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149화 (149/157)

#149화. 화를 자초했다

#149화. 

기이잉······. 

작은 환풍기가 덜컹대며 돌아가는 소음. 

음료 진열대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냉기. 

신상품 마약 광고판에서 일어난 불빛이, 적막이 내려앉은 편의점 내부를 비추었다. 

나는 낙천적인 얼굴로 클로에의 대답을 기다렸다. 

“······.” 

클로에는 륭의 칩이 걸려있던 부분을 응시했다. 

그녀는 사라진 인격 메모리칩의 행방을 묻지는 않았다. 그러다 손을 쭉 뻗더니, 륭의 검집을 만지작 거렸다. 

클로에의 입은 오래 걸리지 않아 열렸다. 

“레반, 괜찮다면 나한테 며칠만 줄래요?” 

“크게 고민할 거리가 있나봅니다.” 

그러자 클로에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아뇨?” 

동료들을 잊지 못해 떠나버린 못난 사내 륭. 그를 눈 앞에서 잃고, 나와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그날처럼. 

다음 순간, 클로에는 씩씩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리 돈 많은 과부라도, 주변을 정리할 시간은 필요하지 않겠어요?” 

이제 클로에는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고민이 아니라, 떠나기 전 주변을 정리할 시간을 달라기에 그리 하라했다. 고작 며칠 정도야 넉넉히 기다릴 수 있었다. 

“잘 생각 했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애초에 나는 대답을 밤새 기다려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왔다. 그렇기에 클로에의 이른 대답이 더욱 반가웠다. 

안 그래도 이곳 발두르에서 반드시 해야할 일이 남아 있었는데, 클로에의 대답을 서둘러 받아냈으니 약간의 여유가 있을 듯하군. 

클로에는 과거 레나와도 결이 척척 맞던 여인이라 곁에 두어도 좋고, 괴상한 공법을 대성한 탓에 가끔씩 마기가 몰아치는 언평 선생의 정신머리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잘 안 되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저 그래주길 바랄뿐. 

클로에가 말했다.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나는······정말 생각도 못하고 있었네요. 그런데 나를 어떻게 찾았어요?” 

“솜씨 좋은 해결사를 풀었습니다.” 

“으으, 우리 해결사 얘기는 하지말죠.” 

클로에는 해결사라는 단어가 나오자 쓴웃음을 짓고는, 까치발을 들어 카운터의 선반을 열었다. 선반 안에서는 산뜻한 차 향기가 풍겨왔다. 

“따뜻한 차 한잔 하고 갈래요?” 

“그럽시다.” 

곧. 

나는 차를 한 잔 얻어 마시고는, 클로에가 있던 편의점에서 빠져나와 발이 닿는 대로 향했다. 그녀가 괜찮은 차를 대접해주어 입안에 산뜻한 차 향이 감돌았다. 

발두르 중심업무지구나 슬럼가가 아닌, 평범한 계층이 살아가는 소도시의 퍽퍽한 정경을, 또 바쁘게 움직이는 주민들을, 사고가 나서 거꾸로 전복되어 있는 차량을 눈에 담았다. 

발두르 시티에 도착한 지 이제 이틀인가. 

십여 일 뒤에 딜런과 다시 회동을 가지기로 약속을 해두었으니, 그 전까지 모두 해결하고 돌아가면 되겠군. 

하여튼 나는 발두르 시티에 처음 온 외지인마냥, 여기저기를 정처없이 걸어다녔다. 나는 말보다도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사내지만 가끔 천천히 걷는 것도 좋았다. 무작정 걷다보면 복잡했던 생각들도 정리되기 마련이니. 

그렇게 한 시간쯤을 걸었을까. 

“저, 형님.” 

“왜.” 

묵묵히 따라오던 루돌프놈이 문득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방금 갑자기 생각난 건데, 저희 발두르 시티에서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되는 겁니까?” 

“상관없다. 마스크 썼잖아.” 

“······.” 

나는 요새 또 영웅 취급을 받아 재차 주가를 올리고 있다보니, 누군가 알아볼까 싶어 클로에의 편의점에서 적당한 마스크 하나를 들고 나왔다. 

