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호랑이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2/77)
2화. 호랑이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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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호랑이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2022.12.06.
아빠의 다정함이 함빡 담긴 목소리와, 단단한 팔이 나를 따뜻하게 지탱해 주는 듯한 기분은 안온하고 평화로웠지만 이래서는 안 되었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내가 지켜 준다니까아.”
나는 아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참 묘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켜 줘야 할, 우리 순수하고 착한 아빠는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검사가 아닌데도 손에 파란 힘줄이 있었으니까.
아마 농사를 오래오래 해서 그런 게 아닐까? 아니면 미르모드 가문이 워낙 신체적 능력이 대단하니, 그 체질을 물려받은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아빠 손에 있는 핏줄을 콕, 하고 누르며 배시시 웃었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아빠가 다시 강조하듯 말을 내뱉었다.
“우리 딸.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건 신체적 능력이 또래보다 떨어져서 그런 것뿐이다.
하지만 아빠한테 그런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였다.
“응, 시엔? 안 그래?”
아빠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렸다. 그는 이 상황이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하여튼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꾹 움켜쥔 주먹으로 조그만 가슴을 쿡쿡 치면서 소리쳤다.
“그, 구거는. 다른 애들도 다 그래. 아무튼, 내가 지켜 주꺼야!”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답했다. 고개를 저을 때마다 포슬포슬한 알감자 같은 두 볼이 파르라니 흔들렸다.
꾸욱.
내 등 뒤에 선 아빠가 내 볼을 꼭 누르며 말했다.
“우리 딸은 그냥 평범한 아이처럼 행복하게 살아.”
나는 아빠의 든든한 등에 고개를 꾹 기대면서 한숨을 한 번 더 포르르 내쉬었다. 한숨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니 나와 아빠의 서글프고 비루한 미래가 그려지는 듯했다.
‘아니야. 여긴 악역 가문이라서 착한 아빠는 나 못 지켜 준단 말이야.’
순진한 우리 아빠, 이래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까? 나는 걱정을 함뿍 담은 시선으로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아빠는 여전히 진지한 듯 보였다.
“알겠지?”
“휴우.”
나는 열기 넘치는 아빠의 목소리에 그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린아이처럼 굴지 않으면, 우리 아빠는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아마 내가 동심을 잃는 듯한 모습이 보기 힘든 것 같았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예전에 내가 당근을 안 먹고 편식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빠는 아주 많이 속상해하면서 당근 친구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버려지는 그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라고 했었지. 울먹이는 목소리로.
‘안녕, 당근들. 해!’
‘……꼭 해야 대?’
‘응. 당근에 인사 안 하면 당근이 아야, 한다니까.’
‘휴…… 힘들다. 당그니 앗녕.’
나는 어른이 아빠의 동심을 지켜 주기 위해 당근에 인사했었던 흑역사를 떠올리며 내키지 않는 입을 열었다.
“우웅.”
“예쁘네, 우리 딸.”
우리 둘이 대화를 나누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두컴컴한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던 문이 슬그머니 열리고 살짝 빛이 새어들어 왔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맞은편 문 쪽을 바라보았다.
‘누구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장인이 조각한 듯한 아름다운 인상의 중년 여성이었다. 드문드문 흰 머리가 보였는데 그것마저도 신이 직접 눈을 내린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녀는 별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만년설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왔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머님.”
아빠가 단정하게 대답했다.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머님이라면, 아빠의 친엄마일까, 궁금해하는 그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가 날 친어미라고 생각은 하는구나.”
“루켈라 공작부인이라 불러 드릴까요.”
왠지 모를 살기 때문에 조그만 몸이 벌벌 떨렸지만 그것도 잠시. 둘 사이에서 핑퐁되듯 이어지는 대화에 나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맥락으로 미루어 봤을 때, 친어머니인 것 같았다. 그런데 루켈라 공작부인이라면……!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지금은 뒷방 노인 취급이지. 하지만 그래도 한때는 악역 공작가의 수장 격이었으니까……. 만약 우리 아빠의 친어머니라면, 혈육이니까 잘 보이는 편이 좋겠지? 그리고 도움을 받아서…….’
혼자만의 생각에 집중하는 사이, 대화는 죽 이어졌다.
“가문에 다시 돌아온 이상, 네 힘으로 떠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어어?!”
“시엔.”
순간 큰 소리를 내 버렸다. 다행히 아빠가 다정하게 나를 얼러 주었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혼비백산이 된 뒤였다.
