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아포칼립스의 고인물 4
#132화.
부패한 피와 내장, 요기를 줄줄 흘리던 손가락 가죽은 마침내 터진 풍선처럼 바짝 쪼그라들었다.
퍼걱—
내가 검끝으로 가죽을 찢어 바깥으로 나오자, 시체들의 육벽에 막혀있던 시야가 탁 트였다.
주변으로는 수백의 시체들이 짓눌린 듯 처참하게 죽어 피웅덩이가 펼쳐져 있었고, 에센스가 쏟아진 흔적까지 드문드문 보인다.
‘고작해야 손가락이 저만하면 대체 그 주인은 얼마나 거대하단 건지.’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어낼 정도로 강력했던 손가락들의 육탄공격이 근방의 시체들을 짓눌러 죽여준 덕분이다.
나를 공격하러 온 거대 손가락은 둘.
개중 하나가 마병에 당해 미라로 화했다.
후우욱!
다른 손가락은 위험을 느꼈는지 기묘한 기운을 발산하더니 곧장 상공으로 솟구쳤다. 저 손가락은 좋은 선택을 했다. 무엇인지도 모를 것과 싸워 얻을 게 없으니.
“······.”
나는 아스파로프의 마병을 내려다보았다.
자칫하면 깔려 죽을 뻔 했는데, 나뭇총이 기운을 투사하는 속도가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빨라진 것 같다.
그때보다 경지가 월등히 높아졌기 때문인가.
예전처럼 기력의 절반까지는 아니어도 꽤 많은 기력을 잡아먹어 발동된 이놈은, 흡성대법마냥 손가락에서 쭉쭉 빨아먹은 기운을 배부르게 머금고 있었다.
그나저나 함부로 쓰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던 기억이 있는데, 엘프 군주인 아이작에 이어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전부 다 알아버렸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어 어쩔 수 없었다지만···이래서 다짐같은 걸 마구잡이로 하면 안 되는 거다.
사내로서는 실격이군.
휙- 휙-
거대한 요기를 머금은 나무총의 대가리는 또 빙글빙글 돌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나는 그것이 다음 전투에 방해될까 허리춤에 깊이 꽂아두었다.
아무튼, 손가락 군집을 곧바로 따라오길 잘했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을 여기서 발견했으니.
“캬, 형님!!!”
저 멀리, 입에 더러운 것을 잔뜩 묻힌 루돌프놈이 괴로운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오자마자 기분이 매우 불쾌해졌다.
“이번에도 바퀴벌레처럼 꾸역꾸역 살아남으실 줄 알고 저는 애초부터 안 놀랬습니다! 하하하···어욱! 근데 배가······.”
“입에 묻은 토나 닦고 말해라.”
“저 깨끗한 것만 골라 먹었는데요?”
“그러냐.”
나는 고개를 돌려 난장판이 된 전장을 바라봤다.
슬레모킨, 루베르겐 집행관, 아힘사와 마법사들.
익숙한 얼굴들이 당황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의 상황이 그닥 좋지는 않다. 골조만 남은 건물 앞으로 시체들의 탑이 쌓여 있었고, 내장과 뼈의 잔해가 사방에 널려 있는게 꽤 오래 이 자리에서 전투를 벌인듯 했다.
그때, 부유하는 5개의 손가락 군집을 마력사 수만 가닥으로 단단히 묶고있던 마탑주가 말했다.
“회포를 풀 시간이 더 필요한가?”
그는 내가 손가락에 깔려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마탑주와 나는 청록빛 마력으로 가장 가깝고도 단단히 이어져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바로 시작하지. 물러서라.”
그의 말 뒤로, 청록의 광휘가 심대히 타오른다.
우우우웅—
지금 마탑주의 청록빛 마력사가 빚어낸 원형 돔. 그것은 거대한 하나의 새장이 되어, 다섯 개의 손가락을 상공에 묶어두고 있었다.
이윽고, 그 가늘고 촘촘한 수만 가닥 청록빛 마력사에 날카로운 가시가 무럭무럭 자라나 안쪽과 바깥쪽을 휘감고 뒤덮어 간다.
콰드드득—
매끄럽고 촘촘했던 마탑주의 청록빛 새장은 곧, 그 어떤 것도 빠져나갈 수 없는 가시넝쿨의 뇌옥이 되었다. 마법으로 빚어낸 가시들은 손가락의 가죽을 파헤치고 관통하며 제멋대로 자라났다.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마법사를 아이 취급하는 카스트라 뷔에탕은 대체 몇 살이란 말인가? 둘 다 외형은 늙은이들이 아니니 알 수가 있어야지.
