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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참을 인이 세 번이면 호구다 (5/77)


5화. 참을 인이 세 번이면 호구다
2022.12.16.


아장아장 열심히 걷던 발을 뚝 멈춘 나를 의아하게 보던 시녀 언니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세요, 시엔 님?”

내가 발을 멈추고, 시녀들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분명 보았을 텐데. 내 귓가에 들리던 목소리는 멎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애들은 계속 들으란 듯이 입을 활짝 벌렸다.


“어차피 곧 쫓겨날 거라는데. 그럼 목이 뎅겅 잘리겠지?”

“그렇겠지. 잘됐다!”

“우리 가문에 저런 약하고 악한 놈들은 필요 없어!”

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왜 저렇게 적대적이지? 나랑 아빠가…… 그냥 추방당했던 게 아닌가? 악녀의 핏줄이라는 게 무슨 뜻이지?’

머릿속에 의문이 마구 일었다.

저들의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풍문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자리에서 확실한 건 단 하나였다.

저놈들이 나와 아빠를 모욕했다는 것.


‘내가 아빠를 위해서 이 모욕을 참아야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속으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가 가만히 있으면, 소중한 우리 아빠는 이런 말을 더 많이 듣겠지. 내가 아주 이 구역의 미친놈이라는 걸 보여 줘야 찍소리도 못할 거야!’

저놈들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녀석들이 분명하다.

이따위 시답잖은 모욕을 가만히 들어 넘겨주면, 그다음은 더 큰 모욕이 올 거다. 열 살짜리 꼬마 주제에 우리 아빠조차도 모욕하려 들겠지.


‘아빠는 내가 열매 따다가 손 다친 것만 봐도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저런 나쁜 말까지 들으면 펑펑 울 게 틀림없어.’

그 생각을 하니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아빠한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쟤네 입을 좀 막아야겠어.’

내가 비록 지금 당장 나쁜 아저씨들의 말은 못 막아 줘도, 저런 어린이들 입은 콱 막아 줄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그들 쪽으로 돌렸다. 악의가 가득 찬 비웃는 시선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거 나보고 한 말?”

“응.”

수긍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했다. 아마 우리 아빠가 너무 착하다는 게 소문 난 모양이지. 우리의 거주지가 북쪽 첨탑이라는 것도 한몫할 거고.


‘쟤넨 이미 날 적으로 돌렸어. 내가 참으면 더 만만해 보이기만 할 거야.’

가문 내에 커다란 소란을 끼칠 순 없었다.


‘좋아, 우회적이고 괜찮은 방법이 생각났어!’

물론 나는 어설프게 울음을 터트린다거나 욕설을 하는 방식을 쓸 생각은 없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 바. 아까 한 말. 악녀의 핏줄이 몬데?”

나는 그중에 행동대장처럼 보이는 머리가 짧은 아이에게 물었다. 그 아이는 공이 튀어 오르듯, 대답을 준비한 것처럼 즉각적으로 답해 주었다.


“말 그대로지. 네가 악녀의 핏줄이라고! 그 저주받은 눈 치워! 첨탑의 마녀 같으니라고!”

나는 팔짱을 끼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악녀의 핏줄이라는 게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좋아, 유도신문을 좀 해 볼까.

첨탑의 마녀?

악녀의 핏줄?

확실히 저들의 말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들에게 말했다.


“아아, 이제 알았어. 너네 정말 나뿌네?”

“우리가 뭐가 나빠?”

“나쁘긴 한데, 너한테 들으니까 기분 나쁘네?”

그들은 나쁘다는 말에 기세등등했다.


‘그래선 안 될 텐데 말이지……?’

나는 훗, 하고 웃으며 대화를 왜곡하는 기술을 쓰기로 했다.


“후우. 첨탑은 우리 함모니가 나한테 가서 살라구 한 거다?”

“그렇지, 쫓겨 난 거지!”

“쫓겨난 거 아닌데? 너네는 그럼 우리 함모니가 그렇게 나뿐 사람이라는 거네? 손녀인 나를 막 쫓아 낼 정도로?”

할머니, 라는 말에 아이들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들에게도 ‘루켈라 공작부인’이라는 사람은 두렵겠지. 지금은 실권이 없다지만 한때는 꼭대기 탑의 지배자였으니까.

할머니를 들먹거리자 그들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리구 너네, 나보고 악녀의 핏줄이라고 했다?”

“그, 그래. 이 악녀의 핏줄아!”

