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탈출
#144화.
—————!!!
초월적인 존재들의 충돌.
힘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파동이 생겨난다. 곧 허공이 찢겨나가는 듯한 굉음과 막대한 충격파가 너울치며 주위로 뻗어나갔다.
— 으아악!
초인의 범주에 오른 7레벨 이상의 실력자들마저 뇌가 흔들려 다급히 기운을 펼쳐야 할 정도로 막대한 충격파. 구름을 밟고 있던 언평 선생은 즉시 법부적에 법력을 밀어넣어 주민들 쪽으로 퍼지는 여파를 상쇄했다.
후둑···후두둑······.
지상에 검붉게 부패한 혈액과 뼈, 살점 등이 장대비처럼 한바탕 쏟아져 내렸다. 청풍이 잠시 하늘로 착각했을 정도로 거대한 파루무치의 손바닥이 통째로 터져나가며 온 세상에 잔해를 흩뿌렸기에.
그 장대비가 쏟아진 다음에야, 통나무 넘어가듯 둔중하게 뒤로 넘어간 파루무치가 땅을 가렸다. 육체가 너무나도 거대한 탓에 넘어지는 데만 한 세월이 걸린 것이다.
파루무치의 근처에 있던 시체들의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지고.
쿠구구구구궁······.
육중한 거체가 결국 크게 넘어지며 그것들을 깔아뭉갰다. 비현실적인 중량을 흙바닥도 버티지 못했는지, 파무루치는 넘어진 자세 그대로 땅을 부수고 들어가 비대한 규모의 구덩이를 탄생시켰다.
곧이어 구덩이를 중심으로 막대한 분진을 머금은 강풍이 불어닥치고, 지표면이 사정없이 요동치며 뒤흔들린다.
자욱한 분진으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전장.
독고웅백은 뻗었던 정권을 회수했다.
허나 곧, 독고웅백의 관자놀이가 작게 꿈틀거렸다.
일격으로 저 거체의 손바닥을 터뜨리고 본신마저 넘겨냈으나, 그의 팔을 타고 전해진 힘은 여지껏 겪어보지 못한 무언가였다.
무당의 진공진인과 밤낮없는 비무를 벌이며 온갖 절초를 다 받아내본 독고웅백이라도, 감히 경시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
게다가 전력을 다한 일격은 전체로 따지자면 말단 부위에 불과한 손바닥만을 겨우 터뜨렸을 뿐, 다른 육체는 아직도 건재한 상태였다.
인간이 상정한 규격을 한참 초월한 맷집과 그 자체로도 파괴적인 덩치. 10레벨의 경지에 오른 절대고수라도 감히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강대한 적임을 일 초간의 합을 통해 알아냈다.
일생동안 상승의 무학을 쌓아온 그의 권격을 상대로, 그저 단순하게 손바닥만을 내리뻗어 중량만으로 대적한 셈이니.
툭. 툭.
독고웅백은 아릿한 손을 휘저어 불편한 감각을 털어냈다.
— 만약 인간이었다면 좋은 공부가 되었을 텐데.
펄럭!
곧, 금빛 자수와 보석이 가득히 박혀 화려하고 호화로운 그의 의복이 구덩이로부터 불어닥친 강풍에 휘날린다.
고대의 황제 못지않게 치장한 그는 오늘, 하오문주가 아니라 숭무교의 주인으로 이곳에 걸음했다.
그는 허공을 천천히 밟으며 내려와 오만히 지상에 내려섰다.
그런 행동을 기점으로.
— 정리해라!
무를 숭상하고, 싸움을 숭상하며 투지를 숭상하는.
또한 숭무교주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숭무교도들이 수십 기의 캐리어에서 뛰어내려 살아남은 시체의 잔당들을 확인 사살했다.
몇 분 전만 해도 살아있는 시체가 까마득히 메우고 있던 광활한 개활지에는, 이제 목이 잘리고 타오르거나 녹아내려 더는 되살아날 수 없는 죽음만이 도래했다.
그때.
——!
