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새로운 경지
#157화.
대부분이 무너져내린 어느 지하 방공호.
인형사, 뷔에탕은 부탁한지 정확히 십 분여만에 일백의 인형을 집결시켰다. 한 기마다 실로 무식하게 마력을 때려박아 각각이 최소 7레벨 이상 되는 듯했고, 8레벨급의 인형도 넉넉히 섞여 있었다.
자그마치 일백 기나 되는 꼭두각시 인형이 방공호를 가득 메웠다. 사람이 발 하나 디딜 틈도 보이지 않았다. 인형들의 숨구멍을 통해 토해지는 마력만으로도, 누군가 내 앞에 서서 뺨을 모질게 후려치는 것만 같았다.
나의 수련은 일 초의 지체도 없이 시작되었다.
— 네 입으로 며칠 안 걸린다고 했으니까. 다른 소리 할 거 없이 바로 시작할까?
마치 그 광오함을 손봐주겠다는 듯.
예상대로, 뷔에탕의 그 싸늘한 한 마디에 온갖 인형이 사방을 점하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짐승처럼 사나운 기세로 뻗어나간 마력은 연신 벽면을 때리며 충격파를 울렸다.
검집을 끌렀다.
콰앙!
전투의 시초에는 일백 기라도 거뜬히 막아낼 만했다.
이제는 상대가 전(前) 십이제이며 전력을 담아 공격한다 해도, 일격에 쓰러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지난 삼 년간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작한지 삼십 분, 한 시간이 지나자 그들의 공세를 막기가 점점 버거워졌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뷔에탕의 압박감은 거셌다. 방공호 내부에 기이한 마력이 진득하게 내려 앉은탓에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아둔 것 같았다.
더욱이, 나는 인형들을 죽일 기회가 있음에도 죽이지 않았다. 강자존의 세상. 나보다도 더한 강자 앞에서 감히 오지랖을 부릴 사안은 아니나, 뷔에탕이 저 불쌍한 사내들에게 허락받아 조종하고 있을 리는 없으니, 오늘따라 내 손속은 거칠지 못했다.
“뭐야.”
뷔에탕도 그것을 알고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눈살이 찌푸려진 것인지, 초승달처럼 휜 것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무슨 수련을 하겠다고? 나야 빌어먹을 연방이 뒤집어지면 두 손 들고 환영하는 주의지만, 꼴을 보니 네가 정말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네.”
그것은 실로 내 속이 뒤집어지는 소리였다. 연방이 뒤집히는 사태만을 바라고 있는 작자가, 사내의 마음가짐을 운운하는 것이 참으로 황당했다. 그러나 저것도 수련의 일종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약간 편해졌다.
우드득!
나는 흉악한 마력을 품고 달려드는 인형들을 떼어내며 수련을 지속했다.
뷔에탕의 인형들은 시체와도 그 결이 비슷했다.
쐐애애액!
인간이라면 크게 다칠까 본능적으로 주춤할 공격에도, 전혀 몸을 사리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접근해 공격을 쏟아부었다. 게다가 뷔에탕의 저주마법이 전투 중인 나의 정신을 스멀스멀 침범하려 드니,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그대로 당해 쓰러질 것이었다.
콰광!
둔기를 들고 덤벼드는 한 인형을 멀찍이 튕겨내자, 그 빈자리를 또다른 인형이 삽시간에 메꾸어 짓쳐들어왔다. 튕겨낸 인형에선 한낱 비명조차 없었다. 인의 장벽으로 빠져나갈 구석이 없으니, 일단 막아내며 기회를 엿보았다. 나중에 처량한 꼴로 죽어버리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처절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전신으로 기운을 운용해 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쉬지않고 계속해서 달궜다. 타오르는 아궁이에 집어넣은 부지깽이 쇠막대처럼 말이다.
그 후로, 시간이 꽤 흘렀다.
쾅!
나는 아직도 먹이를 본 개미처럼 끝없이 달려드는 인형들을 쳐내고 또 쳐내고 있다. 이제는 숨이 턱끝을 지나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식은땀과 체액이 비 오듯 쏟아진다. 이리 격렬하게 몸을 움직여본 게 언제였던가?
푸욱!
“······.”
