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돈만 많은 과부
#148화.
나는 루돌프놈과 발두르 땅에 내려섰다.
회사를 세우기로 결심했으니, 내게도 잡무를 도맡아 하며 부릴 수족들이 필요했다. 고작 일곱 개밖에 없는 도시라 해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참으로 복잡하고 귀찮은 일들이 많은지라.
문제는 신뢰할 만한 놈을 구해야 한다는 것.
지금껏 많은 인연을 차곡차곡 쌓아왔으나, 어느정도 수준이 높은 이들은 각자의 울타리에 깊게 몸을 담고 있어 무 뽑듯 빼 올 수 없다. 화산그룹이 다른 세력의 손에 청풍을 넘겨줄 리는 없듯이.
그리고 안드로이드 같은 기계들은 쉬이 신뢰하기도 힘들고 껄끄럽다. 그나마 정을 쌓아온 아힘사와 루벤카의 시종인 메리 정도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결국은 내가 잘 알고 있는.
더해서 ‘나’ 를 잘 알고있는 놈들이 필요했다.
돌고 돌아 나의 첫 번째 도시. 빌어먹을 발두르 시티.
오랜만에 찾은 도시에서 첫 행선지는 웨스트 정크타운이었다.
쾅!
그렇게 기억에 있는 삼호루를 찾아 들어갔고,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고 있는 현장을 적발했다.
“!?”
저 동네 한량같은 여량천은 삼호문주 등평위의 일대제자로, 삼호문 내에서 입지가 아주 공고해 대사형쯤 되는 위치에 있는 사내놈이다.
밖에서 설핏 듣기로 무슨 대협이라고 불리던데···.
상판대기가 허예진 게 요즘 살판 난 듯 보였다.
나는 나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간 잘 있었냐. 량천아.”
“그······.”
놈과 마주 앉자마자 경계하는 눈빛과 함께 독한 술냄새가 확 풍겨왔다. 아무리 내가 정크타운을 떠난지 일 년이 넘었다지만, 수련할 시간도 모자라야 할 놈이 술이나 퍼먹고 있고.
“그나저나 잘하는 짓이구나.”
“······.”
“사내치고 때깔이 고와. 벌써 이렇게 풀어졌니? 나는 량천이 네가 기녀인 줄 알았어. 혹시 무인에서 무희로 전직이라도 한 거냐.”
“······.”
놈이 주제도 모르고 처먹던 고급 위스키를 내 목구멍에 다 퍼부어버리고 묻자, 놈은 똥 씹은 표정에서 혀 씹은 표정이 되었다.
여량천은 제 혀를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꿈인가?”
“이게 꿈 같니.”
“아, 아닙니다. 그런데······다시는 돌아오시지 않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 누추한 정크타운에는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왜, 내가 찾아오면 안 돼? 갑자기 속이 불편하니?”
“아닙니다! 세상에 맹세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안 불편해?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니까 삶이 즐겁고 행복하구나.”
“······.”
“대답을 해봐.”
숨 돌릴 틈 없이 몰아치는 따뜻한 질문 세례에, 여량천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대답했다.
“오해입니다. 제, 제가 평소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수련했습니다. 우연하게도 오늘이 달에 유일하게 쉬는 휴무날이라서 고기도 먹고 술도 먹고······.”
“돌프야. 이 친구 이거 어떻게 하지?”
“아, 예.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정신을 못 차리네요. 제가 얘기를 잘 해보겠습니다.”
“수, 술을 많이 마시다니. 이제 딱 석 잔 먹었습—”
콰장창!
루돌프놈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테이블을 거칠게 치웠다.
“닥쳐라 이놈! 무인이라는 새끼가 한 달에 한 번씩 치팅데이를 챙겨 무슨. 형님, 무릎부터 꿇릴까요?”
“그래도 사내인데, 쉽게 무릎을 꿇으면 쓰나.”
“······.”
여량천의 쩍 벌어진 입이 닫힐 줄을 몰랐다.
“이, 이놈은 뭐······.”
놈은 살기를 품은 루돌프를 보고서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아직 경지가 부족한 놈에게는, 시체와 사람의 기운이 섞여 기괴한 존재로만 다가올 것이었다.
뻐억!
아무튼 루돌프놈은 즉시 취한 여량천을 집어들고 가차없이 두들겼다. 여량천은 대낮부터 퍼마신 술을 전부 게워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후다닥 튀어와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내가 무릎 꿇은 놈을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자, 여량천은 굉장히 다소곳하게 자세를 바꿔 앉았다. 마치 바위에 올라와 있는 인어를 보는 듯했다.