땅바닥에 처박힌 파루무치의 잘려나간 팔에서, 끈적하고도 꺼림칙한 요기가 스산히 퍼져나왔다.
잘게 맥동하는 요기가 세상 밖으로 그 기운을 드러내자, 누구도 피하거나 흘려낼 수 없는 불길하고 끈적한 감각이 공기에 달라붙었다.
구구구구궁······.
이내, 흙먼지를 뒤집어쓴 태산이 다시 들고 일어난다.
땅을 부수며 일어나던 파루무치는 자신이 깔아 짓뭉갠 시체들을 팔로 훑는 동시에 땅거죽을 뒤집어엎었다.
쿠지지지직······!
자석으로 강바닥의 철가루를 쓸어 담듯, 죽어버린 시체들의 피와 뼈, 살점과 근육, 피와 관절 등이 손바닥이 터져나간 파루무치의 팔목에 자연스레 들러붙는다.
빠득- 빠드드득-
뒤이어 무언가를 꾹꾹 눌러 뭉치는 듯한, 빠득거리는 불쾌한 소음이 들려왔다. 부패한 신체 부위들이 요기에 압축되고 뭉쳐지는 과정에서 괴이한 진액과 구역질 나는 가스가 연신 흘러나왔다. 슬쩍 맡기만 해도 어지럼증이 찾아오는 악취가 전장을 채웠다.
곧, 짙은 색을 띤 가스와 흙먼지가 퍼져 시야를 가렸다.
— 불쾌하군.
독고웅백은 고요히 뒷짐을 지고는 턱을 치켜들었다.
그와중에, 로키 시티 생존자들의 대피가 마무리되었다.
시체들이 쓰러진 땅 위로 착륙한 캐리어들에 나누어 탄 오백의 주민들이 얼싸안고 때 이른 신파극을 찍는 사이, 시체 잔해를 압축하는 파루무치를 보던 실력자들의 표정이 점점 결연해져만 갔다.
파루무치의 거구가 뿜어내는 경이로운 요기로 보아, 쉽게 이 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았기에.
본래의 ‘격’ 을 드러낸 그 요기 때문일까.
근방의 공기가 지극히 무거워졌다.
······잠시 뒤.
지상을 오만히 밟고 선 숭무교주 독고웅백의 뒤로.
진주언가의 언평, 화산의 매화검수들과 청풍, 사천당가, 론 카산드라를 필두로 한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 교수진, 숭무교의 수많은 교도와 딜런을 포함한 마탑의 일행까지.
누군가를 구출하기 위한 목표 하나로 이곳까지 모여든 연방의 실력자들이 길게 늘어섰다.
천지를 뒤덮은 가스와 희미한 흙먼지의 지대를 두고 대치하는 거인과 인간들. 어렴풋한 먼지의 안개 너머로 파루무치의 비대한 윤곽이 점점 가까워진다.
곧.
후우웅—
넓은 보폭으로 걸음을 옮긴 파루무치가 손을 들어 휘둘렀다. 독고웅백의 무형권이 터뜨렸던 손바닥을 재생한 상태로.
상공에서 뻗어나간 풍압에 자욱한 흙먼지와 가스들이 밀려나자, 금세 또렷하고 선명해지는 대기.
파루무치는 작은 인간들을 무심히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 문득, 파루무치의 거대한 눈동자가 공중에서 뒤룩 굴러갔다. 눈동자는 개미처럼 작은 인간들이 늘어서 있는 지점의 한 곳으로 향했고.
【 ······. 】
그 시선의 끝에는, 한 남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로키 시티부터 지금의 모든 상황을 헤쳐나온 사내.
바로 레반이었다.
다른쪽으로 돌아갈 기미조차 없이 확고한 파루무치 눈동자. 오직 레반을 우두커니 응시한다.
“뭐, 어쩌라는 건지.”
퉤-
레반은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피 고인 침을 뱉으며 읊조렸다. 그러고는 한동안 하늘에 걸린 거인의 눈동자를 똑같이 응시했다.
그런데.