그때, 8레벨급 인형이 쥔 날붙이가 마나 보호막을 뚫고 들어와 옆구리를 깊게 찔렀다.
달아오른 피가 관통된 환부로 새어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뷔에탕은 이번에도 자신의 마력을 거두지 않았다. 대신 의문이 어려있는 시선만 슬쩍 던졌을 뿐이다.
— ?
지금 나의 경지라면 많이 지쳤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는 단순한 공격이었다. 기감으로 방공호 내부의 지형지물과 인형들이 풍기는 마력을 속속들이 감지하고 있다. 아닌말로, 마나 보호막에 마력만 조금 더했어도 능히 막아냈을 것이다.
— ······무슨 수련이 이 따위인지 모르겠네? 자신 있으면 계속 그렇게 해보든가.
그러나 내가 다쳐도 괜찮다고 진작에 언질을 주었으므로, 뷔에탕은 구태여 마력을 거둘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교접인형을 너머의 무심한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수련 상대로 뷔에탕을 택하길 특히 잘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이리 만신창이가 된 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일단 손을 멈추었을 것이다.
[ 네놈은 그냥 더 맞아야 한다. 죽기 딱 직전까지. ]
······나의 스승 정도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푸욱!
뷔에탕의 다음 공격은, 약 한 시간쯤 지난 뒤 내 어깻죽지에 적중했다.
푸욱!
다음 공격.
푸욱!
다음 공격.
푸욱!
또 다음 공격 역시도.
나의 육신 어딘가를 깊고 날카롭게 찔렀다.
결국.
“후우······.”
나는 수련을 시작한지 반나절만에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려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를 악물고 진기를 운용해야 겨우 쫓아오는 인형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도망치다가 죽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약 한나절 만에 온몸이 피에 절어 피투성이가 되었다. 볼이 찢어져 입에 고여있던 피가 주르륵 새어나왔다. 그럼에도 쫓아오는 뷔에탕의 인형들은 살기짙은 기세를 거두지 않았다.
힘을 내서 더 빠르게 발을 움직여야했다.
······이후로 나는 하루를 버텼고, 그 대가로 한쪽 팔을 완전히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방공호는 아직 무너져내리지 않았다. 참 튼튼하게 지은 듯싶다.
푹- 푹-
······나는 이틀 낮까지 너끈히 버텨냈고, 양팔은 물론 한쪽 다리도 절게 되었다. 그래도 경공을 허투루 익히지 않아 깽깽이발로 뛰어다니며 인형들의 공격을 회피했다.
푸욱!
······하지만 나는 이틀 밤이 되는 날, 두 다리를 모두 절게 되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깽깽이 발로 펼치는 경공으로는 한계가 있던 탓이다. 슬슬 영육이 극한까지 내몰리기 시작했다.
푸욱.
······사흘 아침이 되는 날, 공격을 너무 당하여 사지를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 한쪽 눈마저도 어디에 긁혔는지 자꾸 감기는 것이 위태했다. 그때부터는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익숙하니까. 마지막까지 아껴두었던 내공과 회로를 혹사하여 방공호를 제집처럼 뛰어다녔다. 가끔은 기어다니고, 가끔은 걸어다녔다.
아침에는 뛰고, 점심에는 걷고, 저녁에는 기고.
그렇게, 끔찍한 고통의 시간이 또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눈꺼풀조차 뜨지 못하는 초주검 상태가 되었고, 수련한 지 나흘째 아침을 맞았다.
“······.”
사방이 어두우므로 아침인지 저녁인지는 정확치 않았다. 세상이 어두운 게 아니라 내 눈꺼풀이 감겨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제야 모든 힘을 다 잃었다. 그래. 확실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털썩.
거기에 더해 무릎관절이 부서져 무릎을 꿇을 수도 없는 관계로, 산등성이처럼 늘어서있는 인형들을 내려다본 채 억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대강 허리만 세운 것을 가부좌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모를 일이다.
— ······.
방공호의 중간에서 시선이 교차한다.
카스트라 뷔에탕의 안광은 늘 그렇듯 여전히 침침했다.
하지만 지난 나흘간 뷔에탕도 무언가를 느낀 것이 있는지, 아니면 정말 내 입에서 그만하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멈출 생각이 없는 것인지.
쾅!
