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며칠 걸리지 않는다
#156화.
일은 벌여놓았으니, 날래게 움직여야 한다.
“몸은 괜찮습니까?”
“걱정해 주신 덕분인지, 이제 움직일 만합니다.”
사나흘 간 몸져누워 있던 윌터 하르트. 그의 늙어빠진 몸은 다행히도 호전되어 생기를 되찾았다. 카스트라 뷔에탕이 방공호에 난입한 데 이어 강력한 마력을 쏘아낸 것이 원인이었다. 전 십이제라는 괴물이 다 늙어빠진 노인을 상대로 힘을 내보였으니, 며칠을 쓰러져도 이상치 않았다.
“한데 딜런님과 전 십이제이신 인형사까지. 로키에서 생존한 군벌들과는 어떤 인연으로 손을 잡으셨—”
“그런 거 아닙니다. 크게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놀랍게도 부사장님을 공격한 ‘그 여인’ 은 반 컴퍼니와는 연관이 없고 누구인지조차 모릅니다. 그 여인 성명이 인 형사입니까?”
“그 사실을 모르신다는 게 당최 말이 안 되는 상황······.”
“여튼, 우리의 공식적인 입장은 그렇습니다.”
나는 딜런은 몰라도, 카스트라 뷔에탕의 존재만큼은 끝끝내 부정했다. 딱히 믿지는 않아도 상관없었다. 글로톤 콥은 이제 반 컴퍼니와 운명공동체가 되었으니.
— 공식적인 입장······그리 말씀하신다면 믿어야지 어쩌겠습니까.
윌터 하르트는 뷔에탕의 난입 사태 직후 덜컥 겁을 집어먹어 단념했는지, 더는 계약에 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핏대를 올리며 계약을 거부하는 대신 누구보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 그럼 이제 같이 가시지요. 본사는 발할라에 있습니다.
— 그럽시다.
나는 기운을 차린 그와 함께 발할라 시티로 떠났다.
그러고는 메모리칩 기업 ‘글로톤 콥’ 의 본사가 있는 곳에 도착하여, 칩 제작에 필수라는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을 신속하게 시작했다.
후우웅!
사람 몇 명이 겨우 들어갈 법한 비좁고 복잡한 캡슐기기. 푸른 빛이 태양처럼 뿜어져나오는 내부에서 전신에 별 괴상한 장치들을 주렁주렁 매달고는 윌터 하르트에게 보였던 무공과 마법을 펼치고 또 펼쳐냈다.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조절해 가며.
치이이이익—
“······.”
그리고 그 작업은 무려 이틀 내리 반복되었다.
단전이 비어 가벼워지면 운공을 했고, 여섯 개의 마나회로가 과열되면 식힌 후 다시 기술들을 펼쳐내야 했을 정도로 생각보다 고된 작업이었다.
그것을 끝낸 뒤에는 어떤 식으로 기운을 운용하고 육체를 움직여야 하는지 같은, 무공구결과 마법의 발현을 위한 수식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익히는 과정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도 빠뜨리지 않고 넣었다. 늙어 죽기 전 깨달음을 남기겠다는 명목으로 동굴 속에 절세비급을 남기는 천하제일인에 빙의한 채로 말이다.
내가 모든 비급을 다 기록하자, 글로톤 콥이 나섰다.
그들이 보유한 인공지능을 포함해 각 분야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내가 기록한 구결과 수식을 넷에 옮겨 입력하고 데이터화시키는 과정에 착수했다. 데이터화 시킨 뒤 메모리칩이라는 저장장치에 심어 봉하면 미래세계판 비급서가 완성된다.
직접 쥐잡듯 잡아가며 가르침을 내릴 필요도 없이, 그렇게 완성된 비급서인 칩을 대가리 링크포트에 꽂으면 끝. 칩 안에 저장된 데이터베이스는 포트와 이어진 신경망을 통해 뇌에 주입되는 것이다.
“이런 거였군.”
만약 중원무림이나 몰타왕국 마탑이었다면 목판이나 암석에 글과 그림을 새기거나, 종이에 구결을 적어놓고 도해본을 그려넣어 후대에 전승했을 터인데. 참으로 편한 기능이 아닐 수 없다.
차르륵—
나는 그들이 준비해 둔 얼음물에 몸을 집어넣고는, 내가 방금 빠져나온 캡슐을 바라보았다. 바다처럼 푸른 광채 사이로, 증발한 땀이 만들어낸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나온다.
