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노력
#138화.
사방팔방으로 잘게 쪼개진 생존자들의 행렬.
7레벨 이상의 강자들도 영화 속 영웅은 될 수 없었다. 다들 제 한목숨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으니.
하기야 칠좌 능광객의 전언을 받잡아 여기까지 끌고 왔다지만, 목숨을 위협할 만한 일이 터지면 막상 소중히 챙기는 것은 본인과 주변인의 목숨 아니겠는가.
처음부터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예상했다.
100km가 넘는 긴 여정을 자동차와 캐리어같은 수단도 없이, 끝도 없이 늘어선 주민들의 행렬까지 지켜내며 걸어 급속행군을 마쳐야만 했다.
깔끔하게 닦여있는 길이라 해도 온전한 성공을 장담하기가 힘들진대, 사방에서 인육을 탐내는 시체들이 피냄새를 따라 습격해오고 진창처럼 발이 푹푹 빠지는 땅이거나 경사가 급한 능선을 넘어가야 하는 곳임에야···
혈관에 투여하면 이틀 정도는 졸리지 않게 만들어주는, 마치 시체처럼 계속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테크 각성제를 비롯한 각종 부스터류를 주민들의 몸에 쏟아붓고 출발했다지만, 그것으로도 명확한 한계는 있었다.
이제 주민들은 길어봐야 이틀 정도 버틴다.
정말로 길면 사흘 정도일까.
장벽이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낙오되고 조난당한 상황. 수면도 불가하고 식량도 부족한데 어둡기까지 하니 정신적인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심할 것이었다.
거기다 발밑에서 미세한 진동이라도 느껴진다면 즉시 자리를 피해야한다. 조금만 느릿하게 움직여도 피부가 긁혀 감염되거나 갈고리 손에 붙잡혀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신경이 내내 곤두서있을 수밖에.
“음, 근처를 둘러 보고 왔다.”
그때, 우리가 낙오한 근방의 지형을 정찰하기 위해 공중으로 떠올랐던 종후표가 어깨에 내려앉았다. 인간의 몸으로 높이 비행했다간 필시 발각당해 시체들의 추격이 시작될 것이라 생명체가 아닌 법기를 보낸 것이다.
말 많은 종후표도 지금만큼은 조용히 읊조렸다.
“그나마 이 근방에 비해서는 우리가 있는 곳이 상당한 고지대다. 과거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도 근처에 산재해 있으니, 작은 도시가 있었던 땅 같다. 다만 워낙 사방이 어두워서 멀리까지는 안 보이더군. 아무래도 빛이 없어서 가시거리가 너무 짧단 말이지.”
아마 먼 과거에 진즉 멸망한 동네.
유적 도시처럼 건물의 큰 담벼락과 무너지기 직전의 창고 몇 개만이 남은, 주변 지형으로 유추해보면 인구 수천 명 정도나 겨우 모여 살았을까 싶은 소규모의 마을이다.
아예 사방이 탁 트인 평야 한복판까지는 아니고 잠시나마 몸을 숨길 인류의 유산이 있다지만, 그래도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은 고립된 것이다.
본대와 외따로 떨어진 우리 일행은,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펼치며 시체들의 방파제를 뚫어내고서 겨우 이곳에 도착했다. 사실 여기까지 오백이 넘는 주민들을 살려서 데려온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아마도 오늘이, 여섯 번째 마탑 역사상 가장 많은 시체를 성불시킨 날로 기록되지 않을까.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담벼락에 딱 붙은 주민들을 세어보았다.
‘오백······하고도 열넷인가.’
514명.
아까의 거대한 행렬 규모에 비하면 소수였다.
주민들 중 팔이나 다리를 사이버웨어로 개조한 이들이 조금 있지만, 그것마저도 값싸고 흔해빠진 보급형에 불과한 물건들이었다.
사이보그급으로 교체하지 않은 이상 본질은 사람인지라 공업용 기계처럼 무한정 움직이지 못한다.