콰드득—
내가 그리 생각하는 동안에도 마력사에서 뻗어나간 청록빛 가시넝쿨들은 점점 그 규모를 좁혀갔고, 가시넝쿨에 얽힌 손가락들의 꼴은 당연히 엉망이 되어갔다.
역시나 9레벨 마법사이자, 발할라의 마탑주.
대단한 신위다.
“겨우 잡고만 있다. 얼마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몸을 보면, 마탑주로서도 회로를 혹사해 힘을 꺼내쓰고 있는 듯했다. 내가 마탑주의 마력을 빼앗아 뷔에탕과 맹약을 맺어버린 것도 그 이유중 하나겠지.
그때.
쿠구구궁!
[ 귀찮은 것들이······. ]
“!”
저절로 바짝 움츠려지는 몸.
가공할 무형의 요기가 사위를 짓누른다. 9레벨의 마법사조차 압도할 법한 미지의 힘. 손가락 군집의 근처에만 있어도 구토감이 밀려오며 헛것이 아른댈 정도로 절대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허나 이쪽에도 마탑주를 비롯해 강력한 8레벨급이 포진해 있다. 요기가 강하다고 해서 기세를 잃어버릴 이들이 아니다.
“아···정말···.”
샷건을 든 팔을 들어 붉어진 눈을 훔치는 슬레모킨.
“죽은줄···알았···어!”
슬레모킨은 일견 주책맞은 모습을 보이나 싶더니, 갑자기 샷건을 슬라이드하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콰과과과광—!
6위계 마법이 청록빛 새장에 갇혀있던 손가락에 적중해 폭사한다. 육중한 살점이 덕지덕지 뜯어져 바닥으로 흘러내렸고.
그때쯤, 루베르겐 집행관의 신형도 푸른 연기와 함께 나타나 거검을 들어올렸다.
서거걱!
전투가 삽시간에 재개되었다.
사방으로 시체들의 괴성이 떠나가라 울렸다. 별별 특이한 능력이 있는 놈들이 많을텐데, 손가락이 뿜는 요기가 두려운지 근처로는 오지 않는다.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하며 나도 광선을 뽑았다.
‘남은 손가락은 여섯 개.’
마탑이 다섯 개를 맡는 동안, 내가 한 개.
한 개 정도라면 단신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탓!
나는 곧장 상공으로 도망쳤던 손가락을 잡기 위해 마법으로 허공에 몸을 띄웠다. 무의식적으로 청록빛 마력을 끌어쓰려다 자제하고 검을 들었다. 그간 광선 덕에 내기를 많이 아껴놓았기에 단전은 아직도 묵직했다.
푸우우욱!
[ ······. ]
총탄처럼 솟구쳐 군집으로 복귀하던 손가락의 마디를 찔렀다. 나를 털어내려 빠르게 회전하는 손가락의 갈라진 손톱에 검극을 박아 넣었다.
전신의 기맥으로 경력이 세차게 내달린다. 길고 두껍게 뽑혀나온 검기. 초식을 전개하며 손가락 마디를 결대로 썰어내자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허나, 생각처럼 매끄럽지만은 않았다.
“······.”
마치 강철로 짠 것처럼 피부가 굉장히 질기다.
검기를 덧씌운 검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정도.
이건 미친 육체의 강도다. 같은 생물체가 맞나 싶다.
게다가 인간이라면 이미 몇 토막이 나버렸을 공격에도, 손가락의 크기가 너무나 거대하다보니 그저 생채기와 비슷한 수준. 그렇기에 처음에는 애를 먹어야 했다.
나는 광선에 기운을 더 밀어넣어 검강을 줄기차게 뽑았다. 놈을 도끼로 장작패듯 썰어내자, 이제는 감히 그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사람보다 커다란 살덩이가 과일 껍질 깎이듯 깎여나간다.
푸화악!
마구 비산하는 육편에서 살이 부패해 썩어들어가는 냄새가 코를 강하게 찔렀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근처에만 있어도 감염되어 버렸을, 사특하고 농밀한 요기와 부패한 향이 쉴새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렇게 부패한 살점을 검으로 썰어내니, 마지막에 가서는 드문드문 검게 변색된 뼈가 드러났다. 뼛골의 표면에 각인들이 깊게 새겨져 있었고, 그것이 이 부패한 손가락을 조종하는 원흉으로 보였다.
