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나의 벗
#141화.
하늘을 수놓으며 낙하하는 유성우처럼.
광채를 뿜는 강기의 파편 조각들이 팔방을 덮으며 떨어진다.
먼지보다 작은 파편도 존재했으며, 실보다 가늘고 긴 파편도, 손가락만한 강기 파편도 더러 있었다.
뿌드드득-
순간, 깡마른 시체놈의 다리근육이 몰라보게 부풀었다. 무언가 기운이 심상치 않으니 즉시 빠져나가려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놈은 만휘극파식의 범위에서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마냥, 망가진 제 무릎을 버려가면서까지 말이다.
퍼엉!
놈의 완력에 공기가 터져나가 파공성이 일었다.
시체놈이 있던 자리는 폭탄 터진 듯 파였고, 뜯겨나간 무릎 밑의 종아리가 남아 풀썩 쓰러졌다.
얇고 깡마른 허벅지만으로 저런 힘과 속도.
실로 비현실적인 육체 능력이다.
도망친 놈은 조소를 머금으며 감탄했다.
— 확실히 위험한 무공이군! 하지만 잘린 육체야 재생하면 그만······
“재생?”
— ······?
그리고 놈은 빠져나가고 나서야 반응했다.
뒤늦게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는지, 제 팔을 앞으로 뻗어 내려다본 놈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우우욱—
팔의 마른 살점이 조각조각 잘려 마치 용수철처럼 늘어진다.
만휘극파식은 이미 이 초식인 섬(纖)의 줄기가 뽑혀나온 순간 공간을 장악했다. 강기 조각들이 떨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도망쳤으니, 저렇게 망가진 꼴이 될 수밖에.
푸화아아아악—!!!
뒤이어 수도꼭지를 튼 듯, 놈의 전신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마른 몸에서 피가 저리도 뿜어져 나오는데 왜 에센스는 보이지 않을까. 나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어느 한 부위도 빠짐없이 강기의 조각들이 훑고 지나갔는지, 물에 젖어 찢어진 종이처럼 너덜너덜해진 놈의 전신.
그것은 마치, 면도칼로 수천 번 그은 걸레짝 같았다.
— ······끄.
한철도 두부 자르듯 하는 무수한 강기조각의 지대를, 그 대단한 육체를 쏘아내며 초고속으로 뚫고 지나갔다.
그 덕에 만휘극파식은 더욱 큰 효과를 보았다. 아무리 검강조차 버텨내는 몸이라곤 해도, 검강의 바다에 몸을 던진 꼴이니 예후가 멀쩡한 것이 이상했다.
상상을 초월하던 시체의 재생력도, 저 상처들을 단박에 복구시키지는 못했다.
사실 저놈이 허벅지로나마 서있다는 게 놀라웠다.
— 끄, 끄아아아악!
놈의 고통스러운 괴성과 함께, 피거품 방울들과 상처로 뿜어져 나온 피가 재차 적색의 운무를 생성했다.
육체를 재생할 시간을 벌기 위한 얕은 수.
···그럼에도 까다롭다. 지겹고 끈질기다.
또다시 저걸 뚫고 들어가야 하는가?
“정말 추접하게 싸우는군. 쓰레기가.”
그러나 이번에는, 딜런이 직접 움직였다.
구구구궁······
근방의 넓은 지면을 통째로 퍼낸 딜런은, 놈이 만들어낸 적색의 운무 위로 지면을 쏟아냈다. 공중에서 딜런의 마력을 머금고 우르르 쏟아진 흙더미가 산사태처럼 몽글대던 피거품 방울들을 뭉개고, 시체놈마저 땅바닥에 묻어버렸다.
그런 뒤, 딜런은 고요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설마, 나랑 싸울때 쓰려했던 검이 방금 그거냐? 그 좆같이 좁아터진 장소에서 그깟 자존심 한 번 세워보겠다고?”
원탁때의 일이 떠오른 듯.
저벅. 저벅.
미간을 찌푸리며 옆을 지나가는 딜런.
눈치가 빠른 만큼 친절한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닐 거다. 어차피 딜런의 시선은 걸레짝이 된 채 허우적대는 시체놈에게 꽂혀 있으니.
