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참 신기한 사람
#142화.
과열된 마나회로가 식어가는 소리.
귀로 들릴 리가 없으나 왜인지 들리는 것만 같다.
우우우우웅—
장벽 바깥의 어두운 풍경이 점점 흩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사위를 점하고 피묻은 손톱을 뻗어오던, 까마득한 시체들의 파도가 진법 바깥으로 밀려나 사라진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들의 연속은 모두 거짓이고 한낱 악몽이었다는 듯, 기적은 그렇게 찾아왔다.
— 뭐, 뭐지?
극한까지 내몰렸던 상황에서 곧장 평온을 되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5분쯤 지나도 빌어먹을 시체의 괴성이 더는 들려오지 않자, 많은 주민이 바닥에 쓰러져 잠들듯 기절해버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사람도,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던 사람도, 하나같이 풀린 눈으로 뒤바뀐 세상을 접했다.
— 사, 살았다! 살았어!
— 구하러 온 건가봐!
— 흐으어어······
참았던 숨과 울음을 토해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아직 저들의 바람 섞인 말처럼 생존을 장담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법력이 유지되는 동안 시체들은 진법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을 것이다.
후우우우—
습하고 축축한 땅이 아니라 넓은 풀밭이 펼쳐졌다. 곳곳에 아득히 솟아오른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그 울창한 대숲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더운 땀에 절었던 옷자락이 말라간다.
몇몇 주민은 몽롱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법이 보여주는 환영이자 가짜 하늘이나, 저들에게 가짜 하늘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터.
저 하늘은 죽어가던 자들의 희망이 되어 주었다. 그러니 저것이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현재 중요치 않았다. 생존자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것을 투사해 주었으니.
언평 선생의 도움 덕에 한시름 덜었다.
우리도 당장 휴식을 취할 시간을 벌었고, 한계까지 몰려있던 정신과 육체를 재정비해 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작정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언평 선생의 진법 안은 확실히 안전한 장소이지만, 법력이 힘을 다하는 순간 이전과 동일하거나 더한 사태에 직면하게 될 테니.
재수가 없다면 몰려든 시체들이 진법 근처를 떠나지 않고 온 사방을 촘촘하게 둘러싸고 있을 수도 있겠지.
그렇기에 나는 딜런을 비롯한 전투원을 한자리에 모았다.
8레벨 내외가 무려 일곱이고 9레벨이 한 명.
어디가서든 높은 한 자리씩 차지하고 눌러앉을 대단한 인물들인데, 다들 지옥을 헤쳐오느라 얼굴에 검댕이와 피딱지가 붙어있는 것이 어쩐지 우스웠다. 대숲의 서늘한 바람이 그들을 희미하게 감싸주었다.
“분위기가 이상한 게 캠핑온 것 같습니다. 형님.”
눈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루돌프놈이, 대강 풀밭에 드러누우며 적막을 깼다.
그러자, 그전까지 움직임 없던 아힘사의 눈이 거짓말처럼 떠졌다.
“시끄럽습니다.”
“뭐야, 배터리 끝나서 쓰러진 거 아니었어?”
“시끄럽습니다.”
“···아니, 왜 나한테만?”
캠핑의 필수재라고 할 수 있는 화톳불은 없었지만, 우리는 중간을 비우고 풀밭에 원형으로 둘러앉았다.
바닥과 혼연일체가 되어 늘어져버린 로키의 주민들과는 다르게, 전투를 치른 이들은 이전까지의 처절했던 분위기에서 쉽사리 헤어 나오진 못했다.
나는 아직도 팽팽한 긴장이 어려있는 저 눈빛들이 꽤 마음에 들었다. 운 좋게 때맞추어 진법 좀 세워졌다고 곧장 드러눕는, 정신 빠진 사람은 없는 것이다.
휘이—
“어우, 하늘이 새파래서 좋네요. 세상도 맨날 저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 미래도 저렇게 밝았으면 합니다.”
“······.”