쿵!
인어가 된 여량천이 기백있게 머리를 박았다.
“살려주십시오! 제가 인사불성으로 취했었나 봅니다! 그건 제가 아니었습니다.”
술을 좀 처먹긴 했지만, 여량천의 기도는 일개 양아치와 비슷했던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아마도 그간 어디서 찌꺼기급이나 최하급의 에센스라도 구해 먹은 모양.
삼호문의 중역인 일대제자이니, 등평위가 투자를 해주었나보지.
“그래. 앞으로도 잘해야지 량천아.”
“지, 지금 나가서 바로 수련 시작하겠습니다.”
“아니다. 오늘은 괜찮다. 그래도 약속한 크레딧은 매번 따박따박 송금했다 들었으니. 나는 배은망덕한 놈들을 가장 싫어하는데, 그래도 얄팍한 의리는 있구나.”
“······아, 그렇습니까. 기본입니다. 하하.”
“하기야 너희 문주가 워낙에 분별있는 사내라 꾸준히 보낼 줄은 알았다. 밑엣 놈들이 돈 아깝다며 개지랄은 안 했을런지.”
“······.”
꼴꼴꼴-
나는 나머지 위스키 한 병을 순식간에 비웠다.
술이 잔뜩 들어가 취기가 오르니 행동거지가 조금 더 단순해질 수 있었다. 나는 당황한 채 돌처럼 굳어있는 여량천을 향해 말했다.
“유천검법, 펼쳐봐라.”
“···예!”
유천검법.
과거 중원무림에서 익혀온 일류 검법으로, 과거 삼호문에 내려준 검법이다. 절정 경지 이상의 무인에게는 큰 감흥이 없는 검법일지 몰라도, 밑바닥에 깔린 무인들에겐 실로 과분한 무학.
주향으로 가득찬 방 안에서.
스아악!
검극에 맺힌 서늘한 예기가 공간을 양단한다. 일류 경지를 대표하는 유형화된 기가 검을 따라 약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최소 5레벨급의 무인이라는 뜻.
익히는 속도가 빠르고 효과적인 무학들을 한움큼 쥐어 던져주었으니 발전이 빠를 만도 했다.
물론, 내 눈에는 차지 못하나···
그거야 쥐잡듯 잡아서 차차 고쳐놓으면 될 일.
‘짧은 시간, 이룬 성취는 괜찮군.’
나는 초식을 펼치게 한 의미를 몰라 의아해하는 여량천놈에게 물었다.
“그 검법은 익힐만 하더냐?”
“예, 손에 척척 잡혀서 아주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심법이나 보법은 어떠냐.”
“그것 역시도 대단히 좋습니다. 있으나 마나했던 단전도 확실히 금세 채워져서 묵직해졌고, 굳어있던 몸과 정신이 새로 트이는 기분입니다······만, 왜 그러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과연, 무공을 접한 경험이 없는 이들도 익힐 수 있겠더냐.”
“······죄송하지만, 그것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쯧. 삼호문주 어디있냐? 안내해라.”
나는 곧장 기루에서 나와 등평위를 찾아갔다.
삼호문의 본문 장원은 최근에 다시 지었는지 꽤 고급지며 위엄이 넘쳤다.
여량천을 따라 곧장 본문 안으로 들어가니.
“문주님, 접니다!”
“그 돈은 죽어도 보내야 한다고 말했잖냐!”
“······그, 그게 아니라 손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지금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다니까 왜 자꾸—”
등평위는 그의 말대로 꽤 바빠 보였다.
여기저기 파묻힌 서류들과 더러운 테이블, 엎질러진 커피.
쿵!
하지만 그는 애초부터 처세와 눈치가 대단한 사내라, 내가 여량천을 따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무언가를 느끼고는 입을 딱 닫았다.
이윽고, 등평위는 다짜고짜 대가리를 땅에 박으며 절을 올렸다.
“······돌아오셨는지요.”
“그래.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었냐.”
“대협이 떠나신 뒤로 꾸준히 정진해 작은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한 보씩 정진해 깨달아 갈수록 더 대단한 무공이었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무공을 익히던 놈들이라 그런가 성취가 빠르구나.”
“다들 재능은 일천합니다. 전부 내려주신 무학의 수준이 뛰어난 덕이 아닐까 합니다.”
삼호문주 등평위는 제 능력을 살려 정크타운을 꽤 효율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느껴지는 기도로 보아 성취도 거의 절정에 가까울 것이다.
