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대협
#147화.
“음, 메모리칩은 기존 기업들의 아성이 공고해서 쉽게 건들기가 쉽지 않은 분야지. 그 조건이 꼭 필요한 거냐?”
딜런은 입맛을 다셨다. 아쉽게도 메모리칩 관련 기업과 특별한 관계는 없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딜런과의 동업을 결정했다.
만약 가장 까다로운 메모리칩 문제가 물 흐르듯 쉽게만 풀렸다면, 나는 오히려 딜런을 의심했을 터이니.
막나가는 로키의 군벌이 그 보수적인 세력과 긴밀한 접점이 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였다. 그쪽 동네가 부패할대로 부패해 개차반이라는 뜻이니까.
“하자.”
“!”
그는 군말없는 결정이 흡족했는지 크게 반색했다.
“큭, 어쨌든 할 줄 알았다. 시기를 잘 탔어. 일약 유명세를 타서 명성이 높아질대로 높아진 애새끼와, 로키에서 병신짓이나 하며 연방 속 썩이던 마법사가 합자로 세울 합법적 회사. 훌륭하다! 연방정부도 감히 싫은 소리 못 하겠지.”
무려 9레벨 마법사가 하루아침에 둥지를 잃는 바람에 소속없는 자유 용병상태. 여러모로 망설이다 놓치기에는 아쉬운 전력이지 않은가.
황금빛 플라자 원탁에서의 첫 대면때 지랄맞았던 상황이 있긴 했으나, 이제는 같이 생사를 헤쳐온 마당에 과거의 충돌이 중요하진 않았다.
그리고 변절 거부에 더해서 제 부하들을 다 잃고도, 끝까지 도주하지 않고 자리를 지킨 딜런에게 약간의 신뢰가 생겨났다. 적어도 불시에 변절이라든지 하는 뒤통수 맞을 가능성은 희박하리라.
“기대해라. 몇 년 지나면 덩치가 몰라보게 불어나서, 적어도 라그나로크 시티 내에서는 모두가 우리를 우러러보게 될 거다.”
딜런은 뷔에탕과 본질적으로 같은 과인 듯했다.
‘흠······.’
막강했던 군벌이니만큼, 권력에 욕심이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들의 존경과 동경이 공포심과 두려움에서 기인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공포심 속에 섞인 존경. 두려움 속에 섞인 동경. 그런 것들에서 오는 만족감을 얻거나 권력, 인정욕을 채우는 부류.
그래도 야심가라면 한 번쯤 꿈꿔볼 만한 인생이군.
쾅! 쾅!
딜런은 그 솥뚜껑같은 손으로, 로비의 탁자를 쪼갤듯 내리치며 말했다.
“메가콥 놈들처럼 좆대로 행동하면서 크레딧도 갈퀴로 긁어모으고, 에센스도 마음껏 빨고, 이 병신같은 세상이 망하기 전까지 펑펑 쓰면서 살아보자고. 돈 벌면 쓸 곳이야 넘쳐나거든. 가상현실 게임에 돈을 처바르면 주먹질 한 번으로 대륙을 날릴 수도 있다던데. 큭큭.”
덧붙여 가끔 대화를 나누다 보면, 메가콥이나 대기업들에 대한 선망과 열등감도 언뜻 엿보였다. 딜런도 바보가 아니라 제 욕망을 숨기려면 너끈히 숨겼을 거다. 허나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목적과 욕망을 드러내는 점이 내게는 오히려 편하게 다가왔다.
만약 무림에서 태어났다면 사파나 마인들의 거두가 되어 정파무림과 대적했을 사내로군.
좋다.
내가 기업을 세우려는 이유와 딜런의 방향성은 서로 달랐으나, 각자의 이유로 서로를 필요로 하기도 했고, 중간 지점에서 겹치는 부분이 꽤나 많았다.
그렇지만.
“라그나로크 시티를 근거지로 한 최초의 메가콥이 탄생할 거다. 큭큭큭.”
······벌써 메가콥을 운운하는 걸 보면 좀 불안하군.
