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그러한가
#136화.
“무슨 감정이 드는가.”
백색 장포를 입은 자의 눈은, 이상하게도 정광이 비치지 않아 희멀건했다.
그러나 이자는 로키 시티를 수호해야 할 칠좌—
능광객(凌光客)이 분명하다.
그 수많은 위업을 쌓아왔을 거인의 앞에서도, 나는 언제나 그랬듯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굉장히 좆같은 감정이 듭니다.”
그리 대답하며 숙였던 고개를 들자.
내 앞에 서있던 능광객은 어느새 정반대로 이동해 무너지는 로키의 사방면을 그 희멀건한 눈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능광객의 희멀건한 시선이 닿은 곳에서 한 사내가 시체들의 무리에 둘러싸였다.
두려움을 주체 못하고 몸을 발발 떠는, 평범한 로키 시티의 주민이었다.
눈처럼 백색의 장포를 두른 이 초월자라면, 지금 발을 떼어 쇄도해도 저자를 능히 구해낼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능광객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두려움에 떨던 주민은 허탈히 죽어나갔다.
나는 그런 능광객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능광객은 제자리에 오도카니 선 채로, 운을 뗐다.
“무모했다. 계속 싸웠다면 자네의 패배야.”
조금 전, 딜런과의 전투를 말함이었다.
나는 팔 한짝과 다리를 버리고 검법의 절초까지 사용하려했다. 만약 그 일 합으로 목을 베어 죽이지 못했다면 종국에는 나의 석패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모가지의 절반 정도는 기합을 통해 베어버릴 자신이 있었으므로, 방금 능광객이 한 말은 귀담아듣지 않기로 했다. 나는 가끔 맞는 말도 귀담아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
그리 생각하던 때였다.
“하지만 그런 무모함조차도 어떠한 감정(感情)에서 기인한 것이겠지.”
“······.”
덧붙인 능광객의 그 말에서 나는 다음 말을 듣지 않고도, 그의 진의를 곧장 알 수 있었다.
이 백색 장포를 두른 사내는 아힘사와 정반대의 인물이구나.
기계로 태어났음에도 감정을 배워가는 것이 아힘사였으며.
사람으로 태어났음에도 감정을 잃어버린 것은 눈앞에 있는 절대의 무인, 능광객이었다.
“감정이 잔재하였음이 진심으로 부럽네. 나는 도시가 저리 무너지고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어떠한 감흥조차 들지 않으니.”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말한 능광객이 돌연 나를 돌아봤다.
헌데, 안면을 마주하자 희멀겋게 죽어있던 그의 눈에 찰나간 어떠한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
슥—
왜냐하면, 내가 능광객의 목덜미에 감히 검을 들이밀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한 번 죽어보시는 게 어떨는지요.”
“······.”
칠좌, 능광객은 분명한 미남이었으나 눈동자가 작고 흰자가 가득히 보이는 삼백안(三白眼)을 가진 자였다.
눈동자가 위로 몰려있어 매사에 몽롱하면서도 의욕이 없는 듯 보이는, 혹은 가만히 있어도 남을 깔아보는 듯한.
사회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무심하고 공허한 눈.
도시가 무너져 내리고 사람이 죽어도.
그 목에 섬뜩한 칼날이 짓쳐 들어와도.
일말의 전의나 살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일견, 지루함마저 보일 정도로 무심했다.
범인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단한 무위를 보유하고 있는데도,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무능력자로 수십 년간 치대며 살아온 나의 마지막께가 떠오를 만큼, 능광객은 극한까지 메마른 사내였다.
그래서 검을 들이밀었다.
“죽어보아라?”
“예, 무엇 때문에 그리 공허하고 감흥이 없으십니까. 혹여 삶이란 것에 자극이 없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자극은 이미 충분하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의외였다.
검을 거둔 나는 능광객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나 그 자극은 무인의 호승심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나의 나약함을 실감하게 하여 도신을 무디게 만들 뿐.”
