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다짐
#155화.
······수많은 인간이 벌레처럼 죽었다.
죽은 이들이 선했는지, 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도망치던 인간들이 도살당하듯 죽고, 고통스럽게 변절해가는 꼴을 하릴없이 지켜보았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가끔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살인 경험이 수두룩한 인간이라도, 그런 규모의 살육을 직접 겪는다면 기분이 더러워지는 건 당연지사.
그러니 나름 유쾌하게 지내보려 해도, 로키라는 말이 나오면 괜히 기분이 이상하게 문드러지는 것이다. 한낱 옷가지에 들러붙은 먼지처럼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었다.
무얼 어떻게 해도 지워지지 않는 전생의 더럽고 추악한 기억처럼, 그저 하는 수 없이 등에 지고 사는 거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그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다음 생까지.
나는 그것이 못내 불쾌했다.
* * *
우르르르릉—
방공호 내부가 요란하게 흔들린다. 레반의 팔을 타고 유형화된 마력이 길다란 창 모양의 형태를 갖추었고, 세상을 잘게 떨어울리며 빛줄기처럼 쏘아졌다.
쿠지지직—
마력으로 빚어낸 장창은 방공호 벽면을 두부처럼 가볍게 뚫고 들어갔다. 창날이 사라져 마나 입자로 흩어질 즈음, 뒤쪽의 창대 부분이 여러 갈래로 펼쳐지며 회전했다.
갈려나간 금속 조각들이 분진처럼 휘날렸다.
그리고 잠시 뒤.
마력의 장창이 뚫고 들어간 방공호 벽면에는 커다란 크기의 인공 동굴이 생겨나 있었다.
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적어도 수십 미터 이상 파고 들어갔을 것이다.
윌터 하르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7레벨의 마법사인 그라도, 레반이 보이는 신위에 감히 평가를 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체 무슨 황당한 위력이란 말인가?’
마탑의 마법사들은 다 저런 힘을 가지고 있는가.
그럴 리가! 소속이 마탑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수식이 복잡한 고위 마법은 아닌 듯한데 위력은 터무니없이 강하니, 마법사가 마법을 눈앞에서 보고도 당혹스러웠다.
헌데, 그것보다도 윌터 하르트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드는 사실이 있었으니.
‘가진 밑천이 바닥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괴물이······.’
윌터 하르트의 기준으로 중, 상급은 될 법한 훌륭한 무공과 마법들이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심지어 하나같이 기존에 본 적도 없는 새로운 것들이며, 숙련도나 완성도 역시 흠잡을 곳이 없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능력들을 모두 배워 익혔는가?
호기심이 일다 못해 그의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였다.
그때, 레반이 조용해진 윌터 하르트 대신 입을 열었다.
“방금 그건 마나회로 세 개, 5레벨 정도면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천 크레딧에 팔아도 됩니다.”
“······5레벨 마법사가, 방금 그 마법을 쓴다는 말입니까?”
윌터 하르트가 되물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레반은 무언가를 골똘히 고심하는 얼굴로 혼잣말을 뇌까렸다.
“마법쪽은 조금 복잡하겠군. 회로가 몇 개 없어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그러는 사이.
파괴의 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윌터 하르트는 반쯤 체념을 하고 말았다.
‘저런 능력을 가감없이 보여주는데, 과연 내게 무슨 요구를 더 해올지······.’
레반의 재미없는 ‘농담’ 이 사실은 한낱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알아챘을 때는, 이미 이 사안에서 쉬이 발을 뺄 수 없을 정도로 깊숙하게 관여해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였다.
쿠구구궁······
현재, 방공호는 걸레짝이 되어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거대한 늑대가 할퀴고 물어뜯어 놓은 듯, 합금들이 녹고 우그러지고 찢어져 사방팔방으로 철의 가시를 뻗어 놓았다.
윌터 하르트의 발 앞으로는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발파용 다이너마이트 수백 발이 터뜨려도 꼴이 저렇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지하 깊은 곳에 설치된 방공호가 아니었다면, 시체들의 대규모 습격으로 오해한 연방군이 즉시 출동했겠지.
부스럭—
윌터 하르트는 구덩이 건너편에서, 또 무언가를 하려는 레반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저자의 안광은 호수처럼 맑았다. 그 누구보다 진심인 것이다.
‘저 젊은 나이에 이룩한 경지로 보아 확실히 세상에 다시없을 괴물이다. 괜히 연방에서 영웅으로 밀어준 것이 아니야. 하지만 저 정도로 정신이 나간 작자여서야······.’
수준 높은 칩을 제작하면, 누구나 그 가치를 인정받아 비싼값에 팔리길 원한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듯이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헌데 저 레반은, 공짜와 다름없는 가격에 팔겠다고 한다.
혼란을 야기해 연방의 세력도를 뒤집어 엎으려는 것인가?
···단지 농담으로 한 얘기가 아니라는 점이 참으로 두려웠다.
콰르르르릉—!