저런 파츠로는 몰려오는 시체를 상대로 대항할 수 없다. 그러니 저들을 전투원으로 쓰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게다가 이미 70km 가까운 거리를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아서 주파한 이들이다. 인간의 시신과 시체들의 육편으로 가득찬 늪을 지나고 소름끼치는 시체들의 요기를 버텨내며. 단 한 시도 쉬지 못한 채 말이다.
힘이 남아있는 전투원은, 나와 루돌프놈 정도.
“······별로군.”
나는 그렇게 고요히 뇌까렸다.
빌어먹을 아포칼립스 상황에서 인간이란, 참으로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아무튼, 행렬을 이어오던 인류는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에는 높고 두텁게 쌓아 올린 인류의 장벽도, 화기를 든 군인도, 도망칠 캐리어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콘크리트의 안전지대도 없다.
오로지 힘으로 헤쳐 나가야만 할 것이다.
아힘사의 방랑 경험이 작은 도움이라도 되길 바랄 뿐.
벅벅-
나는 우선 미어캣처럼 모여있는 주민들에게 땅의 흙을 걸러 피부에 문지르라 명령했고, 이후 마법까지 사용해 외부로 풍겨나가는 인간의 냄새를 지우고 가렸다.
무림 강호와 라아기스 대륙의 전장에서 구르며 온갖 잡기까지 몽땅 익혀놓은 게 도움이 됐다.
칼과 활이 오가는 전장에서는 노련한 잡기에 통달한 자들이 많았으니.
“후우······형님, 이러면 라그나로크 시티까지 또 얼마나 가야 하는 겁니까? 시체 새끼들 뚫고 오느라 아까보다도 더 멀리 떨어진 것 같은데요.”
그때, 루돌프놈이 슬쩍 물었다.
나는 조금 생각하다 대답했다.
“도망치다가 방향이 아예 틀어졌다. 조금 더 돌아가야 할 거야. 70km 지점에서 전투가 크게 벌어졌고 반대로 도망쳤으니, 어쩌면 지금 온 것보다 더 먼 거리를 가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온 것보다 더요? 그럼 진짜 빼도 박도 못하고 좆된 거 아닙니까? 다들 지쳤는데.”
“돌프야, 너는 그걸 이제야 알았구나. 장하다.”
“형님.”
“왜.”
루돌프놈은 언제나 그렇듯 눈치도 없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더니, 가슴팍을 탕탕 두들겼다.
“그럼 저 혼자라도 라그나로크 시티까지 달려서 지원을 끌고 오겠습니다. 저는 뭐 물려도 괜찮잖습니까. 아시죠?”
“네가 가면 난 뭘 타고 다니냐.”
“······예?”
“솔직히 말하면 네가 멍청해서 못 믿겠다.”
“아무리 그래도 말을 너무 거칠게 하시는 것 같은······.”
“라그나로크에 가봐야 네가 이 용담호혈까지 누굴 끌고 올 수가 있을까. 뭐 연방군이 얼씨구나 하고 여기까지 행차해준다냐?”
“······설득을 또박또박 잘하면 되지 않을까요.”
“닥쳐. 그리고 바깥으로 머리 내밀지 마라. 걸리면 다 몰려온다.”
“악!”
루돌프놈의 머리를 잡아 진창에 박아버렸다.
우리는 숨조차도 조심히 쉬어야 하며, 땅 밑으로 미세한 진동이 울려 퍼질까 쉽게 발을 떼지도 못하고 있다.
땅 밑에 사는 두더지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개미지옥마냥 거대하고 깊은 싱크홀을 만들어 인간을 몰이사냥하는 꼴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꽤애애액—
새벽녘 닭마냥 괴성을 지르는 시체들도 퍼져있다.