진작 드러누워서 편히 자빠져있는 루돌프놈은 ‘사람’ 이 아니므로 제외했다. 계속 휘파람을 불기에 아힘사를 시켜 주둥이를 닫게 했다.
와중에 가장 먼저 슬레모킨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샷건을 하도 쏴대서 얼얼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말했다.
“진짜 다행이다. 간발의 차로 마나회로가 망가지지 않았어. 조금만 더 무리했으면 분명 깨져서 되돌릴 수 없었을 거야. 9레벨 에센스의 힘으로도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는데······.”
뒤이어, 딜런이 슬레모킨의 말을 가로채 내게 물었다.
“그래서 도대체 뭐냐? 이 괴상한 가짜 세상은.”
나는 갑작스레 우리를 덮어 보호한 이 진법이 무엇인지, 누구의 힘인지 간단하게 설명했다.
딜런은 설명이 끝나자, 주변으로 솟아난 진법 내부의 정경을 찬찬히 둘러보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진주언가라면 나도 들어봤다. 무림계에서 술법으로 유명한 괴짜들이라 들었다. 수르트 시티 장벽을 담당하는 일가라고 들었는데.”
그도 진주언가를 모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교롭게도 그 진주언가에 내 벗이 있다.”
“어이가 없군.”
딜런은 헛웃음을 지었다.
“로키에서 도망친 병신 겁쟁이들이 호들갑 떨며 지껄여댄 말을 듣고 곧바로 움직였어도 우리를 찾으려면 시간이 더 걸렸을 텐데? 그런데 이건 뭐, 소식을 듣기도 전에 달려온 수준이다. 그게 다 네놈 때문이라고?”
진주언가는 수르트 시티에 있다. 정보를 빠르게 얻었다고 해도, 라그나로크나 로키 시티와는 물리적인 거리가 꽤 있는 편이다.
여기서 ‘꽤’ 라는건 하늘을 고속으로 비행하는 캐리어를 이용해도 최소 한나절에서 평균 하루 이상이 걸린다는 뜻.
그러니 딜런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무너지는 로키 시티를 도망쳐 나와 장벽 밖을 표류한지 약 하루쯤 되었을 뿐이다. 급보를 전해 듣자마자 초호화 캐리어에 올라 뛰쳐왔다 해도 너무 이르긴 하다.
그럼에도 나는 대수롭지않게 말했다.
“천기(天氣)를 읽었나보지. 그들은 수도자니까.”
“······천기?”
천기라는 말에, 딜런의 보좌 하나가 아는척 하며 말했다.
“무림의 수도자들은 하늘의 흐름을 읽는다고 합니다.”
“큭큭, 지랄하고 있군. 9레벨 마법사인 내가 아무것도 못 보는데.”
맞는 말이다. 하늘은 어둡다.
그러나 언평 선생이 제작한 법기인 종후표가 우리를 내내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법기를 통해 로키의 일들을 시기 좋게 엿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종후표 그놈이 직접 SOS를 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내가 죽으면 언가의 심처에 봉인되어 있는 종후표의 몸뚱이도 화형대 위에 올라갈 터이니. 그 대단한 생존 본능이 적절한 시기에 발동했을지도.
푸후—
그리 생각하던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딜런이 말했다.
“아무튼, 지랄같은 네놈 성격에 이런 죽음의 땅까지 한달음에 튀어와 줄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게 기적이었다. 장담하는데 분명 정신이 멀쩡한 놈은 아닐 거다.”
대규모 군벌 세력을 끌고다니며 허구헌날 전쟁을 벌였던 인간보다야 한참 멀쩡하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을 속으로 삼켜내고 귀를 기울였다.
그는 자기가 말하고도 찔렸는지 곧장 화두를 돌렸다.
“그래도 목숨을 구해주러 달려온 인간을 두고 함부로 지껄이면 안 되겠지. 그래서 몇 레벨이냐?”
“9레벨.”
“?”
딜런이 이해못한 얼굴로 되물었다.
“몇 레벨?”
“9레벨의 수도자다.”
