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150화 (150/157)

#150화. 칼스

#150화. 

레반이 벽제방을 찾아가기 전, 마주친 무당의 노고수가 말했다. 

무슨 까닭으로 기세를 피워 올리는 것이냐······고. 

사실, 중견기업인 벽제방이 약해빠진 삼호문의 무공을 탐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강자가 약자를 탐하는 것은 세상의 섭리나 다름없으니. 

레반이 시종으로 있던 반 바이오 컴퍼니도, 사천당가 코퍼레이션보다 약하기 때문에 별 저항도 하지 못하고 폭삭 무너졌다. 

그때 나서서 화내주는 놈이 몇이나 있었는가? 

벽제방에다 대고 화낼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레반은 벽제방주를 베지 않았다. 

하지만, 무당의 노고수가 느낀 레반의 기세는 애초에 벽제방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레반은 삼호문의 무공을 탐낸 벽제방 따위가 아니라, 상선의 칼스를 어찌해야 할 지 내내 고심하던 중이었으니. 

다만, 여량천의 위스키를 빼앗아 마셔 얼큰한 취기가 돌고 있었던 탓에 잠시 명경지수를 유지하지 못했다. 이어진 고심으로 레반이라는 호수에 파문이 일어났다. 

하필 그 시점에 넓게 기감을 펼치다 그만 정제하지 못한 살기가 섞여들었고, 술김에 자신도 모르게 천지사방으로 뻗어버린 기세가 발두르 중심업무지구의 강자들을 찔러 자극한 것이다. 

헌데 그 살기어린 기세를 받았음에도 레반의 앞에 내려선 무당의 고수들은, 칼을 뽑더라도 큰 말썽은 벌이지 말라는 말만 전하고는 돌아갔다. 

그들은 크게 다그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레반의 위치가 이전과 같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인지 레반은 그 노고수의 조언이 굉장히 기꺼웠다. 

칼은 뽑되, 일을 ‘크게’ 벌이지만 않으면 되겠구나. 

스윽—스윽— 

레반은 독 묻힌 옷가지를 숫돌삼아 검신을 쓸고 다듬었다. 

역시나 다르간트의 역작인 광선은 그 만듦새가 대단해서, 당가의 극독을 덕지덕지 처발라도 부식되기는커녕 여전히 형형한 예기를 뽐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레반이 내려앉은 적막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 전신이 딱딱하게 굳은 채 마주앉은 공천립을 향해. 

“공천립 이사님.” 

“예.” 

“방이 더우세요?” 

“······.” 

뚝··· 

공천립의 몸을 적신 식은땀이, 그의 깨끗한 비단 의복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유독 방수처리가 잘 되어있는 재질이라 정도가 더욱 심했다. 

뚝. 뚝. 땀 떨어지는 소리가 공천립의 귓전을 울린다. 

공천립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반은 계속 검신을 쓸어내며 물었다. 

“의복 소맷단이 유독 번들대는 걸 보아, 아무래도 공들여 다림질해 걸친 옷인 듯 한데. 이거 저 때문에 상황이 이리되어 어쩝니까.” 

“정말 괜찮습니다. 한낱 의복이야 많이 있습니다.” 

“제가 무림계 선배를 앞에 두고, 너무 격의 없고 버릇없이 군 것은 아닌가. 갑자기 후회가 밀려옵니다.” 

“무슨 말씀을, 어디 무림에 선후배가 따로 있겠습니까.” 

“공 이사님께서 그리 말해주시니 다행입니다. 사실 선후배가 무엇이 중요하겠어요. 오래 살고 길게 사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요······.” 

말끝을 흐린 공천립의 눈빛이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공천립은 레반의 살벌한 기세를 버텨내지 못했고, 결국 뭐에 홀린듯이 칼스를 이곳으로 호출했다. 

그리고 그게 1시간 전의 일이었다. 

