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현실 감각이라곤 쥐뿔도 없는
#139화.
암담하고 절망적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며 생존에 유리한가.
그것은 내가 아포칼립스 세계에 떨어졌을 때 빌어먹을 좀비떼를 피해다니며 십수년간 궁구한 것. 나는 꽤 여러 가지의 효율적인 생존 행동강령을 정립했다.
빛 한점 없고 개같은 괴성만이 귓전을 괴롭히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인간들은, 보통 작은 암실에 처박혀 지내는 시간이 가장 많았다.
왜냐하면 바깥으로 기어 나가봐야 약탈, 방화, 살인, 전투, 자살 말고는 할 것이 딱히 없다 보니.
하여간 암흑에 잠겨 강제로 사색하는 시간이 길다는 얘기.
서서히 미쳐가기에 딱 좋은 환경이라, 멀쩡히 살아갈 마음을 먹었다면 긍정적인 생각과 관점을 가지는 건 필수다.
그래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떠올리고 생각하며 문제의 답을 궁리해 내놓아야 한다. 되도록 ‘긍정적’ 으로. 그게 바로 효율적으로 시간을 때우는 방법이다.
뭐, 야시시한 생각이나 1+1 같은 간단한 수학 수식마저 좋다.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고 궁리하는 동안 현실의 막연하고 절망적이기만 한 상황을 몇 초라도 더 넘겨낼 수 있다면 충분한 성공이다.
마땅한 게 생각나지 않는다면 의식이 흐름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작은 혼잣말이나 농담을 섞어도 좋지. 입술을 덜덜 떨며 공포에 질려있어봐야 해결되는 것은 없으니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제 낙오된 지 한나절을 훌쩍 넘겼다.
베테랑 시체 사냥꾼들은 장벽 바깥에서 며칠이나 버티며 에센스를 채혈하는 자들도 있다지만, 그거야 말 그대로 시티 장벽이 보이는 곳에서 언제든 도망갈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으니 가능한 얘기.
게다가 거긴 시티가 내뿜는 밝은 빛도 있어서 그리 어둡지도 않고, 여차하면 장벽을 지키는 연방군의 지원도 받을 수 있는 거리에 있을 터.
우리는 시티 장벽과는 한참 떨어진 땅에서 대규모로 조난 당했다는 점에서, 그것과 비교가 불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멀쩡히 살아 남으려면 되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
‘배고프다. 이러다 살 빠지겠어. 체중 관리에 좋겠다.’
아.
확실히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게 쉽지만은 않다.
으으···
찰싹!
어디선가 힘겨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제 뺨을 철썩 철썩 때리는 소리도 들린다.
주민들의 몸에 투여했던 각성제와 부스터류의 효과들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전체적으로도 확연히 보인다. 아까 루돌프놈이 시체 다리를 뜯어먹으며 절대로 잠들지 말라고 위협적으로 엄포를 놓았는데도, 못 버티고 꾸벅꾸벅 조는 이들이 생겨났다.
햇빛이라도 비추면 주민들의 정신건강에 조금 낫겠는데, 일 년에 몇 번 비추지도 않는 해를 언제까지고 바랄 수는 없겠지.
구르릉···.
순간, 담벼락의 일부분이 무너졌다.
화들짝 놀란 주민들이 움츠러들었다.
꺄악—
동시에, 너덧 살쯤 되는 여자아이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주변의 주민들이 다급히 달려들어 입을 막았다. 만약 마법으로 소리를 차단해두지 않았다면 근방의 시체들을 이곳으로 소환하는 대참사로 이어졌을 것이다.
어째서인지, 점점 꽥꽥대는 시체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만 같다. 그저 환청이라면 좋겠다.
이제는 더이상 딜런처럼 합류해오는 실력자를 기대할 수 없다. 자그마치 한나절이 지났다. 힘이 남았다면 진작에 라그나로크 시티로 죽음의 행군을 떠났거나, 이미 죽어서 시체가 되었겠지.
재수가 없으면 시신도 못남겼을 수도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주민들의 안색이 어두워져 간다.
- 그래서, 저 인간은 결국 어떻게 할 거야?
그때, 귀를 세운 슬레모킨이 속닥이며 말했다.