“···대답 없는 거 보니까 맞나보군. 저 흉악한 걸 사람 상대로 쓰려고 했다고? 병신 병신 거리다가 자칫하면 내가 병신이 될 뻔했어. 이런 개같은 경우가 다 있나.”
화르르륵···
그 생각을 떠올리자 성질이 났는지, 그의 모공 하나하나로 마력의 불길이 빠져나오며 활활 타올랐다. 딜런이 밟고 지나간 땅은 부글거리며 녹아내렸다. 그의 커다란 발자국 모양을 따라 끓는 길이 생겨난다.
대체 저게 마법사인지, 악마인지 구분하기도 힘든 겉모습.
하기야 저런 무력을 가지고 있으니, 악명높은 카스트라 뷔에탕이 있는 로키에서 당당히 군벌 행세를 할 수 있었겠지.
“이봐, 만약 살아서 돌아가게 되면 너와 절대로 상종할 일은 없을 거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 막무가내로 설치면 한 3년 내로 죽을 거다. 숙일 때는 숙여야 나처럼 오래 살아.”
딜런의 충고아닌 충고를 듣는 사이.
뚝···
마지막까지 쥐어짠 내 팔에서도 피가 떨어졌다.
억지로 초식을 끝까지 전개하느라 근육을 비틀어 쥐어짠 탓에 고통이 꽤 컸다. 만휘극파식은 초절정의 경지로도 육신에 가해지는 부담을 온전히 버텨낼 수 없다. 그렇기에 오랜 전생에서도 몇 번 쓰지 못했었지.
그래도 이번 생에서는 나노로봇이 있으니 금방 고칠 수 있으리라. 그간 피를 많이 흘려서 그런가 요즘 효과가 줄어든 것 같긴 해도, 아직도 회복력은 꽤 준수하다.
퍼덕! 퍼덕!
산처럼 쌓인 흙더미 속.
— 끄으으윽······.
시체놈은 몸 전체가 너덜거리는 와중에도, 어깨에 날개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려했다.
그러나.
일순간 어두웠던 근방의 하늘이 새파랗게 물든다. 난도질당한 놈이 날개를 완성하기도 전에, 딜런의 맹공이 시작되었다.
콰앙! 콰아아앙!
활활 불타는 마력을 뒤집어쓴 거인이 아까보다도 더 비쩍말라 쪼그라든 시체를 육탄으로 짓이긴다.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한 폭력이 강림했다.
다만 그 위력이 실로 대단하여, 근방에 있는 시체들의 관심이 쏠리는 부작용이 있었다.
뿌드득!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딜런은 놈을 손수 잡아 전력으로 찢었다. 귀청을 찢는 폭음과 매서운 열기가 연신 터져나왔다. 시체놈은 끝없이 신체를 기워붙여 재생하려 했으나, 재생하는 속도보다 해체되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마침 놈의 목이 부러졌다.
나는 딜런이 전투인지 폭행인지 모를 것을 하는 동안 고장난 팔을 최대한 회복하고, 감각을 끌어 올렸다. 저 깡마른놈이 지금까지 붙었던 놈들 중 가장 강한 상대는 맞으나, 저걸 죽인다고 해서 라그나로크가 가까워지진 않을 테니.
카아아악—
나는 하늘에서 익룡처럼 낙하하며 습격한 시체의 날개를 가볍게 갈라버렸다. 놈은 끈 떨어진 연처럼 지면에 곤두박질쳤다. 피륙 날개를 펼치며 발악하는 놈을 간단히 토막치고 시선을 돌렸다.
— ······크어억.
거기에는 딜런이 깡마른 시체의 수급을 들고 있었다. 꼴을 보면 아직 숨은 붙어있는 듯했다.
“여기 대가리만 남은 놈이 할 말이 있다는데, 혹시 들어볼 사람 있나?”
“살고자 하면 죽어야지.”
“큭큭.”
저 변절자의 오랜 생은, 오늘로 끝이다.
놈의 비루한 사연 따위 궁금하지도 않았다.
퍼걱!