라그나로크 시티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아주 이곳저곳에 손을 뻗어 꿀만 빨아먹을 생각이 확고해 보이는데—
일이 잘 풀리면 한 도시를 주름잡는 대기업이 될 수도 있으나, 방향이 조금만 비틀리면 로키의 군벌이나 마피아처럼 적폐집단으로 취급받아 연방과 다른 세력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은 순식간일 터.
물론, 내가 무작정 딜런에게 전권을 맡겨두고 놀고 있지만은 않을 테니······딜런의 생각처럼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군벌세력을 십수년간 독자적으로 이끌어본 경험이 있는 딜런에게, 이 동업의 주도권을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경험 많은 9레벨의 마법사라면 마땅히 그럴 자격이 차고도 넘친다 해도, 어디까지나 그는 나의 조력이 되어주어야 하니까.
그때, 딜런이 내던 흥을 조금 죽이며 말했다.
“이제 마음껏 부릴 놈들이 필요하겠어.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갈 텐데, 우리가 그 잡다한 걸 직접 하기는 버거울 거다.”
“주변에 쓸만한 이들이 있나?”
“쓸만한 놈들이야 얼마든 있지. 돈만 쥐여주면 곧장 달려올 놈들이 한트럭이다.”
딜런은 연방 이곳저곳에 인맥이 꽤 있어보였다. 나보다 이 세계에서 훨씬 오래 살았고, 한 도시의 거물급 인사였으니 당연하다.
“로키쪽은 다 개박살났으니, 발두르나 프레이야 시티 쪽으로 알아봐야겠군. 능력은 있는데 어쩔 수 없이 숨죽이고 있는 인재들이 많지.”
“숨죽이고 있는 인재들?”
“철창신세를 지고 있는 병신놈들, 원한다면 꺼내올 수 있다.”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게 내버려둬라. 죗값은 치러야지.”
“아쉽군. 이름도 있고 능력도 확실한 놈들인데.”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딜런은 태생이 막가파 군벌인지라 그런지, 아무래도 음지에서 활동하는 자들과의 연대가 강했다.
‘기업 일에 눈이 밝은 사람이 필요하겠군.’
나는 커다란 기업을 운영해 본 경험이 딱히 없다.
뭐, 정 알고 싶다면 머리통에 기업인의 칩을 꽂아서 속성으로 익힐 수야 있겠으나, 내가 진짜 기업 회장을 해먹고 싶어서 회사를 세우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잡 정보들을 뇌에 집어넣을 여력도 없지.
허나 그렇다고 해서 딜런이 데려온, 지하세계의 유명한 범죄자들을 회사 고문이나 직원으로 떡하니 앉혀놓을 수는 없는 노릇.
그럴 바에 차라리 인공지능 시스템을 앉혀놓는 게 낫다. 인공지능 자체도 해킹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게 넌센스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들로 외부에서 해킹당할 위험이 없고, 내가 완전히 신뢰할 수 있으며, 기업 운영에 사리가 밝고 경험 있는 인력이 필요한데······
마침 딱 떠오르지 않는가.
내가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그리고 약 2년 전쯤만 해도 기업에서 업무를 맡아 보던 유일한 사람이.
‘레나.’
곧장 레나가 떠올랐다.
나는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딜런과의 동업을 결정한 뒤, 세부적인 사항의 조율은 뒤로 잠시 미뤄놓고 2주 뒤로 다시 약속을 잡았다.
“고생했으니 당분간은 쉬어라. 나도 필요한 준비 해놓고, 뒈진놈들 장례도 치러줘야 하거든. 나중에 다시 연락하지.”
딜런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떠나갔다. 밖에서 기다리던 두 명의 보좌가 그를 호위했다.
이제 나는 처리해야 할 과제들을 생각해냈다.
우선 레나.
때마침 공교롭게도, 레나와 자매인 루벤카가 왜인지 카산드라 교수 일행과 같이 발할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만나기도 참으로 쉬웠다.
지금, 내 앞에 도착했으니.
“야.”
털썩!
“방금 나간 그 남자. 장벽 밖에서 너랑 같이 싸우던 마법사지? 진짜 더럽게 무섭게 생겼네. 연쇄살인마가 분명해.”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찾아가기도 전에, 루벤카가 호텔에 있는 나를 곧장 찾아왔다. 루벤카는 후드를 눌러써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하지만 감추어도 그 절세의 미모를 다 감출 수는 없어서, 힐긋대는 이들이 로비 주변에 많았다.