불현듯이 떠오른 기억이 레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레반의 손이 아스파로프의 나뭇대를 꽂아둔 허리춤을 더듬었다.
‘손가락, 요기.’
생각해보니, 로키 시티에서 벌어졌던 전투에서 거대 손가락의 요기를 잔뜩 빨아먹은 아스파로프의 나뭇대를 아직까지도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로키의 상공을 둥둥 떠다니던 열두개의 손가락 군집. 그것을 조종하던 의문의 존재가 지껄였던 말과 지금의 상황이 묘하게 얽혔다.
아마도 언평 선생의 진법이 펼쳐진 지 고작해야 두 시간만에 저 끔찍한 거인이 둔중한 몸을 이끌고 나타났으니 어느 정도 확신이 섰다.
대충 전후사정을 파악한 레반이 인상을 구겼다.
‘이 요기를 따라 찾아온 거로군. 근데 제 손가락을 잘라간 놈을 잡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처먹은 요기를 도로 내놓기라도 하란 건지······.’
그때, 독고웅백이 파루무치를 향해 몇 발 나아가며 입을 열었다.
— 사람의 말을 할 줄 아는가.
그것은 마치 가공할 위력을 지닌 신 앞에, 개미처럼 작은 인간의 황제가 청을 올리는 모습 같았다.
일대에 목 잘린 시체들이 흘린 혈액이 강을 이루고 있으니, 어찌보면 악신에게 인신공양을 올리는 광경 같기도 했다.
그러나 독고웅백의 전신에 둘러진 무형의 투기와 위엄있는 기백은, 하늘까지 솟은 거인의 앞에서도 무뎌지지 않았다.
— 말을 할 줄 아느냐고, 네게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독고웅백이 풍기는 기세가 점점 부풀고 팽창했다.
한층 더 가열차게 뿜어나오는 독보적인 박력. 그의 기세가 뻗어나가며 인간들과 파루무치 사이의 공간을 점차 잠식해 나갔다.
목표는 레반의 구출이었고 반쯤은 이루었으나, 이미 흉흉한 요기를 흘리고 있는 파루무치가 인간들을 순순히 돌려보내 줄 리도 없다.
게다가 애당초 전투에 미쳐있는 싸움광이 독고웅백이다.
그러니 빈 공간을 그의 기세가 다 잡아먹고 나면, 신형을 폭사하며 전투의 시작을 알릴 것이었다.
자그마치 10레벨의 무인.
현경에 오른 절대고수에게 어지간한 간격은 의미가 없기에.
그렇게, 줄기찬 기세가 파루무치의 코앞까지 닿은 순간.
【 ······인간. 】
아득한 거인, 파루무치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기세를 풀어헤친 독고웅백의 신형도 잠시 멈추어섰다.
【 내······앞에······가져다······놓아라. 】
그 물리적인 음성은 압도적으로 크고 아득히 울렸다.
어찌나 큰지 귀로 들리는 게 아니라, 세상 전체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경지가 비교적 모자란 이들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레반이었다.
가져다 놓으라는 말을 할 때에도, 뒤룩뒤룩 굴러가던 거대 눈동자는 레반에게 철썩 붙어 떨어지지 않았으니.
레반은 허리춤에 꽂아둔 나뭇대를 꺼내며 소리쳤다.
“이걸 말하는 거냐?”
【 ······거기 있구나······건방······진······. 】
“···맞군.”
바로 그 순간.
팟!
독고웅백의 신형이 창졸간에 사라졌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싸움에 미쳐있는 사내. 오로지 무(武)라는 가치만을 숭상하는 숭무교의 교주.
그리고, 시체의 손에 멸망한 독고세가의 마지막 생존자.
독고웅백은 시체 따위와 대화를 길게 나눌 생각이 없었다.
쐐액!
날카로운 안광으로 허점을 노리고 있던 독고웅백의 신형이 비어있는 공간을 한 호흡에 가로질렀다. 그는 숨 한 번 들이마실 시간에 수백 미터의 간격을 뛰어넘어 파루무치의 목전에 나타난 것이다.
