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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펑크의 전생자-140화 (140/157)

#140화. 삼 초

#140화.

쿠구구궁······

전투로 인한 굉음이 하늘까지 울려퍼진다.

슬레모킨과 집행관, 루돌프와 아힘사 그리고 딜런의 보좌 둘이 로키의 주민들을 보호하며 고지대로 몰려오는 시체 무리를 요격해 짓이기는 소리. 마법의 포격이 비처럼 쏟아져 땅을 갈아엎는다.

그리고.

화아아악!

시체와 나의 격돌지를 중심으로 강대한 기파가 원형으로 퍼져나간다. 습기를 머금은 대기가 밀려나며 몇 차례나 너울쳤다.

밀려나는 대기에 편승해 거리를 벌린 놈이 말했다.

— 역시 인간은 약하구나. 그나저나 어느 정파의 제자지? 그런 검법이 있었나?

그것은, 자기 신체를 경화시켜 만든 칼날로 나와 다섯 합을 겨뤄본 뒤 내뱉은 말이었다.

나 또한 직전의 다섯 합으로 놈의 수준을 가늠했다. 지척에서 베고 찌르며 손을 몇 번 섞어본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힘의 격차가 생각보다도 크군.’

레벨 차이가 명확하다. 놈은 강하다.

바만차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굳이 따지자면, 요기의 격이 다르다고 해야할까.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놈을 베어넘길 수 없으리라.

물론, 놈이 익힌 무학의 수준과 완성도는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았다. 솔직한 말로 일류는커녕 이류 무학으로 칭해주기도 창피한 수준.

그러나 시체 특유의 어마어마한 육체 강도와 비정상적으로 빠른 재생력에 더해서, 마구 낭비해도 줄어들 기미가 없는 기운이 그 단점들을 상쇄하고도 남겠지.

깡마른 몸에 키가 3m에 육박하는 이형의 괴물. 마치 마을 어귀에 세워두는 정승을 보는 것만 같았다.

“······.”

놈은 전투 시작 이후부터, 피부가 따끔거릴 만큼 농도짙은 요기를 쉴 새 없이 뿜어대고 있다. 그런데도 충분히 여유로워 보인다. 나처럼 공력을 적절히 분배할 필요 자체가 없다는 것.

단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내공이 무한정 솟아난다는 공령지체(空靈之體)를 이룩한 것도 아닐 텐데···마치 온 세상의 기운을 몸으로 흡수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 한데······.

인간은 역시 약하다며 삼류 악당이나 할 법한 말을 지껄이던 놈은, 문득 내 검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욕심이 나는듯 감탄을 머금었다.

— 잘 닦인 명검이 나약한 주인을 만났구나. 아무래도 그 물건은 내게 더 어울릴 것 같지 않나?

“자, 바로 줄 테니 잘 받아라.”

쾅!

문답무용.

나는 즉시 디딤발로 땅을 박차고 쇄도해 검을 내뻗었다. 현묘한 이치를 담은 보법이 놈과의 간격을 삭제했다. 뒤이어 검강이 서린 광선이 쾌속하게 쏘아졌다.

꾸드득-

“!”

그러나 광선은 무엇도 자르지 못했고, 웬 단단한 돌벽을 쑤시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광선의 검극이 놈의 옆구리 살갗에 겨우 박혀 있는 정도였다. 한낱 생물의 피부 따위를 검이 관통하지 못한 것이다.

뿌드드득······

그때, 놈의 살갗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검을 물었다. 검을 붙잡은 내 손목이 부러질듯 돌아가기에 즉시 검을 뽑아 회수하여 물러섰다.

— 킥.

물러서는 나를 보던 놈은, 마치 불쌍하다는 듯 연민 어린 얼굴로 비웃었다. 추격도 해오지 않았다. 워낙 여유만만한 것이 진작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한 태도.

그러던 놈이 이빨을 내보이며 말했다.

— 그래도, 본 적 없는 무공이로군. 안 그래도 무료했는데 그 검은 물론이고 네 검법도 받아 익혀봐야겠다.

시체놈의 그 말에 나도 긍정적으로 웃으며 받아쳤다.