저 건너편의 벽면과 천장이 무너진다.
레반은 윌터 하르트가 잠깐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또 새로운 마법을 꺼내 시연한 것이다.
윌터 하르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그만하면 더 보여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충분합니다. 그러니 이 상황을 이해시켜 주시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연방 장군들을 만나봐야 하나.”
레반의 뜬금없는 딴소리에, 윌터 하르트의 음성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고객님께 이제는 진중한 답변을 드릴 차례인 듯하군요. 몇백 크레딧에 칩을 판매한다면, 한 개 생산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적자가 누적되어 사업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죄송하지만 다른 기업을 알아보셔야겠습니다. 귀한 시간 내주셨는데, 다시 한번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계약금은 빠른 시일 내에 돌려드리겠습니다.”
윌터 하르트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는 원래도 노인이었는데, 레반과 마주한 그 짧은 사이에 폭삭 늙어 등이 굽어가고 있다. 마치 레반의 회로에 마력을 빼앗겨 몸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윌터 하르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기업과 기업간 계약 아닙니까. 책임과 신뢰가 달려있는 일인데, 이렇게 쉽게 깨버리시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그쪽과 계약하려고 담보잡고 사채까지 빌렸어요. 목숨을 걸었단 말입니다.”
“······?”
“계약을 일방적으로 깨려거든 그쪽에서 우리 채무를 대신 변제해주십시오. 빌린 사채의 일일 이자가 50퍼센트라, 지금까지 불어난 이자만 따져도 계약금의 몇 배는 될 겁니다.”
“······.”
“그 사채꾼놈들 아주 악질입니다.”
상대가 등이 꼽추처럼 굽은 노인이든 뭐든···
레반은 절대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사내가 아니었다.
그의 협박성 발언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떠나려면 신체부위를 내놓아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러나 윌터 하르트는 예상했다는 듯, 즉각 입을 열었다.
“채무는 반 컴퍼니의 사정이니 알아서 하십시오.”
윌터 하르트는 칩의 적당한 가격과 경제적 가치를 따지고 설명해가며 설왕설래할 시기는 한참전에 지났다고 판단했다.
이제는 배짱 싸움인 것이다.
“또한. 계속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시면 자사 쪽에서도 법적인 대응을 할 수밖에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지금 누가 막무가내입니까. 내 무공과 마법을 전부 봐놓고서 막상 계약을 파기하겠다니.”
“그 부분은 진심으로 유감입니다만, 계약은 속행할 수 없겠습니다.”
상황이 정 곤란해지면 법원으로 가면 된다. 기업 간 소송은 한 쪽의 힘이 월등하지 않은 이상 질질 끌리기 마련이니.
······허나.
그것은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게 세상이라는 걸 잠시 망각한 판단이었다. 강한 쪽은 명분을 만들어내는 세상 아니던가.
“윌터 하르트씨, 화를 잘 참지 못하는 친구가 우리쪽 사내에 대기하고 있어요. 딜런이라고.”
“······군벌 딜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 친구가 진짜 막무가내입니다. 법 없이 살던 친구라, 법적 대응을 하면 당신네 본사 빌딩이 뜨거워질 수도 있는데 정말 일을 이따위로 해도 괜찮겠습니까?”
“······.”
순간, 윌터 하르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9레벨 고위 마법사. 로키 시티의 악명높은 대군벌.
호랑이 앞의 곶감마냥, 이름만 나와도 대기업의 부사장쯤은 오줌을 찔끔 지리게 만드는 존재.
레반이 딜런을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리자면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
“음.”
하지만 윌터 하르트의 표정이 더없이 심각해지자, 레반은 갑자기 노인을 괴롭히는듯 하여 일말의 죄책감이 들었다.
오늘은 나쁜 일로 부른 것이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뜻 한번 이루자고 그 빌어먹을 당가 놈들과 비슷한 짓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결국은 서로 한 발씩 양보하며 타협점을 찾아갈 시기였다.
사위에 정적이 내려앉을 즈음, 레반이 본론으로 돌아와 먼저 제안을 건넸다.
“300크레딧은 과하니 열 배를 늘려서 3천으로 합시다.”
“열 배를 늘려도 상황은 똑같습니다. 캐리어 티겟값 보다도 적고 원가 보전조차······.”
“좋습니다. 그러면 백 배 늘려서 3만 크레딧 정도로 합시다. 증권시장 개잡주도 백 배 오르기가 쉽지 않아요.”
“······처음부터 이럴 심산이었습니까?”
윌터 하르트의 황당해 마지않던 눈은 더욱 침침해졌다.
300크레딧이나 3만 크레딧이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레반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한발 더 양보해서, 위탁 판매 계약도 취소해주겠습니다. 제작 생산을 제외하고는 우리 반 컴퍼니가 맡아서 하겠습니다. 그래도 다른 기업과 문제가 생기면 그쪽이 좋아하는 법적 대응을 불사하시든가 하세요.”
“······.”
후우······.