하하-
고명한 메가콥의 회장들과 연방의 절대적인 강자들도 저 코딱지만한 캡슐에서 저런 귀찮은 과정을 거쳐 무공과 마법을 메모리칩화 시켰다는 생각에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나에게는 신선하면서도 은근히 좆같은 경험이었다. 어린 시절을 통째로 날려 먹었던 어떤 회사의 배양기 속에서 매일같이 정보를 주입해주던 인공지능 지니가 떠올랐다고 할까.
“······.”
나는 신경질이 나서 옛날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차가운 얼음욕조에 머리를 끝까지 담가버렸다.
뇌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쿠르륵···.
* * *
하루간 글로톤 콥이 마련해준 곳에서 지냈다.
글로톤 콥의 직원들은 한 시간마다 나를 찾아와 귀찮은 질문들을 자꾸 던져댔다. 왜 거기서 그 초식이나 수식이 들어가야 하냐느니 하는, 그 목소리들은 어쩐지 인공지능 지니의 음성처럼 귓전을 울렸다.
나는 놈들의 턱을 돌려버리고 싶은 심정을 잘 참아냈다.
하기야 저자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이 기술력 좋은 세상에 부모도 없이 태어나, 십 년 가까이 허비했던 내 운을 탓해야지.”
나는 그렇게 신세 한탄을 한 번 하고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윌터 하르트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저 적당히 좋은 무공칩과 마법칩을 생산해 값싼 가격에 시중에 풀어버릴 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콧대 높은 무림, 마법계 놈들의 쓸모없는 무력 독점 체제를 조금이나마 희석하는 것이고, 세상이 망하길 무력하게 기다리는 자들도, 역겨운 시체놈들의 침공에 맞서 제 한 몫을 다하게 하는 것.
그리고 어딘가 숨어있을 기재들을 발견해내는 것.
‘설마 청풍이 같이 재능있는 놈이 세상에 하나 없으랴. 찾으면 회사로 끌고와서 진짜 신공절학들을 가르치면 되겠군.’
나는 오형검이나 무선대지신공같이, 신공절학이라 불릴만한 것들은 꺼내지도 않았다.
일단 대성하기 어렵지 않은 흑도사파의 실전적인 무공과, 회로가 없어도 쓸만한 왕국의 저위계 마법만을 고르고 골랐다.
왜 흑도사파들이 익히던 무공을 택했냐 하면, 빠른 성장에 초점을 두고 몇 대를 거쳐 다듬어진 무공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백도정파 놈들에게 근본도 없는 시정잡배들과 같다며 욕을 먹기 일쑤다. 그러나 그것만큼 익히기 수월하고 허례허식이 없으며 빠른 속도로 강해질 수 있는 무공은 없다. 덧붙여서, 흑도사파가 시정잡배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 화낼 일이 아니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백도정파의 무공은 대부분이 매우 훌륭한 절학이나,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경지가 깊어지는 대기만성형이 많아 내 계획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이 세상 무림계는 구파일방을 대가리로 뫼시는 정파의 시대다. 사파의 무공을 익힌 이들은 녹림과 하오문 정도를 제외하면 이미 다 사라졌거나, 있어봐야 성세가 대단치 못하다. 흑도사파는 보통 서로가 제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라, 마땅히 계파를 이끌 종주세력이 없어서 그렇다.
그렇기에 흑도사파의 무공을 뿌리기가 용이한 상황이다. 중간에 내 임의대로 변형해둔 무공의 초식도 있어서, 비슷한 무공을 쓰는자가 있더라도 큰 상관이 없었다.
고르고 고른 저위계 마법들은 몰타 왕국 마탑에서 절찬리에 가르치던 전투마법들로, 대륙을 차지한 제국과의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기에 역시나 실전적인 놈들로 골라 뽑았다.
단전과 마나 회로만 있다면, 그리고 멀쩡한 뇌를 가지고 있다면 다 익힐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준비할 것은 하나였다.
[ 메가콥 여럿을 상대로 싸움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당신이 십이제급의 힘은 가지고 있어야 그들의 압박을 버텨낼 수 있을 겁니다. ]
부사장 윌터 하르트.
그 작달막한 노인은 재수 없이 걸려 코를 꿰이긴 했지만, 그래도 꽤 능력있는 기업가였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정확히 꿰고 있었다. 그의 말은 한 치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신공절학 수준은 아니더라도, 그 칩들이 완성되어 팔리기 시작하면 반향이 클 수밖에 없다. 연방 각지에 있는 거대 기업들은 공고히 완성되어 있는 이 사회의 체제를 지키려 할 거다. 사람이 탐욕과 이기심을 놓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그 체제의 지속이 연방의 멸망으로 귀결되어도, 그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끝까지 이기심을 놓지 못할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뒈져본 전생자라 그런 부분에서는 욕심이 없다. 돈욕심과 명예욕 따위는 없는 사람이다. 그저 내 한 몸 지킬 강력한 힘과 지식이면 충분하다.