심지어 뼈가 아주 지랄맞게 크다 보니, 새겨진 각인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그런데.
후욱!
뼈에 군데군데 새겨진 각인들이 전부 세상 밖으로 드러나자, 창졸간 곰팡이 포자처럼 퍽 퍼져나가는 기운의 파동이 전신으로 느껴졌다. 더해서 공간 전체가 가라앉는 듯한 이상한 기분까지 들었다.
키이이이······
‘마법.’
그것의 정체를 내가 인지하자마자, 뼈에 새겨진 문자각인들은 기관진식에 설치된 화살이라도 된 것마냥 삽시간에 어마어마한 기운을 집중해 쏘아냈다. 재앙과도 같은 기운의 밀집.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차마 피할 새도 없었다.
콰과광—!!!!
큽-
허공에 떠있던 내가 일직선으로 지면을 뚫고 틀어박혔다.
아픈 줄도 모르고 먼지구름과 흙바닥을 헤엄쳐 바깥으로 기어나왔다. 그제야 전신이 망치로 두들긴듯 욱신거렸으며, 몇 줄기 선혈이 입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급히 호신강기를 두르고 보호막까지 이중으로 펼쳤기에 다행이지, 조금만 대응이 늦었다면 몸이 다 으스러져 피떡이 되었을 것이다.
퉷, 나는 고인 핏물을 뱉으며 위를 바라봤다. 방금의 각인 마법 술식으로 힘을 다 쏟아냈는지, 뼈만 남은 거대 손가락은 골수를 줄줄 흘리며 천천히 낙하한다.
쿠구궁······.
자욱한 먼지가 썩은 내에 섞여 흩날렸다.
뼈에 새겨둔 각인을 통한 고위 마법 수식의 발동. 과연 누가 저만한 손가락을 잘라 이따위 장난을 쳐둘 수 있다는 말인가.
“흡.”
나는 가빠오는 숨에 혈도 몇 개를 짚었다. 답답하게 막히던 호흡이 터져나온다.
전투 내내 등에 붙어있던 종후표가 말했다.
“놀랐나? 뷔에탕의 인형처럼 조종당하는 중이었군. 9레벨 이상의 시체가 쓸 수 있는 기운은 무한정에 가깝고, 목과 머리가 잘려도 무탈히 재생하는 종족이다. 세계의 기운이 자연히 육신에 쌓인다는 말은, 마법사들의 회로가 놈들에게는 항시 작동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지. 기운이 무한정이니 이런 괴물딱지를 조종하는 것도 비교적—”
“안다. 나도.”
대충 대답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내 쪽은 끝났으나, 아직도 마탑은 전투 중이었다. 손가락 군집을 상대하는 마탑주의 얼굴에 여력이 사라지고 있다. 그는 허리가 꺾이기 직전이었다. 이미 회로의 한계까지 혹사해 쓰고 있는 것. 격이 다른 요기 앞에서도 뿌리내린 거목이 되어 버텨내고 있으니.
[ ······. ]
순간, 저 손가락이 무언가 고심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타인의 머릿속에 직접 의지나 의념을 때려박을 정도라면, 낮게 잡아도 완숙한 경지의 9레벨급. 혹은 그 이상.
마탑 말고도 다른 전력들이 아직 로키 내에 남아 있는데도 굳이 마탑이 있는 쪽으로 온 이유가 궁금했다.
아마도 저 손가락은 굳이 마탑의 마법사들을 찾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탑의 전력이 만만찮은데다 예정에 없던 내가 나타나 손가락 두 개를 지워버렸으니, 계산이 뒤틀렸을 터.
곧, 상념을 지운 나는 광선을 들고 쏘아졌다.
* * *
나는 즉시 손가락 군집과의 전투에 합류했고, 이 합류로 전투의 균형추는 급격하게 무너졌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시넝쿨에 갇힌 네 개의 손가락을 더 박살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한참 전투를 치루는 도중 이쪽에서도 희생이 나왔다. 한 명의 8레벨급 마법사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나로선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마지막 손가락 하나만이 남았다. 놈은 마법의 집중포화를 버티지 못하고 곤죽이 되어 떨어졌다.
[ 피를 받았다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을 곧 일깨워주마. ]
그리고 마침내, 놈의 협박과 함께 요기가 모두 사라졌다.
“······.”