나는 당연히 이 호랑이 같은 할머니에게 잘 보여서 이 성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알고 있습니다. 후계자가 되거나, 아니면 추방당해서 도망자 신세가 되거나, 죽거나. 셋 중 하나겠지요.”
나는 깨진 계획에 충격을 받아 반쯤 실신하기 직전까지 갔지만, 겨우 정신을 차렸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어.’
나는 일부러 좁쌀만 한 이를 앙다물고, 으드득 갈아 보이며 눈에 힘을 꽉 주었다.
내 귓가에 루켈라 공작부인의 냉정한 목소리가 닿아 왔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간단한 일갈에도 아빠는 그저 눈을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너무 차가워.’
오랜만에 만난 모자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싸늘했고, 분위기조차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빠가 내 어깨를 포근하게 감싸 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앞을 볼 수 있었다.
공작부인의 시리도록 푸른 눈과 내 둥근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저건 뭐지?”
“녜?”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말했다.
나를 상당히 혐오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헝겊에 싼 꿀단지 같은 건 뭐냔 말이다.”
헝겊에 싼 꿀단지…….
‘나 그런 꿀단지 아닌데. 헝겊도 아니고, 이거 아빠가 예쁘게 바느질해 준 건데.’
나는 가만히 아빠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아빠가 우리 시엔 옷 예쁘게 바느질했다, 어때?’
‘씽나!’
‘다음에는 재봉틀도 배워 올게. 이사벨 부인이 알려 준대.’
‘웅! 꼭!’
아빠와 함께했던 몽글몽글한 추억들이 떠오른 탓에, 약간 억울해져서 나는 눈을 부릅떠 보았다. 그러자 루켈라 공작부인이 냉혹한 낯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거 헝겊 아니에요. 아빠가 만들어 줘써요.”
열심히 어필하는 나를 냉혹하게 바라보던 공작부인이 이내 아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빠는 저 호랑이 같은 눈이 무섭지도 않을까? 손이 살짝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조금씩 떨리는 손과 달리 아빠는 제법 담담하고 용기 있게 말을 이었다.
“제 딸입니다. 시엔, 인사드려.”
그래도 인사는 공손하게 해야지! 나는 별말 없이 눈을 깜빡이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심니까!”
그렇지만 내 머리에서는 팽팽, 루켈라 공작부인에 대한 정보가 돌아가고 있었다.
생각이 끝나는 시간, 삼 초.
나는 입술을 꼭 물었다.
제 발로 떠날 수 없는 건 절망적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다행이었다.
우리가 악역 공작가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바로 루켈라 공작부인이어서.
왜냐하면 그녀는 아빠의 친엄마이자 내 친할머니이기도 했고…….
‘나, 원작 『멜로디아의 생애』에서 루켈라 공작부인 공략법에 대해 읽었으니까!’
그녀에게 잘 보이면 공작가 생활이 조금 편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이 어둡고 위험한 흑막 악역 가문에서 한때 어둠의 제왕이라는 수식언을 달고 있던 여자, 루켈라 공작부인.
지극히 위험한 자인 그녀의 유일한 약점 아닌 약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열심히 생각하는 사이.
루켈라 공작부인은 싸늘하게 나와 아빠를 바라보았다. 일반인이었다면 시선 한 번에도 침묵할 법한 위압감이었다.
초조해진 나는 습관처럼 달랑달랑, 다리를 흔들었다.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툭 내뱉듯 말했다.
“저건 왜 달고 왔지?”
“시엔을 어머님께 보여 드리고 싶었거든요.”
아빠의 목소리는 구슬처럼 단정했다.
“저걸 내보내고 얘기를 하지. 후계 구도 문제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우선, 네가 저질렀던 구도의 악마 사건 재판은-.”
“-그 얘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겠습니다.”
구도의 악마 사건이라는 말에 나는 귀를 쫑긋했다.
그렇지만 내 호기심을 해결할 새도 없이 아빠는 단칼에 공작부인의 말을 잘랐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루켈라 공작부인의 표정이 영 험악해졌다.
내내 무표정했던 그녀는 상당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아빠가 성에 들어와서 처음 마주한 사람이 루켈라 공작부인이니까, 아직은 내 추측뿐이지만 공작부인이 아빠의 추방령을 풀어 주고 다시 가문으로 돌아오게 해 준 것 같았다.