재물과 권력을 끌어안고 살아봐야, 죽으면 다 사라질 테니.
“그래도 오밤중에 암살자를 보내면 좀 무서운데, 앞으로는 방검복을 입고 다녀야겠군.”
다음날, 윌터 하르트가 찾아와 말했다.
“검법, 보법, 심법 3개의 무공칩과 공격, 보호, 지원계통 마법칩 3개. 총 6개의 메모리칩이 상용화 가능한 완성품으로 생산되기까지 시간이 꽤 필요합니다. 그래도 상용화까지 반년 이상은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제 글로톤 콥에서의 일처리가 모두 끝났다.
나는 그곳을 떠나, 곧장 발할라 산맥의 마탑을 찾아갔다.
부웅!
이룩한 경지가 전과 같이 허접하지 않았다. 이제는 발할라 산맥 밑둥에서 차를 잡아타지 않아도 산보를 하듯 가볍게 올라갈 수 있었다. 가끔 심심하면 허공도 날아가면서.
— 그새 회로를 하나 더 쌓았군.
—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 굳이 라그나로크에 기업을 세웠다는 것은, 네가 가진 정체불명의 수많은 지식들을 슬슬 세상에 풀어놓겠다는 생각인가?
— 맞습니다.
— 일레힌 가문에 연락을 넣어두겠다. 일신의 힘만으로는 헤쳐나갈 수 없는 마찰이 생겨날 것이다.
마탑 서재에서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를 만나 꽤 긴 담소를 나누었다. 이 세계에서 무선대지신공의 정체와 수준을 아는 것은 직접 신공을 익힌 마탑주 뿐이었다. 그나마 나의 행동방식을 이해하며, 말이 통하는 상대인 것이다.
그렇게 마탑에서 하루의 시간을 보낸 뒤, 라그나로크 시티로 돌아왔다.
“······.”
돌아와서 바라본 라그나로크 시티는 밝으면서도 어둑했다. 새벽녘의 어스름을 보며 수련하는 그 맛이 있는 건데, 가짜 불빛들만 가득하니 약간 아쉬웠다.
그리고 아쉬운 김에, 이제는 다음 벽을 뚫고 나갈 시점이다.
명색이 전생자인데, 청풍이 놈보다 뒤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그 길로 카스트라 뷔에탕을 찾아갔다. 뷔에탕의 교접인형은 호텔의 한 층 전체를 대여해 사용하고 있었다.
뷔에탕이 쓰는 플로어에 도착하자.
활짝 열린 호텔 방문 안으로, 웬 교태로운 음성이 흘러나와 곧장 귓전을 때렸다.
아—
지금 앞에 있는 뷔에탕의 교접인형은 나신이었다. 동일하게 알몸인 어떤 사내와 침대 위에서 정사를 나누고 있었는데, 사내는 마력에 홀렸는지 정신이 반쯤 나가있었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아마도 이 호텔의 사장이었던가.
난 그들의 정사를 신경쓰지 않고 문을 열어둔 채 정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뷔에탕의 교접인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으로 나왔다. 호텔 가운을 걸치고 있었으며, 호텔 이름이 박힌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였다.
후우—
“뭐, 할 말 있어? 들어와서 같이 할래?”
뷔에탕이 달뜬 한숨과 함께 첫 연기를 뿜어냈다. 나는 뜸 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당신의 인형들을 빌려 내 수련에 사용하고 싶다. 최대한 수가 많았으면 좋겠는데, 혹시 로키 사태때 잃은 인형들이 많아 빌려주기 힘든가?”
스아아아악!
순간, 거센 광풍이 내 볼을 훑고 지나갔다.
풍압에 귀가 찢겨져 나갈 듯한 통증이 일었다. 뷔에탕은 이런 당돌한 제안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짓더니, 이내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풋, 아이들은 충분하고 어렵지도 않아. 언제까지 빌려줄까?”
스윽.
나는 뷔에탕의 물음에 허리춤의 검집을 끌렀다. 그리고는 삽시간에 검집에 기운을 주입해 강맹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서걱!
검집에서 뻗어나간 검강줄기가 천장에 숨어있던 인형의 턱을 베고 지나갔다. 한 치만 옆으로 그었어도 두 토막을 냈을 것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뷔에탕의 물음에 대답했다.
“9레벨까지. 며칠 걸리지 않는다.”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완전한 9레벨의 경지가 머지않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