“우리 함모니한테 나쁜 말 할 정도면, 악녀 얘기도, 우리 함모니가 악녀라고 얘기하는 거네?”

“무, 무슨 소리야!”

나는 주변을 힐끗거렸다.

공작부인은 적어도 이 저택 내에서는 여전히 약한 실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직 가문의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루켈라 공작부인이 저택의 내부를 일정 부분 담당하기 때문이다.

특히 시녀들 쪽이 그러했다.

그래서일까. 내가 모욕당하는 것에는 관심도 없던 시녀들이 지금 모두 기세등등하게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장을 한 푼 보태자면 정원 안에 있는 공작 저의 시종과 시녀들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일부러 아주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난 우리 함모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데! 너네 진짜 못대써!”

살아남기 위해 양념 같은 아부는 필수다.

나는 그중에 행동 대장 격인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씩씩대는 표정이 볼만했다.


“공작부인, 그, 그분 말하는 거 아니거든!”

그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원래 당황하면 지는 건데.


“그럼? 누구 얘기하는 곤데?”

질문처럼 느껴지겠지만 답을 상정하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가장 짜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다 들었어. 우리 함모니 불쌍해. 엄청 좋은 사람인데. 나쁜 사람들이 욕할 분 아냐! 함모니한테 악녀라고 하지 마! 나한테 악녀의 핏줄이라고 하지 마! 바부야!”

이 아이들 주변에 그들을 잡아 줄 어른이 있었다면 내 말의 오류를 짚어 줬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공작부인’ 에 대해 언급한 시점에서, 이 자리에 있는 어른 그 누구도 이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나는 마지막 쐐기를 박아 두기로 했다.


“온니. 교육받을 때는 할모니가 내 일정 다 본다구 했어?”

나는 눈을 세모로 뜨고 곁에 있는 시녀를 바라보았다.


“네?”

“웅?”

“아아, 네.”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찾지 못한 시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이 일도 보고해야겐네, 그치?”

“아! 네, 그렇죠.”

“아냐, 말하면 안 대.”

나는 일부러 아주 큰 소리로 소리쳤다.

저기 있는 정원 사람들이 전부 다 듣도록.


“네? 왜요?”

“나는, 우리 함모니 상처받을까 걱정대.”

시녀들이 서로를 보며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나는 집게손가락을 입술 위에 가져다 대며 쉿, 소리를 냈다.


“우리만의 비밀, 알지?”

“네, 물론이죠.”

북쪽 첨탑 시녀들이 공작부인에게 보고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다. 그들은 이미 내가 건넨 야자나무 열매의 노예였으니까.

그렇지만 정원에 분포하고 있는 시녀들은 결이 다르지.

공작부인의 눈과 귀가 되어 주는 그들은 분명히 이 사건에 대해 깊이 있게 공작부인에게 보고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해코지당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건지, 아이들이 턱을 치켜들면서 뻔뻔하게 소리쳤다.


“흥! 무서운 줄은 아는 모양이지? 첨탑의 노예 주제에!”

“웅, 내가 첨탑의 노예면 넌 한 치 앞도 모르는 머저리일걸!”

나는 조그마한 아이를 향해 환히 웃어 주며 다시 시녀를 콕콕 찔렀다.

놀란 시녀가 조심스럽게 내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론데, 쟤네가 저렇게 말하게 댄 이유가 뭘까?”

“네?”

나는 환히 웃으며 패드립을 쳤다.


“다 부모가 잘못 가르쳐서 그래.”

하지만 맞는 말이고, 쟤네가 먼저 선빵 날렸거든!


‘너희 입을 잘못 놀린 죄로 공작부인에게 끌려가도록!’

저 아이들은 무사할 것이다. 저 아이들의 부모가 루켈라 공작부인의 진노를 살 뿐이겠지.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나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기로 했다.


“나중에 어떻게 클지 참 기대댄다. 나쁜 넘들. 그치만 이건 전부 다 비밀이다, 알지?”

나는 힐끔, 주변 시녀와 시종들을 바라보았다.

어떤 소식이 널리 널리 퍼져나가게 만드는 방법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비밀이야’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비밀이 된 순간 그 소식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간다.

나는 확신했다.

이 모든 건 5분 이내로 공작부인에게 보고가 들어갈 것이라고.

이미 눈에 띄는 파랑 머리 시종이 발 빠르게 정원의 서쪽으로 떠나갔다.

나는 속으로 키득키득 웃으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은 딱 그만큼 벌을 받아야 하는 법이다.