이윽고, 엄청난 속도의 강권이 거침없이 폭사했다.
콰아아앙—!!!
파루무치의 넓은 복부에 주먹이 눌린 듯한 흉이 새겨졌다.
권제(拳帝), 그의 웅대한 별호를 증명하듯 잔상마저 따라오지 못하는 독고웅백의 권격이 거체를 분쇄해버릴 듯 쉴 새 없이 때려박혔다.
찰나간에 일어나는 권강의 응축과 폭발.
가공할 위력의 권격이 한 호흡에 수십 번씩 때려 박히자, 결국 파루무치가 대응을 하기도 전에 복부가 그대로 짓이겨지며 검붉은 피의 폭포가 쏟아져 나왔다.
쿠르르륵······.
피의 폭포에서 잔해물이 마구 떨어졌다.
그러나 파루무치의 짓이겨진 복부에서 썩은 뼈다귀로 이루어진 굵은 사슬 수백 다발이 와르르 쏟아져 나와 독고웅백의 전면을 봉해버렸다. 뼈다귀의 사슬 하나하나가 통나무처럼 굵고 경도가 엄청난 탓에, 독고웅백도 잠시 몸을 물려야 했다.
한편.
‘훌륭하다. 권법으로는 내 생을 통틀어 일절이겠군.’
레반도 광선을 길게 뽑아들고 지면을 박차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자신을 구하러 장벽 밖까지 목숨을 걸고 걸음한 이들이다. 뒤에 조용히 숨어있을 바에야 배를 가르고 죽는 게 나았다.
탓!
지면을 박찬 레반의 옆으로 살풍경이 훅훅 지나간다.
화아아악!
그런데, 등 뒤에서 희멀건한 마력의 빛무리가 터져나오며 파루무치의 거체를 때렸다.
“형장, 먼저 가겠소.”
그에 더해서 매화검을 쥔 청풍이 땅을 단숨에 접으며 달려오더니, 레반마저 가볍게 추월해 파무루치의 왼쪽 발목에 검극을 박아넣었다.
푸욱!
“병신같은 세상, 저렇게 큰 건 반칙이다.”
심지어, 푸른 불꽃을 피워올리는 딜런까지 레반을 추월해 오른쪽 발목으로 향했다.
복부쪽에서 공방을 펼치는 독고웅백, 그리고 각자 발목을 하나씩 붙들고 늘어진 청풍과 딜런.
레반의 뒤쪽으로도 여러 실력자들이 몸을 던져오고 있다.
콰득!
그렇기에 이제는 레반도 여력을 남길 수가 없었다. 전방으로 쇄도하던 그는 발목을 비틀어 궤도를 수직으로 꺾었다. 이어서 파루무치의 지척에 이른 레반이 경공으로 기둥같은 파무루치의 다리 위로 뛰어올랐다.
신동경의 황금빛 플라자 벽면을 오를 때처럼.
말 그대로, 거인의 피륙을 등반한다.
울퉁불퉁한 둔부와 등허리 부근까지 순식간에 주파한 레반은, 경사가 진 거인의 몸뚱이에 광선을 박아가며 파루무치의 목과 머리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나마 급소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부위를 베기 위해 올라가는 것이다.
콰드득!
“!”
그러나 늑골까지 당도해 더 위쪽으로 올라가려던 레반의 발목을, 두꺼운 살갗을 뚫고 나타난 수십의 촉수들이 방해했다. 부패한 향과 요기가 코를 찔렀다. 그 촉수들의 힘과 속도가 생각보다도 빠른 탓에,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 ······. 】
파무루치는 눈 깜빡할 새 자신의 늑골까지 감히 등정한 개미, 레반을 찢어버리기 위해 늑골부위에 요기를 더 집중했다.
그러자 늑골의 두꺼운 살갗이 활짝 열리며 집채만 한 손바닥들이 거미처럼 기어나와 촉수와 함께 레반을 잡아 몸 속으로 끌고 들어가려했다. 레반의 입장에서는 실로 공포영화가 따로 없었다. 발을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지면으로 떨어질 것이었다.