누가 모가지라도 붙잡아 비트는지, 사람 그림자만 봐도 미친듯이 지랄을 떨어대는데 그 괴성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
한번 걸렸다하면 일대에 있는 시체들을 죄다 그쪽으로 불러온다. 그런 놈과 더불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비행류와 땅 파서 습격하는 두더지들을 항시 경계해야하니, 집중력은 앞으로도 무한히 유지될 리가 없겠지.
우선, 부지런히 기감을 펼쳐가며 주위를 확인했다.
‘감염자는 아직 없군.’
천만다행히도, 일행과 주민 중 감염자는 없다.
다만 특이한 봉법을 쓰는 9레벨급 시체와 마력을 해방한 루베르겐 집행관의 전투에 휘말렸던 슬레모킨이 꽤 심한 내상을 입었을 뿐.
“으으으······.”
한쪽에서 연신 들려오는 신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져버린 슬레모킨이 처연한 얼굴로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회로는 가동할 만한가?”
“······응, 그런데 하루 정도는 제대로 마력을 쓰기 힘들 것 같아. 그래도 어떻게든 민폐는 안 끼칠 거니까 신경은 쓰지—”
나는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런 뒤, 유리병을 꺼내어 몇 방울을 덜었다.
그것은 능광객이 ‘가륵’ 의 피에서 짜낸 농후한 에센스.
“마나회로는 멀쩡하다니 불행중 다행이군.”
“······응?”
슬레모킨은 그게 왜 네 손에 있냐는 듯, 당황하며 나를 올려보았다. 갑작스레 눈가가 그렁그렁해지는 것이 당장 닭똥같은 눈물을 흘려도 이상치 않았다.
그래도 슬레모킨은 상황파악을 빨리 끝냈다. 나는 로키의 절대자인 능광객과 유일하게 독대한 사내인 것이다.
“어쩐지 그 언데드들 머리만 뽑혀있고 몸은 없더라니······근데 이렇게 귀한 걸 내가 마셔도 돼?”
뚝···
슬레모킨이 입가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말했다.
“빨리 마셔라.”
“나, 나 정말 괜찮은데.”
그렇게 슬레모킨은 몇 번 거절하는 척을 하나 싶더니, 나중에는 꿀꺽꿀꺽 잘만 받아먹었다. 축 처져 있던 슬레모킨의 귀가 에센스 한 방울마다 조금씩 일어나 나중에는 쫑긋하게 섰다.
잠시 뒤.
내가 슬레모킨의 등에 손을 얹고 기운을 흘려넣어 마나회로를 자극시켜주자, 이내 에센스의 기운이 회로에 스며 들었는지 슬레모킨의 심각했던 내상이 점점 회복되어 가는 게 느껴졌다.
“말도 안 돼······.”
슬레모킨은 고작 에센스 몇 방울로도 금세 내상을 털고 일어났다.
확실히.
‘녹량백량’ 이나 ‘바만차’ 의 에센스보다 효과가 좋은 듯하다. 가륵은 바만차보다도 더 강한 놈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못해도 9레벨 끝자락 이상일까.
완전히 괴물같은 놈. 그러니 9레벨들을 상대로도 마음껏 피를 뿌리고 다녔겠지.
그때.
“······.”
슬레모킨 옆에서 숨을 고르던 루베르겐 집행관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 * *
시간이 조금 지났다.
우리는 아직도 담벼락 뒤에 딱 붙은 채, 제자리였다.
나는 극히 지친 기색의 루베르겐 집행관에게도 가륵의 에센스를 몇 방울을 흘려 주었고, 나도 몇 방울을 마셔 빠져나간 기력을 회복하는 때를 가졌다.
평소라면 이리 귀한 에센스를 이리 소모품으로 낭비하지는 않았겠으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근데 마탑주님은······.”
어느덧 내상을 다 치유한 슬레모킨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우리와 떨어져 싸우다가 결국 사라져버린 마탑주를 걱정하고 있다.
“우리 위치를 알더라도 오지 않는 게 낫다.”
“그건 그렇겠네. 시체들이 따라올 테니까.”
