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값싸게 팔 준비
#154화.
작달막한 체구의 노인.
“저는, 글로톤 콥의 윌터 하르트라고 합니다.”
메모리칩 제작기업 ‘글로톤 콥’ 의 부사장, 윌터 하르트.
자기 몸만 한 서류 가방을 내려놓으며 간단한 소개까지 마친 그는, 나이 치고는 순수한 호기심이 어려있는 눈으로 반대편에 앉은 레반을 바라봤다.
그러자.
“아, 반갑습니다. 반 컴퍼니의 레반입니다.”
레반은 오랜 고심에 잠겨있다가 지금 막 정신을 차린 듯한 낯빛으로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이어서, 둘은 가벼운 악수를 나누었다.
윌터 하르트의 주름진 눈가가 살짝 좁아졌다.
전장에서 구르고 구른 악귀와의 대면을 상상했던 윌터 하르트 눈에는, 기세도 그렇고 그리 특별한 점은 없어 보였기에.
‘흐음, 이 잘생긴 사내가 정말 그 레반이라는 말인가? 이번 로키에서도 활약이 대단했다고 들었는데······.’
레반.
혜성처럼 갑자기 나타나 두각을 드러낸 실력자.
라그나로크 수복전에 이어, 몇 달 전 로키 시티 사태까지 커다란 사건마다 여지없이 참여해 연방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가진 능력과 얻은 명성에 비해 명예나 출세욕은 그리 강하지 않은지, 굳이 대중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리고 기껏해야 발할라 마탑 소속이라고만 짧게 알려졌을 뿐, 명확한 출신이나 성장 배경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추측만 무성하고 반쯤은 베일에 싸여있는 인물인 것이다.
허나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화제성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지간한 메가콥 회장 이상급의 파급력을 구름떼처럼 몰고 다니는 인물이니.
나다. 좆같은 연방군 땅개······로 시작한 약 5분간의 수복전 연설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윌터 하르트를 비롯한 글로톤 콥의 직원들도 한 마디 한 마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정도.
대부분 원색적인 욕설이었다만.
‘······외형은 라그나로크 때와 달라졌으나, 역시 굉장히 젊군.’
그가 마주한 레반은 젊었다.
군계일학이라고 어디서든 주머니 속의 못처럼 튀어나오는 신진 강자들은, 잊을만 하면 어디선가 등장해 세상을 놀라게 한다.
그러나 그런 이들의 대다수는 메가콥이나 순위권에 드는 대기업 출신이었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마법계 제약기업 출신의 ‘반 루벤카’ 정도가 그나마 메가콥이나 대기업의 자제가 아님에도 명성을 날렸었지.
현실이 그렇기에 윌터 하르트는, 레반 역시도 메가콥이 막후에서 키워낸 실력자라고 믿고 있었다.
·····저자가 뜬금없이 악명높은 군벌 딜런과 결탁하여 라그나로크 시티에 기업을 뚝딱 세워버렸다는 소식이 들려옴과 동시에, 딜런의 수하가 글로톤 콥에 방문하기 전까지는.
‘전 연방에 명성을 떨쳐놓고선 정작 군벌과 합작해 회사를 세우다니. 정말 오래살고 볼 일이군.’
로키 시티를 주름잡던 9레벨의 전투마법사, 딜런.
악명높은 그 군벌과 결탁할 정도라면 거대 기업에서 공들여 키운 인재마저 아니라는 뜻이니, 여러 의미에서 눈앞의 젊은 사내 레반은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를만큼 말이다.
여하튼, 윌터 하르트는 그런 인물과 계약 맺기위해 라그나로크 시티까지 한 달음에 달려왔다.
‘마침 자금난이 심하던 참인데, 이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글로톤 콥의 고객사였던 몇몇 기업들이 한꺼번에 경쟁사로 빠져나가는 불상사가 있었다.
때문에 과거처럼 콧대를 높이며 고객을 가려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크레딧만 충분히 지불한다면 신생 기업과도 기꺼이 웃으며 계약을 맺는다. 더욱이 화제를 몰고 다니는 인물이니, 마케팅 차원에서도 쓸만하지 않겠나.