“그럴까? 헌데 멍청한 놈들은 줘도 못 익힌다. 태생부터가 비천한 사파 잡졸따위가 감히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니.”

쾅!

갑자기 거대하면서도 거친 반탄력이 전신을 휘돌았다. 무언가에 맞아 튕겨나간 내 입가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렸다.

고개를 들자.

— 비천한 사파 잡졸따위?

“······.”

길게 늘어진 놈의 팔이 스르륵 줄어들고 있었다.

강철보다도 단단하면서도 때에 따라 유연하고 낭창하게 흔들리며 충격을 흡수하는 육체.

전설 속의 광물로 빚어낸 몸뚱이도 아닐진대. 수수깡처럼 말라붙은 뼈에 피륙인지 껍질인지 모를 것만 붙어있는데도 실로 강력하다.

헌데.

나도 사파 출신이지만, 저놈은 이상하게 사파라는 말만 나오면 지랄발광이군.

놈의 첫 등장 때부터 이상했던 부분이다. 현재는 굳이 사파와 정파의 경계가 명확히 나뉘어있지 않은 세상인데, 저놈에게서는 어떠한 열등감의 편린이 엿보였다.

재능없는 무인의 설움. 거대한 벽에 막혀 좌절한 무인의 설움. 대강 그런 것들이라고 해야 할까.

스스로 변절한 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된 주제에 인간 시절의 기억들에 저리도 격하게 반응해 주다니. 참으로 유치하면서도 기가 막혔다.

킁.

나는 기가 막혔으므로 일단 코라도 풀고 자세를 잡았다. 어째서인지 사파잡졸이라는 말에 태도가 일변한 저놈의 요기가 점점 증폭되어 끝도 없이 부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드드득!

창졸간, 놈의 두 팔이 곤충의 갑각처럼 변했다. 더해서 놈의 어깨에서 괴상한 날개가 돋아나 신형을 공중으로 끌어올렸을 때는, 나는 그 괴이함에 더 이상의 할 말을 잃어버렸다.

— 네놈은 얼마나 잘났기에? 어디 막아봐라 정파놈.

놈의 분노섞인 말이 끝나자 마자.

팟!

깡마른 신형이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사라졌다. 곧장 섬뜩한 칼날이 목젖 바로 앞까지 들이닥친다.

카가가강—!

보고 막은 게 아니라, 예측과 반사신경으로 겨우 비껴냈다.

광선의 검면을 긁으며 쓸고 내려오는 놈의 칼날. 분명히 출수는 이쪽에서 먼저 했는데도 힘에서 밀렸다. 사내로서 이만큼 부끄러운 일이 또 있을까.

그러나 못 막을 정도는 또 아니었다. 왜냐하면 놈의 공격에 담긴 이치와 검로가 정말로 단순하며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무인이었으나, 지금은 무(武)를 잃어버린 변절자인가?

“흑도 사파라 그런지 칼을 개처럼 못쓰는군.”

놈에 의해 정파의 무인이 된 나는, 저걸 저잣거리에서나 쓰는 막칼이라고 규정했다. 손 가는대로 마구 휘두른다고 하여 막칼. 대체 저런 놈이 절정의 무인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러면 오히려 인간 때보다 실력히 퇴보한 것은 아닌가?

하지만.

부우우웅!

그 막칼에 검강과도 같은 기운이 담겨있다면, 고작 세로 베기가 끔찍한 요기를 머금고 총탄보다도 빠른 속도로 연신 목을 노린다면.

카가강!

그리고 검강을 두른 광선마저도 쉽게 튕겨낸다면.

······그때부터는 막칼이라 부를 수 없다. 실력의 퇴보라고 할 수도 없겠지. 어쩌면 변화한 신체에 걸맞게 진화했다고 보아야 하는 건가. 압도적인 힘의 격차 앞에서는 무공의 고하를 논해봐야 그리 영양가가 없는 듯하다.

그때였다.

쿵!

“무림계 칼잡이놈들, 정파고 사파고 쓸모도 없는 걸로 지랄떨지 마라.”