딜런이 흉터 가득한 얼굴을 구겼다.
“어디 처박혀있느라 찾기도 힘들다는 9레벨 수도자라고?”
“맞다.”
“그런 거물이 너를 손수 구하러 와줬다는 얘기냐? 도무지 무슨 접점이 있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넌 마탑 소속 아닌가? 그놈들은 무림계에서도 교류가 없기로 유명한 놈들······아. 그거로군.”
곧이어 딜런은 이제야 이해간다는 표정을 하더니, 피곤한 기색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생각해보면 무공과 마법의 쓰임이 자연스럽고 경계가 없었지······진짜 운도 더럽게 좋은 놈이군. 대체 어떤 거물의 물건을 구해다 박은 거냐?”
인격 메모리칩과 연관지어 상황을 금세 납득해버린 딜런은, 얼마 지나지 않은 얘기들을 늘어놓으며 입맛을 다셨다.
“르포포이, 그 인간도 로키에 몇 안되는 9레벨이었다. 하지만 좆같은 손가락 괴물이랑 싸우다가 먼저 뒈졌지. 그렇게 허무하게 갈 양반인 줄 알았으면 내 손으로 부숴놓고 로키를 통일했어야 하는 건데.”
시간상으로는 어제 있었던 일.
어제까지만 해도 인류의 보금자리였던 로키 시티는 이제 완벽하게 시체들의 땅이 되었다. 그러므로 저건 의미가 없는 말이니-
9레벨이 오더라도 큰 도움을 주기 힘들 것이라는, 부정적인 얘기를 돌려한 것이겠지.
내 예상대로 딜런은 안타깝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 수도자가 진법에 조예가 깊은 건 알겠다. 하지만 여기까지 캐리어든 구름이든 타고 온다 쳐도, 혼자 우리를 다 구해낼 수 있겠나?”
언평 선생은 라그나로크 시티 근처에 있을 것이다. 잘하면 캐리어도 구할 수 있을 테지. 다만 어지간한 캐리어를 타고 와도 오백의 주민을 전부 태워보낼 수는 없다. 화물용 캐리어처럼 거대한 놈을 끌고오면 또 모를까.
애초에 선주들이 캐리어를 선뜻 내어주긴 하려나?
수도자들은 자신이 제작한 진법 안에서는 절대적인 신위를 낸다. 하지만 장벽 밖은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가혹한 환경. 게다가 강력한 시체들이 무리를 이루어 도시를 무너뜨리고, 도망자들을 습격해 행렬을 뿔뿔이 찢어놓은 것만 보아도 평범한 일이 아니지.
그때, 생각에 잠겨있던 루베르겐 집행관이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가면 갈수록 다사다난해지는군. 로키와 멀어질 때마다 언데드들의 수준이 점점 강해졌던 것 같지 않나? 마치 우리의 힘을 천천히 빼려는 것처럼 말이지.”
맞다.
끝도 없이 늘어선 주민들의 행렬을 모두 방어할 수는 없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처가 아주 허술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원탁의 참여자들은 최대한의 대응을 했다.
그런데 라그나로크와 로키의 중간 지점쯤에 이르렀을 때, 기다렸다는 듯 지능이 높고 강력한 시체들이 나타나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와중에 행렬의 어딘가에선 땅이 통째로 무너져 몇백 명씩 매몰되어 버리니, 그 거대한 혼란을 다 통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방어선이 무너지니 지레 겁먹고 도망쳐버린 이들도 있었고, 끝까지 싸우던 이들도 있었지만 결국은 이렇게 되었다.
“물론, 그저 기우에 불과할 수도 있는 일이다만···”
“쓸데없는 걱정이 아닐 거다.”
말꼬리를 흐리는 집행관의 말을 딜런이 긍정했다. 지금 딜런의 표정은 꽤나 심각했다.