그런데 자기 말을 중간에 자르다니. 내가 공작부인이라도 화가 났을 거다.
‘아빠가 할머니 말을 중간에 잘라 버렸어. 잘 보여도 모자랄 판인데!’
걱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던 찰나, 루켈라 공작부인이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건방진 태도는 여전하군.”
‘죽여버리고 싶게.’라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내 몽글한 두 손을 꼭 쥐었다.
위험하다.
벌써 사망 플래그가 선 것 같다!
루켈라 공작부인은 자기편에게는 든든하지만, 거슬리는 자들은 가차없이 죽여 버리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다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러다 나랑 아빠, 공작가에 입성과 동시에 죽는 거 아냐?’
그렇지만 아빠는 여전히 천하태평이었다.
아빠는 루켈라 공작부인의 말을 무시하고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시엔. 나가서 시녀 언니들 보러 갈까?”
아빠가 다정하고 상냥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특별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아무리 봐도 이 할머니, 우리 아빠도 나도 무지무지 싫어한다.
따뜻한 물도 단번에 얼릴 것 같은 차가운 시선으로 우리를 훑고 있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나는 진지하게 결심했다.
좋아, 루켈라 공작부인 공략법을 사용하겠어!
“웅, 아빠. 시엔 잠깐만!”
아빠와 할머니가 대화하는 모습을 보던 나는, 아빠가 열심히 따 준 양 갈래머리를 쥐었다 펴며 결심한 차였다.
‘역시 아빠는 순수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게 분명해. 그러니까,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어.’
나는 폴짝 아빠의 무릎 위에서 뛰어내렸다.
“시녀를 불러 줄 테니 나가라.”
할머니가 거만하게 나를 훑으며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조그마한 꼬마 발로 열심히 할머니 옆으로 갔다.
“시엔?”
“뭘 하는 거지.”
아빠와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지만, 나는 무시하고 곧장 할머니의 의자 바로 옆에 섰다. 책상보다 내 키가 조금 더 작았기 때문에 아빠에게는 내 동그란 윗통수만 보일 게 분명했다.
‘루켈라 공작부인의 약점을 공략해야 해!’
나는 하나뿐인 가족인 아빠를 지키기 위해 악역 할머니 앞에 섰다.
조금, 아니 아주 조금 무섭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옆구리에 동글동글 밀떡 같은 양팔을 처억 대고 할머니를 노려보았다.
루켈라 공작부인은 귀찮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뭐지?”
“함모니!”
반짝반짝 눈빛 발사!
나는 필살기를 꺼내는 심정으로 할머니를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보았다. 만두처럼 탱글탱글해진 손을 앞으로 모으는 건 덤이었다.
할머니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라고?”
시선이 싸늘하게 굳어진 게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눈을 더 똥그랗게 뜨고 반짝반짝 눈빛 빔을 쏘면서 입을 열었다.
“시엔 함모니 맞지요? 보고 싶어써!”
일부러 말꼬리도 아주 기이일게 늘렸다. 귀엽고 무해한 어린이처럼!
내가 이러는 이유가 있다.
루켈라 공작부인은 소설 속 도둑 길드 학살 사건 때, 위험성을 감수하고 어린아이는 전부 풀어 줬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놀랍게도 어린아이를 싫어하지 않고, 귀여운 걸 좋아하기 때문에.
물론 모든 어린아이들은 루켈라 공작부인을 무서워했다. 악역 가문 아이들도 그녀를 사악한 마법사라고 여기며 꽁지 빠지게 도망치고는 했다.
그건 그녀가 이미 뒷방 노인네 신세로 전락한 지금 시기에도 비슷했다.
‘어쨌거나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호랑이 이미지는 아직 남아 있거든.’
그러니까 나는 틈새시장을 노리는 거지! 내가 장담하는데 루켈라 공작부인은 귀엽게 애교 부리는 꼬맹이 본 적 없을걸? 나는 눈을 땡그랗게 뜨고, 내 앞에 있는 루켈라 공작부인의 표정을 연신 살폈다.
“함모니는 나 안 보고 시퍼써요?”
나는 제철 새우처럼 통통한 볼 안쪽에 바람을 불어 넣으며 귀엽게 웃어 보였다.
무서운 할머니, 이렇게 부탁할게요! 우리 순수한 아빠 죽이지 마세요. 하는 표정으로.
내 반짝반짝한 눈동자를 마주 보던 할머니는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