난 절대 참지 않는다.

옛말에 그런 말이 있지? 참을 인이 세 번이면 호구라는 거!


‘그런데, 악녀의 핏줄이라는 건 진짜 무슨 의미지?’

나는 이 일에 대해 제대로 알아볼 필요성을 느꼈다.

***

그때 먼발치에서 시엔을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 있었다.

그 시선은 조용히, 멀리 떠나가는 그녀의 발자취를 바라보다가 다른 쪽으로 사라졌다.

진득했던 시선은 사라졌지만, 사람은 남았다.

그 미묘한 시선의 주인공은 바로 몇 분 뒤, 시엔과 함께 후계 수업을 받을 소년, 레온하르트 미르모드였다.

조금 전, 정원에서 시엔을 보고, 대략 몇십 분 정도 시간이 흘렀다.

가면을 쓴 소년 레온하르트는 마침내 후계 교육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시야 안에 커다란 방과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책상 두 개, 그리고 밤톨만 한 꼬마 하나가 보였다.

저렇게 조그마한 꼬마와 단둘이 수업을 듣는다는 것.

누군가는 자존심 상한다고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나 그는 이미 천재적인 이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은 상태였기에, 자신이 양자라서 무시하는 거냐며 패악을 부릴 수도 있을 문제였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달랐다. 소년은 나이가 많고 적음에 구애받지 않는 성격이었으니까. 그리고 아까 시엔의 활약상을 한번 눈여겨본 덕분에, 심지어 약간쯤은 고양된 상태였다.

비록 누군가 보기에는 무뚝뚝하고 표정이 없이 보일지라도.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정도의 감상은 지니고 있었다는 소리다.

레온하르트, 그는 본래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사실상 누군가와 대화를 섞을 욕구가 없었다고 말하는 쪽이 옳았다.

어차피 누구도 그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그도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시엔은 좀 달랐다.

시엔과 그의 아버지인 마티어스 대공자에 관한 이야기는 소문에 밝지 않은 레온하르트조차 알 정도였으니까.


‘그러니까 저 밤톨이 그 유명한…….’

책상 쪽으로 다가가면서 그는 아기의 밀밭 같은 머리칼이나 뒷모습에서도 보이는 넘치는 볼살 같은 것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마티어스 대공자한테 죽을 애라는 거지?’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자신보다 몇 살 어린 애의 존재는 꽤 신기했다.

꼭 두 번째 삶을 사는 것처럼 당돌한 애였다.

그리고, 아마도 마티어스 대공자의 딸일 여자아이다.

물론 마티어스 대공자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자여서, 제 딸이라 해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면 곧장 버릴 것이 자명했다.

마티어스 대공자가 한창 후계자 교육을 받을 때쯤이 어떠했나. 그의 반대편에 선 자들은, 그리고 그를 배신한 자들은 찢겨 죽었다.

사실 그런 일이야 가문 내에서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마티어스 대공자는 한술 더 뜬 잔혹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일견 약해 보이는 제 편들까지도 가차 없이 도륙했으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을지 모를 꼬마 아이, 시엔.

잔머리는 제법 굴릴 줄 아는 눈치였지만 어딜 보나 약하기 짝이 없었다.


‘시엔이라는 애, 일찍 죽긴 아까운데.’

하지만 슬슬 감상은 마무리할 때였다. 여전히 경직된 표정의 레온하르트는 아기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한번 시험해 볼까.’

그는 단감을 콕콕 누르듯 꼬마를 찔러 볼 생각이었다. 그는 턱을 괸 채로 시엔 쪽을 바라보며 툭 말을 던졌다.

이미 알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 볼까.


“밤톨. 넌 이름이 뭐야?”

밤톨이라고 불린 아이가 새침하게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 밤토리 아니구 시엔.”

꼬마가 제법 맹랑히 입을 열자 아마도 그 괴상한 시녀들이 삐뚤빼뚤 묶어 줬을 양 갈래머리가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시엔. 시엔 미르모드?”

“웅.”

시엔은 고개를 다시 돌렸다. 금세 그에게 관심을 끈 셈이다.

레온하르트의 어느 부분도 시엔의 호기심을 끌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사실이 유쾌해서 레온하르트는 작게 웃었다.


‘내 가면을 궁금해하지 않는 어린 애군. 하긴, 마티어스 님의 딸이니까.’

‘그’ 마티어스 대공자의 딸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아마 저 애는 살면서 그 어떤 것도 궁금해하지 못했을 테니까.