나는 루벤카와 대화를 나누기 전, 마법으로 가볍게 장막을 쳤다. 주변의 소리와 기척들이 일거에 사라지며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그에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루벤카의 눈썹이 비틀렸다.
“······안 놀란다. 난 안 놀란다. 후우.”
내가 물었다.
“혹시 최근에 널 찾아온 남자 없었나?”
“남자? 연락처 따려는 쓰레기들은 있었는데, 지금쯤 다 병원에 드러누워있겠지.”
“다행이군.”
“다행이긴 뭐가 다행······야, 됐어. 너랑 알콩달콩 대화하러 온 건 아니니까. 웃어봐.”
“?”
뜬금없이도, 루벤카는 주섬대며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일회용 사진기였다.
“대충 활짝 웃어봐 빨리. 레나한테 사진 찍어서 갖다주기로 했단말야. 아 씨 이거 괜히 까먹어가지고.”
“······.”
“······.”
우리는 서로를 마주 바라봤다.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고, 루벤카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일회용 사진기를 내동댕이쳐버렸다.
콰작!
일회용 사진기가 처참하게 박살났다.
“시발, 그냥 좀 웃어주면 되잖아!!!!!!”
“금방 웃으려 했는데.”
“···아, 지랄하지마.”
툭- 툭-
이윽고, 루벤카는 박살난 사진기를 줍더니 먼지를 후후 불었다. 그리고는 필름을 꺼내어 마법으로 간단히 내 얼굴을 그려냈다.
실로 정밀한 솜씨.
스아아아악!
나도 모르게 루벤카의 심장으로 흘러 들어가던 마력을 빼앗아 보태니, 완벽한 내 얼굴이 필름 위에 그려졌다.
“······마력이.”
루벤카의 눈가가 지진난 듯 떨렸다.
다음 순간.
“레나가 필요하게 됐다.”
“······뭐?”
나는 눈가에 경련이 이는 루벤카에게 장황한 얘기들을 간단히 압축해 설명하고, 레나를 라그나로크로 데려와 주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루벤카는 안전하지도 않은 라그나로크에 미쳤다고 레나를 데려오겠냐며 연신 거절했으나, 내가 계속 교수들 밑에서 빌붙으며 살라고 비꼬자 눈빛이 대번에 바뀌었다.
“야, 레나는 나 혼자서도 충분히 알아서 먹여 살리······.”
“여기에 와도 알아서 할 수 있다. 레나 때문에 너도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리고 누가 너더러 같이 와달랬나? 넌 꺼져 이 악독한 년아. 그냥 가서 말이나 전하라고.”
“······씨, 씨입.”
부들부들-
자존심 하나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루벤카였다. 씩씩대면서도 쌍욕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었다. 부르르 떨리는 입술이 참으로 애처로웠다.
나는 그렇게 루벤카와의 대화를 마쳤다.
그런데 그때.
“······.”
기이한 마력을 스멀스멀 뽐내는 사내들이 루벤카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안광이 칙칙했다. 호텔 로비를 메운 수가 꽤 여럿이라 그들 주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뷔에탕.
기별도 없이 찾아왔으나 놀랍지는 않다.
딜런은 아예 난민이나 다름없는 신세였지만, 뷔에탕은 그보다 사정이 조금 나았다. 점조직인 마피아는 다른 도시에도 나름의 세력을 뻗어두었고 어차피 본 전력은 인형들이니까.
아마 그녀는 유일한 약점인 본신을 숨기기에 라그나로크 시티가 최적이라고 생각하겠지. 이곳 주민들에게는 참으로 슬픈 일이겠으나, 뷔에탕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다.
카스트라 뷔에탕도 이번 사태로 전력을 상당히 잃었을 것이다. 그런데 뷔에탕급의 거물이 다른 도시로 숨어들어 기반을 다지려다간, 기존의 세력들과 귀찮은 분쟁들에 휘말릴 게 뻔하니.
저벅.