발두르에서도 최악이라고 일컫는 서쪽 변방의 정크타운에서 저 정도의 무력을 지니고 있다면 딱히 반기를 들 세력도 없겠지.
“일단 밖으로 나가서 천천히 걷는 게 어떻겠습니다. 집무실이 조금 더럽습니다.”
“지금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전혀 아닙니다. 대협께서 오셨는데 바쁜 게 대수겠습니까.”
“그러자 그럼.”
나는 등평위를 따라 삼호문 바깥으로 나왔다.
등평위는 정크타운을 산책하듯 걸으며, 그간 삼호문이 집어삼켰거나 도맡아 운영하는 곳들을 돌아다니며 내게 소개했다.
이제는 정크타운 전체가 삼호문의 손아귀에 있었다.
나는 동양식 기루와 온갖 주점, 클럽, 골패 노름판, 비무 도박장등을 거닐며 하나씩 구경했다.
술기운을 일부러 날리지 않아 적당히 비틀대는 발걸음이었다.
그러자, 성큼성큼 앞서가며 정크타운을 뱅뱅 돌던 등평위가 조심스레 물었다.
“대협, 혹시 따로 필요한 것이 있으신지요?”
“왜. 내가 저것들을 다 빼앗아 갈까 불안하냐.”
“그 무슨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신지. 삼호문이 이루어 낸 게 아닙니다. 또한 절정의 벽에 가까이 와있어도, 대협의 무위는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어 놀라울 뿐입니다. 대체······.”
“문파에 특별한 일은 없고?”
“아, 그것이······.”
등평위는 잠시 고심하나 싶더니 금세 답했다.
“문파가 점점 커지면서 의도치 않은 분쟁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 상대가 벽제방이라고, 발두르의 무림계 중견기업입니다. 정크타운은 뭐 잡아먹을 것도 없는 쓰레기동네라 지금까지 크게 신경을 기울이지는 않았을 것인데, 어떤 연유로 마음을 고쳐먹은 듯합니다. 계속 자신들의 밑으로 들어올 것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등평위의 말을 듣자하니, 이유가 있는 듯했다.
이전에는 집단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더러운 진흙탕을 뒹굴어야 했으나, 현재는 정크타운의 유일한 세력인 삼호문만 자기 휘하에 두면 고혈을 효과적으로 빨아먹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정크타운 거너하우스 총포상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상선’ 소속의 친씨아도 죽었겠다, 삼호문을 제외하면 신경쓸 것이 없겠지.
그리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비무 도박장.
“그런데 등평위야.”
“예.”
“놈들이 원하는 게 정말 크레딧 같으냐?”
나는 정크타운치고는 나쁘지 않은 비무를 구경하며 물었다. 처세로는 어디가서 빠지지 않을 위인인 등평위가 아무렇게나 싸움을 걸어댔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여.
곧이어 등평위가 쩔쩔대는 기색으로 답했다.
“그것이······제가 생각하기에는 대협께서 내려주신 무공인 듯합니다. 요즘 정크타운이 먹고살만해졌다 해도, 여기서 얻어갈 크레딧이라고 해봐야 그들이 가진 금력에 비견이 되겠습니까. 푼돈을 만지려고 흙탕물에 손을 뻗지는 않을 겁니다.”
“맞다. 무언가를 봤으니 이딴 동네에도 기웃거리겠지.”
“······삼호문의 행사가 신중하지 못했나 봅니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대협.”
“됐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뒤,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라그나로크 시티에 기업을 하나 세우려 한다.”
“예, 대협께서 원한다면 당연히 세우셔야지요. 혹여 잡일을 할 수족이 부족하지는 않으십니까.”
등평위는 그런 내 의도를 단번에 파악했다. 입 안의 혀처럼 구는데 도가 튼 놈이다. 쓸데없이 대가리만 굵어져서 술이나 퍼먹고 있는 여량천 놈보다 월등히 낫지 않은가.
“그래, 하인으로 부릴 놈들이 필요하다. 입 무거운 놈이면 좋고. 너희 삼호문의 이름과 세력은 유지하되 내 산하의 무력조직인 걸로 하자.”
“어찌 부족한 저희를 이리 거둬주시는지 모를 일입니다. 제가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등평위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것으로 삼호문의 포섭을 끝냈다.
그리고는 비무 도박장을 나서며 마지막 선수로 나온, 박치기공룡을 보았다.
과거 까불다가 몇 대 두들겨 맞고 조용해졌던 은소라는 녀석이다. 저번보다 나이를 먹어 그런지 이제는 제법 여인의 태가 났다.