깡마른 시체의 머리가 가차없이 터져나가며 끝을 고했다. 핏물에 진득하게 잠겨있던 놈의 척추뼈에서 이제야 에센스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고농축의 에센스. 그것을 유리병에 받아 챙겼다.
그 후에 전투를 벌이는 마탑쪽에 딜런과 함께 합류해 전장을 쓸어버렸다. 주위가 조용해졌고, 아주 잠깐 정도는 호흡을 고를 여유가 생겼다.
후우—
나는 호흡을 고르며 안력을 틔웠다.
그리고 보았다.
“······개같은 세상이군.”
아직도 많다. 너무도 많다.
전투의 소음이 워낙 시끄러웠는지, 지평선 너머를 메운 시체들이 개미 떼처럼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러니 지금, 강력한 시체놈을 죽이고 에센스까지 뽑아왔다고 해서 천진난만하게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몰려오는 시체들은 피냄새를 맡은 이상 기수를 돌리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당장은 버틸만해도 가랑비에 옷 젖듯이 언젠가는 지쳐 죽고 말거다.
“빨리 벗어나야 해. 정말 끝도 없이 몰려온다.”
우리는 호흡을 몇 번 더 고르고는, 반쯤 정신이 나간 주민들을 재촉해 당장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라그나로크 시티 방향으로 5km쯤을 더 이동했다.
베고. 찌르고. 자르고. 태우고.
살육의 향연.
지면 밑을 상어처럼 헤엄쳐 따라오던 7레벨급의 두더지를 요격해 죽이고,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오는 시체들의 팔을 자르며 전진했다. 소리지르는 놈은 발견 즉시 쫓아가 죽였고, 촉수를 쓰는 놈은 촉수를 뽑아버렸다.
주민들의 걸음이 느려 시체들을 따돌릴 수가 없으니, 이동하는 동안 전투가 쉬지도 않고 일어났다.
그아아악!
근방에서 배회하던 저레벨 시체들이 주민들을 발견하자마자 뛰어온다. 달리는 폼은 우스웠으나, 속도가 자동차와 맞먹는 놈들도 많으니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와 이빨을 들이미는 탓에.
이어진 전투로 인해 지축이 흔들리고 파공성이 울려퍼지니, 사람 냄새를 맡은 별별 시체들이 다 몰려들었다. 괴성을 지르는 시체들까지 몰려드니 시체들의 수가 눈덩이 불어나듯 불어났다.
꽤애애액—
죽여도 죽여도, 어디선가 계속 몰려들어 빈자리를 채운다.
이후에도, 우리는 끝없이 시체의 목을 베어넘기며 5km를 더 이동했다. 아마도 지금까지 사살한 시체들의 숫자가 만 단위를 훌쩍 넘어갔을 것이다. 에센스를 챙길 시간도 없어 전부 땅바닥에 버리고 가야만 했다.
정말로, 계속 움직였다.
그리고 총 15km쯤 가서는 시체를 확인 사살할 여력도 없어 대충 다리를 공격해 따라오지 못하게만 만들고 비척비척 걸었다. 시체들의 뜀박질은 그만 보고 싶다. 왜 저리 빠르고 집요한 것인가.
···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지쳐갔다.
어둡고 황량한 땅만이 계속 이어졌다.
우리는 휴식을 취할 시간도 없어 돌아가면서 겨우 몇 분 정도씩 회로를 식히고 단전을 채울 뿐이었다. 말수도 줄어만 갔다. 서로 나누는 대화라고는, 이쪽이 라그나로크 시티 방향이 맞는지 묻고 확인하는 정도가 다였다.
어느덧.
주민들을 이끌고 총 20km를 호위하며 이동했다. 그때쯤 딜런이 지친 기색을 숨기며 말문을 열었다. 그의 수많은 흉터를 타고 식은땀이 떨어졌다.
“······이제 30km정도 남았겠군. 저 멀리에 언뜻 보이는 게 장벽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 말에,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라그나로크의 장벽까지 남은 거리, 최소 30km.
숙련된 군인이라도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극한의 어둠 속에서 30km의 거리를 주파하려면 몇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은 장벽이 보일 거리도 아니다.