“그렇다면 어째서 더 나약한 후배를 부르셨습니까?”
“사라진 협을 설파하는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
능광객이 시선을 멀리 던졌다. 동시에 압도적인 무형기(無形氣)를 뽑아 한 줄기의 벼락처럼 쏘아냈다.
쐐애애애액—
쏘아진 무형기를 따라 세상의 공간이 양 옆으로 열리며 점차 선명해진다. 나의 의식이 간헐적으로 명멸하며 무형기의 탄환 위에 서있는 듯했다.
그렇게 타오르는 로키의 도심을 지나, 무너지고 있는 장벽 너머에 위치한 드넓고 광활하며 어두운 땅까지 닿았다. 이곳은 희미한 지평선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지대. 인간의 시선이 제자리에서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너머까지 시야가 확장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 있는 무언가를 목도했다.
질퍽-
앙상히 썩어버린 채 흔들거리는 무언가.
아.
장벽 너머에 무언가 있어선 안 될 것이 있다.
무림에선 고금삼대도객(古今三大刀客)으로 일컬어지는 절대고수. 칠좌 능광객.
감히 천하를 다투는 도객이 뻗어낸 무형기를 어렵지 않게 갈라먹은, 또 하나의 격외급 불가해가.
‘······.’
온몸의 감각이 쭈뼛, 거꾸로 곤두서는 느낌.
점점 가까워진다.
슬슬 저런 것과 그만 가까워져도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나의 의식은 무형기의 탄환과 함께 빈 공간을 가로질러 더욱 빠르게 가까워지다가.
마침내 나의 눈과 눈꺼풀이 그것의 앞에 덜컥 놓였다.
인간이 격렬하게 발버둥쳐봐야 거스를 수 없는, 일종의 자연재해와도 같이 실체화된 두려움와 공포감의 집합체.
헌데 그것은 어째서인지 썩은내를 풍기며 진노하고 있었다. 나는 바로 지척에서 그것을 마주한 듯, 그 앙상한 존재 앞에 억지로
시선이덜컥붙잡혀도저히뗄수가없었다개씨이팔이딴걸보여주다니묫가를굴토해시신을파먹은듯형용못할불쾌함이지대하여본능적으로당장눈알을뽑거나터뜨려야겠다는생각이들어서
손에힘을주어올렸는데왜인지나의끔찍하게도느려터진손가락이꿈틀대며동공을찌르지못하고아슬히피해가던
그쯤.
【 직전의 협의지심(俠義之心)이, 그대의 마음 한켠에 아직도 남아있는가? 】
능광객은 내게 아까의 질문을 다시 던졌다.
그가 혜광심어(慧光心語)로 의념을 전달한 것이다.
아주 조금의 틈과 여유가 생겼다.
허나 물어오는 그의 의념은 아득히 멀게만 들렸다.
나의 행동은 지금도 절반 이상 강제되어 있으므로.
장벽 밖, 시체의 수해 속 점처럼 작게 박혀있는 저 존재.
처음에는 이유모를 ‘동질감’ 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어떠한 억지력에 강제로 육감을 틔워 집중하자. 눈을 감아도 보이고, 눈을 떠도 보인다. 귀를 막아도 들린다. 귀를 막지 않아도 들린다. 숨을 쉬어도, 숨을 쉬지 않아도. 그 존재는 그곳에 자리함을 부정할 수 없다.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이형의 존재감에 인지부조화가 치밀고, 정혈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듯 어지러움이 앞뒤 좌우상하에서 엄습했다. 덕분에 힘겨웠던 호흡이 멎어간다.
“······.”
능광객은 저 태생부터 불합리한 생명체가 뿜는 압박감을 오롯이 견뎌왔다는 말이던가.