이곳에는 황금빛 플라자 최상층처럼 화려한 원탁은 없었으나, 우리는 이전부터 찾아온 딜런의 처우를 놓고 슬레모킨과 집행관, 종후표와 함께 간단한 토의를 벌이는 중이었다.
나는 긍정적인 마음을 집어치우고 대화에 집중했다.
- 자기들만 살겠다고 주민들을 버리고 온 걸 수도 있다.
- 그건 아닐 거다. 나 백리뇌부 종후표가 앵무새의 눈썰미로 볼 때, 극한으로 몰린 상황에서 거짓 이야기를 지어내 늘어놓을 이유는 없다. 군벌이라도 성정이 야비한 놈이면 큰 세력 못 다루지. 그러니까 차라리 에센스를 주고 힘을 보태게 만드는 쪽이 생존하기에 낫겠다.
- 네 에센스도 아니잖아. 누굴 주라 마라야.
- 9레벨이랑 저 둘이 마음먹고 배신하면······알지?
- 변절할 마음을 먹었으면 이미 했겠지. 우리를 농락하는 거면 몰라도.
- 그럼······
이제는 결정을 내리고, 움직여야 할 때.
나는 일행의 유일한 9레벨인 딜런을 바라봤다.
후우—
중간에서 눈이 마주치자, 그가 뿜어낸 담배연기를 마법으로 가라앉히며 말했다.
“편하게 마탑에서만 지내는 새끼들이라 그런가? 음흉한 쥐새끼처럼 몰래 속닥이는 건 언제 끝낼 생각이냐.”
“어, 방금 막 끝낸 참이다.”
딜런은 얼마나 힘겨운 전투를 거쳐 이곳까지 도착했는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기력을 다 회복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늘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로키 시티에서 수없는 전쟁을 치르며 산전수전 다 겪어본 군벌인데도 저런 꼴이라니.
“그래서, 어떻게 결정이 났냐.”
나는 딜런의 곁에 누워있는 둘을 바라보았다.
딜런을 보좌했던 둘은 슬슬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7레벨 끝자락에서 8레벨쯤 되는 이들이었는데, 아마도 시체와 전투를 벌이다 원기가 크게 쇠했을 것이다.
“같이 간다. 살아남은 네 새끼들도 데리고.”
“······.”
스윽—
그리 결단을 내린 나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딜런의 실망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이런 병신, 에센스는 이미 한참 전에 먹여봤다. 어지간한 9레벨급 에센스라도 가져오지 않는 이상 어림도 없지.”
그는 한심하다는 듯 욕설 섞인 비아냥까지 던지며, 자포자기한 얼굴로 드러누워버렸다.
* * *
“씨발.”
빠악!
레반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던 딜런의 태도가 급변해 제 뺨을 후려쳤다. 그의 손바닥이 워낙 거대한 탓에 얼굴가죽이 찢어질듯 돌아갔다.
“······대체 뭐, 어이가 없군. 칠좌 아들이라도 되냐?”
레반은 딜런과 그 보좌 둘에게 가륵의 에센스를 몇 방울 내주어 몸을 회복하게 했다. 덕분에 이제 에센스가 절반도 남지 않았다. 레반은 순간 보좌 둘의 눈이 탐욕으로 번뜩이는 걸 보았으나, 인간은 원래 본질적으로 탐욕스러운 존재라 신경쓰지 않았다.
보좌 둘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 감사합니다.
그러다보니, 레반을 향한 딜런의 묘한 시선도 호의적으로 바뀌어갔다.
여태까지는 ‘좆같다’ 는 말로 일관하며 별 움직임은 없는 딜런이었으나, 이제는 경계심을 풀고서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로키에 9레벨 여덟만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점창의 육장도가 말했던 게 뭔지 알았어. 분명히 십이제급의 힘을 가진 놈이 후방보다도 멀리서 행렬을 따라오고 있었다. 풍기는 기운이 옅더라도 칠좌가 아닌 이상 내 눈은 못 속이지, 굉장히 유령같은 놈이더군.”
딜런은 뜸도 들이지도 않고 말을 꺼내 이어갔다. 정리되지 않고 두서가 없었으나 나름 긍정적으로 들을만한 얘기, 레반은 넉넉히 이해해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주민들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지?”
“모른다. 다만 짐승 털같이 빳빳한 의복을 두르고 있는걸 어쩌다 봤다.”
“짐승 털?”