콱! 콱! 콱! 콱!
그에 레반이 파루무치의 살갗에 검을 박아넣으며 허공에서 몸을 뒤집는 기예를 부리던 그 시점.
퉁!
“···언평 선생!”
아기자기한 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대나무와 구름이 생겨났다. 법력이 느껴지는 물건. 언평이 법부적을 변형해 만들어낸 것이었다. 레반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것들을 차례로 밟고 위로 쏘아졌다.
그렇게, 파루무치의 어깨 부위까지 이른 레반. 이미 고도가 너무도 높아서 지상이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였다. 레반의 하체에 강력한 힘이 들어갔다.
쾅!
어깨를 발판삼아 강하게 박차고 솟구친 레반은 드디어 파루무치의 안면 부근에 이르렀다. 이대로 놈의 아니꼬운 눈동자를 베어버릴 심산이었다.
그런데.
뒤룩!
【 ······. 】
분명 독고웅백을 응시하는듯 하던 거인의 눈동자가 갑자기 ‘힐끔’ 돌아가더니.
“?”
갑자기 끝도 없는 암흑이 레반의 눈앞으로 펼쳐졌다.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세상. 아마도 끔찍한 악취가 나지 않았다면 레반도 재빠르게 알아채지 못했거나 어떠한 진법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 짧은 사이에 잡아먹혔나? 마지막 쯤에 눈이 있던 위치가 입으로 바뀐 거로군.’
어찌 되었건 레반은, 파루무치의 입 속에 들어와 있었다. 어지간한 동굴보다도 넓고 거대한 공동. 흐물흐물한 살점과 뼈로 가득한 장소. 파루무치는 그대로 잡아먹은 레반을 익사시킬 생각인지, 뻥 뚫린 목구멍과 입천장에서 진한 혈액을 마구 쏟아냈다.
“후우.”
허나, 레반을 잡아먹은 것은 파루무치의 오판이었다.
레반은 곧장 광선에 어마어마한 양의 공력을 밀어넣고 꿈틀대는 공동 안에서 자세를 잡았다. 진법 안에서 휴식하며 부서졌던 팔은 정상으로 돌아온지 오래.
잠력까지 줄기줄기 뽑아낸 레반의 검 끝에서,
다시 한번, 만휘극파식이 전개되었다.
그러자.
어두운 공동의 주변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실선이 생겨나 약간의 빛이 들이쳤다. 그리고 찰나의 시간이 흐르자, 오색광채를 뿌리는 검강과 눈부신 휘광이 실선들을 죄다 갈라내며 터져나갔다.
파루무치의 입 속 공동이 걸레짝으로 변하며 두껍고 거대한 살덩이들이 조각조각 잘려 밑으로 떨어지고—
서거거걱!
가장 얇은 부위를 찾아 뚫어낸 레반이 거인의 입 속에서 공처럼 쏘아져나왔다. 레반은 허공을 박차 몸을 돌리며 자세를 잡았다. 파루무치의 턱 일부분이 사라져 있었으며 지금 광선의 앞에, 눈동자가 찌르기 좋게 놓여져 있었다.
뒤룩!
“······.”
허나 눈동자가 또 뒤룩대며 레반을 직시했다. 형태없는 요기가 격렬하게 쏘아져 전신을 구속하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그래도 눈동자의 크기가 정말 어지간한 캐리어보다도 큰 탓에, 칼을 대충 휘둘러도 무조건 맞을 듯했다. 레반은 저릿한 요기의 파도를 억지로 버티며 칼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부지불식간.
【 ······ 】
쫘아아아악!
안 그래도 거대했던 파루무치의 눈동자가 무언가에 놀란 듯 크게 확장되었다. 살점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눈동자에서 흰자와 실핏줄이 밀려나고 불길하게 동그란 동공만이 남아 존재했다.