하늘에서 뚝 떨어진 딜런이 두 팔을 땅에 박아넣자, 마력의 줄기가 이리저리 뻗어나가 지면을 가열차게 달궜다.

기에에에엑-

순식간에 용암처럼 절절하게 끓어오른 대지가 그대로 융해된다. 땅 밑 깊숙이 숨어 기회를 엿보던 두더지들도 산채로 녹아내려 땅과 섞여들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지대가 주변부를 잡아먹으며 점차 넓어졌다. 깡마른 시체놈이 밟고 있던 땅마저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놈은 귀찮다는 얼굴로 자리를 벗어났다.

곧, 딜런이 마력을 회수하자 별안간 녹았던 땅이 탄 숯처럼 꺼멓게 굳었다. 땅 속에서 튀어나오는 두더지를 의식해 지면을 단단하게 경화시킨 것 같았다. 힘이 아무리 좋은 두더지라 해도 쉽게 뚫고나올 수 없을 테지.

그렇게 근방 땅 밑에서 조금씩 기감을 방해하던 요기들이 사라지자, 저 깡마른 시체 한 놈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땅이 굳자, 딜런과 나는 서로 말없이 몸을 쏘아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주변의 마력이 모조리 딜런의 심장으로 빨려 들어가나 싶더니.

꽈과과과광—!

그 두꺼운 손바닥으로 간단히 쌍장을 뻗자, 강대한 마력이 연속으로 폭사하며 전방을 광역으로 휩쓸어버렸다. 수류탄 수십 다발이 터진듯, 깡마른 시체가 있던 곳을 포함한 근방 오십 미터의 지면이 전부 박살나 튀어올랐다. 그 중심에서 피가 퍽-하고 튀었다.

역시나 9레벨의 마법사. 그저 간단한 견제 공격인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도 강력히 터진 충격파에 순간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내쪽에서 마법을 쓰는 건 자제해야겠군.’

나는 딜런의 회로가 빨아들이는 마나의 흐름을 조금도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딜런이 합류했으니 이제 2대 1의 전투 상황. 이제는 이쪽이 유리하다.

“회복하기 전에 결판을 내자.”

쐐애액!

광역 마법이 적중해 두 다리가 부러진 시체놈을 확인한 딜런이 속도를 높였다.

나도 단전에 잠들어 있던 공력과 세맥으로 흩어놓은 기운을 단번에 끌어올렸다. 기경팔맥을 타고 순환하던 기운들과 단전에서 한꺼번에 솟아오른 정순한 기운들이 합류해 내 육신에 거력을 불어넣었다.

팟!

딜런의 마법에 산산이 부서져 허공으로 튀어오른 지면 파편을 밟고 몸을 가속했다. 강맹한 경력이 휘몰아치며 터질듯 광선에 주입되었다.

그런데.

쐐액!

“!”

사파의 무인이라는 말은 명백한 사실인지, 초식을 전개하려던 도중 놈의 입술이 우물거리는 게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입술에서 기다란 세침같은 것이 쏘아졌다.

내가 본능적으로 그것을 피하자.

으득-

이번에는 제 혀를 질겅질겅 짓씹더니,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이윽고 놈은 혀에서 흘러나온 피에 바람을 불어 부채꼴로 흩뿌렸다.

푸화아아악!

정면이 붉게 물든다.

놀란 딜런이 마력을 끌어올리며 즉시 그것들을 태워보려 했으나, 놈의 요기가 담겨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씨발.”

결국 딜런은 경로를 틀어 허공으로 솟구쳤다. 딜런이 벗어난 지대에 부채꼴로 쏘아진 놈의 피분수가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푸욱!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딜런이 잠시 벗어난 사이, 놈은 자기 팔을 그어 피를 줄줄 뽑아냈다. 그러고는 그 피를 전신에 덕지덕지 펴발랐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만약 스쳐서 상처라도 나는 날에는 곧바로 감염. 9레벨급 시체이니 직접적으로 접촉한다면 감염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 대단한 정파의 무공을 익히면 뭘 하나. 나는 네놈들을 딱 한 번만 베면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다. 이제 누가 더 고귀한 존재지?

그놈의 정파를 부르짖던 놈이 비척대며 일어났다.