쿨럭-
갑자기 기침을 하니 묽은 피가 튀어나왔다. 두어번 기침을 하니 코에서도 찝찔한 피가 흘러내렸다. 저 존재감을 확실히 인지한 것만으로도 죽음이 목전까지 가까워짐이 와닿았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이루어낸 모든 것이 모조리 부정당하는 듯한. 저 존재가 움직이면 내가 전속력으로 도망쳐도 마침내 붙잡혀 파리처럼 짓눌려 죽을 것이라는 심상이 스며들었다.
백색 장포의 능광객은, 저리 어두운 존재를 경계하느라 마음껏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는가.
대체 인류의 절대자들은 무슨 짐을 지고 있었는가.
능광객의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시선에, 갑작스레 지극한 합리가 깃든다.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저런 것을 마주하고 있으니, 투닥대는 아랫것의 미물들은 의미없고 하찮아 보일 수밖에.
게다가 저 괴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기운을 받아들여 점점 성장하고 있을 게 아닌가.
밑에서 사람이 죽는데도, 능광객이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 가륵과 동행한 시체까지 간단히 죽여 내던져버린 초월자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했던 이유. 명확하며 또렷하게 이해했다.
그러나······
쾅!!!
【 ······. 】
나는 주먹을 굳게 말아 쥔 뒤, 내 턱을 부술듯이 후려쳤다. 곰도 때려잡을 주먹질에 돌처럼 빳빳하게 굳어있던 고개가 들썩-하고 들리며 어떤 존재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이제 어두운 하늘만이 보였다. 세상은 어둡다.
······아무튼 성공이군.
후우우—
직전의 협의지심(俠義之心)이, 그대의 마음 한켠에 아직도 남아있는가······라.
저 존재를 목도한 뒤에도 주민들을 살리려는 마음이 남아있냐는 물음.
나는 미뤄두었던 호흡을 한꺼번에 몰아쉬며 말했다.
“못합니다.”
“역시 그러한가.”
능광객의 삼백안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실망한 기색도 없이 이해한다는 듯 발을 돌렸다.
나는 능광객의 무심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장벽 너머의 존재가 뇌리에 남기고간 불쾌한 여운에 잠시 빠져있다가.
문득, 딜런 놈의 얼굴을 바라볼 때처럼 실소했다.
흐흐, 하고.
“못합니다. 못해요. 방금 느낀 이 두려움과 절망감은 나의 오래전 스승에게 매타작당했을 때보다, 어찌 한참 못합니다.”
떠나려던 능광객이 우뚝 멈추었다.
“······.”
나는 기본적으로 전생자다.
다른 세상의 경계를 몇 번이나 뛰어넘어 여기에 왔다.
그렇기에 한낱 괴물에게 붙잡혀 죽는 것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이미 미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아니기도 했다.
원래 무력감이라는 것은 익숙해지기 마련인데, 나는 좌절과 무력감이란 것을 유독 지겨울 만큼 겪어 보았다. 그렇기에 잠시라면 몰라도, 더 이상 그런 허튼 감정이 정신을 침범할 틈새가 없다.
일평생을 쌓아온 무위나 지계가 더 높은 경지를 이룬 이의 앞에서는 모두 부질없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
그런 경험은 이 세계의 인간 중 내가 가장 많이 겪었다 장담할 수 있다. 무력하게 몇 번이나 죽어본 건 다회차 전생자인 나뿐일 테니.
그리고 때마다 그것들을 떨쳐내주는 것은 다음 세상이었다.
헌데 능광객은 다음 세상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이 사내의 무력감을 비로소 완전히 이해하여 가슴에 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도 모르게 입술이 열렸다. 어떤 응어리 같은 것이 쏟아져 나오려 했다. 아마 늘 그렇듯 별 쓸모없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멈춘다면 턱끝까지 차오른 ‘어떤’ 것을 얻지 못할듯 하여, 그만 무례하게도 내버려 두는 것을 선택했다.
“나의 스승은 이미 좌절해 쓰러진 사내도 쉬이 꺾어 올렸는데, 저 존재는 고작해야 서있는 놈도 꿇어앉히지 못하는 수준이니, 둘 중 과연 누가 더 두려운 존재라 할 수 있겠습니까.”