잠시 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레반이 말했다.
“무공칩, 마법칩 양쪽 모두 제작할 수 있겠습니까.”
“예, 그야 당연히 어떤 분야든 제작 가능합니다.”
스륵—
레반의 질문에 윌터 하르트는 들고온 가방에서 검은색의 서류를 한 장 꺼내고는, 만면에 영업용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제작된 칩은 어떤 용도로 사용하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아직은 자세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없이 사는 놈이라. 여기서 굳이 답을 해야 하는 겁니까.”
레반의 날카로운 반응에 윌터 하르트는 익숙한 일인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많은 자본력이 투입되는 사업인만큼, 절차상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요식행위입니다. 이쪽에서 칩을 제작 생산해 넘긴 뒤 불법 복제나 도난같은, 혹시모를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이를테면 판매 목적, 직접 사용등의 목적을 간단하게라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 설명하자, 레반은 대수롭잖게 답했다.
“판매로 합시다. 일단 몇 개는 판매할 거니까.”
윌터 하르트는 곧장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목을 가다듬은 뒤 말문을 열었다.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그리고 기억하고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3년 전에 마법계 대기업인 쿼롯 오토모빌. 그러니까 쿼롯 가문의 비전이 담긴 마법칩이 한정판 타이틀을 달고 시중에 일부 판매된 적이 있습니다. 과거에 십이제였던 쿼롯의 고위 마법사가 창안한 보호계 마법이었고, 프리미엄까지 붙어 개당 600만 크레딧에 팔려 나갔지요. 바로 저희 글로톤 콥에서 제작과 생산, 위탁 판매까지 모두 맡은 칩입니다.”
“쿼롯 그룹이라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하면 혹시······.”
“위탁 판매권도 가져가세요. 하실 수 있으시면.”
“?”
가져 가는데, 할 수가 있냐니?
그 말에 아주 약간의 의문이 들었으나—
“허허,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윌터 하르트는 레반의 시원한 대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꺼내놓은 서류에 몇 가지 사항을 더 체크했다.
공중에서 펜이 저절로 움직이며 마나를 뿌렸다.
‘간단하군.’
이제 장사치로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을 얻어냈다.
그리고 이미 본사에 계약금 지급이 완료된 상태였다. 그러니 괜한 절차로 시간을 더 허비할 필요는 없었다.
윌터 하르트는 추가요금 목록을 두둑이 체크해둔 서류를 고이 보관해놓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메모리칩에 담아낼 무공과 마법을 제게 견식시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간단하게나마 등급을 매겨야 하니, 괜찮으시다면 이 마공학 무기를 써주십시오.”
스윽.
윌터 하르트가 커다란 서류가방을 펼치자, 그 안에는 목검과 목창을 비롯한 온갖 무기들이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어렴풋한 마력이 느껴진다. 일반적인 연습용 무기들은 아니었다.
그것을 확인한 레반이 머리를 벅벅 긁자.
“다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글로톤 콥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등급에 불과합니다. 마공학 무기에 저장된 데이터의 보안절차 역시 철저합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이래서 지하 방공호를 미팅 장소로 선택하셨습니까. 생각보다도 배려심이 깊으십니다.”
“······허허.”
윌터 하르트는 예상한 반응에 쓰게 웃었다.
경지에 오른 마법사 혹은 무인은 자부심과 자존감으로 똘똘 뭉쳐있는 괴물이다. 자기가 익힌 무공과 마법에 등급을 매겨보겠다고 말하면, 저렇듯 크게 불편해하거나 꺼려하기 마련이다.
윌터 하르트는 일부러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본사 방침상, 무공이나 마법을 메모리칩에 옮겨 담아내기 전에 그 수준을 필수로 확인하고 분류 작업을 거칩니다.”
그에게도 마땅한 이유는 있었다.
차마 메모리칩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운, 지하 시장에 불법복제된 채로 돌아다니는 조악한 삼류 양산칩 따위를 제작하려는 게 아니니.