“그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알아는 둬라.”
레반은 딜런의 얘기에 머리를 주억였다.
딜런 일행의 회복이 끝나자마자 다시금 이동을 시작할 계획을 세웠다. 그 전에 무엇이라도 새로운 정보를 얻어 나쁠 건 없으니 말이다.
이제 딜런과 보좌 둘까지 포함해 전투원은 열 명 남짓.
사실, 열 명 남짓의 전투원으로 오백이 넘는 주민들을 이끌고 땅을 횡단하기에는 벅차다. 원래 초식동물들은 최대한 많은 무리를 이루어야 포식자의 눈에 띄어도 살아날 확률이 높은 법인데······.
다른 뾰족한 방법이나 대안이 없었다.
그저 하늘에 맡기고 가는 수 밖에.
헌데.
딜런과 보좌 둘의 회복이 마무리 되어갈 즈음이었다. 설핏 잠든 주민들을 깨우느라 아주 약간 부산해지던 시점.
— 안녕들 하신가. 여기에 잔뜩 모여 있었군.
······어떤 존재가.
그들이 숨어있던 담벼락 위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정말로 불쑥.
그것도 상당히 능글맞은 태도로, 두 팔을 당당히 위로 치켜들고서.
누구에게도 초대받지 않은 그 방문자는 루베르겐 집행관이나 딜런처럼 키가 컸다. 팔 다리는 수수깡처럼 얇아 깡마른 행색이었으며, 어찌보면 마르고 큰 인간으로도 보였다.
소름 끼치는 요기와 비대칭으로 일그러진 안면만을 제외하면 말이다.
깡마른 그 존재의 등장 이후로, 사위가 쥐죽은듯 고요해졌다.
일행 중 누구도 근방에 저런 모습의 시체가 돌아다니는 것은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시체 비슷한 것은 마탑이 여기까지 돌파해 오는 동안 전부 죽여버렸기에.
게다가 일행이 머무르는 폐허 도시는 꽤 고지대라, 밑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면 반드시 눈에 띄었어야 했다. 그러나 별다른 기척도 없이 여기까지 올라와 마법으로 친 막까지 가볍게 뚫어내고 담벼락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답은 단 하나였다.
“······시체다.”
최소 9레벨 이상의 강력한 개체.
철컥!
소음을 막는 마법의 장막 아래.
슬레모킨이 펌프액션 샷건을 꺼내들어 조준했고, 딜런이 눈에 마력을 담아 그 불청객의 움직임을 응시했다. 레반마저 광선의 검집에 손을 올려두고, 출수할 준비를 마쳤다.
털썩-
그런데.
“?”
갑자기 나타난 깡마른 불청객은, 그들을 향해 더 다가가지 않고 담벼락 옆 바닥에 궁둥이를 붙여 앉았다.
당황스러운 시선이 여기저기서 교차하던 순간.
— 나는 과거, 사파의 무인이었다.
모두의 앞에 홀연히 나타난 그 시체는 자신이 70여년 전, 7레벨 초입에서 오를 수 없는 벽을 마주한뒤 변절해 지금의 수준이 되었다며 장황하게 자기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 친구를 만난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당해서······
아무도 그 기이함과 이질감을 지적하지 못했다.
— 사파는 정파에 비해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이었지. 그 당시에 절정 경지의 무인이었는데도 떨거지 취급이나 받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보면 그야말로 당당하지 아니한가?
그러다 대뜸.
쯔거걱-
시체의 깡마른 팔에 오톨도톨한 돌기가 돋아났다. 어지간한 특수합금보다도 단단하고 질겨보이는 외갑피. 그리고 그 신체를 길게 뽑아내 연성해낸 피륙의 칼날이 자연스레 연계되어 형태를 잡아갔다.
— 잘 봐라.
서걱-
시체는 자신의 육체를 이용해 연성한 칼날로 제 팔을 잘랐다가 붙이는 짓을 반복했다. 깔끔하게 잘려나간 신체 말단은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자석처럼 붙어버렸다.
인간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회복력.
깡마른 시체는 팔을 자르면서, 물 흐르듯 말을 이어갔다.