패션쇼의 모델처럼 걸어온, 아름다운 인형이 나와 루벤카를 번갈아 바라보다 인사했다.
“안녕?”
쑤욱!
그리고는 루벤카의 옆자리를 가볍게 차지했다.
색을 탐하는 뷔에탕이 가장 아끼는 인형일 터.
그런데, 그 인형마저도 루벤카 앞에서는 빛이 바랬다. 심지어 루벤카는 욕설을 뱉는 중이었다.
“······아니 이건 또 뭔, 누구야 이 년은?”
인형들의 에스코트를 받은 뷔에탕의 교접인형이 루벤카의 엉덩이를 옆으로 쑥쑥 밀어넣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헌데 이년 소리를 듣자마자, 인형의 목이 곧장 직각으로 돌아갔다.
“···년?”
“너 누구냐고 썅년아. 목관절 부러졌니?”
성격 더럽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여인들이다. 루벤카는 갑자기 자리를 빼앗겨서 그런지 뷔에탕의 인형을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저것은 정말 상대가 누구인지 몰라서 가능한 배짱이었다.
“궁둥이 치워라? 나 아직 얘기 안 끝났어.”
“······역시 아름답구나. 인형으로 만들기 좋겠어.”
“!”
뷔에탕은 마력을 슬쩍 흘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한 성격 하는 루벤카도 본능적으로 기세에서 밀리지 않으려 마력을 끌어올렸다.
로비 근방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계속 저러다가는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아 적당히 둘을 중재해야 했다.
“서로 죽여라.”
“풋, 저렇게 예쁜데 죽이긴 왜 죽여?”
“······무슨.”
뷔에탕은 달아오른 얼굴로 성내던 루벤카를 야시시한 눈으로 훑다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 시선에 루벤카가 소름끼치는 얼굴로 제 팔을 쓰다듬었다.
“딜런이랑 회사 하나 만들 거라며?”
나는 호기심이 어려있는 뷔에탕의 그 첫 물음으로, 앞으로의 대화가 어찌 흘러갈지 알았다.
뷔에탕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재미있겠네. 나도 끼워주는 건 어때?”
대답을 기다리는 새 뷔에탕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사실 내가 무슨 대답을 하는지는 뷔에탕에게 중요하지 않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답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내 자리 비워둬.”
“별것도 아닌 회사가 될 텐데 벌써 관심이 지대하군. 마피아 하나로는 충분한 악명을 떨치기 부족한가.”
“모르는 척하는거 봐. 귀엽게. 진짜 별것도 아닌 회사야?”
“······.”
뷔에탕의 기세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그녀가 요염하게 길쭉한 다리를 꼬자 흰 맨살이 드러나고, 기이한 마력이 공간을 사로잡았다.
곧이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 자리 비워두라는 이유는 첫째, 네가 아직 딜런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
뷔에탕은 웃는 낯으로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며 말했다. 인형의 칙칙한 안광이 나의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둘째, 네가 기업을 세워 하려는 짓이 무공칩이나 마법칩과 관련된 사업이라면, 반발이 네 상상 이상으로 심할 거라서. 셋째, 감히 내 앞에서도 당당했던 남자가 엄한 놈들한테 부러져 꺾이는 꼴을 보면······내 흥미가 식어버릴 것 같아서. 여기서 이유 더 필요해?”
그녀의 마지막 문장은 의문문이 아니었다.
반문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뜻.
‘쯧.’
이렇게 되면, 연방에서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을 거다. 로키에서 빠져나온 9레벨 군벌 둘이 작당중인 것으로 보일테니.
그것도 이제야 태동하는 라그나로크 시티에서.
너무 시작부터 악인들만 모여드는 것 같은데.
“난 이만 갈게. 너도 안녕 예쁜아. 우리 또봐?”
여튼, 뷔에탕은 저 세 가지 이유만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설마, 저런 미친년이랑 만나냐? 예쁜 사랑 해라?”
그리고 루벤카는 끝까지 남아 떠나는 뷔에탕을 악독하게 노려보다가, 레나에게 말은 전해보겠다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 이후.
나는 호텔 방으로 돌아와 간단한 주변 정리와 채비를 마쳤다.