솔직한 말로, 절친한 죽마고우도 아니고 모임의 일원을 위해 제 목을 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아무튼 공천립은 그 뒤로도 꼼짝없이 자리를 지켜야 했다. 

스윽— 

장장 1시간 동안 쉬지 않고 칼을 갈고닦던 레반이 불현듯 물었다. 

“헌데 공 이사님은, 혹시 날 기억하십니까?” 

“······.” 

공천립은 무던히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해내려했다. 

‘···누구지?’ 

수십 년간 칼날 위 같은 당가에서 근무하며 쌓아온 경험은, 이것만큼은 반드시 기억해내야 한다며 공천립의 심신을 몰아세웠기에. 

공천립은 최근의 소요들을 더듬어가며 헤집었다. 

내가 언제, 무언가 크게 잘못한 것이 있었나? 

스윽—스윽— 

그러나 눈앞에서 독을 발라가며 검신을 다듬고 있으니, 신경이 쓰여 도무지 떠오를 리가 없었다. 

공천립은 안면에 흥건한 땀을 훔치며 답했다. 

“······깊이 생각을 해 보았으나, 확실히 오늘 처음 뵈었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확실한 겁니까?” 

갑자기 레반이 검을 확 잡아들자, 공천립은 크게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 이전에 저희가 마주친 적이 있었는지요? 가르쳐주시면 새기겠습니다.” 

“글쎄요. 살면서 한 번은 보지 않았겠어요.” 

“······.” 

공천립과 레반은 잠깐, 마주한 적이 있었다. 

레반은 과거 정크타운에서 모래폭풍을 타고 날아온 시체를 때려잡은 뒤, 연방군에 붙잡혀 격리구역으로 호송되었다. 

그리고 그 격리구역에서 스쳐지나갔던 사천당가 소속의 중년인이, 바로 지금 눈 앞에 있는 공천립. 

우습게도, 레반만이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레반은 긴장한 얼굴로 굳어있는 공천립을 바라봤다. 분명 고급진 차를 타고 왔던 그 중년인이 맞았다. 

‘하기야, 그 시절의 나는 신경쓸 가치가 없는 사내였지.’ 

그때, 뷔에탕의 저주를 억지로 증폭시키지 않았다면 시체로 변절한 마법사의 손에 이미 병신이 됐던가 진즉 죽었을 터. 

그만큼 약했다. 

심지어 자신의 ‘레반’ 이라는 간단한 이름마저도 흔해 빠졌으니, 공천립이 레반을 기억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지도 몰랐다. 

곧, 레반의 안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모르시면 됐습니다.” 

“······.” 

“그나저나 칼스는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쿵··· 

레반이 독으로 갈아낸 광선을 잠시 내려놓으며 공천립을 응시했다. 

공천립은 다급히 답했다. 

“이 공가가, 다시 기별을 넣어보겠습니다. 허나 칼스는 워낙 공사가 다망한 인사라 시간을 내지 못할 수도—” 

“괜찮습니다. 제가 이곳의 지부장인 당녹운 대인께 사흘간 이 접객실을 빌리겠다 하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공사다망해도 사흘 내로는 오겠죠.” 

“······.” 

“이제부터 공 이사님은 눈 좀 붙이고 계세요. 그리 뚫어져라 쳐다보시니까 내가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 

“······예.” 

공천립은 별수 없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레반과 공천립의 대화도 거기서 멈추었다. 

스윽— 

그렇게 두 눈을 감은 공천립의 귓전으로는, 계속 옷가지로 검신을 슥슥 쓸어내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30분 정도가 지나자, 공천립 휘하의 직원이 고독 유충과 여덟 개의 목함을 가지고 들어왔다. 

“······?” 

안으로 들어온 직원은 왜인지 돌처럼 빳빳하게 굳어있는 공천립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으나, 공천립이 별 말이 없자 고독과 목함이 놓인 판을 두고 서둘러 사라졌다. 