“······.”
“만약 나의 스승이 이곳에 있었다면, 검 한자루 차고 한달음에 내달려가 저 요상한것을 쳐죽이고 돌을 사지에 매달아 강바닥에 던져버렸을 겁니다. 아직 부족한 제자는 그러지 못함에 못난 스승을 또다시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
“고인께서는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나는 이 말을 토해냄으로써, 작은 단초를 새삼스레 깨닫고 입마(入魔)에 들 것입니다.”
“자네는 정기신이 크게 합일하지 못하다.”
“다른 부분을 드높은 쪽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드높은 부분을 잠시 낮추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 하라.”
능광객의 죽은 눈이 내게 향했다.
침묵의 시간은 느릿하게 흘러갔다.
무너지는 로키 시티, 황금빛 플라자 빌딩 위.
삭막하게 말라붙어 무엇도 남지 않은 나뭇가지가 몸을 빙글 돌려, 저 장벽 밖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응시했다.
그는 삼백안이었으므로, 무언가를 깔아보게 되었다.
이윽고 그 나뭇가지와도 같은 심지를 가려주던 백색 장포가, 불어오는 삭풍을 타고 낭창하게 나부꼈다.
사방으로 비치는 빌딩의 황금빛과 장포를 수놓은 백색의 천이 조화로이 섞여들 때쯤.
— 나도 그러한가.
어느덧, 능광객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능광객의 그 마지막 말을 들으며, 편한 잠에 빠져들듯 입마에 들었다.
* * *
가루가 된 원탁에 둘러 앉아있는 여덟의 인영.
그들 대부분은 어느 때보다도 고요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니.
고요하다기보다는, 칠좌라는 거인이 가감없이 뿜어낸 기세에서 여즉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맞았다.
마력을 잠재운 딜런은 몇 시간 전부터 넋이 나가 있었다.
“······칠좌 능광객. 허상이 아니라 정말로 있었군. 그런데 왜 하필 그놈만을 데리고 나간거지? 그냥 두었으면 내가 찢어발겼을 텐데.”
“그 남자를 이해하려 들지 마.”
“로키의 세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게 아니었던 건가?”
뷔에탕의 날카로운 대답도 듣지 못한 딜런은 긴장감에 빳빳하게 굳은 고개를 돌려 가륵의 머리통을 눈여겨보았다.
머리와 척추가 거대한 힘에 그대로 뽑혀나온 모습.
저런 말도 안되는 신위를 보인, 절대강자가 풍기는 미증유의 위압에 감히 대항할 수 있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의문이 크게 들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 그딴 놈이 뭐 볼게—”
그때였다.
화아아아악!
순간, 마력이 일점에 몰리더니 가루가 되었던 원탁이 스멀스멀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누군가 천장의 구멍에서 훌쩍 뛰어내려 재탄생한 원탁에 사뿐히 내려섰다.
“너······.”
몇 시간 전, 능광객과 함께 사라진 레반이었다.
그런데 딜런을 비롯한 모두의 관심이 쏠린 장내에서.
원탁에 내려선 사내, 레반은 실로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더 늦기전에, 주민들 모아서 라그나로크로 출발하시죠.”
화르르르륵—!
말을 끝낸 레반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던 원탁은, 불이 붙어 활활 불타오르더니 순식간에 새까만 잿더미로 화해버렸다.
그 무례하고 물색없는 행동과 의아한 말에, 원탁 근처에 있던 이들의 강렬한 기세들이 레반의 전신으로 쏟아졌으나.
“결정 났습니다.”
누군가 나서 지탄하기도 전, 레반이 곧게 쭉 편 손가락은 플라자 최상층의 천장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들보다도 위에 자리하는 자.
······칠좌(七座)의 결정.
말인즉, 이제는 어느 누구도 저 원탁을 되돌려 의견을 제시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