원래 이 세상의 공기질이 탁하고 좋지 못한 탓에, 기관지가 예민한 주민들은 마스크를 달고 살았다. 

그러니 주변과의 위화감은 딱히 없을 것인데. 

하지만, 루돌프놈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제가 그걸 말하는게 아니잖습니까. 모르시겠어요?” 

“돌프야, 너는 뭐가 그리도 매일 불안하냐.” 

“그 새끼들 기억 안나십니까. 생선.” 

“생선이 아니라 상선.” 

“예!” 

상선. 

돌프놈의 주둥이에서 상선이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산뜻하게 입 안을 감돌던 클로에의 차 향이 씻은듯 사라졌다. 그러니 이제 슬슬 그만 걸어도 좋을 것 같았다. 

“형님, 하여간 알고 있으시면서 왜 신경을 안 쓰세요. 저번에 집행관 덕에 살아 나와서 그렇지, 걔들이랑 감정 안 좋잖아요.” 

그간 발두르 시티에 오지 않은 이유는 여러가지다. 

일단 첫 번째는, 루베르겐 집행관을 따라 마탑이 있는 발할라로 떠난 후부터 많은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굉장히 바쁘게 움직여야 했고, 시간은 유수처럼 흘렀다. 

중간에 따로 시간을 낼 여력이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다음은, 친씨아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화물 운송조합 ‘상선’ 과 엮여있는 악연이다. 

상선. 

발두르 시티에서 가장 오래된 협동조합. 

메가콥과는 비교할 수 없겠으나, 그래도 발두르 한정으로는 대기업과 비견되거나 혹은 그 이상이다. 

시티 화물의 무려 30% 가량을 책임지는 곳이자, 발두르의 정치 권력자들과 결탁해 일감을 몰아받는 놈들. 어떤 방식으로든 시티 전반에 영향력을 끼치는 대형 집단. 

자금력도 대단해서 독자적인 무력집단도 보유하고 있다. 친씨아같은 직원들을 발두르 이곳저곳에 널리 퍼뜨려놓고 뒷구멍으로 해먹는 짓들도 서슴없이 한다. 

상선과 결탁한 정치권의 묵인아래, 연방군의 무기를 암시장으로 빼돌리던 그들의 행각이 상대쪽 정치권의 귀에 들어가게 되자, 죽어도 되는 히트맨들을 대거 구인했었다. 

당가로부터 한창 쫓기던 중인 2년 전의 내가 강제로 발탁당한 히트맨 중 하나였고······ 

그때의 나는 잘 쳐줘야 6레벨 수준. 

떠올리기로 절정 경지도 못 되었다. 놈들 덕분에 얼얼하게 뒤통수도 맞아보고, 몇 번이나 죽을 뻔 했었지. 

“돌프야.” 

“예.” 

“마침 나도 그놈들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요? 안전 불감증은 아니었네요.” 

“상선도 나를 잘 아는 놈들 아니냐. 당가에게 쫓기고 있는 사실도 그놈들이 가장 먼저 눈치 챘었지. 아주 약삭빠른 녀석들이야.” 

“그거야 그렇죠. 발두르에서 먹어주잖아요. 제가 발두르 토박이 출신이라 잘 압니다.” 

“좋다. 그 칼스라는 놈, 오랜만에 보러 가자.” 

“?” 

우뚝! 

루돌프놈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말을 더듬었다. 

“······왜죠. 굳이 왜요?” 

“원래부터 갈 생각이었다. 말 나온 김에 가서 차라도 같이 한 잔 하고오자.” 

“형님, 그 새끼들이 삼호문처럼 허접한 놈들인 줄 아십니까. 어제 찾아간 벽제방보다 배는 더 빡센 새끼들입니다. 그냥 옛날 일은 추억으로 묻어두고 조용히—” 

“나 입 아프다.” 

“···가시죠.” 

내가 검집에 손을 올리자 루돌프놈은 곧장 설득을 포기해버리더니, 자포자기한 얼굴로 실실 웃으며 앞장섰다. 

