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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일단 시녀들부터 꼬시자 (1) (3/77)


3화. 일단 시녀들부터 꼬시자 (1)
2022.12.09.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할머니를 마주 보았다.


“너. 시엔이라고 했나?”

“녜!”

“나는 루켈라 공작부인이자 꼭대기 마탑의 지배자였던 자다. 네 할머니라 사사로이 불릴 사람이 아니야.”

‘꼭대기 마탑의 지배자’라는 수식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녀는 꼭대기 마탑에서 수련하던 젊은 시절 다른 마법사를 죽이고 그 마탑을 접수했다.

12등위까지 있는 마법 계급 중, 무려 4등위인 ‘아냐크’ 등위의 마법사가 되기도 했지.

현재 1등위인 대마법사가 단 한 명도 없는 상황이니 매우 높은 작위였다.

……어쩐 일인지 지금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 같지만.

루켈라 공작부인은 선을 확실하게 그었다.


‘아깝다. 귀여운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녀에게는 내 애교가 안 통했나 보다.

그럼 한 발 뒤로 물러날 차례였다. 지금은 분위기를 잠깐 환기한 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녜에…….”

일 보 후퇴했지만, 지금이 끝이 아니에요, 할머니!

할머니는 그런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고 느리게 말했다.


“넌 꽤 어설프게 구는군.”

선 긋기를 당한 거로도 모자라…….

……구박까지 당하다니.

나는 삐죽 앞으로 나오려는 입술을 손으로 톡톡 치며 몸을 돌렸다.


“미아내요…….”

원래 내 애교는 백전불패였는데.

역시 악역 공작부인이라서 다른가. 철옹성 같은 사람인가.

그렇지만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숙였던 고개를 높이 들고 할머니를 다시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눈이 순간 반달처럼 기울어졌다가 급하게 싸늘한 제 눈빛을 되찾았다.


“내 눈을 제대로 보는 어린 것은 오랜만에 보는군.”

“말을 삼가십시오, 어머님. 그리고 시엔.”

상황을 깬 건 바로 아빠였다.


“웅?”

어느덧 몸을 일으킨 아빠가 내 몸을 번쩍 들더니 루켈라 공작부인을 향해 힘주어 말했다. 마치 영역 표시를 하는 사람처럼 경계하듯이.


“시엔을 시녀에게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그러지.”

나는 마지막 힘을 내어 할머니를 향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빠아. 함미, 안녀히 계세여.”

루켈라 공작부인이 고개를 까딱했다.

이상하긴 했다.

내가 루켈라 공작부인을 잘 아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대화 중에 돌연한 사고가 발생하면 싸늘하게 일갈할 사람이라 짐작했었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별말이 없었다.

지난한 침묵 속에 나는 아빠의 손에 이끌려 문 바깥에 섰다.


‘할머니 꼬시기 작전은 실패지만, 원래 첫술에 잘되는 법은 없는 법이거든. 그럼, 그럼!’

우리 아빠는 내가 지킬 거야! 나는 솜방망이 같은 주먹을 꼬옥 쥐고 먼발치에서 무언가를 들고 걸어오는 시녀들을 노려보았다.

좋았어. 아무나 다 나한테 덤벼라.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우리 아빠는 절대 못 괴롭혀!

내가 있으니까!

***

시엔이 시녀들의 손에 이끌려 떠날 때, 루켈라 공작부인과 그녀의 첫 번째 아들, 마티어스 공자는 커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다시 마주 앉아 있었다.

냉혈한 침묵이 모자 사이를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냉정함을 가장해서 입을 열었다.


“시엔이라, 꽤 많이 컸군. 갓난아기였던 기억이 있는데.”

빛이 가득 차 있는 듯한 동그란 눈, 꿀을 숨겨 둔 것 같은 탱글탱글한 양 볼, 연분홍 꽃잎 같은 자그마한 입술까지.

확실히 귀엽게 자란 데다 ‘그 여자’를 닮기까지 했다.

남에게는 관심 없는 마티어스가 애지중지 끼고 도는 것도 다 그 이유 탓일까.


“시엔에게 관심 두지 마십시오.”

루켈라 공작부인은 적대적으로 변한 제 아들을 보며 헛웃음을 쳤다.