“무공으로 예를 들자면 쉽게 익히고 사용할 수 있는 삼재검법(三才劍法)은 최하급으로 보고, 무당 코퍼레이션의 태극혜검(太極慧劍)은 최상급으로 치는 셈이지요. 그에 따라 칩의 성능과 사용기한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정 불편하시다면—”
후웅!
“?”
순간, 설명하던 윌터 하르트의 눈앞이 삽시간에 흐릿해졌다.
그가 놀라 고개를 돌리자.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레반은 어느새 손에 맞는 마공학 목도를 하나 집어들고, 기수식을 취한 상태였다. 실로 신속했다.
이윽고, 현묘한 보법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한 레반은 때로는 강맹하게, 때로는 유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목도를 뻗어갔다.
후웅!
비어있는 사방위를 목도의 끝이 점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검법의 초식이 물흐르듯 연계되고 있는 것이다.
언뜻보면 평범한 검법과 다르지 않은 듯했다.
“······!”
하지만, 레반의 이어지는 움직임을 자세히 뜯어보던 윌터 하르트의 동공은 서서히 확장되어갔다.
‘별 건 아닌 듯한데, 빈틈이 전혀 없군.’
힘을 빼고 간단히 휘두르는 듯 보여도 각각의 초식마다 단번에 풀어낼 수 없는, 심유한 이치가 담겨있는 검법이었던 것이다. 마치 경지에 이른 무림계의 명숙이 펼치는 검법을 보는 것만 같았다.
우우웅—
우우우웅—
이곳은 과거 라그나로크 시티 연방군이 전시벙커로 사용하던 대형 방공호. 이 넓은 방공호 안쪽이 목검에서 뿜어져나간 경파와 풍압만으로 웅웅 울려대고 있으니···
불현듯, 방공호 내부가 점점 묘한 기류로 채워져간다.
레반이 연신 펼쳐내는 검을 견식하던 윌터 하르트의 눈은, 점점 놀라움을 넘어 경탄에 가깝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그는 처음 내렸던 ‘별 건 아닌 듯하다’ 라는 평가를 정정해야만 했다.
‘······수준이 대단히 높은 검이다.’
윌터 하르트는 비록 마법사이나, 무학의 수준을 판단하는 눈이 훌륭하다 자부하는 사람이다.
메모리칩을 제작하는 글로톤 콥에서 평생을 근무하며 수준높은 무학과 마법을 끊임없이 보아왔고, 기본적으로 자신도 7레벨의 경지에 오른 상위 마법사였다.
지금 레반이 펼쳐보이는 저 검법은 어지간한 메가콥의 무학에도 절대 뒤쳐지지 않았으며, 누군가의 것을 모방해 펼쳐내는 검도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아는 한, 저런 검법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진신무공을 내놓을 리는 없으니······설마 무공을 새로 창안할 정도라는 말인가?’
마법계 대기업, 글로톤 콥의 부사장.
그는 지금껏 대단한 기업가나 재벌 고객들을 상대해왔다.
사업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칩을 양산하려면, 건실한 대기업은 되어야 그나마 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 테니.
그런데 설립한지 석 달된 신생 기업이 거대한 계약금까지 지불해가며 칩 양산을 원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첫 번째로는 그만한 자금이 없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는 이제 막 시작한 기업 따위에 그 정도로 가치있는 무공이나 마법을 익힌 자가 없기 때문에.
‘이유가 있었군.’
허나 지금, 윌터 하르트의 주름진 눈가는 황금덩이라도 찾은 마냥 번쩍 뜨여있었다.
레반은 분명 힘을 빼고 목검을 휘두르고 있는데도, 검이 주는 고유의 분위기에 그의 목이 빳빳하게 굳었다.
‘보통 희한한 검법이 아니라 무조건 고가에 팔린다. 상급으로 분류해도 부족함이 없겠어.’
각각의 초식이 보여주는 검로는 분명한 이치를 담고 있으나, 그리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상당히 효과적이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무공에 아예 문외한인 자들도 저 검법이라면 익힐 수 있을 듯했다.
