며 사과 인사를 꺼내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등불에 불씨가 화르르 붙듯 공작 부인이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아, 그래. 대공자의 딸, 꿀단지를 다들 보았는가.”
“예에? 꿀단지요?”
“……부, 부인?”
당혹스러운 부인들과 달리 루켈라 공작부인은 한 마디를 더 얹었다.
“그 꿀빵이가 어찌나 귀…… 아니, 맹랑한지 말이다.”
이번엔 꿀빵이……?
지금까지 누군가를 아끼는 격한 반응을 보인 적 없는 루켈라 공작 부인이 부르는 뜻밖의 애칭에, 가장 나이 어린 부인 하나가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히끅, 히끅!”
하지만 누가 사레가 들리건 그게 대수랴. 감정 표현도 싸늘하고 차갑기만 한 루켈라 공작부인이 태도를 달리했는데.
마티어스의 딸이 어떻게 제 할머니를 구워삶은 것일까?
“왜들 놀라고 그러는가.”
루켈라 공작부인이 차갑게 말하자 그들도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아직도 알 수는 없었다.
당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일지 말이다.
개중 가장 용감한 부인 하나가 입을 열어 말했다.
“그, 그렇죠. 시엔 님은 정말 대, 대단하십니다……?”
“크흠.”
그녀의 말에 공작부인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런 그녀를 보던 백발의 노인, 중년의 여성이 눈을 빛냈다. 공작 부인의 의중을 읽어 낸 그들이 앞다투어 아첨하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소문이 자자합니다. 교육도 잘 받고 계시다던데요.”
본디 학생이 수업을 열심히 듣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절대 지지 않는 기상을 지녔다 들었습니다. 그때 정원에서도 음해 공작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맞서셨다지요?”
그래 봤자 어린아이들의 말다툼에서 이긴 것뿐이다.
“게다가 다섯 살인데 무, 무려 말도 잘하신다고요!”
다섯 살은 원래 말을 잘한다.
상대적으로 시엔은 환생 패널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발달이 늦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열정적으로 간과하고 있었다.
“그렇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의 아첨을 듣던 공작 부인이 진지하게 선언했다.
“잘 들어라.”
“예?”
세 부인의 시선이 공작 부인에게 모였다.
“아무래도 그 아이는 미르모드에서 전례가 없는 천재인 것 같다.”
“처, 천재요?”
만약 시엔과 교육원장 사이의 일이 널리 퍼졌다면 ‘시엔이 천재’라는 말에 진지하게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을 꾀한 교육원장은 의문사했고, 마티어스는 사건을 묻어 버렸으며, 시엔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서 시엔이 천재라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럼에도 공작 부인은 드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통 어린 것들은 콧물이나 흘릴 나이지. 그에 반해 뭐랄까, 꿀빵은 꽤 똑똑한 것 같더군.”
그녀가 찻잔을 응시하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리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때 루켈라 공작 부인을 보던 세 부인은 서로 은밀히 시선을 교환했다.
공작 부인이 시엔을 엄청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는 뜻을 담은 눈빛으로 말이다.
왜냐하면, ‘꿀빵이’라는 애칭을 말할 때마다 광대가 터져 나가고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