“큭큭.”
“?”
헌데 정말 박치기로 싸우기라도 하는 건지, 이마빡이 사과처럼 벌건 게 자동으로 실소가 흘러나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내가 등평위에게 물었다.
“등평위, 그 벽제방인가 하는 곳이 어디 있다고?”
나는 직전에 쇠뿔도 단김에 뽑기로 다짐했다.
헌데 심지어, 지금은 위스키에 잔뜩 취한 상태.
그러니, 독한 술에 불콰하게 취한 사내는 쇠뿔 말고 코끼리 상아라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 * *
나는 술을 마신김에 발두르의 업무지구까지 내달렸다.
기감을 빌딩 사이로 넓게 펼쳐내자, 이전에는 잘 느껴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피부로 와닿았다.
드높고 화려하게 솟은 마천루 빌딩 숲 사이로,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강력한 기세들이 군데군데 숨어있었다. 면적이 가장 작은 도시지만 속알맹이는 꽤 알차다.
발두르 시티 중심업무지구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자 기세가 흉흉한 곳은, 무당 코퍼레이션의 초고층 전각이었다. 짙은 형광 빛깔을 사방으로 뿜어내는 초고층 전각의 장엄한 풍경. 창을 하나 두고 풀풀 풍겨오는 기세들이 하나같이 날카롭고 강맹했다.
“음.”
흥을 조금 냈다만 도시 위에 군림하는 그들의 체면을 조금은 세워주어야 하므로, 입맛을 다시던 나는 취기와 함께 풀풀 내뿜던 기세를 적당히 조절했다.
그때, 저들도 내 체면을 조금이나마 생각해주기로 했는지 전각의 창 바깥으로 몇 개의 신형이 뛰어올랐다.
탓.
수백 미터 높이의 고층전각에서 뛰어내려 사뿐히 내려선 세 명의 고수들. 그들의 도복이 잔바람에 부드럽게 펄럭였다.
가장 나이가 지긋한 노고수가 말문을 열었다.
— 무슨 까닭으로 기세를 흘렸는지 알고 싶네.
그 물음은 정중했다.
나도 정중히 대답했다.
“술에 취해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모양입니다.”
— 옆에 있는 괴이도 자네의 동행이 맞는가?
“예.”
— 허면 자네의 뒤를 밟는 저자는 무엇이지?
나는 무당 노고수의 말에 뒤를 돌아봤다.
밝게 빛나는 건물 조명 아래, 기이한 사내가 오도카니 이쪽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카스트라 뷔에탕, 그 스토커가 붙여놓은 인형이다.
그렇기에 나는 적당히 헛기침을 하며 모르는 척 답했다.
“저를 남몰래 흠모하는 여인이 있나 봅니다. 내버려 두십시오.”
— 혹여 검을 뽑아도, 크게 말썽을 피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야.
“그리하지요.”
내가 순순히 수긍하자, 일이 커지지는 않았다.
뒤이어 무당의 고수들은 쑥덕대며 저들끼리 전음을 나누나 싶더니, 드높은 전각으로 솟구쳐 사라졌다.
이윽고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등평위가 말했던 기업의 본사를 찾았다.
벽제방이라는 이름의, 중심업무지구 외곽 쪽에 위치한 무림계 중견기업. 대충 루돌프를 시켜 찾아보니 과거 반 바이오 컴퍼니보다도 기업 순위에서 한참 뒤쳐져있는 기업이었다.
본사는 30층이 약간 넘는 건물이었는데, 나는 건물벽에 기댄 채 기감을 펼쳐 가장 강맹한 기운을 풍기는 놈을 찾아 올라갔다.
마침 열린 창문 안으로 담뱃불을 붙이고 있던 양복차림의 사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스릉—
검을 어깨 뒤로 길게 늘어뜨린 내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 ······.
양복차림 사내의 움직임이 쥐죽은듯 멈추었다.
나는 열린 창틀 위에 대수롭잖게 걸터앉았다.
“다름이 아니고, 저 삼호문 태상문주입니다.”
— ······삼호문?
마른 붓처럼 빳빳하게 굳은 사내가 흠칫하더니, 이내 퍼래진 낯짝으로 담뱃불을 비벼 껐다.
치이익···.
행색으로 보나 기세로 보나 벽제방의 회장으로 보이는 그 사내는, 7레벨 끝자락쯤의 경지를 지닌 무인이었다.
발두르 시티 중견 기업의 회장, 벽제방주.
몇 년 전이라면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을.