그러니, 더 이상의 평가는 무의미했다.
뚝!
문득, 레반의 목도가 빛살처럼 허공을 가르며 멈추었다. 윌터 검에 홀려서 빠져들었던 사이 무공의 시연이 금세 끝나버린 것이다.
“맡겨만 주십시오.”
윌터 하르트는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조금 전에 레반으로부터 저 검법이 새겨질 무공칩의 위탁 판매권까지 훌륭히 따냈기 때문이었다. 위탁 판매의 수수료를 얼마나 책정해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팽팽 굴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첫 무공을 선보인 레반이 쥔 목검을 툭툭 털어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지금 보여드린 것은, 한 오백쯤으로 책정합시다.”
“오백······입니까?”
오백이라면.
저 귀한 무공을 500만 크레딧에 팔아넘기겠다는 뜻인가?
윌터 하르트는 레반의 말을 듣자마자 격하게 손을 저었다. 얼마나 격하게 저었는지 주변의 마나 입자들이 반응하여 그의 손에 달라붙을 정도였다.
“500만 크레딧은 너무 값싸게 책정한 겁니다. 3년 전 쿼롯 가문에서 한정판으로 냈던 마법칩보다도 더 가치있는 물건이 될 겁니다. 크레딧은 쌓아두었으나 훌륭한 검법을 보유하지 못한 무림계 기업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도 남을 듯—”
다음 순간, 그의 말을 끊어먹은 레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500크레딧으로 합시다. 500만 말고.”
“······?”
순간, 짧은 정적이 일었다.
윌터 하르트는 황당한 얼굴로 레반을 쳐다보았다.
저자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아무리 물건 가격은 파는 놈 마음이라지만······.
500크레딧이면 고작해야 배양육 버거 몇 개 값인데, 천문학적인 크레딧이 지척으로 아른거리는 상황에 저게 무슨 뜬금없는 농담이란 말인가.
사실상 무료로 배포하는 것과도 다름없지 않은가.
‘고객이라고 오냐오냐 해주었더니, 확실히 정신세계가 특이한 자로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고 치면 그것은 더욱 큰 문제다.
수준높은 무공을 단돈 500크레딧에 팔아먹는다면, 기존의 무림계 세력들이 가만히 두고만 보지 않을 터.
마땅한 명분 따위야 만들어내면 그만이니, 즉각 손에 손을 잡고 라그나로크 시티로 몰려와 저 젊은 영웅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다.
위탁 판매를 맡은 본사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허허.”
그 어이없는 가정에 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너무도 황당한 소리가 의문을 제기할 건덕지도 없었다.
애초에 실현 가능성 자체가 없는 정신나간 짓이라, 윌터 하르트는 레반의 저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방군 상대로도 욕을 뱉는 사내가 그깟 농담쯤 못하겠나.
“재미없는 농담은 이제 그쯤—”
“다음으로 뿌릴, 팔아치울 마법은 이겁니다.”
“······?”
타닥.
레반은 돌연 목검을 바닥에 던지더니, 손가락 두 개를 모아 앞으로 뻗었다.
방공호 내부의 마나가 허공으로 빨려 올라간다. 막대한 양의 마나가 레반의 손가락 앞쪽에 금세 응집했다.
작게 응집된 마나 입자들은 둥그렇고 기하학적인 모양의 마법진을 그려냈고, 잠시 뒤 그 마법진 안에서는 두꺼운 마나기둥이 육중하게 뻗어나왔다.
악마라도 소환되듯, 위압적인 마력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꽈지지지지직!
곧, 그 마나기둥은 합금으로 제작된 방공호 벽을 통째로 우그러뜨렸다. 깊숙이 파인 골의 깊이가 보통이 아니었다.
“······.”
그 파괴력에 윌터 하르트의 사고회로가 잠시 정지한 사이.
레반은 무심한 얼굴로, 또다시 재미없는 ‘농담’ 을 꺼내 놓았다.
“이건 한 300크레딧으로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