헌데 더 큰 문제는···우리가 당장 30분도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 모두가 지쳤다. 너무나 지쳤다.
카스트라 뷔에탕에게 언평 선생의 법부적을 쓰지 않았다면, 잠깐이라도 휴식할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텐데. 계속 그것이 뇌리에 남아 잡념을 만들어냈다.
“후우우······.”
사실상 휴식 없는 전투와 이동이 이어지니, 극한의 피로감이 중첩되어 쌓여간다. 초인이라 할지라도 무리에 무리를 거듭하니 발이 점점 느려지고 호흡이 가빠온다. 이제 조금 강력하다 싶은 시체의 요기가 느껴지면, 모두가 바짝 긴장해야 했다.
딸칵!
결국 총20km 정도를 이동한 지점에서, 나는 지금껏 얻은 에센스를 남김없이 분배해야 했다. 가륵과 깡마른 시체놈의 값을 매길 수 없는 에센스가 일행의 뱃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에센스를 나누어 마셨다고 해서 만능이 아니다. 아끼지 않고 태운다면 잠시동안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겠지만, 정신적인 피로가 씻겨 내려가지는 않을 거다.
나는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무능력자로도 20년을 넘게 버텨와 이따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약간의 내성이 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닐 터. 특히 딜런의 보좌 둘은 심히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양심이 참으로 없지만, 원래 사람이 그렇다.
“······주민들의 발이 너무 느려졌습니다. 이러다간 하루가 지나도 라그나로크에 도착하지 못할 겁니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서로 부축해주느라 주민들의 걸음이 확연히 느려졌고 많은 이들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억지를 쓰며 정신력으로 버텨내는 것도 한계가 있을 터.
딜런의 다른 보좌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제는 단호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주민들을 버리고 우리끼리라도 도망치자는 의미. 직접적으로 꺼내진 않았으나, 그런 뜻으로 뱉은 말이란 것을 모두가 알았다.
그렇기에 아주 잠깐의 침묵이 있었고.
“아, 이거 길이 좆같이 험하군.”
나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는 묵묵하게 걸었다. 쉬어선 안 된다. 한 번 퍼지면 끝이라 곧 죽어도 가야함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선두에서 묵묵히 걸어가며 전방을 가로막는 시체들을 베어 넘겼다.
“너희 둘,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라. 죽어가는 놈들을 살려주었더니.”
그러자 딜런이 보좌 둘을 대놓고 타박했다. 그는 로키의 일면식도 없는 주민들을 살리기 위해, 처음의 의견과는 달리 자기 수하들을 사지로 밀어넣었다. 이제와서 도망치면 그들의 죽음은 정말 의미 없는 헛짓거리로 남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꾸역꾸역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거기서 3km쯤을 묵묵히 걸어가자, 이제는 정말로 일행 전체가 한계에 봉착했다. 1km전부터 유독 강력한 시체들이 쉴 틈 없이 튀어나와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레반······.”
아힘사는 배터리 부족으로 가동을 거의 멈추어버렸고, 루베르겐 집행관과 슬레모킨의 마나회로도 터져나갈 듯 과열되어 마법을 마음껏 쓰지 못했다.
그리고 내 몸도 슬슬 누적된 피로에 휴식을 원하는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광선이 공력을 많이 잡아 먹지 않음에도 단전은 비어버렸고 회로가 둘러진 심장 역시도 터져나갈 듯했다.
더 이상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도···
명확한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근방에 숨을 만한 도시가 없나 계속 돌아보았으나, 인류가 남긴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인류의 터전이 아니니까.
종래에는.
총 25km를 이동한 지점에서 약속이나 한 듯 꾸역꾸역 걷던 주민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기절해 퍼져버린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각성제에 부스터까지 투여해서 잠력을 한계까지 끌어 올렸으나, 결국은 평범한 인간의 육체가 고된 노동에 더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들어버린 것이다.
고요한 정적이 휘몰아치는 도중.
“······씨발, 무리다 이제.”
나와 같이 묵묵히 걷던 딜런도 제 머리를 감싸며 욕을 뱉었다.
이거.