꿈찔- 

쌀알보다도 작고, 불그스름한 애벌레들이 판 위에서 꿈틀꿈틀 움직인다. 숙주의 내장을 파먹어 천천히 말려 죽이는 당문의 독충. 고독. 

레반은 그쯤, 닦던 칼을 내려놓고 굳이 그것들을 하나하나 세어가며 확인했다. 

“꼬물대는 게 귀엽네. 하나, 둘. 셋······일곱. 여덟” 

“······.” 

“여덟. 맞네요. 영약도 이만하면 좋습니다.” 

2년 전, 칼스는 레반에게 주겠다던 8개의 영약에 모두 고독유충을 넣었다. 죽으라며 보낸 히트맨이 루막슨의 케아드로라는 정치인을 죽이고 돌아오자, 인재 욕심이 난 것이다.

그 고독이 들어있는 영약을 전부 받아먹었다면 내공은 크게 증진되었겠으나, 평생을 뷔에탕의 꼭두각시처럼 상선의 밑에서 부려먹혔을 터. 

“하하.” 

레반은 그것들을 모두 기억하는 자신이 대견하다 생각하며, 아직도 눈을 감고있는 공천립에게 물었다. 

“고독의 해독약도 당가 지부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본문에 있고, 제가 취급할 수 없습니다.” 

“고독을 키우는 건 아무나 하는데, 해독약은 취급하지 못한다? 당가도 참 악랄합니다. 누가 덥썩 받아먹어도 해독약을 구하지 못할 테니, 반드시 죽겠군요.” 

“······.” 

순식간에 ‘아무나’ 가 된 공천립이었으나, 단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철저한 당녹운 지부장이 귀빈 접객실을 사흘간이나 흔쾌히 내주었다는데, 거기서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저자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나가 맞았다. 

“하면, 공 이사님이 드셔도 곧장 해독할 수 없겠네요.” 

“······그렇지요. 저도 고독은 해독할 수 없습니다.” 

레반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에이, 그래도 공 이사님쯤 되면 죽기 전에 해독약 정도야 구할 수 있겠죠? 언젠가 당가에서 더 높은 지위까지 올라가실 테니까.” 

“······.” 

“제가 칼에 바른 독은 해독할 수 있습니까?” 

“예, 그것은 지금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후웅! 

그 말에, 레반이 광선을 쥐어 크게 휘둘렀다. 

창문 하나 없는 밀실 내부로 은은한 독기가 퍼져나갔다. 광선이 마치 극독을 들이쉬고 뱉으며 호흡이라도 하는 듯했다. 

레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쉬어요.” 

그 후로,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한 시간. 

세 시간. 

다섯 시간. 

그리고 공천립과 레반이 대면한 지, 여섯 시간이 되었을 무렵. 

저벅. 저벅. 

바깥에서부터 느긋한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점점 이쪽과 가까워졌다. 당가 귀빈실에 마음대로 방문할 수 있는 인사는 발두르 시티에도 몇 없었다. 

‘드디어 왔구나···!’ 

기다리던 공천립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상선의 전무 자리를 꿰찬 괴물, 칼스가 드디어 도착했다. 

그는 대외적으로 7레벨이라 알려져 있으나, 공천립이 알기로 무려 8레벨 초입의 무위를 지니고 있는 대단한 실력자. 

전투로 인해 자그마한 소란이라도 일어난다면, 매사에 철저한 당녹운 지부장이 직접 내려와 볼 것이었다. 

— 모임 때도 아닌데, 갑자기 무슨 일로······. 

잠시 뒤, 귀빈실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칼스의 목소리. 그 피곤에 잔뜩 절은 음성과 함께 두꺼운 문이 열렸다. 

홱! 

공천립은 눈을 감고있어 세상이 어두웠으나,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살갗으로 불어왔다. 

이윽고. 

카가강! 

아주 잠깐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귀빈실의 두꺼운 문이 다시 천천히 닫혔다. 

귀빈실 내부는 다시 이전처럼 적막에 잠겼다. 