— 어떠냐? 이쪽의 삶도 생각보다 재미있을 거다. 강력한 육체와 충만한 내력을 지닌채 영생을 구가한다. 인간을 잡아먹고 싶어지는 부작용이 있지만, 그래도 꽤 동하지 않는가? 어째서 꺼려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시체의 일그러진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이후에도 깡마른 시체는 실로 기괴한 행동과 말들을 설파하며, 듣는 이들을 변절의 길로 회유하려 들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레반을 포함한 마탑의 마법사들은 큰 소란을 만들기가 싫었기에 적당히 들어주는 척했다. 저리 강해보이는 개체와 무력으로 부딪치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쓴 것이다. 당장은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렇게.
변절자가 되지 않겠냐며 꾸준히 제안하던 깡마른 시체가, 인간 시절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지까지 얘기가 오갔을 때.
“큭.”
듣고만 있던 딜런이 불현듯, 흉터를 벅벅 긁으며 웃었다.
“솔깃하네.”
— 오호, 떠든 보람이 있구나!
깡마른 시체의 혈색없는 얼굴이 더 일그러지며 화색을 띠었고, 반대로 마탑 쪽의 안색은 심히 파리해졌다.
유일한 9레벨인 딜런이 변절을 선택하면 말 그대로 여기서 끝이다. 이곳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으리라.
“그런데 딱 하나, 이해되지 않는 게 있다.”
— 뭐지?
그러나 딜런은, 그런 예상과는 다르게 쓰디쓴 미소를 머금고는 입을 열었다.
“변절이 그리도 대단한 게 맞다면, 70년 전 7레벨에서 변절을 택한 네놈은 왜 아직도 나와 비슷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거냐. 난 그 시절에 동네서 사탕이나 빨던 애새끼였는데. 괜찮다면 이해를 좀 시켜 주겠나? 보나마나 병신 같은 변명이겠지만 한 번 들어는 보겠다.”
— ······.
딜런은 오합지졸인 이들을 규합해 한 세력을 일군 거물답게 입담이 걸걸했으며······변절할 마음 따위는 애초부터 조금도 없었다. 또한 흐름을 읽는 눈도 뛰어났다. 이미 들켜버린 이상 전투는 애초부터 피할 수 없는, 확정된 결말이었다.
“개지랄을 떨더니. 주둥이 막혔냐? 버러지놈.”
그렇게, 딜런이 굳건한 눈으로 시체를 주시하자.
— 킥.
시체의 전신으로 새어나오던 요기가 꿀렁이더니.
끼드드득—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깡마른 시체의 목이 거꾸로 돌아갔다. 빙글빙글 돌던 목은 마치 꽈배기처럼 꼬여 주위의 인간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그 안면은 이제 비대칭과 일그러짐을 넘어 형태가 뭉개지는 바람에 점점 추상적인 미술 작품처럼 변해갔다.
— 굳이 시간을 할애해서 설득했건만, 인간은 왜 이리 멍청할까?
깡마른 시체는 얼굴을 가리며 슬며시 웃더니, 창졸간 자신의 피륙으로 빚어낸 칼날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그러자 근처의 땅이 쩌억 갈라지며 천지가 우르릉 울렸다.
꽈과과광—
동시에, 피부가 따끔따끔할 정도로 예리한 요기가 시체의 전신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막대한 압력을 버티지 못한 주민들 몇의 눈과 귀,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이내, 근방의 지면이 미세하게 진동한다.
두더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그리도 피하고 싶었던, 큰 소란이 벌어져 버렸다. 모든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진 것이다.
스아아아아—
그러거나 말거나.
천지 아래로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딜런의 마력.
딜런이 대기의 마나를 잔뜩 빨아들이며 입을 열었다. 딜런의 시선은 이전부터 무심한 표정의 레반을 향해 있었다.
“그거 알고 있냐? 나 혼자라면 도망칠 수 있다.”
그 말에 레반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아마도 이 자리가 우리의 공동묘지가 되겠군. 나만 믿고 따라온 새끼들을 사지로 밀어놓고서 혼자만 살아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거든.”
“그럼 우리가 도망갈 동안 시간이라도 벌어주겠다는 건가? 하긴 당신이 자극했으니까.”
“···이런 상황에도 그 주둥이에서는 농담이 나오나?”
딜런의 그 못마땅한 질문에.
스르릉—
레반이 광선을 길게 뽑아들며 말했다.