아무래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으려나 보다.
내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튀어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고개를 들자, 역시나 하늘은 어두웠다. 해조차도 뜨지 않으려나보다. 라그나로크 시티까지 못해도 20km이상 남았다.
앞으로도 최소 한나절은 쉼 없이 가야 하는 거리.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오백 명이 넘는 주민들은, 어딘지도 모르는 이 어둠 속에서 찾아오는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해서 비교적 힘이 있는 우리에게는.
끝까지 이곳을 지키다 같이 죽느냐.
지금이라도 그냥 두고 떠나느냐.
두 가지의 선택지가 눈앞에 남아 아른거렸다.
“정말로, 개같은 세상이 맞군.”
그러면 모든 게 다 부질이 없었는가?
허면.
어차피 다 죽을 신세라면, 나는 여태까지 뭘 한 거지.
사내라는 놈이, 고작해야 오백 명도 못 살려?
나는 갑자기 심경이 복잡해진 탓에, 근방의 시체를 직접 찾아 베러 다녔다. 목이 잘려 퍽퍽 튀는 피를 보아도 진정이 될 기미가 없었다. 나는 마구 돌아다니며 50마리가량의 시체를 베었고, 묵직했던 단전이 완전히 비어버렸음을 느꼈다.
“······.”
슬레모킨의 처연한 시선이 옆으로 느껴졌다. 시체 다리를 뜯어먹던 루돌프놈도 힘겨운 얼굴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형님.”
“왜.”
“일단······아직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도 살려보시죠. 한 백 명이면 데리고 갈 수 있을겁니다.”
“우리 돌프는 그게 최선이니.”
“예, 아마도요.”
“종후표!!!”
루돌프놈을 옆으로 치우고, 곧장 종후표를 찾았다.
그러자 앵무새 법기가 이쪽으로 쪼르르 날아왔다. 앵무새의 부리에서는 심후한 법력이 흘러나왔다.
나는 사실,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물었다.
“종후표, 너도 비슷한 생각이냐? 정치꾼인 너라면 잘 알겠지.”
“전부 살릴 것이다.”
“······.”
종후표의 뜬금없는 대답에 나는 놀랐고, 루돌프놈은 개소리를 하냐는 듯 인상을 팍 찡그렸다.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날개 뜯어줘?”
신경질을 낸 루돌프놈이 손을 들어올리던 그때였다.
“돌프야, 기다려 봐라.”
내가 루돌프놈을 말리며 유심히 앵무새 법기를 살펴보니, 어딘가 평소의 종후표와는 달랐다.
왜인지 법기의 눈깔에 초점이랄 게 없고. 아까부터 계속 일행에 없는 듯 부리를 재잘거리지도 않았으며, 저번보다 흘러나오는 법력의 기운도 짙고 심후한 것이······.
“나, 언평이다.”
“······.”
순간.
젖어버린 등골에 시원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종후표가 아닌 수도자 언평이 자신이 제작한 법기를 통해 말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앵무새 모양의 법기의 배가 열리며 언평의 진신 법력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다음 순간.
앵무새 법기가 아까의 나처럼 하늘로 고개를 치켜들고는 입을 열었고.
“기다려라. 하늘은 밝아질 것이다.”
화아아아아악—
한순간, 앵무새 모양의 법기가 조각나며 봉해져있던 언평 선생의 법력이 흘러나와 천공까지 솟구쳤다. 법력은 둥그렇게 퍼져 우리 일행들을 가리는 진법을 쳤다.
다른 세상이 주변에 덧씌워지듯.
장벽 바깥의 황폐한 정경이 점점 사라진다.
어두웠던 하늘은 순식간에 푸른 하늘로 바뀌었으며, 온 사방으로 곧고 높은 대나무가 쑥쑥 자라났다.
고작 법기를 이용해 이러한 진법을 단숨에 만들어냈다.
······말인 즉.
원영경의 수도자인 언평 선생이, 우리가 있는 이 땅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잠시 뒤.
모두가 황망해 말을 잃은 그 상황 속에서.
“드디어 왔다.”
“······.”
나는,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진 딜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 노력을 알아줄, 나의 벗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