그런데······벌써 적막에 잠기면 안 되는데? 

공천립이 의아한 기색으로 감았던 눈을 슬쩍 뜨자. 

“?” 

가장 먼저 희미한 오색빛의 광채가 들어왔다. 

그리고 뒤이어, 레반의 해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공 이사님.” 

“······?” 

“기별만 하라니까. 기대는 왜 하고 있어요.” 

푸우욱! 

순간, 극독으로 벼려낸 레반의 검이 붙잡힌 칼스의 가슴팍을 쑤시고 들어가는 장면이 공천립의 뜨인 시야를 가득 메웠다. 

“······.” 

공천립의 정신은 그 충격에서 쉬이 헤어나오질 못했다. 

쿨럭- 

가슴을 간단히 꿰뚫은 검극이 귀빈실의 벽에 틀어박히자, 칼스가 몸을 떨며 조용히 토혈했다. 

그의 깔끔한 와이셔츠는 찢어져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늘상 쓰고 다니는 얇은 안경테는 부러져 한쪽 귀에만 걸려있었다. 

공천립은 전의 상황을 채 보지도 못했다. 허나 시간상 한 합 이상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칼스의 가슴에는 이미 검이 깊숙이 박혀있다. 

말인즉, 8레벨의 칼스조차 일초지적이라는 뜻. 

‘······저, 저 젊은 놈이, 그리도 강하단 말인가.’ 

쿨럭- 

핏줄이 잔뜩선 채 파르르 떨리는 칼스의 목덜미. 

“······.” 

“······.” 

순간,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원망이 가득 담긴 칼스의 눈이 공천립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그의 두 팔은 힘없이 밑으로 늘어졌다. 공천립이 지닌 극독에는 강력한 마비독까지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8레벨급이니 전신으로 침범하는 독기를 어찌 틀어막고는 있겠으나, 빠르게 해독하지 못한다면 불행한 최후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공천립은 이 상황이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으나, 최대한 정신을 다잡고 말했다. 

“이제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 

“끄아악!” 

그순간, 칼스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검을 붙잡았다. 레반이 칼스를 꿰뚫은 검을 잡아 그대로 치켜들었기 때문이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 칼스가 연신 비명을 질렀다. 검을 붙잡은 그의 손이 빠르게 거뭇해지며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공천립이 눈앞의 광경에 말도 꺼내지 못하는 사이, 레반이 한쪽으로 손을 뻗어 마력을 방사했다. 

우르르르— 

그러자 여덟 개의 목함과 고독 유충들이 딸려왔다. 

“······.” 

공천립은 그저 경악하며 그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레반이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자 목함들이 딸깍 열리며, 청량한 향이 뿜어져 나오는 영약이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레반이 다시금 손가락을 움직이자, 고독 유충들은 청량한 향을 뿜는 영약이 제 집이라는 듯 꾸물대며 기어들어 갔다. 

레반은 그렇게 만든 영약 하나를 집어 칼스의 굳게 닫힌 입에 갖다댔다. 레반은 여전히 희미하게 웃으면서도, 무심하게 말했다. 

“몸에 좋은 영약입니다. 이거 다 줄 테니, 먹고 일합시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칼스는 짓씹듯 뇌까렸다. 

“······당신 대체 뭡니까. 내게 어떤 억하심정이 있기에 이러는 겁니까.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은데, 나는 상선의—” 

콰직! 

“꺼억······!” 

레반이 가슴팍을 꿰뚫은 검의 궤적을 돌렸다. 끔찍한 격통이 일어도 칼스는 이제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그대로 심장이 도려질 것만 같았다. 

“내가 하라고 하면, 그냥 따르면 되는 거야.” 

“!” 

레반의 그 말에, 칼스는 잠시 굳어있다가 크게 놀라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저 문장은 자신이 매일같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하라고 하면 따르라. 네게 선택권은 없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흩어진 정보들이 조합되어 갔다. 

“자, 잠싯···!” 