백여 기의 인형들은 가차없이 땅을 박찼다. 방공호의 부서진 천장 사이에 가부좌를 튼 나를 향해, 살기짙은 마력들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지칠 기색이 없는, 시커먼 인영이 코 앞까지 들이닥쳐 날붙이를 들이민다.
이제 조금이라도 피할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입에 고인 침을 질질 흘리며, 심호흡을 크게 했다.
후우우우우······
폐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 숨이 그대로 새어나갔다.
그래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점점 감기려던 눈을 번쩍 떴다.
딱 죽기 직전인데도, 내 찢어진 입가에는 오히려 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되······었다.”
* * *
다섯 번의 삶.
나는 그 중 이번 삶에서, 가장 드높은 경지에 발을 들였다.
정기신의 부조화로 제 수준을 완전히 낼 수 없어 강제로 막아두었으나, 어릴 적부터 임독양맥을 타통해 상단전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었으며.
직전 생의 대륙에서 아쉽게 오르지 못했던 6위계까지 끝끝내 달성했다. 그간 로라 마르티네즈의 육체 재구축 등 여러 일들이 있었을뿐더러, 과거에 한 번 걸어보았던 길이니만큼 이리도 빠르게 올라선 것이다.
그런데.
마나회로를 하나 더 쌓아 6위계를 달성한 이후였다.
‘···?’
갑자기, 심장과 단전 부근에서 알 수 없는 온기가 감돌았다.
심장을 휘도는 6개의 마나회로와 내공이 그득히 쌓여있는 단전. 그 두 곳에서 공명이라도 하듯 한날한시에 그러했다.
괴상한 감각이었으며 전생에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상단전을 제외한 무공의 수위는 화경 직전의 8레벨 끝자락, 마법은 6위계를 달성했으니 8레벨의 초입.
‘지금부터는 전생의 기억을 등대삼아 갈 수 없겠구나.’
이제 무공과 마법 양쪽에서 전생에 이뤄보았던 경지를 훌쩍 뛰어넘었으므로, 무슨 일인지 곧장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이 세계에 마나회로와 단전을 모두 지니고 있는 자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나처럼 전생의 지식이 없다면 매우 비효율적인 일이므로 찾아보기가 힘들다. 하나에만 집중해 갈고 닦아도 일정 경지에 오르기가 지극히 빠듯하여, 돌연변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게다가 양쪽을 8레벨 이상의 경지에 올려놓은 이는 연방에 내가 유일할 것이니, 이러한 경험을 겪어본 자들이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있을 리가 없었다.
‘무언가 일이 생긴다면, 그때 대응하는 수밖에.’
그렇게 나의 육신은, 6위계를 달성한 후 며칠 주기로 단전과 마나회로가 동시에 달아오르다가 식기를 반복했다. 어떨 때는 서로의 기운이 더 강한지 힘겨루기를 하는 듯했다.
생소한 경험.
다행히도 육신에 큰 문제나 이상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저 바닷물의 만조와 간조 때처럼, 점차 달아오르다 식어 멀쩡해지기를 반복하니 답답함과 호기심이 크게 일었을 뿐.
그런데, 기다리던 변화는 뜻밖의 장소에서 겪게 되었다.
글로톤 콥.
칩의 데이터를 제작하기 위해 간 그곳. 푸른 광채가 흘러나오는 캡슐기기 내부에서 무공과 마법을 이틀 내리 펼쳐낸 뒤, 차가운 얼음욕조에 몸을 머리 끝까지 담갔을 때.
뇌가 조금 맑아지는 느낌이 들더니.
돌연.
쾅!
‘!’
하단전과 심장 사이를 꽉꽉 틀어막아 두었던, 내가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단전과 마나회로를 나누던, 어떠한 경계가 갑작스레 허물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게 가능한 일이던가?
찰나의 순간, 나뉜 경계가 넓게 벌어지며 양쪽에서 터져나온 기운이 서로의 그릇으로 콸콸 흘러 들어갔다. 마치 임독양맥을 타통해 상단전을 열어젖혔던 그때처럼.