일레힌 포이체카는 손가락 군집과 싸운뒤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몸으로, 9레벨급의 요기를 가진 시체와 전투를 벌였다.
적은 손톱을 포함한 다리가 극도로 발달한 인간형의 시체였는데, 격외의 탄성을 지녀 뛰어다니는 속도를 눈으로 좇기도 쉽지 않았다.
“하아, 이 근처에 9레벨급이 그렇게 많은 건가?”
“그건 아닐거다. 아마도 로키 시티에서부터 저레벨 시체들을 강제로 밀어넣으며 어둠 속에서 따라왔겠지.”
“그런데 여기에 계속 숨어있어도 되는 걸까? 장벽 밖이라 그렇겠지만 통신도 전부 먹통이야.”
“······.”
어둡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괴성들에 괴롭다.
지금은 무너진 건물 담벼락 밑에 잘 웅크려 있지만 누구 한 명이라도 발각당하는 순간 다시 미친듯 뛰쳐나가야 한다.
라그나로크 시티, 수십km는 떨어진 곳을 향해서 무작정.
과연, 여기있는 모두가 그 부하를 버틸 수 있을까?
내가 그리 답없는 고민을 하던 때였다.
[ 요기가 느껴지는군. ]
루베르겐 집행관의 말이 들려오자마자 즉각 고개를 돌렸다. 이미 내 눈은 주민들의 머릿수를 확인하고 있었다.
결과는 오백 열 다섯.
아까는 분명, 오백 열 넷이었는데.
하나가 늘었다.
“······.”
에센스로 기력을 회복하며 지체한 시간은 고작해야 30분 정도.
대체 언제 그 짧은 사이에 끼어든 걸까.
닫힌 상단전이 벌써 그리워지려 하는군.
···열려있었다면 즉각 인지했을 텐데.
나는 루베르겐 집행관과 조용히 전음을 교환하다 슬쩍 일어나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오백 명이 넘는 주민들.
일반인이니 감염의 확산은 순식간일 것이다. 그래서 옹기종기 뭉치려는 주민들을 조금씩 떨어뜨려 놓았는데, 눈치는 또 더럽게 빠른 놈이 끼어들었는지 곧장 억눌렀던 요기를 끄집어 내려 했다.
하지만.
퍼억!
그사이, 요기의 진원지를 알아챈 나는 순식간에 주민들 사이로 짓쳐들어 누군가의 목을 붙잡았다.
미세한 요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왜, 왜 이러세요!”
“······.”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놓아주세요. 제발요.”
그것도 신동경 특유의 억양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환락의 도시이니만큼, 조금 여유로우면서도 나른한.
— 혹시, 왜 그러시는 겁니까? 우리와 로키부터 계속 같이 있던 분입니다.
남은 주민들의 대표격 되는 중년이 나서 물었다.
기감을 집중해 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숱한 전투를 지나온 덕에 피로한 주민들의 기억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리라. 주민들은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하나 둘 소란스러워지며 원래 옆에 있었던 사람이라며 두둔하려 들었다.
스걱-
순간, 목을 붙잡은 여인의 머리칼을 마법의 칼날로 잘라보자, 목 안쪽에 숨겨진 아가미같은 부위가 드러났다.
우두둑.
나는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손아귀에 강기를 흘려넣고 힘을 주었다. 여자의 얼굴에 피가 몰려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꽤애액— 소리를 지르려기에 목을 붙잡고 분질러버렸다.
뿌드드득···
— 걸렸네.
목이 밑으로 축 처져 덜렁이던 여자가 히히덕대며 웃었다. 목이 부러져 그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만 새어나왔다.
이토록 장벽 밖은 인류에게 너무나도 불리하고 가혹하기만 한 환경이다.
서거걱—
나는 놈을 광선으로 수십 토막 내버리고 피냄새가 퍼져나가지 않게 불태워버렸다.