“장벽 밖이 원래 좆같은 곳이라도 이건 일정 수준을 넘었어. 능광객이 죽인 두 놈을 빼놓고 봐도 그래. 9레벨급이 그렇게 많이 뭉쳐다니며 지랄을 떠는 건, 처음부터 로키를 무너뜨리고 도망치는 인간들도 사냥하기로 작정을 했다는 거다. 그런데 대체 이유가 뭐지? 그냥 인간을 잡아 처먹고 싶어서?”
“아!”
“?”
딜런의 의문에 뭔가 마음에 두었던 것이 떠오른듯, 슬레모킨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9레벨 마법사를 죽인 손가락들이 마탑주님과의 대화에서 그랬어. 자신이 싫어하는 ‘파루무치’ 의 손가락을 여흥으로 잘라 왔노라고. 피를 받으면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거라고. 나중에는 받지 않은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언데드들 사이에서 반목이라도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로 들리는군. 하지만 그 한 놈 말만 믿고 결론을 내긴 어렵지.”
모두가 마땅한 의미를 찾으며 고심하는 사이, 내가 슬쩍 입을 열었다.
“실제로, 시체들의 세상도 세력이 나뉘어 있을 수도 있지. 인류의 연방처럼.”
“뭐?”
“그중 한 축의 지배자가 시체들을 이끌고 로키 시티를 박살내러 온 거야. 그런데 시티를 무너뜨리는 김에 강자들을 수급해 자기들 휘하에 두려고 계속 변절을 권유한 거지. 만약 휘하에 둘 생각이 없었다면, 그냥 아무렇게나 감염시키면 그만 아닌가. 어차피 끓어오르는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알아서 사람을 잡아먹을 테니까.”
“······씨발. 뭔 말인진 알겠는데, 그런 재수 없는 얘기는 집에 가서 해라.”
딜런은 내 말에 미간을 팍 구겼다.
재수가 없는 얘기라기에 나도 굳이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는 로키의 칠좌인 능광객이 내 앞에 ‘그놈’ 을 보여준 뒤, 나름대로의 가설을 세워가고 있었으나, 모든 게 다 확실치 않은 가정중 하나일 뿐이겠지.
곧, 딜런이 물었다.
“그나저나, 이 진법은 얼마나 갈 것 같냐?”
우리의 목숨을 구해준 언평 선생의 진법.
법기에 조용히 잠들어있던 법력의 양으로 추측해 보았을 때, 오래는 못 갈 것이다. 더 유입되는 법력도 없으니.
“외부의 개입이 없다면 반나절 정도.”
“젠장, 오래는 못 가는군. 일단 흰소리 말고 회복부터 해야겠어.”
딜런은 굵직한 침음을 흘리더니 눈을 감았다. 다른 마법사들도 회복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고요해진 언평 선생의 진법 안.
나 역시도 가부좌를 틀고 비어버린 단전을 채우기 위해 소주천에 전념했다. 끝없는 전투로 기이하게 팽창한 혈도를 풀고 심신을 닦았다.
그렇게.
진법 안에서, 두 시간 정도가 쏜살같이 지났고.
“······.”
나는 어떠한 기시감을 느끼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내 고개가 저절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다. 진법에 이상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어떠한 기시감에 더해 괴이한 위화감은 점점더 박차를 가하더니, 종국에는 내 전신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쿵······
쿵쿵거리는 작은 소음.
나의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인가.
아니면 그저 잡소리에 불과한 것인가.
그게 무엇이든 확신할 수 없기에, 나는 감각을 한계까지 틔워 진법의 푸른 하늘을 연신 뚫어져라 바라봤고.
쿠지직——
“······.”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쿠직—
검고 가는 선이 푸른 하늘 사이를 유영하며 점점 번져나간다. 저것은 언평 선생이 친 진법이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는 뜻. 진법 안에 있는 모두를 강제로 기상시켜야만 했다.
뒤이어 퍼져있던 주민들이 모두 단 꿈에서 깨어났을 무렵, 하늘을 가로지른 균열의 한 부분이 점차 벌어지더니.
콰아앙!