마나 회로를 여섯 개나 휘감은 심장과 내공을 담은 단전이 구슬꿰듯 이어진 상황. 따로 놀아야 할 놈들이 견우와 직녀도 아니고 저들끼리 오작교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건 내버려두면 위험하다. 주화입마와 다름없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이 날뛰는 기운은 언제 독이 되어 돌아올지 모르는 위험요소다. 허나 내가 대처하기 위해 소주천을 하며 전신경맥으로 뻗친 기운을 회수하려 할수록, 벌어진 경계는 점점 더 넓어져만 갔다.
그러다 종래에는, 하나의 큰 통로가 생겨나고 말았다. 애초부터 막을 수 없던 것이다.
그 와중에 조금 더 강한 기운을 담은 하단전이, 마나회로가 있는 심장 쪽으로 끝없이 제가 가진 기운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듯 하단전부터 심장까지 이어진 기운의 흐름은, 내가 임시로 막아둔 상단전까지 역행을 거듭하며 나아가려 했다.
‘이 흐름의 목적지는 임독양맥의 타통인가?’
그러나 내쪽은 상단전이 진작에 열려있었다.
게다가 단전과 심장에 이어 상단전까지 기운의 흐름이 치밀어오른 뒤에도 계속 멈추지 않는다면, 그 다음으로 무너뜨릴 경계는 어디란 말인가?
있어봐야 몸 바깥으로 흘러나갈 일밖에 더 없지 않겠나.
그리된다면 나의 최후는 주화입마로 인한 죽음이 분명할 것이다.
나는 그쯤 되어,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을 찾았다.
‘육체의 그릇이 작아 두 힘의 양립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다. 8레벨의 수준으로 감당하기에 마나회로 6개와 막대한 몇 갑자의 내공을 담아둔 단전은 벅차겠어. 사람 둘을 합쳐놓은 꼴이니.’
그간 운공을 통해 들끓는 기운을 가라앉혀 왔으나, 세상의 섭리와도 같은 커다란 격류를 인간의 몸으로 계속 막아설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우선 날뛰는 기운들을 통제해 잠시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글로톤 콥에서의 일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를 찾아갔다.
과거 내게 무선대지신공을 배워 익힌 덕에 목숨을 부지한 일레힌 포이체카.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되려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라면 무언가를 일깨워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며.
[ 새로운 형태의 주화입마인 듯합니다. 살고 싶다면 어느 한 쪽을 선택해 폐하는 방법이 있으나,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
[ 흐음. 과거 나의 마나회로가 망가졌을 때, 네게 받은 무선대지신공을 익혀 단전을 만들어 살아남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나? ]
[ 생생히 기억합니다. ]
[ 그렇다면 그때 나누었던 대화도 기억나겠군. 무선대지신공(舞仙大地神功)은 나약한 근골과 정신을 탈태시켜주는 효과가 있다고 너의 스승이 그랬다지. ]
[ 예. 그랬지요. ]
[ 맞는 말이다. 네게 그 심공을 배워 익히기 전에는, 나의 성정이 불같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발할라 시티에 퍼질 대로 퍼져있었지. 하지만 지금 내 성정을 보아라. 불같아 보이나? ]
[ 죽었다 살아나면 사람이 바뀐다지 않습니까. ]
[ 웃기는 소리. 이건 네 심공이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사실 9레벨 마법사의 회로가 모두 재건될 때까지 그 막대한 기운을 버텨내는 심법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때는 목숨이 귀해 네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지만, 과연 무당과 소림이 가진 절학도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심이 든다. 그리할 수만 있다면 이미 연방은 그들의 손에 떨어지지 않았겠나. ]
[ ······. ]
그렇게.
나는 마탑주와 하루 간의 담소를 나누었다.
형용할 수 없으나 분명 어떠한 도움이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번뇌와도 같은 관조를 거듭했다. 무아의 과정에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들까지 되짚어가며 헤집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그리고 그러하기로,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조화로구나.’
무선대지신공(舞仙大地神功)의 진정한 공능은 조화(調和)라고.
‘필시 조화다. 다만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을 뿐.’
숨겨져있던 무리(武理)를 깨우치니, 무학 자체가 새로이 정립된다.
근골과 정신을 탈태시켜주는 것은 본래의 공능이 아니라, 절세의 심법으로 세상의 탁기를 거르고 정순한 내력만을 쌓으니 자연히 따라오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보이는 것만 보니, 대단한 천하무적의 공능으로 느껴졌던 것이었다고.