동시에 레반을 구속했던 요기가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둑 터진 강줄기처럼 터져나와 순식간에 전신을 난도질했다. 레반의 입가에서 몇 줄기의 선혈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더니.
후우우우우웅—!!!
일순간, 레반의 안면으로 거대한 풍압이 몰려왔다.
눈동자를 찌르기 위해 겨누었던 자세가 단박에 흐트러진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당황한 레반이 기감을 펼치자, 이번에는 목이 거꾸로 돌아간 파루무치가 빠른 속도로 몸을 돌려 걷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귀찮은 무언가를 보고 달아나는 것처럼.
“?”
전투 중, 드높은 허공에 난파된 레반은 그 거체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봤으며.
쿵···! 쿵···! 쿵···! 쿵···!
콰광!
끊임없이 들러붙는 독고웅백을 파리잡듯 후려친 파루무치는 몸을 완전히 돌리고는 더욱 빠르게 가속했다. 저 멀리 날아가 지면에 처박힌 독고웅백이 아무렇지 않게 다시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러나, 파루무치는 덩치에 비해 실로 빨랐다.
한걸음에 수백 미터는 가볍게 뛰어넘을 법한 보폭.
어떠한 방해와 강력한 공격들도 깡그리 무시한 채, 하늘과 지상을 잇는 기둥같은 두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사라지니, 그 속도가 독고웅백과 레반의 경신법에도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
— ······.
파루무치가 밟은 지면에서 흙먼지가 해일처럼 일어나 시야를 가렸다. 얼마 뒤 그토록 거대한 파루무치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황당한 일이었다. 지금은 그저, 미세하게 쿵쿵대는 땅의 진동만이 발을 찌르르 타고 올라올 뿐.
지상에 우뚝 솟아있던 거인이 사라진 방향에서는, 이쪽으로 미친듯이 달려오는 시체들의 까마득한 파도만이 보였다.
그리고 레반은, 파루무치가 그리한 이유를 금세 알 수 있었다.
“······”
몇 번의 호흡을 고를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파루무치가 사라진 정반대쪽의 지평선으로, 시꺼먼 인영 두 개가 홀연히 나타났으니.
갈기갈기 찢어진 백색 장포 차림에 도 한자루를 쥔 사내가 하나.
커다란 사냥활을 등 뒤에 진, 귀가 뾰족하고 긴 사내가 하나였다.
지평선을 넘어온 두 사내 중, 커다란 사냥활을 꺼내든 사내가 난데없이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끊어질듯 늘어난 활끝에 구 형태의 마력이 모여들어 응축되었다. 이어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회전하며 공간을 찌그러뜨렸다.
퉁!
그 사내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줄을 놓자, 활 끝에 응축된 마력의 구가 발사되었다. 천둥처럼 가공할 속도로 뻗어나간 그것은 파루무치가 걸어 사라진 길을 따라 낮게 쏘아졌고, 파루무치 대신 이리로 몰려오는 수만의 시체들의 앞에 이르렀다.
콰르르르르르륵—
이내, 응축된 마력의 투사체가 그 시체들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맹렬히 회전하는 마력의 영역은 중력이 붕괴된 행성처럼, 가까이에 다가온 것들을 모조리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순식간에 회전 반경에 빨려들어간 시체들은 핏물로 화해 즉사했다. 한 번의 공격에 광활한 토지와 수만의 시체가 대부분 쓸려나가고 땅에 피거름이 뿌려졌다.
레반이 그러한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의 앞까지 다가온, 커다란 사냥활을 든 근육질의 사내.
어두운 땅의 지평선을 넘어 나타난 엘프들의 군주, 아이작은 비교적 멀쩡한 얼굴의 슬레모킨과 아주 엉망이 되어 입가로 선혈을 줄줄 흘리는 레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냉엄한 아이작의 시선은 다른 이들이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오직 둘의 행색만을 비교해 훑었고.
곧.
레반의 앞까지 천천히 다가간 아이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고생했다.”
그리고 그것이.
오백 열 세명의 주민을 모두 살려낸 로키시티 탈출 행렬의 마지막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