곧, 그의 관자놀이에서 더운 땀이 흘러내렸다.
— ······무슨, 쓰레기나 퍼먹고 사는 삼호문 따위에 당신같은 태상문주가 어디에 있었단 말이오.
나는 식은땀을 흘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광선의 곧은 검신이 건물 외벽 조명을 받아 환하게 번뜩였다.
“삼호문에 관심이 많다 전해 들었습니다.”
— 이제부터는 아니오. 즉시 손을 떼겠소.
“그래요? 하면 이유가 뭐였습니까?”
— ······그들을 해하려던 건 아니었소. 어쩌다 접한 그들의 독문무공에 약간의 관심이 생겼을 뿐이오. 그런 슬럼가의 잡배들이 어디서 그런 무공을 배워익혔나 해서······.
“무공만 궁금하고, 해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 ······그것이.
“재수가 참 없지? 원래 사는 게 그래.”
— ······.
벽제방주가 뻘뻘대며 고개를 푹 숙였다. 멀끔한 양복단 위로 땀이 솟아나고, 적당히 꽂아둔 금색의 행커치프가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그는 죄인처럼 고개 푹 숙인 채 말을 이었다.
— 별 것 아닌 일로 고인(高人)께서 어렵게 걸음하시게 했으니, 이 후배가 어찌해야 조금이나마 화가 풀리시겠습니까? 일을 맡은 한 두 놈을 죽여서 바깥에 걸어놓는다면 노여움을 푸시겠습니까?
벽제방주의 흥건한 뒤통수를 보며, 내가 답했다.
“사람을 찾는다. 내일까지 찾아와.”
* * *
다음날.
발두르 시티에서 하루쯤 머무르자 벽제방에서 보낸 전령이 다급히 찾아왔다. 정중히 건넨 내용을 보니, 클로에를 찾았다는 얘기였다.
나는 어제의 취기를 말끔히 날려버리고 아이처럼 낙천적인 얼굴을 했다. 돈 많은 과부가 나의 사내다운 모습에 반하기라도 하면 참으로 곤란한 일 아니겠는가.
그렇게.
발두르 중심 구역과 외곽 사이.
평범한 서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소도시의 한 편의점.
익숙한 얼굴이 유리창 안쪽으로 보였다.
편의점 카운터에서 일을 보고 있는 클로에였다.
허나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클로에의 쓴 표정은, 마지막에 보았던 그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상처에는 시간이 약이라던데, 아닐 때도 있는 듯하다.
클로에는 분명, 발두르 고급 주거지역의 아파트를 살 수도 있는 돈을 가지고 떠났는데.
떠날 적에는 억지로라도 활짝 웃으며 떠나더니.
[ 사냥꾼으로 살다 사냥꾼으로 죽었으니 명복을 빌어야겠습니다. ]
[ 명복은 무슨, 크레딧만 잔뜩 남겨두고선 자기 여자를 팽개치고 가버린 사람인걸요? ]
[ 세상은 돈이 전부입니다. 한밑천 단단히 잡았으니 그 돈으로 잘먹고 잘살면 되겠군요. 돈 없는 과부보다 돈이라도 많은 과부가 처량함이 덜할테지요. ]
[ 그럼 레반씨도 과부 만들지 않게 조심하셔야겠어요. 혹시 PTSD나 정신병 같은건 없죠? ]
[ 누가 과부가 됩니까? ]
[ 레나요. 사무소에서 같이 지내는 동안 정이 꽤 들었었거든요. 청소도 매일 도와줬는데···. ]
그때의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
뭐, 언제나 긍정적인 재회만을 바랄 수는 없는 법.
나는 클로에의 앞까지 조용히 다가가 섰다.
“가져간 거금이 탐나서 이제야 찾아왔습니다.”
“······?”
클로에가 고개를 올려다보자,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한밑천 단단히 잡아놓고서 멀리 간다는 게, 고작해야 이곳입니까. 어디로 가는지도 알려주지 않고 언젠가 만나자고 시원하게 떠나더니.”
“······설마, 레반?”
“돈 많은 과부도 처량하긴 매한가지인가?”
툭.
나는 카운터에, 챙겨온 륭의 적색 검집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과거 클로에가 찾아온 륭의 검집으로 끝에 군번줄처럼 매달려 달랑거리던 인격 메모리칩이 빠져있는 상태였다.
“······.”
클로에의 시선이 물끄러미 그 검집 끝으로 향했고.
나는 클로에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날처럼, 낙천적으로 웃었다.
“이제 그만 처량하게 굴고, 같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