그러던 루돌프놈이 고개만 슬쩍 돌려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갑니까?” 

“음.” 

나는 잠시, 그때의 추억에 잠겨들었다. 

상선의 칼스. 거너 하우스 친씨아의 상관. 

발두르 스테이션 근처의 대형 빌딩에서, 칼스 그자가 나를 사천당가에 밀고하겠다며 협박하던 때의 대화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 공 이사님. 저 칼스입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 ] 

[ 아닙니다. 대 사천당가를 저같은 놈이 걱정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반 바이오의 일로 본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그저 일의 진척이 궁금해 큰 결례를 무릅쓰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 

[ 아, 여즉 도망치고 있답니까? 관련해 듣기로는 장부를 조작해서 억 단위 크레딧을 빼돌렸다는 얘기까지 돌던데······화를 자초하는군요. 나중에 어찌 감당을 하려고. ] 

[ 예, 아무튼 조만간 모임에서 뵙겠습니다. ] 

눈 앞에는···몰래 고독 유충을 넣어둔 영약이 있었던가? 

화를 자초한 것이 누구인가. 나중에 어찌 감당하려고. 

그 대목을 되새긴 나는 금세 발걸음을 돌렸다. 

“사천당가, 발두르 시티 지부로 가자.” 

“예.” 

발두르 시티에서의 마지막 할 일을 마치러. 

* * * 

사천당가 코퍼레이션 발두르 지부. 

“크흠.” 

이사, 공천립이 긴장한 얼굴로 호흡을 가라앉혔다. 

공천립은 당씨 성이 아니니만큼, 당가의 직계가 아니다. 

그는 지금껏 수완을 인정받아 지부 임원의 자리를 꿰차고 있으나, 결국은 당씨들의 눈에 들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중년을 지나 장년을 향해 가는 연배. 앞으로 특별한 성과가 없다면 막강한 권세를 누려보지 못하고, 그저 평범한 임원에서 오랜 경력을 마무리해야할 처지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발두르라는 변방 도시로 밀려난 판에, 이곳에서마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못한 채 경력을 마무리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오늘. 

공천립에게 다시는 없을 기회가 주어졌다. 

‘······연방의 영웅이라.’ 

발두르 지부에 대단한 귀인이 나타난 것이다.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이 끝난 뒤, 소가주의 보은패를 받아간 사내. 그를 모르는 이는 당가 내에 없을 정도다. 

레반. 

실로 흔해빠진 이름이었으나, 최근 가장 연방에서 화제가 되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레반이 발두르 지부를 찾아와, 당가의 발두르 시티 지부장. 그러니까 무려 당문의 직계를 물려버리고 공천립을 택해 담화를 나누고 싶다며 요청을 해왔다. 

아무래도 그는 나이가 젊으니, 나이 많고 무림의 대선배가 되는 당가의 직계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으리라. 

“흠.” 

품속에서 고급진 명함을 꺼내려던 공천립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내 그것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자는 이미 당문의 직계와 연이 있을 것인데, 실수할 뻔했군.” 

그러던 때. 

바깥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그의 귀로 들렸다. 

당가 발두르 지부에서 귀인들만이 쓸 수 있다는 호화 접객실. 공천립은 칼칼한 목을 가다듬고 귀인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덜컥. 

“먼저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반갑습니다.” 

문이 열리자 한 젊은 사내가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이자가 레반이군.’ 

행동거지가 거침없는 것이, 듣던대로 의기가 대단하고 인물이 훤한 사내였다. 바깥으로 내비치는 기세 또한 지극히 강대하여 공천립의 고개가 자동으로 숙여졌다. 

공천립은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사천당가의 공천립이라고 합니—” 

“여기서도 고독(蠱毒), 구할 수 있죠?” 

“······?” 

갑작스러웠다. 

그것은 수십 년간 당가 밑에서 일한 공천립으로서도 실로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시작부터 쉽사리 키울 수도 없고 취급도 힘든 고독을 구할 수 있냐니. 

본래대로라면 단호하게 거절을 해야했다. 

허나, 공천립은 이 기회를 놓칠 마음이 없었다. 