“어, 아포칼립스에서는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뭐 버티고 또 버티다보면 누군가 도와주러 오겠지. 그런데 계속 입으로만 싸울 생각인가——-”
탓!
그 문장을 다 끝맺기도 전에, 섬전처럼 쇄도한 레반의 오색검강이 붉게 꿈틀대는 시체의 피륙도와 합을 이루었다.
레반이 남긴 마지막 말꼬리가 길게 늘어지며-
오색섬광과 똬리를 튼 요기가 뱀처럼 뒤엉킨다.
콰과과광—!
“······크하하!”
그 광경을 본 딜런은 돌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이내 흉터 가득한 얼굴을 잔뜩 찡그린 딜런은 앞서 쏘아진 레반을 은근히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노려보다가···
지극히 힘빠진 음성으로 뇌까렸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긴 씨발. 나 아니면 네놈처럼 성격 좆같은 사내놈들을, 어느 누가 이런 사지까지 도와주러올까. 낭만파야? 하여간 현실 감각이라곤 쥐뿔도 없는 새끼 같으니라고.”
곧이어.
콰앙!
솥뚜껑같은 두 손에 마력을 가득 주입한 딜런도, 전투를 벌이는 레반을 따라 허공으로 높이 솟구쳤다.
* * *
수르트 시티, 남경.
오늘, 화산 그룹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 오오오······.
화산의 미래이자 무림계 최강의 재능을 지녔다 평가받는, 화령검절 청풍이 드디어 오랜 폐관을 끝내고 세상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기암괴석 위에 자리잡은 화산의 문도들은 청풍을 보며 하나같이 경탄을 머금었다. 초절정의 초입에서 폐관에 든 청풍의 기도는, 그전과는 또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 약관을 갓 지난 나이에 저만한 경지라······괴물이야. 괴물.
10레벨의 경지를 달성한 하오문주, 독고웅백에게서 사사한 심득까지 익힌 최강의 후기지수.
아니, 이제는 후기지수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경지의 무인이 화산 암석 위에 오롯이 서있었다.
이윽고, 암석을 벗어난 청풍은 의복을 바로하고 장문인의 처소를 찾아가 선천자의 앞에 정중한 예를 올렸다.
그런 뒤, 곧바로 천무진을 만나 현재 크게 화제가 되고 있는 사태의 자초지종을 전해 들었다.
청풍이 잘생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형장이 말입니까?”
“그렇다. 절대로 어디가서 쉽게 죽을 사내는 아닌데, 아무래도 장벽 밖이라면 상상초월의 괴물들이 즐비할 테니 위험······.”
“하하하! 그것 참 잘 되었습니다.”
“?”
“폐관의 성과가 마침 궁금하던 참입니다. 거기가 어디라고 했지요?”
장벽 밖 어딘가에 조난당해있을, 레반의 행방에 관해.
* * *
같은 수르트 남경, 어딘가.
— 보은패는 쉽게 생각해서 될 물건이 아니다.
당가의 무인이라면 알고 있는 사실이다.
보은패.
당가주나 실권을 받은 소가주, 혹은 당문의 대원로 배분쯤은 되어야 가문의 보은패를 타인에게 건넬 자격이 있다. 그러니 그 의미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시초부터 지금까지, 은원(恩怨)이라는 가치를 병적으로 지켜온 사천당가였다. 은과 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과거 천하제일독가, 현재는 무림계 메가콥 사천당가 코퍼레이션을 지탱해온 독기이자 신념.
그런데.
자그마치 당가의 ‘소가주’ 가 발급한 보은패를 가지고 있는 자가-
대대적인 습격으로 탈출 행렬이 이어지는 로키 시티와 라그나로크 시티 사이 어딘가에 고립되었다는 소식이, 당가의 귀에 들려왔다.
백만방도 포털에 관련한 뉴스가 오르내리기도 전에 당가는 소식을 먼저 전해 들었던 것이다. 그때보다 시간이 더 지났을 테니, 어쩌면 그 보은패를 쥔 사내는 이미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살아있다고 해도, 혹은 죽었더라도 당가의 입장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살아있다면 정중히 당가의 본각으로 뫼셔올 것이며, 이미 죽었다면 흉수를 추적하여 한줌 독수로 녹여버리면 그만인 일이니.
“······.”
과거 그 사내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남았던 당령이, 출전하는 당가의 무인들 앞에 서서 스산한 시선을 보냈다.