윌터 하르트는 허탈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기야 뒤에 벌어질 일의 여파같은 걸 꼼꼼하게 생각했으면, 라그나로크 수복전이 끝난 뒤 그런 연설을 했을 리가 없었다.
윌터 하르트는 이제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눈앞의 이 사내는 적당히 말려서 될 게 아니라는 것을. 또한 애초부터 계약과는 상관없이, 코를 꿰어버릴 생각으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의 가슴 어딧께의 혈관이 꽈악 막힌 듯했다. 노화와 스트레스로 인한 동맥경화일 수도 있으니 이른 시일내에 병원을 찾아가야 할 듯했다.
다음 순간.
윌터 하르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을 토해냈다.
“······그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연방이 발칵 뒤집힐 겁니다. 매우 안 좋은 쪽으로 말입니다. 다른 기업과 세력들의 견제와 압박을 다 떠나서 생각해봐도, 고작 3만 크레딧에 그 무공을 구매한 자들이 과연 무슨 짓을 벌일 것 같습니까?”
“열심히 실력을 갈고닦는 수련을 해야겠지요.”
“어렵사리 세워놓은 질서에 금이 가면 깨지는 건 정말 순식간입니다. 칩을 실제로 양산해 판매한다면, 필시 막대한 혼란이 전 연방에서 일어날 겁니다.”
“그럼 지금은 태평성대입니까.”
“······.”
“30년 뒤에 망하나, 조금 더 혼란스러워져서 20년 뒤에 망하나. 그게 뭐가 다릅니까.”
윌터 하르트는 그 질문에 입이 턱 막혔다.
당장 몇달 전 로키 시티가 무너졌고, 밑바닥의 주민들은 여전히 반목하며 총을 쏘고 칼로 찌르기 바쁘다.
메가콥과 대기업들은 그들보다 약한 기업들을 사냥해 해체하고 잡아먹는다. 연방의 공권력은 어찌된 게 강력한 기업보다도 못하다.
말세라는 말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세상이 맞다.
꿀꺽.
그래도 윌터 하르트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혼란수습을 빙자한 온갖 명목으로 반 컴퍼니는 와해될 겁니다. 딜런이 굉장히 강력한 무력을 지닌 마법사인 것은 나도 압니다. 하지만 그라도 메가콥 여럿을 상대로 싸움을 벌일 수는 없습니다. 당신과 비슷하게 생각하던 이가 과거에 없었던 줄 아십니까? 전 세대에 칠좌의 위에 앉아있던 ‘발할라의 현자’ 마저 의논 단계에서 포기하고 접어버린 계획이란 말입니다.”
“허어, 정말 그렇습니까?”
“그런 일을 벌이려면, 칠좌나 십이제쯤 되는 격외 초월자 여럿이 모여 궁리해야 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당신이 십이제급의 힘은 가지고 있어야 압박을 버텨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것을 계속—”
실로 피토하는 윌터 하르트의 열변이 이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
콰직!
무언가 부서진 방공호 사이의 철판을 찢으며 안쪽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다음 순간, 그 불청객의 칙칙한 적색 눈동자가 열변을 토하던 윌터 하르트를 지그시 응시했다.
삽시간에 밀려오는 기이한 고통과 어지럼증.
“!”
피부 살갗이 다 벗겨지는 듯한 감각이 윌터 하르트의 내장을 마구 헤집어놓았다. 7레벨 마법사인 그일진대, 한낱 타인이 뿜어내는 마력에 속이 진탕된 것이다.
이윽고.
“앞으로 수련을 매우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
영문을 몰라하는 윌터 하르트의 귓전으로, 레반의 실소 섞인 목소리가 유유히 마력을 타고 들려왔다.
“부사장님 말대로, 내가 십이제의 지위라도 올라서 버텨내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 * *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나는, 호텔 방에 앉아 분주히 움직이는 휴머노이드 노동자들을 바라보았다.
반 컴퍼니 본사 빌딩이 올라갈 대지는 이제 막 구획정리를 끝낸 뒤, 기초공사에 들어간 참이었다. 커다란 중장비들이 땅을 파고 지면을 다지고 있었다.
쑤욱!
그때, 옆으로 딜런의 솥뚜껑 같은 손이 불쑥 나타났다. 딜런은 창 밖의 광경에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빌딩은 무조건 라그나로크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대해야 한다. 바벨탑이라고 알지?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거대해야 내 권위가 좀 선다.”
딜런은 저번부터 거대하고 웅장한 형식의 빌딩을 원했다.
그는 사채 시장을 비롯한 밑바닥 지하경제를 박살내고 싹 쓸어내면서도, 건설사를 알아보러 다니는 데까지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아주 입장이 확고해서 이견을 낼 생각은 없었다.
내가 계속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자니, 딜런도 진행상황이 궁금한지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나저나 칩은 어떻게 하기로 했지? 그쪽과 얘기는 잘 끝났나?”
나는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이는 노동자들을 보며 답했다.
“열심히 노력해 보겠다고 다짐하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