벌써 부러졌던 두 다리가 거의 다 재생된 것이다.

— 이래도 재능같은 걸 논할 생각이냐? 나도 처음부터 구파일방에서 무공을 익혔으면······.

놈이 흥분을 주체 못하고 떠드는 사이 시선을 잠시 돌렸다. 겁에 질린 주민들을 마탑의 인원들이 돌아가며 힘겹게 방어하고 있다. 저쪽은 무수한 잔챙이들을 상대하느라 이미 한계에 봉착했다.

— 지금, 어딜 보는 거냐.

카강!

기습해온 놈의 칼날을 광선으로 받아 흘려냈다. 그런데 놈의 칼날이 찰나간 쑥 들어가 사라지더니 주먹으로 바뀌었다. 물리법칙 따위는 무시하듯, 채찍처럼 변한 주먹이 경로를 곧장 직각으로 비틀었다.

뻐어어억!

광선을 다급하게 들어 권격의 폭사를 막아냈다. 그러자 놈은 제 팔을 검신쪽으로 강하게 붙여 밀었다. 시체놈의 주먹이 검신에 닿자 그대로 두 갈래로 잘려 나뉘었다. 헌데 그 어마무시한 재생력은 상황을 가리지 않았다.

“!”

광선이 반쯤 파고들어간 채로, 놈의 손목 부근이 감쪽같이 재생해 붙었다. 검이 놈의 피륙 안에 틀어박힌 꼴이 된 것이다.

푸확!

나는 다급히 광선에 내공을 더 주입해 검날을 강하게 비틀었다. 놈의 주먹을 갈라내고는 몸을 뒤로 뺐다.

시체놈은 검을 놓쳐서 아쉽다는 듯, 깡마른 팔을 툭툭 털며 고개를 꽈배기처럼 꼬아 올렸다. 뼈가 비틀려 부드득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 ······정파 무인이 아닌가? 왜 도망치지?

깡마른 육신에서 뿜어지는 불가해한 요기. 과연 저걸 한때나마 사람이었던 생물체라고 볼 수 있을까. 차라리 사람보다는 언가의 생강시에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

놈은 딱히 인체의 급소나 혈이라고 할 곳도 없고, 재생이 너무나도 빠르다보니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단박에 목을 베어야 하는데.’

죽이려면 단박에 목을 베어내고 머리를 밟아 터뜨려야 한다. 저 질기고 단단한 살갗을 뚫을 방도를 찾아야 했다.

그때.

— 왜 도망쳐. 정파라고 했잖느냐!

놈은 갑작스레 두눈을 뒤로 까뒤집더니 게거품을 물었다. 사람이 저랬다면 슬슬 뒈져간다는 뜻이겠으나, 시체에게는 아니었다.

포르르르륵—

놈이 입에 문 게거품에 슬그머니 요사스러운 피가 섞여들었다. 곧이어 붉은 막을 가진 핏방울들이 게거품처럼 쏟아져 나오고, 순식간에 사방이 피거품 방울로 막혀들었다.

단 몇 초 사이에 놈의 형체가 보이지도 않았다.

인간의 감각을 유린하는 요사스러운 기운들의 밀집.

나는 마력을 발산해 그 역겨운 방울거품들을 밀어내려다 불현듯 힘을 뺐다.

전투를 지속하며 최대한 거리를 벌렸으나, 아직도 주민들이 있는 곳과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다. 그러니 방울거품들이 조금이라도 저쪽으로 밀려나가 터진다면 곧장 대참사로 이어진다.

— 킥.

저건 무를 익혔던 무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저 한 마리의 괴물. 이빨을 박아넣고 살점을 뜯을 생각뿐인 괴이.

나는 주민들이 있는 곳으로 흘끔 시선을 던졌다.

마법사들과 루돌프놈이 근근이 막아내고 있지만, 언제까지고 막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아힘사도 배터리가 거의 없는지 움직임을 최소화 하는 단계에 들어갔다.

허공으로 솟구쳤던 딜런이 내려서서 물었다.

“주민들을 인질로 잡을 생각이군. 어쩔 거냐.”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공간을 낼 수 있나?”