바닥에 축 늘어진 손가락뼈의 기이한 자태를 보면서도 우리는 기뻐할 새가 없었다. 목적은 사냥이 아니라 생존과 탈출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했다.
지친 기색의 마탑주를 향해 내가 입을 열었다.
“마탑주님, 신동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생존한 세력과 강자들도 모두 신동경을 선택할 겁니다.”
“······.”
마탑주는 잠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슬레모킨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에휴, 로키에 있어야 할 칠좌께서는 대체 뭘 하는 건지.”
“다른 시티에 휴양이라도 갔나보지.”
“시체들 몰려오겠다. 빨리 가자.”
슬레모킨이 청록빛 괴물에 탑승해 앞장선다.
그렇게.
우리가 방향을 잡아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살아있네. 변절도 안 했고.”
짙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한 쌍의 형체가 나타났다. 그들은 시체의 잔해를 사뿐히 밟으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인간과 거의 비슷하게 생긴 남성과 여인 하나.
나는,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뒤에야 그들을 인식했다는 것을 불현듯이 깨달았다.
“······.”
차원부터가 다른 어떤 존재. 본능적으로 알았다.
인간이되 분명 인간은 아니다. 불쾌한 골짜기라고나 할까.
반박귀진의 경지를 이룩한 절대고수라도 되는 듯, 기운이 없다.
그래서 더욱 불길하다. 방금 손가락 군집을 마주했을 때와는 다른, 불길한 감각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확실하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녹량백량, 바만차, 남궁천같은 9레벨과도 궤를 달리하는······.
아마도 네임드급 시체. 그것도 매우 강력한.
“파루무치의 손가락들이 다 사라졌군. 마탑의 마법사들 같은데, 탑주가 9레벨 중에서도 강한 편인가? 몇 번째 마탑이지?”
소풍이라도 나온듯 여유로운 말투.
인간의 형상을 한 그들은 다가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탑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마탑의 마법사들에겐 휴식이 필요하고, 저런놈들과 싸우면 필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의 발이 얼어붙은 듯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러나 그 순간.
【 빨리 신동경으로 오렴. 네 말대로 대부분 모아 뒀으니까. 】
저벅.
내 뒤에 붙여두었던 카스트라 뷔에탕의 인형 무리가 창졸간 튀어나와 그들과 우리의 사이를 막아섰다. 기이한 뷔에탕의 마력을 잔뜩 머금은 정예 인형들이었다.
스각—
그러나 8레벨급 인형들의 목은 순식간에 잘려 공중을 날았다. 동시에 여인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로키 시티에 귀찮은 게 있다더니.”
【 얘, 시끄러워. 】
“?”
콰르륵—
그 뷔에탕의 경쾌한 대답과 함께, 인형의 잘린 목에서 유형화된 뷔에탕의 마력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더니 꽉꽉 뭉쳐졌다.
그 뭉쳐진 마력 덩어리는 마치 블랙홀처럼 주변에 떨어진 손가락뼈와 떨어진 살점을 다 빨아들이더니, 금세 거대한 살덩이로 이루어진 괴물의 형태를 갖추었다. 박살난 손가락이 다시 생겨난 것만 같았다.
“······카스트라 뷔에탕이 왜?”
나는 조금 당황한 마탑주를 잡아끌었다.
“일단 가시죠.”
탓!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와 마탑의 인원들은 뷔에탕의 인형들에게 뒤를 맡기고는, 즉각 신동경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몸을 돌리자마자 손가락의 기세에 접근하지 못하던 온갖 시체들이 또 몰려들어 뚫어뒀던 퇴로를 꽉 막고 있는게 금방 시야에 들어왔다.
푸후-
저 멀리 신동경의 황금빛 플라자가 어렴풋이 보이는데, 이걸 언제 다 뚫고 신동경에 도착할지 한숨이 나왔다. 만약 전투를 벌인다면 도착하기도 전에 따라잡힐 것이다. 뷔에탕의 인형들이 아주 박살이 나서 부서지는 소리가 등 뒤에서 실시간으로 들려온다.
그래도 아포칼립스 세상을 겪어 이런 상황이 익숙한 편인 나는, 모두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말문을 떼었다.
“돌프야, 시체들이 창궐해 망해가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냐.”
“그야 사내끼리의 뜨거운 우정입니다.”
“지랄하네, 틀렸다.”
“······아녜요? 아! 총이네.”
“틀렸다.”
“아니, 그럼 뭔데요?”
나는 억울하다는 듯 반박하는 루돌프놈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달리기다. 이 새끼야.”