‘분명 마티어스 대공자는 저 애를 학대했겠지.’

그 마티어스 대공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소년은 미르모드 가문에 입적되면서 가문의 비밀 몇 개를 훔쳐 들었다. 그 비밀 중에는 ‘마티어스 대공자’가 추방된 이유도 있었다.

그의 앞에는 항상 무도하고 악랄한 자, 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무도하고 악랄한 자가, 제 딸을 제대로 키웠을 리 없다.

레온하르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가 ‘그’ 마티어스 님의 딸이라고.”

이 자그만 꼬마가 ‘그’ 악독하고 무시무시한 악귀, 마티어스 미르모드의 딸이라니.

괴물이라도 될 줄 알았는데 조그만 새처럼 사랑스…….

……럽진 않고.

레온하르트는 무뚝뚝한 표정을 견지하기 위해 조금 노력하며 시엔을 바라보았다.


“웅.”

시엔은 다시 하품했다. 더 말하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레온하르트는 달랐다. 그는 시엔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했다. 자신처럼 누군가의 그림자로 몸을 숨기면서 살아간 게 아닌지. 마티어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그래. 가문 역사상 마티어스 대공자 같은 분은 없었지.”

시엔은 마티어스 대공자에 관한 얘기가 이어질 것 같아 보이자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관심 있는 주제인 건지 드디어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시엔이 저리 반응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레온하르트 자신도, 자신을 학대했던 자들을 떠올릴 때면 눈이 번뜩이곤 했으니.


‘그래, 너도 네 아비의 잔혹하고 무정한 모습에 대해 잘 알고 있겠지. 시엔 미르모드.’

마티어스처럼 아무렇지 않게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압도적인 힘을 가진 사람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도, 그렇게 잔혹한 사람도 없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도.

가만히 있어도 타인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지닌 사람도, 없었지.

레온하르트는 마티어스가 궁금했고 시엔이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했다.


“웅. 당연히 없었을 고야.”

시엔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레온하르트는 시엔의 표정을 차분히 관찰했다. 말랑한 찹쌀떡 같은 뺨에 미묘한 홍조가 일었다.

감정에 서투른 레온하르트는 사람이 얼굴을 붉히는 이유를 단 한 가지밖에 몰랐다.

바로 공포였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시엔은 마티어스 님을 두려워해. 마티어스 님은 친자에게도 자비가 없으시군.’

마티어스가 시엔을 핍박했을 거라 당연히, 예상하긴 했다. 그러나 저 어린 애가 저렇게 빨간 얼굴이 되어 울먹이는 걸 보니 마음에 변덕스러운 불쾌감이 일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 콩떡 같은 어린 걸 괴롭힐 데가 어디 있다고.

같은 어린이인 주제에 그렇게 생각하면서 레온하르트는 무덤덤하게 다음 말을 꺼냈다.


“그럼 네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도 알겠네.”

마티어스 대공자가 언제 시엔을 죽일지 모른다. 그의 평소 성품을 고려해 봤을 때 시엔의 죽음은 그저 시간문제였다.

그 명백한 사실을 시엔도 알까?

놀랍게도 시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좌절한 얼굴은 아니었다.


“맞아. 그치만 난 절대 안 주거. 살 고야.”

레온하르트는 꼬마의 얼굴에서 생존에 대한 놀라운 집념을 읽어 내고 잠깐 굳어졌다.

‘그’ 마티어스 대공자에게도 기죽지 않는 기개와 강단이라니.

그래서 저 어린 애가 마티어스 대공자에게 죽임당하지 않고 공작가까지 함께 들어온 것일까.

여러모로 신기한 밤톨이라는 생각에 레온하르트는 말을 툭 이어갔다.


“그래. 살아.”

시엔이 고개를 연거푸 끄덕였다.

레온하르트는 조그만 밤톨을 내려다보며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밤톨, 꽤 멋지다.

햇빛을 받은 밤톨, 시엔이 눈을 꼭 감고 가볍게 재채기를 했다.


“에치.”

뭐지.

귀엽기까지 하네.

시엔이 그쪽을 힐끔 보며 속삭였다.


“휴우, 나 좀 그만 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선새미 오는 거 같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바깥에서 발걸음 소리가 빠르게 들려 왔다.

그는 피식 웃으며 밤톨만 한 꼬맹이를 내려다보았다.

이상하게 저 말랑한 얼굴이 자꾸 보고 싶었다. 저 볼이 몇 년 전 가지고 놀던 슬라임 같아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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