“설마 저 안으로 기어들어 가겠다고? 병신같은 소리. 그게 바로 저 새끼가 원하는 거다. 도망치지 말라는 거지.”

“간다.”

“······.”

나는 그리 말하고는 광선의 검병을 붙잡았다.

이곳에는 플라자의 원탁때처럼 나의 무공을 견식할 무림계 명숙들이 없다. 나중에라도 귀찮게 따라붙는 시선이 없다고 생각하자, 어딘가 조심스러웠던 마음마저 씻겨 내려가 편해졌다.

“너 알아서 해라.”

곧이어, 잠시 날 응시하던 딜런은 가타부타 하지않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와중에도 시체놈이 뿜어낸 피거품들은 동산처럼 솟아나 근방을 장악해 나갔고.

준비가 끝난 딜런이 소리를 질렀다.

후우우우우욱—

— !

어떠한 소리도 없이 공간을 꿰뚫는 마력의 파동. 피거품 방울들의 중간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그 작은 구멍 사이로 찰나간 몸을 밀어넣어 진입한 나는. 어느덧 시체놈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 있었다.

— 그래, 제 발로······

“어. 들어왔다.”

뿌지지직!

공력을 가득 실어 진각을 쾅쾅 때려 밟았다. 환희하던 놈의 무릎뼈가 그대로 우그러지며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우그러진 무릎은 곧바로 재생을 시작했다.

후웅!

위로 그어지며 나를 동강내려는 칼날을 피해 팔을 타고올랐다. 얇은 줄 위에서 묘기를 보이는 곡예사처럼. 깡마른 팔을 딛고 어깨까지 올라선 나는 검을 뽑아 오형검의 일 초식과 이 초식을 연계했다.

출. 섬.

시간을 나눈 듯 느리게 흘러가는 장면 속에서.

섬전처럼 출수한 검끝에서 명주실처럼 가는 검강이 뽑혀나온다. 가늘게 기운을 뽑았다면 두껍게 늘릴 수도 있다. 두껍게 늘린 뒤에는 또다시 얇게 저밀 수도 있다.

그러니 나의 검은 형(形)을 그려내는 붓이다. 오형검의 일초와 이초는 형을 그리기 위한 준비 동작. 원하는 형태를 그려내기 위해 시작점에 겨우 선 것에 지나지 않았다.

스아아악—

검에서 뽑혀나온 기운들의 줄기가, 느릿해진 정신 속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놈의 전신을 덮어간다.

검강의 실을 뽑았으니, 그 실을 꼬아가며 형태를 만들 차례.

뇌와 경맥이 타는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러나 정기신이 합일하여 초절정 끝자락 이상의 경지에 오른 나는, 초식의 전개로 인한 부하를 버텨낼 자신이 있었다. 통증을 참아내며 계속 팔을 움직였다.

검법의 사조 되는 이가, 사형수의 목을 치기 전 발광하는 망나니를 보고 창안했다는 식.

오형검법 삼 초. 만휘극파식(滿輝極破式).

빛나는 검강 줄기가 허공을 어지럽게 수놓는다.

검강 줄기는 팔방의 극점을 따라 유려히 이어진다.

하나 둘 비어있는 공간을 메워간 검강 줄기는 어느새 시체놈의 팔방을 완전히 점했다. 삼 초의 과정을 펼쳐내느라 팔뚝의 근육들이 죄다 찢어졌으나, 나는 검끝을 멈추지 않았다.

쩌적-

유수처럼 검강 줄기를 그리며 팔방을 점해가던 검로에 어느 순간, 빗금처럼 작은 균열이 생겨났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낸 균열이었다.

쩌저저저저적—

놈의 귀에도 들렸을 것이다.

휘영청한 팔방의 극점을 따라 어떠한 형태를 그려가던 나의 검강 줄기들은, 마치 깨진 유리처럼 한순간 금이 가더니 반응할 새도 없이 찢어졌고.

무수한 갈래로 잘게 깨져나간 조각들이, 밝은 휘광을 발산하며 놈의 머리 위로 떨어져내렸다.

먼지처럼 작은 조각들이, 각자의 강기(罡氣)를 머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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