이윽고, 무언가 우그러지는 굉음과 함께 진법의 푸른 하늘에 날카로운 구멍이 뻥 뚫렸다. 진법 속의 세상이 깜빡거리며 점멸했다.
우우우우웅—!!!
언평 선생의 법력은 구멍이 뚫린 즉시, 진법을 공격한 존재에 대항하듯 위력적으로 휘몰아쳤다. 높은 대나무들이 하나둘 뽑혀 올라가며 구멍 뚫린 하늘을 막기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진법을 세우고 남은 여분의 법력으로는, 진법을 부순 존재의 앞에 항거하기에는 역부족인 듯싶었다.
“!?”
어느 순간, 구멍 뚫린 하늘 사이로 거대한 ‘눈동자’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가더니.
콰르르르륵—
갑자기 검붉은 액체가 폭포처럼 진법 내부로 쏟아졌다.
그것은 누군가의 피였다. 피를 뿜어내는 하늘로 인해 푸르렀던 초원이 붉게 물들어갔다. 흑색과 붉은색이 섞인, 부패한 혈향이 평화롭던 진법을 메웠다.
그리고, 그때였다.
언평 선생의 다급한 전언이 사방에서 들려온 것이.
【 거대한 무언가가 진법을 강제로 뜯어내려 하고 있다. 한쪽으로 길을 내줄 터이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라. 】
구우우우우웅—
곧, 그의 말에 따라 진법 속 세상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졌다.
구멍뚫려 피를 쏟아내던 진법의 구멍이 측면으로 몇 번이나 접히며 저 멀리로 사라졌다. 덕분에 우리는 쏟아지는 피의 폭포와 약간의 거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진법은 금세 무너질 듯 연신 크게 흔들렸다.
“이게 무슨······.”
우지지직······
진법 속의 세상이 지진난 듯, 흔들리고 모두 우그러진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야 했고.
마지막까지 한가로이 자빠져 자고있다가 봉변을 당한 루돌프놈은, 검붉은 피를 죽죽 뿜어내는 구멍을 향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야 이 개씨이! 팔놈들아! 적당히 좀 하라고!!!”
* * *
구우웅—!
마치 태산처럼 거대한 육체.
발할라의 산맥을 옮겨 놓은듯한 거인(巨人). 어두운 하늘 위로 얼굴이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높고 웅장히 솟아있는 거체.
구우우우웅—!
구우우우웅—!
그러한 존재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거대한 주먹을 연신 내리쳤다. 하지만 어느 한 공간에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하는 주먹. 그 형태없는 충돌부에서 막대한 기파가 연신 터져나와 지축을 터뜨리고 흔들었다.
잠시 뒤.
콰앙!
계속 이어지는 거인의 주먹질에 결국,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작은 구멍이 뻥 뚫렸다. 그러자 거체는 고개를 숙이고는, 동굴의 입구보다도 거대한 입을 벌려 뭔가를 잔뜩 쏟아냈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광경을, 멀리서 우묵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내.
허공을 부유하는 캐리어 위, 화산 그룹의 검수들을 둘러본 청풍이 입을 열었다.
“두렵다면 화산으로 돌아가 무학에 정진하십시오.”
그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청풍은 고개를 내밀어 캐리어 밑을 보았다.
······그러자 거기에는, 시커멓게 꿈틀대는 땅이 있었다.
입을 벌리고 구멍뚫린 허공에 무언가를 쏟아붓는 거인을 중심으로, 청풍의 시야에 들어온 광활한 대지를 온갖 종류의 시체들이 빼곡히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청풍은 다시금 고개를 들었고.
이번에는 근처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하하하—
매화건을 질끈 동여맨 청풍이 한바탕 호쾌하게 웃었다.
시체들의 육신으로 까마득히 메워진 대지. 그에 대항하듯.
“화산만 온 것이 아니었군. 형장은 참······신기한 사람이오.”
청풍의 시야에 들어온 드넓고 광활한 하늘 역시도, 수백 기가 넘어가는 캐리어가 빈 공간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