우리는 그 사태 이후로, 오백이 넘는 주민들의 몸에 기운을 주입해 한 명 한 명 확인해봐야 했다. 그 작업이 끝나니 후련함보다는 탈력감이 밀려왔다. 신경쓸 것이 한 두개가 아니다.
지체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민들의 공포심은 점점 치솟았다.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도 없이, 불도 함부로 켜지 못하는 어둠 속에 꼼짝없이 갇혀있다 보니 헛소리를 하며 선동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점차 주민들의 통제가 힘들어질 때쯤.
“여기에 있었나?”
“······.”
만신창이가 된 얼굴에 흉터가 더욱 늘어난.
“······살아있어서 아주 반갑다. 좆같은 애송이.”
기진맥진한 행색의 딜런이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휘하에 있던 군벌세력의 수하들을 비롯해 같이 흩어졌던 주민들을 모두 잃고···
고작해야 다 죽어가는 두 명의 보좌만 남긴 채로.
* * *
우리와 같이 후방의 대열을 지키던 딜런은 9레벨의 마법사.
그는 기운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던 슬레모킨과 루돌프놈의 기척을 쫓아 여기까지 당도한 것이었다. 기감을 넓게 펼쳐봐도 시체의 요기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꼬리도 붙지 않은 듯했다.
“너는 용케도 살렸군. 적어도 오백은 넘겠어.”
숨을 몰아쉬다 철푸덕 앉아버린 딜런을 보며 내가 물었다.
“데려간 주민들은 어디있지? 아까 같이 흩어지지 않았나.”
툭. 툭.
딜런이 피에 젖은 담뱃갑을 치며 비웃었다.
“말했잖냐. 현실이 동화인 줄 알아? 어떻게 됐을 것 같은데?”
“···알겠다.”
딜런의 눈빛에 체념과도 비슷한 것이 차올랐다.
“겨우 여기까지 찾아오긴 했다만. 이 지역은 라그나로크 시티 장벽에서 50km는 떨어져 있을 거다. 연방에 정확한 위치를 알릴 수도 없고, 우리를 콕 집어 구하러 올 리가 없으니······.”
연방은 방관한다. 합리적인 선택이다.
괜히 어딘지도 모를 곳까지 구하겠답시고 왔다간 더욱 피해가 커질 위험이 있으니, 차라리 도시의 방벽을 튼튼히 정비하는 것이 나을지도.
만약 칠좌인 능광객이 우리와 같이 나동그라져 조난 당했다면 몰라도······무언가를 막으러 간 그의 행적은 아직까지 묘연한 상태다.
먼 지평선 너머에서 간간히 박동하는 압도적이고 초월적인 기운의 편린만이, 아직 능광객이라는 거인이 생존해 있다는 식의 불확실한 희망을 줄 뿐.
화악-
딜런은 젖은 담배를 말리고는 불을 붙여 태웠다. 그는 담배 한 모금을 힘겹게 빨아들이고는, 자신의 처지가 우스운지 크게 웃었다.
“킥, 크하하하!”
이윽고.
쾅.
딜런은 양쪽 정강이에 차고있던 보호구인 각반을 빼서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각반 안쪽으로, 아이가 그린듯 상당히 조잡하며 유치한 그림이 띄엄띄엄 그려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분수.
몸보다 얼굴이 더 큰데, 얼굴에 흉터 가득한 남자가 중심.
그의 주위로 삐뚤빼뚤하게 그린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고.
동그란 눈물을 구슬프게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남자의 뒤쪽 가장자리에서 그를 열심히 응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주위로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어디 아동용 만화에나 나올법한 괴물들이 귀여운 이빨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노력은 했다. 병신같이. 남의 새끼 살리려고 내 새끼들 다 죽이면서.”
곧이어, 딜런이 조용히 웃더니 등을 기댔다.
그렇게 반나절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고.
우리는,
아직도 똑같은 위치에 그대로 고립되어 있었다.
담벼락에 기대있던 딜런이 불현듯 이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큭큭큭, 어디 우리를 위해서 병신처럼 노력해 줄 놈들은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