누군가가 그리 말하고 있다.
내가 몇 번의 생과 여러 일들을 되짚어 다시금 이해한 무선대지신공은, 정신이 나가버린 자가 세상과 다시 조화되기 위하여 창안한 것이었다.
정신나간 자들을 다시금 정도의 궤에 올려 걷게하고, 세상과 다시금 조화시키기 위한 신공이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을 가진 신공이다.
절강성의 삼류흑도에 불과했던 나의 스승이 화경이라는 절대의 경지에 오른 뒤, 홰까닥 돌아버린 어린 아해에게 제 손을 내밀었듯 말이다.
왜.
그 양반이 왜 그러했나.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되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미친놈 주제에, 사내는 무얼 찾으려 했는가.
문득, 스승이 내게 온갖 독을 처먹였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 극음초(極陰草)다. 대단한 천년설삼도 원래는 음의 기운이 가득한 독약일 뿐이지. 허나 공력을 끌어올려 양기를 불어넣어 주면 음양(陰陽)이 조화되어 천고의 영약이 되는 것이다. ]
[ 무선대지신공(舞仙大地神功)을 익힌 네 놈이 고작 극음초 따위에 패한다면 살 이유가 없다. ]
나는 본능적으로 무선대지신공의 구결을 읊으며 생각했다. 정신이 나가버린 그때의 내가 극음초라면, 스승이 날 붙잡아 불어넣어준 무학들은 나의 정신머리를 고쳐줄 극양기가 아닐까.
그렇다면 조화의 결과물인 내가, 천고를 논할 사내가 될 수 있겠는가.
“······.”
나는 우주의 숨겨진 비밀이라도 깨달은 양, 방방 떠있기가 싫어 지그시 고개만 끄덕였다. 뒤이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스승을 향해 뇌까렸다. 성대가 잘렸는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뻐끔대며 말했다.
‘혹, 정신 나간 나를 세상과 어울리는 놈으로 만들어보려 하셨습니까? 아니면 스승도 나처럼 이러했습니까.’
개보다 못한 놈도 두들겨 사람으로 만드는 인간이었으니, 그것은 사실일지도.
쉬이 형용할 수 없는 무리를 새삼 깨우치니, 통제 불가한 독으로 느껴졌던 기운의 충돌과 덤벼드는 뷔에탕의 인형들이 그저 온화한 훈풍에 불과하게 느껴졌다.
“······.”
나흘간 피를 많이 흘렸다.
사지는 부상을 입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죽어가는 몸이라, 생을 향한 의지가 남아있다 해도 깃들 길이 없다. 그 덕분에 눈앞에 아른거릴 만큼 떠오른다. 광인의 매질에는 미치지 못해도, 이 정도면 옛 생각을 하기에 적당했다.
‘주화입마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단전과 회로를 막아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신공은 이미 내가 가야 할 길을 알고 있었구나. 매질이 극음초고, 신공이 양기라.’
나는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한 뒤, 끝내 틀어막고 있던 기운을 놓아버렸다. 의심과 의지를 제하고, 모든 흐름을 새로이 깨우친 신공의 공능에 맡겼다.
그러자.
“······.”
잠시 세상이 조용해지나 싶더니.
스아아아아······.
갑자기 전율적인 감각이 일며, 대기가 울렁이다 이지러졌다. 서릿발처럼 형형하기만 했던 인형들의 기세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서서히 감기던 눈을 부릅뜬 순간.
화아아아아악—!!!
털썩. 털썩. 털썩.
눈앞까지 달려들던 뷔에탕의 인형들이 실 끊어진 듯 풀썩 쓰러지고, 장내를 메우고 있던 모든 기(氣)가 나의 피투성이가 된 육신으로 빨려들어왔다.
마지막까지 교접인형의 아름다운 눈을 차지하던, 뷔에탕의 칙칙한 적안도 어느새 사라지고 그 안쪽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만이 남았다.
내 심장과 단전으로 빨려 들어온 기운은 전신을 휘돌다가, 결국 한곳으로 합류하여 활짝 열려버린 상단전으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만약 마법사의 심장인 마나 회로를 중단전으로 본다면······’
그렇게 하, 중, 상단전이 이지러이 조화를 이룬다면.
필시, 새로운 경지가 열리리라.
뿌드드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