마비독이 점점 퍼져가니 혀가 꼬이고 눈 앞이 뿌옇게 흐릿해졌다. 

칼스는 그런 와중에도 다급히 입을 열어 말했다. 공천립을 원망하는 것은 저 뒤로 미뤄놓았다. 그는 성공한 기업가. 상황판단이 느리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여덟 개 목함에 영약, 그때 루베르겐 집행관을 따라갔던 녀석과 관련이 있으시겠군요. 거기서 어떤 말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우리 쪽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능력 있던 직원이 죽었단 말입니다.” 

“그것 참, 한심해 보이는 궤변입니다.” 

“······?” 

희미하게 웃던 레반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이내, 레반은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때는 궤변이라도 궤변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궤변으로 들려.” 

[ 첫째, 발할라로 보내줄 것. 둘째 중급의 영약을 내어줄 것. 셋째 연방군의 무기들을 가져다줄 것. 마지막으로 토사구팽하지 말 것. 여기서 첫째를 빼고는 나머지는 모두 지켜졌다. 그리고 첫째 요구 조건에서 발할라행의 기한을 따로 명시하지 않았으니, 상선이 네게 어긴 것은 아직 단 하나도 없지. 내 말에 틀린 부분이 있나? ] 

과거 칼스가 내뱉었던 그것은 궤변이었다만. 

원래 힘 있는 자의 궤변은 궤변이 아닌 법이다. 

그렇기에 칼스의 저 말은 궤변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레반이 하는 말도, 궤변이 아닐 것이었다. 

“이독제독(以毒制毒)이라고, 독 때문에 친씨아 따라가기 전에 얼른 먹어봅시다. 몸 상태가 호전될지도 모르니.” 

“······!?” 

“나를 믿어요. 고독은 몸에 좋습니다.” 

레반의 그 괴상한 말과 동시에. 

고독 유충이 파고든 여덟 알의 영약이, 고통으로 가득찬 칼스의 입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 * * 

다음날. 

사천당가 발두르 지부의 귀빈실. 

“보인다! 보여! 들린다! 들려!” 

그로부터 하루가 더 지나자, 주머니에 고이 넣어두었던 앵무새 법기에서 종후표가 깨어났다. 

며칠 내로 말을 시작할 거라던 언평 선생이 말 그대로였다. 

다음 순간. 

귀빈실 안에서 신나게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다니던 종후표는, 내게 지금까지 일어난 상황들을 모두 전해 듣더니 부리를 열었다. 

“그러니까, 저 상선의 전무인 칼스라는 놈은 고독유충을 여덟 마리나 퍼먹었고.” 

“음.” 

“저 공천립이라는 놈한테는 마법으로 저주를 새겨 두었다고? 꼴을 보니 고문도 좀 했나?” 

“적당히.” 

“허어······.” 

기함한 종후표가 산송장이 되어 늘어져있는 칼스와 공천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은 토혈을 많이 해서 기력들이 하나같이 쏙 빠진 상태였다. 

나는 최대한 살살 다루었는데, 워낙 사내답지 못한 자들이었다. 

잠시 뒤. 

그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종후표가 대수롭잖게 말했다. 

“그러면 뭐, 여기서 잘 빠져나가기만 하면 이 둘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겠군.” 

“나가는 거야 간단한 일인데, 다른 것이 고민이다.” 

“다른 것?” 

“엮여있는 놈들이 꽤 많다. 오래전부터 상선과 끈적하게 결탁해 뒤를 봐주는 정치인들이 있어. 복잡해서 그냥 죽여버릴까 싶다.” 

헌데. 

헹- 

그런 내 말에 종후표는 크게 코웃음을 치더니······ 

제 날개로 콧구멍을 여유롭게 후비적대며 낄낄댔다. 

“이깟 변방 정치판이 끈적해 봐야 얼마나 끈적하다고. 그냥 이 종후표가 일러주는 대로 해라. 상선을 네 것으로 만들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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