진작에 당가의 보은패까지 받아갔던 인간이다. 보은패마저 내주었을진대, 무엇을 더 내준다 해도 문제가 되겠는가? 

게다가······. 

“예, 고독(蠱毒) 유충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씨익- 

고개를 숙인 공천립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발두르 지부에서 고독 유충을 담당하는 인물이 바로 공천립 본인이었기에. 

‘다시 없을 천운이구나.’ 

공천립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들어갔다. 

“만약 귀인께서 원하신다면—” 

“공 이사님, 칼스라고 알고 계십니까?” 

“?” 

점점 대화를 나눌수록 공기의 흐름이 이상해졌다. 

무언가 당가 지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든가, 아니면 특별히 알아볼 것이 있다든가. 뭐 그런 것이 정상 아닌가. 

고독이 있냐 묻더니, 칼스를 왜 찾는 것이지? 

하지만 공천립은 잡념을 지우곤 공손히 대답했다. 

“혹, 운송조합 상선의 전무인 칼스를 말씀하시는지요?” 

“예.” 

다행히도 칼스는, 그가 충분히 잘 알고있는 자였다. 

발두르 시티 내에서 돌아가는 여러 개의 상류층 모임이 있는데, 공천립이 소속되어 있는 모임의 주최자가 바로 그 칼스였으니. 

발두르 시티에 뿌리내린 거대 운송집단. 상선의 일을 도맡아 하는 상계의 거물. 

공천립은 그와 인연이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기며 은근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이 공가는, 공교롭게도 그 칼스 전무와 오랜세월 연을 이어오고 있습······” 

“그분, 이리로 좀 불러볼 수 있겠어요?” 

“가능할 것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면······.” 

“내가 부른다는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흠, 그렇다면 쉽지 않겠으나 제가 힘을 써서 한 번 기별을 넣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그리고, 공 이사님.”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키우는 고독 중에 가장 독한 놈으로 여덟 마리, 그리고 영약 단환 여덟 알 준비해달라고 일러줘요.” 

”······?” 

그 말까지 마친 젊은 사내. 

레반은, 탁자 위에 기다란 검집을 끌러놓았다. 

쿵··· 

무거운 검집이 탁자 위에 둔탁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상황이 이쯤 되니, 저자세로 일관하던 공천립도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확실히 눈치챘다. 

‘왜지? 분위기가 심상찮다.’ 

분명······당가의 은인이자 연방의 영웅이라 하지 않았나? 

당가의 직계인 지부장은 굉장히 철저한 인간이다. 

먼저 지부장을 보고 내려왔을 터이니, 신원은 확실할 것인데. 

그러니 신원은 확실하다.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공천립의 예민한 오감은 격렬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허면, 준비해오겠습니다.” 

어딘가 수상한 기색을 느낀 그는 천천히 엉덩이를 일으켜 세웠다. 

‘지부장께 아뢰러 가야겠군.’ 

일단 준비해 오겠다는 핑계를 대었으니, 나가서 조금 더 알아볼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그러나. 

멈칫— 

“!?” 

엉덩이를 떼려던 공천립이 돌처럼 굳었다. 

그의 사지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 힘이 들어가질 않는 상태였다. 귀빈의 접객실이라는 공간 안에, 서늘한 칼날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듯했다. 

이윽고, 공천립이 벌벌 떨며 억지로 고개를 들자. 

“······.” 

“바쁘세요?” 

눈 앞까지 다가와 얼굴을 들이미는 레반이 보였다. 곧이어 레반은 공천립이 허리춤과 품 속에 넣어두었던 암기와 극독들을 탁자에 주르륵 꺼내 놓았다. 

부욱—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공천립의 옷가지를 부욱 찢더니, 그 옷가지에 꺼낸 극독을 덕지덕지 발라 광선의 날에 도포하기 시작했다. 

공천립은 기이한 분위기와 기세에 감히 입을 열지 못했고. 

그렇게 벙어리가 된 공천립 앞에 앉아, 광선의 곧은 검날에 극독을 묻혀 쓸어내던 레반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불러요.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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