“돌프야. 따라와라.”
“예, 형님.”
이제 귀찮은 일들의 정리를 마치고 약간의 여유가 생겼으니, 나도 적당히 필요하고 믿을만한 놈들을 찾으러 가볼 생각으로.
* * *
발두르 시티.
웨스트 정크타운.
— 삼호대협!
“별 일 없소?”
— 없습니다. 대협!
“허허허. 무슨 변고가 생기면 곧장 고하시오.”
— 알겠습니다. 대협!
정크타운의 주민들은 삼호문의 일대제자이자 실권자인 여량천을 삼호대협(三虎大俠)이라고 불렀다. 이제는 무인의 태가 나는 삼호문도들을 우르르 이끌고 길거리에 나타나면, 기적처럼 길 중앙이 갈라졌다.
발두르 중앙 포목점에서 맞춘 위풍당당한 삼호문의 의복을 걸치고 길을 걷노라면 그야말로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하하하하!”
현재 정크타운의 삼호문은 둘도 없는 전성기를 맞는 중이었다.
웨스트 정크타운 전체가 곧 삼호문의 영역.
다섯 개의 집단이 나누어 뜯어먹던 정크타운을 삼호문이 홀로 독차지했으니, 그 자금력과 위세가 비할 바 없이 대단했다. 가는 곳마다 온갖 상인들이 부랴부랴 튀어나와 고개를 숙였다.
— 대협!
— 대협!
게다가 삼호문주 등평위의 수완이 상당해서 삼호문은 꽤 합리적으로 세를 걷으면서도 점점 세력을 불려나가고 있었다. 인망도 대단하여 삼호문도가 되고 싶어하는 꾀죄죄한 아이들이, 본문의 문지방을 하루가 멀다하고 드나들었다.
삼호문이 앞둔 미래 역시 창창하다는 말씀.
지금, 삼호문의 본문은 증축에 증축을 거듭하여 여타 소도시의 중견문파 못지않은 성세를 자랑했고, 정크타운에서 가장 높은 투레 더 타운도 자금을 부어 완공시켜 버렸다.
별호 삼호대협, 여량천의 무공도 날이 갈수록 수준이 높아져 이제는 독자적으로 에센스를 구입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3레벨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무인에서 불과 1년 정도만에 당당한 5레벨의 무인으로 발돋움했다. 지금은 사라진 ‘그놈’ 이 던져주고 간 무공들은 마치 자신만을 위한 무공인듯, 손에 착착 감기는 게 이러다간 절정의 경지까지도 머지않아 보였다.
조금 아쉬운 것은.
‘쓰읍.’
여량천은 요즘따라 ‘그놈’ 에게 보내는 막대한 수수료가 조금 아까워졌다. 삼호문이 얻는 수익의 거의 절반 이상이, 얼굴도 보이지 않는 그놈에게 송금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 그 돈은 절대로 건들면 안 돼! 필시 죽을 거다. ]
하지만 문주인 등평위가 워낙에 완고한 바람에 말려봐도 일대제자인 여량천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여량천은 늙어가는 사내들은 원래 겁이 많은 법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쪼륵-
오늘도 삼호루에 들러 술을 기울이던 여량천은, 잔에 고급 위스키를 따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곧 절정에 이르게 되면 판도를—
쾅!
그때, 기루의 두꺼운 방문이 부서졌다.
“!?”
갑자기 여량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술을 마시던 그가 화들짝 고개를 들어보니, 부서진 문 너머에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사내 둘이 서 있었다.
“쟤가 이제 대협이야?”
“여긴 문이 굉장히 튼튼하네요. 형님.”
“삼호문 이 새끼들은 뭐 이딴 데다가 돈을 썼어 아깝게. 그냥 문풍지로 대충 발라서 만들 것이지.”
이윽고.
둘 중, 머리칼이 조금 길고 젊은 사내가 여량천의 앞에 털썩 앉더니 위스키병을 빼앗아 입에 털어넣었다.
꼴꼴꼴꼴-
그리고 위스키를 병째로 빼앗아 주둥이에 때려붓는,
그 젊은 사내의 미소가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곧,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간 잘 있었냐. 량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