* * *
한편.
발할라 시티.
시립 아카데미에도 ‘그 소식’ 이 전해졌다.
로키 시티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을 규합해 라그나로크까지 육로 횡단을 결정했다는 미친 영웅들의 소식이 여기까지도 전해진 것이다.
포털 기사는 1분 간격으로 새로고침되어 업데이트되는 중이었다. 실제로 고립당한 누군가도 혀를 내두를 만큼 세세하게.
백만방도 포털을 통해 조난당한 이들의 대략적인 명단이 존재했는데,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마탑이 있는 만큼 발할라 시티 전체가 발칵 뒤집어질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어떤 남자가 있는지도.
“······얘는 뭐 사건 터지는 곳마다 끼어있어?”
뉴스기사를 읽던 루벤카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도 레반이 나서서 미친 짓을 했을 것은 자명했다.
그런데 연방이 밀어주었던 젊은 영웅께서는 기사화되기에 아주 손쉬운 먹잇감이란 말이지.
이미 레반을 포함한 다른 이들의 죽음을 상정한 황색언론의 자극적인 기사들이 우수수 쏟아지고 있다.
그랬기에.
뚝···
뚝···
뚝···
조금 전부터, 레나의 턱 밑으로 흐르는 눈물이 도통 그칠줄을 몰랐다. 아무리 달래보고 달콤한 소리를 해도 의미가 없다.
루벤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하아······미치겠네 진짜? 레나, 장벽 바깥은 인간이 나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삼존칠좌가 친히 나설리는 없으니까 그냥 알아서 잘 살아오기를 바라야 하는 건데, 당연히 걔 수준으로는 뭐 백퍼센트 죽······아, 아니다! 아주 희망이 없지는 않고오—”
풀썩.
레나는 결국 눈물을 흘리다 기절해 쓰러졌다.
“······하아, 썅. 기레기 새끼들.”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쉰 루벤카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한 뒤, 저택의 주인인 론 카산드라 교수를 찾아갔다.
찾아가봐야 별 소득을 얻을 수 없겠지만, 이럴때 뭐라도 액션을 취해야 나중에 뒤탈이 적을 것만 같아서.
그런데.
“루벤카, 무슨 일이죠?”
“?”
루벤카가 찾아오기도 전에, 론 카산드라 교수는 이미 자신과 뜻을 함께한 아카데미의 마법학 교수들과 함께 어디론가 출정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심지어 인상이 지극히 흉흉한 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론 카산드라 교수는, 막대한 재물을 풀어 베테랑 시체 사냥꾼들을 섭외 해놓은 것이다.
루벤카는 익숙한 교수들과 사냥꾼들의 살벌한 면면들을 확인하다, 바보처럼 벙찐 얼굴로 물었다.
“······뭐, 다들 어디 가시게요?”
* * *
숭무교(崇武敎)의 제단.
“교주님. 용두방주의 전갈입니다.”
숭무교, 무를 숭상하는 이백만의 교도를 거느린 교단.
드높은 제단 위에 나른히 앉아있던 숭무교주는, 개방의 용두방주(龍頭幇主)가 보내온 전갈을 펼쳐 확인했다.
그리고 지금 전갈을 펼친 그는.
하오문의 유일한 주인이기도 했으며.
숭무교의 교주이기도 한 백면서생.
독고웅백.
평소의 수더분한 복장 대신 화려한 교주의 의복을 걸치고 있던 독고웅백은, 용두방주가 보내온 전갈을 반쯤 읽더니 품에 접어 넣었다. 그러고는 휘적휘적 일어나 숭무교의 제단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그러자.
거대한 대전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자들이 일거에 기립하여 독고웅백의 발자취를 쫓아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숭무교의 거대하고 웅장한 제단이, 수많은 교도들의 발울림에 흔들리고 있었다.
···
그렇게, 저마다의 이유에 따라.
유수한 세력들이 장벽 바깥으로 향하고 있는 사이.
알 헤임달 시티 북부.
엘프들의 근거지인 세계수 최상층.
누군가의 곁을 지키던 토퀸타이아의 나긋한 목소리가, 고요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정말···이번마저 그 아이를 내버려 두실 건가요? 누군가를 구하려다 그렇게 되었다잖아요. 그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잖아요······아이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