모든 아이가 자신을 두려워한다. 그러니 자신을 할머니라 부르는 아이가 신선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어차피 어린 애라 해도 이 공작가에 들어와 순수를 잃고 말겠지.’

약육강식인 공작가에서 저런 어리고 약한 것은 쉽게 스러지고 마는 법이다.

그보다 그녀가 할 말은 따로 있었다.


“아까부터 말이 꽤 건방지구나.”

“제가 원래 이런 성미인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루켈라 공작부인은 제 아들인 마티어스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알다마다.

제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오 년간 고요히 숨어 힘을 기른 남자였다.

후계 구도에서 완벽하게 탈락했다가 가까스로 복귀한 마티어스. 모두가 그의 패배를 점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세력도, 딛고 일어설 날개도 없는 자.

그러나 루켈라 공작부인만큼은 그에 관한 판단을 달리했다.

마티어스는 이미 모든 걸 잃은 상태이기에 더 위험했고, 가장 소중한 것이 있기에 누구보다 극악할 수 있는 남자였다.


“그렇겠지.”

이제 본론에 관해 이야기할 때였다.


“구도의 악마 사건 재판은 무효로 끝났으니, 중단했던 후계 교육을 다시 받도록 해라.”

“예.”

“오 년 전과는 다르다. 그때 넌 유일한 후계자였지만, 지금은 성년이 지난 혈족들 모두가 후계자 자리를 넘보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가문 내외로 널 반대하는 세력이 많다는 걸 잊지 마라. 네가 벌인 악마적인 기행을 생각해.”

말을 마무리한 루켈라 공작부인은 조용히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마티어스의 낯은 만년설처럼 차갑고 살벌하기까지 했다. 방금, 제 딸인 시엔을 다정하게 품을 때와는 영 딴판인 모습에 그녀는 턱을 괸 채로 제 아들을 묵묵히 관찰했다.

그때, 마티어스가 무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누군가에게 패배할 거라 여겼다면 다시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원로원도, 혈족회도, 마탑에서도 모두 너를 경멸하고 있는데도?”

“상관없습니다.”

“네 딸이 다칠 수도 있다.”

“결코, 그렇게 두지 않습니다.”

그는 단정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싸늘함이 묻어 있었다.


“네 말이 패기인지 치기인지는 시일이 지나면 알겠지.”

“둘 중 어느 것도 아닙니다.”

그가 공작부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엔을 지킬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

차디찬 눈동자를 마주 보며 루켈라 공작부인은 깨달았다.

제 아들은 오 년 전보다도 더 무던하게 강해져 왔다는 사실을.


“우선 후계 교육을 받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허가하지. 너와 네 딸은 북쪽 성의 첨탑에 거주하게 될 것이다. 원로원과 혈족회의 요청이었다. 괜찮나?”

“첨탑이라……. 별 상관없습니다.”

공작의 직계 혈족들은 중앙의 저택에 살았다.

북쪽 성의 첨탑은 궁벽한 곳이다. 혈족이 머무는 중앙 저택과는 가까운 거리였으나 그 위상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나 그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떠나라.”

시엔의 순수한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고 마음이 조금 부드러워진 루켈라 공작부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순박한 꿀단지는 특별히 잘 씻겨서 교육하라 명하지.”

오랜만에 만난 아들에게도 딱히 사적으로 할 말이 없었던 그녀가 고개를 까딱했다.

***

순수를 이미 잃은 지 오래인 나는 나를 모시러 나온 시녀들을 바라보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


‘시, 시녀 맞아? 기사 아니야?’

보통 중세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시녀들은 하늘하늘한 시녀복에 연약한 잠자리 날개옷 같은 걸 입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곳은 악역 공작가!

그 모든 건 나의 하찮은 편견일 뿐이라는 듯, 두 시녀는 180cm가 훌쩍 넘는 장신에 몸 전체가 우락부락했다. 그들은 나 같은 어린 아기 따위는 당장 없앨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 보였다.


 
그들은 내가 전생에 알던 ‘마동석’이라는 배우보다도 팔뚝이 더욱 굵었으며, 그 팔뚝에는 이상한 문신과 헤나 같은 것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다른 피지컬 쪽은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무서워!’

저 사람들은 평범한 시녀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쫄보가 될 순 없다. 나는 고개를 높다랗게 치켜들고 그들을 보며 뻔뻔하게 말했다.


“안녕, 시녀들이구나?”

“예, 시엔 님을 뵙습니다.”

그들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여기서 내가 지고 들어간다면, 우리 아빠도 얕보이는 것! 아빠를 지키는 유일한 기사인 나는 위엄 있게 말했다.


“나는 시엔이다. 방갑다, 위대한 나의 시녀들아.”

나는 절대 쫄지 않는다.

순수한 아빠를 위해서라면 시녀들을 위협하는 나쁜 짓도 할 수 있었다.

턱을 한껏 근엄하고 뻣뻣하게 치켜세우며 위엄을 보이고 있자니, 그들이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시군요. 첨탑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첨탑?”

“네. 북쪽의 첨탑에 기거하게 되셨습니다.”

나는 동그란 앞이마를 톡톡 치며 다섯 살 인생 최초로 찾아온 커다란 고민에 빠졌다.


‘상황이 최악이다.’

북쪽 첨탑.

그곳은 과거 죄인의 목이 효수되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도는 척박한 공작가 내부 탑이었다. 계승 서열이 가장 낮은 방계 혈족들이 저택에 들를 때 묵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그런데 명색이 공작의 적자이자 첫 번째 아들인 우리 아빠가 북쪽 탑으로 가게 된다니.


‘북쪽 첨탑이라니, 진짜 나랑 아빠 죽나 봐. 죽이려고 데려온 건가?’

오, 이럴 수가.

반드시 이 상황을 타개해야만 했다.

순수한 아빠는 분명 아무것도 모를 테다. 그러니까 내가 시녀들을 꼬드겨서 온갖 정보를 다 알아내야 한다!


‘첨탑의 시녀들을 어떻게 꼬셔서 내가 원하는 정보를 알아내지?’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우선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물론 그냥 따라가기로 한 건 아니었다. 내 머릿속은 여러 가지 정보 값을 떠올리느라 바빴다.


‘북쪽 첨탑 시녀들의 특징은 단순, 무식이라고 했어. 오직 근육 외길 인생이라고. 그래서 공작가 내에서도 배척당한다고 서술되어 있었어!’

그러니까 그들의 성향을 잘 이용해서 구슬려야 하는데 말이다. 단순 무식 근육 시녀들을 어떻게 구슬려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가실까요, 시엔 님?”

나는 일단 위엄 있게 말했다.


“그래. 가쟈.”

“네.”

시녀들을 바쁘게 따라가면서 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그러나 소설, <멜로디아의 생애> 속에는…….

악역 공작가의 근육질 시녀들을 공략하는 방법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어떻게 공략하지? 어떡해?’

내가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사이 벌써 우리는 북쪽 뾰족한 첨탑에 도착했다.

가시가 잔뜩 둘려 있는 첨탑을 보니 두려운 탓에 마음이 찌릿찌릿했다. 찬 바람이 불어 온몸이 스산하기까지 했다.


“이곳입니다. 아름답지요?”

……뭐가 아름다워?

근육이 가득한 팔로 첨탑 아래의 문을 연 시녀가 무뚝뚝하게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으시고 목욕을 하신 후, 내일 소공자님들과 함께하실 교육에 대해 간단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내 볼때기만큼 포동포동하게 말끝을 늘리며 대답했다.


“그으래애.”

당연히 마음속으로는 열심히 짱구를 굴리는 중이었다.


‘소공자라면 누구지? 악역 공작가의 소공자라면 크래포드? 아니면, 킬리언?’

내가 마주칠 소공자가 누구일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나는 어느덧 커다란 방으로 나를 안내하는 그들의 팔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북쪽 첨탑 얘기도 묻고 싶고 내일 만날 악역 소공자들에 대한 정보도 알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친하지 않은 사이라 머쓱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앗, 잠깐만.’

그 순간, 시선을 위로 올린 나는 문득, 그들의 팔목 언저리에 새하얀 가루가 묻어 있는 걸 발견했다. 코끝으로 킁킁, 냄새를 맡아 보니 익숙한 내음이 느껴졌다.


‘송진 가루잖아……!’

나는 키득키득 미소 지었다.

앞볼이 땡그란 공처럼 위로 부풀 때까지.

어쩐지 내 편을 만드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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